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이씨鳳山李氏의 시조始祖 이수李隨 선생先生은 본관(本官)이 봉산(鳳山), 자字가 택지擇之, 호號는 심은深隱 또는 관곡寬谷,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시다.《갑인보(甲寅譜)》세록世錄편에 따르면 선생은 고려高麗 1374년(공민왕恭愍王 23)에 태어나 1396년(태조 5)에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문과文科 생원시生員試에 장원壯元으로 급제及第 하셨다.
1410년(太宗 10)에 왕王이 경명행수經明行修 - 경서에 밝고 행실行實이 바름 - 한 사람을 구할 때, 대사성大司成 유백순柳佰淳의 천거薦擧로 뽑혔으나 사퇴辭退하고 이듬해 왕명王命을 받고 충령대군忠寧大君(훗날 世宗大王)의 잠저시절潛邸時節 왕사王師가 되어 11년 동안 교육敎育 시키셨으니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 어린 시절 스승의 교육敎育이 훗날 세종대왕世宗大王이 성군聖君으로 만드는데 일조 하셨다는 사실을 실록에 전하고 있다.
1412년 종묘서주부宗廟署主簿를 지내시고, 1414년 왕王이 성균관에 행차하여 취사取士할 때, 급제及第, 전사주부典祀主簿.공조정랑工曹正郞.예조정랑禮曹正郞을 역임歷任하셨고, 1417년 전사소윤주부典祀少尹을 지내셨다. 이듬해 세종世宗이 즉위卽位하자 사재감정司宰監正.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 1422년(世宗 4)에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거쳐, 고부부사告訃副使가 되시어 명明나라에 다녀오셨다. 1423년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조참판吏曹參判, 1425년 중군도총제中軍都總制.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를 등等을 역임歷任하셨다.
1427년 모친상母親喪을 당當하시자 사직辭職하셨다가 1429년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조판서吏曹判書에 재 등용되셨으며, 이듬해 병조판서兵曹判書 때에 세종(世宗)께서 모화루(慕華樓)의 응제(應製-임금의 명에 의하여 시와 글을 짓는 일)에서 친히 운(韻)을 내려 황희黃喜, 맹사성孟思誠, 등 수많은 신료臣僚들 가운데 ‘삼색도화시三色桃花詩,로 장원壯元을 하시자 세종(世宗)께서 너무나 기뻐 어사주(御賜酒)를 권勸하시여 드시고 귀가(歸家) 도중道中 불의不意의 낙마사고(落馬事故)로 향년享年 57세世이 돌아가시니考終 세종世宗께서 거애擧哀하시며 흰옷을 입고 애도哀悼하는 식式을 거행擧行하고 3일日 동안 철조輟朝 하였으며, 문정文靖의 시호諡號를 내리시고 예장禮葬하는 특별한 예우禮遇를 보이셨다.
선생은 특히 문장文章과 덕행德行 높아 충령대군忠寧大君(세종世宗)의 사부師父가 되셨고, 세종世宗이 선생의 청렴결백淸廉潔白함을 높이 사서 봉산토지鳳山土地를 하사下賜받아 후손後孫들이 그곳에 살면서 본관本貫을 봉산鳳山으로 했다. 종묘宗廟의 세종묘정世宗廟廷에 배향配享되셨고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시다.
그런데《갑인보甲寅寶》권수卷首를 보면 고려시대 예의판서禮儀判書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 상호군上護軍을 지낸 이사윤李士贇을 시조始祖로, 이수李隨는 4세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수는 중조가 된다. 라고하나 이사윤은 경주이씨慶州李氏로 상조上祖 또는 선조先祖로 기록 되어야 하고 따라서 이수李隨 선생先生은 봉산이씨鳳山李氏의 시조始祖 이시다. (參考文獻: 姓氏의 本貫 韓國學中央硏究院)
*〈삼색도화시三色桃花詩〉:「이백도홍품자수李白桃紅品自殊 하얀 오얏꽃과 붉은 복숭아꽃이 서로가 다른데/ 일지삼색문하유一支三色問何由 한 가지에서 세 가지 빛깔을 내는 것은 무슨 연유인고/ 지연선후분심천只緣先後分沈淺 다만 먼저 피고 뒤에 피면서 그 깊고 얕음이 나뉜 것이지/ 비시천공별점두非是天公別點頭 특별히 하늘의 뜻이 아니로다.」
이수(李隨)의 아들 4형제兄弟 중 맏아들長子 귀종龜從은 세종 때 태학太學에 천거薦擧되어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겸 춘추관春秋館 기주관記注官을 지냈다. 차남次男 서종筮從은 호조좌랑戶曺佐郞을 역임하였다. 삼남三男 복종福從은 평산부사平山府使를, 막내인四男 길종吉從은 참봉參奉을 역임歷任하여 대代를 이어 가문家門을 빛냈다.
