질문을 잃어 버린 한국연극
안치운(연극평론가) 텅빈 손 그동안 연극에 대한 전반적인 글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적었다. 기껏해야 짧은 공연평을 쓰는 것이 연극비평(가)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터에, 연극의 안팎에 접근하는 글은 환영받지 못하는 일이 되고 말았다. 연극제작과 공연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한국연극은 오랫동안 연극환경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포기하고 있다. 다양한 논의와 깊은 사유가 없는 이러한 모습은 우리가 겪고 있는 허장성세와 만연된 부실공사에 비유하면 좋을 것이다. 자연과학에 대한 지원과 기대는 많지만 예술이 지닌 사회적 역할은 점점 무시된다. 국가경쟁력과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문화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그 실제는 위축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연극의 위기이기도 하다. 필자의 이 글은 연극 분야에 대한 지원이 쓸모없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고, 지원금이 부족해서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지원에 앞서, 지원에 의지한 채 연극하는 이들이 잊고 있는 것을 지적해 보려고 한다. 그 이유는 지난 몇 년간 좋은 연극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지원을 받아 제작된 공연들 가운데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들이 드물다. 몇 년 전, 프랑스 아비뇽 연극제 책임자가 초청할 작품을 고르기 위하여 우리나라 공연들을 보고 난 후, “빨리 가는 미국식 쇼, 관광객들을 위한 밤무대 쇼같다”고 말한 것은 치욕이 아닐 수 없다. 최근의 한국연극은 그 때와 비교해서 별 차이가 없다. 공연들은 애매모호하고, 각색이니, 해체니 하면서 이상한 탈을 쓴 공연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창작도 예외가 아니다. 삶에 지침을 주는 존재가 없을 때 삶은 거칠어진다. 오늘날 한국연극이 그런 경우에 속한다. 교과서에 씌어있는 것처럼, 극장에 가면 연극적 경험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예라고 답하기 어렵다. 그것은 전적으로 좋은 작품이 없기 때문이다. 감히 말하건대 연극의 불황은 관객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작가의 역량이 부족하고 공연의 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제작 환경이 열악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반성이 아니라 불평일 뿐이다. 우리는 이 점을 너무 잊고 있다. 필자는 다른 글 「풍경에 매혹된 기쁨-연극과 삶의 환경」에서, 오늘날 한국연극에는 “단계적 실험과정을 통해 장르 해체 이전의 원시적 공연 형태를 복원하고, 현대적 제의성의 재창출이라는 어마어마한 말들이 난무한다. (그러나 공연을 보면) 작가가 쓴 텍스트와 번역된 공연 대본은 다르다. 순서와 내용의 차이가 너무 크다. 종잡을 수 없을 만큼 생략된 부분이 너무 많다. 어디에도 연극의 온전함이 없다. 한국연극은 연극에 대한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fi?가 따로 논다. 연극에 대한 언어가 연극하는 이들의 의식만 팽창시키고 확대시켰을 뿐이다. 그 끝은 분명한 자기소멸이 아닌가. 언어가 현실로부터 떨어져 나올 때 기표가 완전히 기의와 결별하는 것처럼, 연극과 연극하는 이들의 실제적 삶 사이에는 근본적인 균열이 생긴다. 떠올리기 싫지만 그 끝은 무섭다. 공연된 연극들은 무너진 기표가 되고, 연극하는 이들은 맹목적으로 연극을 일삼는 자동기계 장치로 전락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쓴 적이 있다. 2000년 새해 들어 한국연극계는 다시금 경제적인 문제들을 내세워 연극하기가 어렵다는 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연극은 그럴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이가 있고, 연극에 관한 정부의 지원이 많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과연 그러한가? 서구의 연극 역시 예전에 비하면 턱없는 몰락의 상황을 경험하고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많다. 첫째는 경제적 위기를 꼽을 수 있다. 경제적 위기는 모든 문화적 정체성의 위기를 가져온다. 아주 갑자기. 그리고 걷잡을 수 없이. 연극은 무엇보다도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함께,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해왔다. 연극은 이름하여 사람과 말을 함께, 하나로 모으는 장소요 역할이었다. 연극을 만남의 예술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름답고 옳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고, 사람과 장소의 만남이고, 사람과 이야기의 만남이고, 몸과 몸의 만남이고, 몸과 말의 만남이고, 몸의 울림과 말의 들림의 만남이다. 연극의 위기란 이러한 만남이 불가능해진다는 뜻이다. 지난 20년동안 동서양을 막론하고 연극에 대한 전망은 어두었다. 연극예술은 사회적 위기의 한복판에 있고 분명하게도 그것으로부터 예외가 아니다. 이제 연극은 소수집단의 예술로서의 위치마저 포기할 위기에 빠져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자본과 기술이 지배하는 지금, 연극예술의 몫에 대하여 말하는 이들은 더 많아졌다. 세상의 거울로서, 이 세상에 대하여 말하는 연극을, 우리의 불안과 세상의 혼란을 무엇보다도 연극이라는 고유한 언어로 말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글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유럽의 대표적인 연출가였던 조르지오 스트렐러(G Strehler)의 좬삶을 위한 연극Th즺^tre pour la vie좭, 안트완느 비트즈(A. Vitez)의 좬이념들의 연극Th즺^tre des즜d es좭, 의제니오 바르바E.Barba의 좬연극, 고독하지만 혁명적인 직업Th즺^tre, Solitude m즨ier r즪olt좭등과 같은 책들을 보라. 고통스럽지만 다시 묻자. 연극이란 무엇인가를. 연극은 본질적으로 현실의 부재이다. 이 말은 연극과 현실과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인데, 현실의 결핍 때문에 연극을 한다고 해석해도 된다. 여기서 말하는 현실이란 연극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보장하는 현실이 아니다. 이 말은 연극은 현실과 늘 길항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좋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질문들로 늘려 놓을 수 있다. 부재는 힘인가? 나약함인가? 현실과 현실부재의 사이를 메꾸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연극적 상상력과 우리 연극이 어떠한 모습으로 21세기의 연극에 입문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돈이 없어 연극을 못하겠다고 할 때, 서양연극은 자신의 뿌리에 대해서 다각적으로 질문했다. 그것은 자민족 중심주의(ethno-centrisme)의 연극으로 좁혀지고, 국가라는 거대한 담론이 서서히 해체되는 것, 각자가 사회적 책임을 자신의 몫으로 인수하는 것, 국가라는 편리한 허울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뜻한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처럼 주인공들이 서서히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을 떠나면서 시작되는 일종의 여행의 연극이 되었다. 여행은 내게 아무도 아닌 자의 철학을 배우게 한다. 나라와 나라의 경계를 넘을 때마다 영원한 여행 속에 편히 쉬는 것과 같다. 그래서 주인공들은 길 위에 있기를 좋아한다. 주목하라. 기차 역 앞에, 버스정거장 앞에는 항상 떠나지 못하는 이들이 즐비하게 길 위에 누워있는 모습을. 그들은 떠나지 못하는 절망과 떠나지 못하게 하는 억압의 상징이다. 이들은 이 억압의 주체인 국가에 대항하기 위하여 길 위에 나뒹군다. 그들은 길 앞에 무력하게 내버려진 이들이다. 그들 뒤에 그들을 무기력, 무능력하게 만드는 합법이 있다. 그리고 그들 앞에 구걸하는 불법이 있다. 길의 무화는 곧 자신의 무화를 뜻한다. 길이 막혀있다. 길이 없을 때 등장하는 인물들의 부재가 확인된다. 길이 없을 때 인물들은 분열된다. 절망한다. 무화된다. 아무 것도 아닌 나가 된다. 그러나 한국연극은 지금 텅 빈 객석을 바라볼 뿐 지금, 여기에서의 연극행위에 관한 근원적인 질문을 잃어 버렸다.