봉산이씨鳳山李氏 조선시대朝鮮時代 인물人物: 지평持平을 지낸 귀종龜從을 비롯하여 호조좌랑戶曺佐郞 서종筮從, 현령縣令 楫, 부사府使 복종福從, 참봉參奉 길종吉從, 병마사兵馬使 팽구彭丘, 판윤判尹 탄坦, 군자감정軍資監正 숭조崇祚, 선전과宣傳官 덕德, 부사과副司果 예환繼漢 우후虞候 질瓆 돈敦, 현감縣監 두명斗明, 판관判官 귀서貴恕 등等)이 그 대표적代表的이다. 그밖에 판관判官에 오른 석재碩梓, 참봉參奉 수생秀生, 참판參判 익기翊奇, 총관總官 연준延俊, 오위장五衛將 학종學從, 돈영부도정敦寧府都正 영욱永旭 등等이 있고 또 효자孝子)로 이름을 날렸던 응열應說, 종함宗涵, 준일俊一, 병관秉官, 덕성德成 등等의 이름이 전傳해온다.
과거급제자科擧及第者(朝鮮時代): 봉구鳳九(1841 辛丑生) 文科 高宗19年(1882) 別試 丙科, 수隨(1841 辛丑生) 文科 太宗14年(1414) 親試 乙科, 익룡翊龍(1866 丙寅生) 司馬試 高綜17年(1880) 增廣試 等外 壯元及第, 학구鶴九(1853 癸丑生) 司馬試 高宗22年(1885) 式年試 三等, 석봉錫鳳(1659 己亥生) 司馬試 肅宗15年(1689) 增廣試 三等, 관일貫一(1607 丁未生)司馬試 仁祖17年(1639) 式年試 三等, 일鎰(1607 丁未生) 司馬試 中宗20年(1525) 式年試 二等, 엽燁(1603 癸卯生) 司馬試 仁祖11年(1633) 式年試 三等, 等 모두 9名의 科擧 及第者가 있다. (文科 2名, 司馬試 7名) (삼국유사의 홈페이지)
본관 연혁本貫 沿革: 본관주소지本貫所在地 봉산鳳山은 황해도黃海道 은파군恩波郡과 봉산군鳳山郡 지역地域의 옛 지명地名으로 고구려高句麗 때 휴암군鵂嵓郡 또는 조파의租坡衣·휴류성鵂鶹城 등等으로 불리었다. 신라新羅 때에는 서암군栖巖郡으로 고쳤다. 고려초高麗初 에 봉주鳳州로 개칭改稱하여 방어사防禦使를 두었으나 현종顯宗 때 폐廢하고 황주黃州에 속屬)하게 하였다. 충열왕忠烈王 때에 봉양군鳳陽郡으로고쳐 지사知事를 두었다가 후後에 다시 봉주鳳州로 개칭改稱 하였다. 조선朝鮮에 와서 태종太宗 13년에 봉산군鳳山郡으로 고쳤고, 1947年에 사리원면沙里院面이 사리원시沙里院市로 승격昇格하면서 봉산군鳳山郡에서 분리分離되었다. 1982年 10月에는 해서리海西里가 사리원시沙里院市에 포함包含되는 대신代身 은파군恩波郡의 청룡리靑龍里가 봉산군鳳山郡)에 이관移管 되었다.