역설의 가치 좀 더 구체적으로 한국연극이 불황이라는 말들을 곱새겨 보자. 텅 빈 객석이, 취소되는 공연? 말을 바로 하면, 한국연극은 언제나 힘들게 이어졌다. 극장이 텅 비는 것은 공연작품이 형편없기 때문이고, 공연이 취소되는 것은 들어가는 돈이 너무 많기 때문에 생긴 사태가 아닌가. 작가가 글을 쓸 수 없을 때는 잠시 쉴 수 있는 것이고, 극단은 돈이 모자라면 공연의 예산과 규모를 축소하면 될 일이다. 연극의 ‘모양’ 혹은 모양새란 무엇일까? 우리보다 잘 사는 나라를 포함해서 연극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닌 역설과 같은 것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다들 돈놓고 돈먹기 식으로 삶을 저울질 할 때, 삶 속에는 그렇지 않은 것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역설이다. 그것은 땅 한뼘크기로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유전자조작을 통한 대량생산과 유통구조를 지배하고 있는 큰 나라에 저항하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해도 좋다. 한국연극은 90년대를 지나면서 역설의 가치를 거의 잃어버렸다. 연극하는 이들이 지닌 경향은 승자독식으로 바뀌었고, 흥행의 성공이 공연에 관한 모든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연극하는 이들을 만나서 말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돈이다. 많은 극단, 희곡작가, 연출가들은 문예진흥기금, 특수 지원금 등을 타서 활동하고 있다. 그 수혜자와 몇 천만원 혹은 일억이 넘는 기금들의 액수는 적지 않다.(좬문화예술좭 2000년 1월호 참조) 하여 많은 이들이 이 기금을 타려고 애를 쓰고 있다. 한 극단의 예산계획서를 살펴보면, 가장 많은 부분이 무대제작비이고, 배우의 몫은 참으로 적다. 이런 예산편성은 한국연극이 지닌 정신적, 물질적 결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사람과 공부에 대한 배려보다 무대셋트 제작, 프로그램, 포스터 제작, 극장 임대료와 같은 물리적 소비가 훨씬 크기 때문이다. 이것이 제대로 분배되어 연극을 생산하는 이들의 역량이 향상되지 않는 한, 그 많은 지원사업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일 뿐이다. 작년과 올해 지원금을 받고 공연된 작품들 대부분이 졸속이었고, 나눠먹기식이었다는 연극인들의 자조적 표현이 무엇보다도 그것을 잘 드러내고 있다. 다시 묻자. 돈이 있어야만 연극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한가? 이는 사실이지만, 돈의 지위를 강조할수록 연극이 존재했고, 존재해야한다는 가치는 추락한다. 생활이 안되는데 연극은 무슨 극이야라고 말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그 말이 옳은가 그른가를 따지는 것은, 연극과 연극하는 이들이 스스로 진정한 가치에 대해 사유하는 것을 방해하는 격이 되어 버린다. 연극하는 이들이 추구해야 하는 것은 생활이되, 생산해서 이윤을 붙여 파는 유통구조 속의 생활이 아니라 자신과 연극의 존재를 되묻고 그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가난하고 쓸쓸하지만 자유로운 생활이다. 이것이 연극과 연극하는 이들이 역사적으로 지녀왔던 역설의 가치이다. 강제로 연극하는 것이 아니라면, 연극하는 것이 자발적인 선택이라면 표현과 자유의 가치를 옹호해야 하는 것도 연극하는 이들의 몫이 아닐 수 없다. 잘라 말해, 오늘날 한국연극에는 깊은 세계를 지닌 작가들이 많지 않고, 감동을 주는 작품들이 거의 없다. 무대에 등장하는 배우들 대부분이 경험이 많지 않은 젊은이들이다. 연극은 연극 바깥의 기준에 주눅이 들어 버렸다. 그런 모습들은 성공을 돈과 인기와 비례하는 것으로 본 나머지 주변 장르와 구별되는 연극만의 독자성을 유지 발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일 뿐이다. 배우, 연출가, 희곡작가들은 새로운 연극을 창조하지 못했기 때문에 극장을 삶 속에 내세울 시도를 하지 못했고, 고전 희곡을 줄줄 외울 수 있는 배우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죽었다 깨어나도 연출을 고수하겠다는 연출가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런 면에서 영세한 연극동네는 아직도 아마츄어들이 엉거주춤한 삶을 살다 떠나가는 간이역과 같다. 연극은 사람이 사람을 말하는 예술인데, 앞 사람이 허하고 가벼우니 뒷사람이 허깨비들이고 가짜일 수밖에 없는 노릇아닌가. 차라리 집에서 희곡 한편을 소리내 읽느니, 세익스피어 희곡을 영화로 만든 비디오를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연극을 하고자 한다면 다시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머리에 끈을 동여매고 책을 읽고 사유하면서 구두 밑창이 다 닳도록 걸어다니면서 너른 세상의 삶에 조응하는 수 밖에 없다. 새로운 연극을 꿈꾸는 수 밖에 없다.
공연의 끝에서 다시 텅 빈 객석, 늘 그렇고 그런 공연을 보는 비평(가)도 연극을 생산하는 작가들처럼 괴롭기는 마찬가지이다. 연극비평도 가난하기 때문에 글을 쓸 수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연극비평(가)을 위한 지원은 거의 없다. 한국연극에서 연극에 관한 글쓰기로서 비평은 문학도 아니고, 연극의 생산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공연프로그램에 들어있는 주례사와 같은 비평은 비평이 아니다. 한국연극의 불황은 공연이전과 아울러 공연 이후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공연이전이 극단과 연출가와 배우의 몫이라면, 공연 이후는 비평가의 몫이라고 할 수 있다. 연극비평은 제 역할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사실 상투적이기도 하다. 늘 그렇게 물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연극이 이렇게 초라해진 지금 이 질문은 유효하다. 작가가 공연의 생산에 대해서 책임을 지니고 있다면, 비평은 생산 이후에 대해서 질문하고 평가할 의무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형편없는 공연 앞에서 어찌할 수 없어 망설이거나 부르르 떠는 것은 비평가의 글이 아니라 비평(가) 그 자체이다. 브레히트도 좋은 작품에 좋은 비평이 깃든다고 말했다. 연극비평(가) 앞에는 두 개 큰 항이 놓여 있다. 그것은 연극의 문제와 문제의 연극이다. 이 땅의 평론가들은 대부분 문제의 연극에 대해서만 말한다. 좋은 연극과 나쁜 연극을 가늠하는 것이 여기에 속한다. 하나의 작품에 대해서 긍정적인 면을 찾고, 보다 나은 점을 기대한다고 덧붙이는 것도 문제의 연극에 매달리는 비평의 상투성이다. 연극비평(가)이 이 문제의 연극에만 관심을 갖는 동안 연극의 문제는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다시 말해 연극의 근원에 대해서 다 알고 있는 듯 되묻지 않게 된다. 연극의 문제에 대하여 고민하는 것이야말로 문제의 연극에 대하여 연구하는 일보다 훨씬 심각한 일에 속한다. 그것은 오늘날 한국연극의 정황을 사회, 미학적 문제로 읽어내는 일, 그것을 연극에 관한 글쓰기로 이어지게 하는 일이다. 여기에 연극은 미적 생산물인가, 경제적 생산물인가를 묻는 일도 포함된다. 필자의 견해로는 오늘날 문제의 연극에 관한 시선을 지닌 우리 연극(인)과 평론가들은 당연히 후자에 가까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비평은 좋은 것이 좋다는 식이 되고 만다. 그런 현상의 피폐는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비평(가)은 희곡작가, 연출가, 배우의 결핍이 인정되고, 그것을 확인할 때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비평(가)의 글은 그들의 불만과 결핍을 향하여 달려간다. 그것들을 애무하러 땀을 흘리며 가까이 다가서려 한다. 글쓰기로서의 비평은 따뜻한 위로가 아니라 남김없이 벗기는 행위에 가깝다. 그 글은 작가들의 이중과 속을 벗기는 작업이다. 그러므로 비평과 비평가는 작가들의 가정부가 아닐 뿐만 아니라 작가들의 식구로서 가정을 꾸미는 이도 아니다. 비평(가)은 그들 밖에서 그들과 함께 존재한다. 그들이 자신들의 언어와 세계에서 결핍을 메타화하면 비평(가)은 그것들을 현실적 불만과 결핍의 언어로 바꾸어 놓는다. 사물을 메타화하면 언어는 반복된다. 그러나 언어를 반복하면 사물은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작가는 여기서 사물을 차별시키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차별시키게 된다. 작가는, 연출가들은 반복의 위험과 상실의 함정을 비켜가며 사물을 드러낸다. 좋은 작가와 연출가는 반복의 위험과 상실의 함정을 은폐하지 않는다. 반면에 설익은 작가와 연출가는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빠져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곳은 함정이 아니고 보지 못하는 행위가 위험이 될 수가 없다. 그들은 한마디로 눈뜬 장님과 같다. 언어가 가끔씩 작가와 관객 모두에게 길을 잘못 안내하는 안내판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그런 탓이다. 언어는 길을, 사고를 다른 방향으로 안내한다. 그것이 심해지면 언어가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모든 연극은 주제를 지니고 있다. 그 주제는 연극하는 이들이 연극으로 만드는 형상이다. 연극으로 주장하고 요구하고 연극으로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는 책임감과도 같은 것이다. 모든 연극은 그것으로부터 시작하고 동시에 그것을 이행함으로써 사회 안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차지한다. 연극과 연극인의 영광은 순간에 빛나고 동시에 순간에 소멸한다. 연극의 미덕은 바로 순간과 그 영광이다. 예컨대,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아비뇽 연극제의 주제는 연극으로 돈을 버는 일이며(이것에 결코 머물지 않으면서), 연극과 연극인들이 당당하게 산업사회에서 자신들의 몫을 주장하는 일이며, 무대가 차지하는 사회적, 문화적 역할을 극대화하는 일로 귀결된다.
말의 절대성 연극은 관객들에게 어떤 것을 줄 것인가? 실망, 아니면 기대. 어떻게 연극이 감동을 줄 수 있을 것인가? 다시 묻자. 오늘의 연극은 관객들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연출가들은, 극단의 책임자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앞으로 그들의 계획은, 밝은 미래 아니면 희망의 무게에 짓눌리는 어려움? 연극이라는 역사와는 어떤 관계를, 어떤 연극의 역사를 남길 것인가? 바츨라프 하벨(Vaclav Havel)이 말한대로 연극은 말들의 무덤처럼, 말들의 최후의 무대(l’ultime sc즢e du dialoque)가 될 것인가? 연극은 볼거리를 보여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어떻게 연극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가? 아니면 확인시켜야 하는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벌써부터 텔레비젼과 영화같은 것이 독점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필자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정말 아니라고. 그것은 연극은 살아있는 말들이 모여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연극의 말이란 살아있고, 유일하고, 모방할 수 없는 말이다. 사회와 그 비극적 정황들과 사람들의 고통과 원한, 사랑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말이다. 이런 것들이 결핍의 시대가 요구하는 아주 귀중한 연극의 반성이 아니겠는가? 경제적 위기라고 해서 연극 고유의 원초적 반성마저 아껴야 하겠는가? 연극은 원초적 역할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제의, 신비, 텍스트의 아름다움으로. 관객이 한번 연극배우가 희곡 안에 쓰여있는 대사를 발음하는 연습장을 보았다면 놀라고 말 것이다. 관객들이여 보라. 무수하게 반복되는 똑같은 대사들 앞에 경건하게 몸을 세우고 배우는 말한다. 배우의 몸으로부터 울리는 말들은 나갈 뿐 되돌아오지 않고 계속해서 달리 울린다. 되돌아 오지 않는 말들의 뒤에 항상 배우의 몸이 있다. 배우의 몸에서 나와 울리는 말들은 메아리가 없다. 저멀리 사라질 뿐이다. 그 사라질 뿐인 말들을 위하여 배우는 온 몸을, 온 정성을 다하여 소리내고, 몸을 움직인다. 조용하고 나직하게 그리고 사납게 소리지르기도 하며. 사라지는 말들은 배우의 몸의 고통과 환희를 담는다. 사라지는 것만이 울린다. 많은 연출가들은 배우들에게 사라지는 말의 울림이 배우 자신의 몸을 울리는 경험을 하라고 요구한다. 어려운 주문이다. 말이 울림이 배우의 몸을 울리는 것 그것이 자연스러운 연기라고 믿기 때문이다.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포샤의 대사 하나 “내게 빛을 주시되 가볍게는 하지 마세요”.(5:1:129) 배우가 말을 반복할수록 말들은 더욱 견고해지고 결국에는 절대성을 지니게 된다. 연극이야말로 말의 절대성을 인정하고 요구하는 곳이 아닌가. 그런 맥락에서 배우는 가장 정확하고 바른 말을 하는 이라고 한다. 연극하기 어려운 지금, 연극인들은 단결해야 한다. 연극이라는 커다란 주제의 탑에 모여야 한다고. 아주 원초적 질문을 하기 위하여, 짧은 이익을 눈앞에 두고 헛갈리지 말고, 너무 일상적인 질문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사회의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연극으로서 경제적 이익보다는 다른 이익을 추구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일이다. 그것은 연극에 대한 반성을 필요로 한다. 반성은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이면서 자신의 연극적 행위의 정당성을 묻는 일이며 동시에 경제적 위기와 이어지는 연극의 위기가 주는 불안을 진정시키고 연극행위를 계속할 것인가에 대한 주저를 과감하게 벗어나는 길이다. 최종적으로 연극이야말로 문화적 소산임을 확신하고, 자신이 그 행동의 전위에 몸담고 있다는 자신감을 더욱 굳게 다지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