봉산이씨鳳山李氏인구수人口數: 2000년 통계청統計廳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2,284가구 총摠 7,389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본적분파本籍分派: 부사공파府使公派, 좌랑공파佐郞公派, 지평공파持平公派, 참봉공파參奉公派 등이다. 집성촌集成村은 전북 정읍시내 일원 全北 井州市 井州邑, 순창군 복흥면 대방리全北 淳昌郡 福興面 大榜里, 정읍시 북면 일원 全北 井州市 北面 一圓, 전남 장성군 북이면 만무리 全南 長城郡 北二面 晩舞里, 경남 거창군 웅양면 죽림리慶南 居昌郡 太陽面 竹林里, 황해도 평산군 세곡면 黃海道 平山郡 細谷面, 평남 대동군 부산면 하삼리 平南 大同郡 夫山面 下三里 등等이다.
* 참고문헌: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제계고帝系考,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윤창현, 보명사, 1929. 한국지명연혁고韓國地名沿革考, 권상로, 동국문화사, 1961. 한국인의 성보姓譜, 삼안문화사, 1986. 성씨(姓氏)의 고향, 중앙일보사, 2002. 뿌리를 찾아서 (http://www.rootsinfo.co.kr/), 전통족보문화사傳統族譜文化社.
세종조 병판 이수 졸기(世宗朝 兵判 李隨 卒記): 병조 판서 이수李隨가 졸卒하셨다. 수隨 의 자는 택지擇之요, 봉산군 사람이시다./ 兵曹判書 李隨 卒。隨 字 擇之, 鳳山郡 人
젊어서 학문을 좋아하여 게으르게 하지 아니하시고 정밀하게 연구하여 강론하니, 당시 사람들의 추앙하는 바가 되셨다. 홍무 병자년에 생원시험에 1등으로 합격하시고, 영락 경인년에 태종 대왕 이 경학에 밝고 행실을 닦는 사람을 찾아 구하니, 성균관 에서 도천으로 수를 추천하였는데, 부름을 받았다가 얼마 아니 되어 과거 공부를 한다는 이유로 사양하시고 돌아가셨다가,/ 少好學不怠, 精硏講究, 爲時輩所推服。洪武 丙子, 中生員試第一人, 永樂 庚寅, 太宗 訪求經明、行修者, 成均館 以 隨 薦, 被召未幾, 以習擧業辭還。
이듬해에 지신사 김여지가 왕명을 받잡고 편지를 보내기를, “지존께서 그대가 산야에 숨어 있음을 들으시고 특히 명하여 부르시니, 곧 길을 떠나 오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그가 서울에 도착하자 여러 대군에게 글을 가르치라고 명하였다./ 明年, 知申事 金汝知, 承命走書曰: “至尊聞君遯于山野, 特命召之, 宜卽就途。” 及至, 命授諸大君書。
임금이 잠저에 계실 때에 더욱 공경하여 예를 더하였으며, 수隨도 더욱 삼가고 조심하였었다. 임진년에 종묘의 주부가 되었으며, 갑오년 가을에 태종 이 성균관 에 거둥하여 선비를 뽑을 적에 수隨가 네째로 뽑히어 전사 주부를 제수하였고, 공조와 예조 두 조의 정랑 으로 누차 천진하였다가,/ 上在潛邸, 尤加禮貌, 隨 益謹愼。壬辰, 拜宗廟注簿, 甲午秋, 太宗 幸 成均 取士, 隨 擢第四人, 除典祀注簿, 累遷工禮二曹正郞。
정유년에 전사 소윤에 임명되고, 이듬해 세종 이 즉위하자 선공 정으로 있는 것을 동부대언으로 특수하고, 또 그 이듬해에 동지총제에 올랐더니, 얼마 아니 되어 늙은 어버이가 황해도 에 있기 때문에 본도 감사 로 나갔다가, 이듬해에 들어와서 동지총제 가 되어 곧 이조 참판 으로 옮기고,/ 丁酉, 拜典祀少尹, 明年, 上卽位, 以繕工正, 特授同副代言, 又明年, 陞同知摠制, 未幾, 以老親在 黃海道, 出爲本道監司, 明年, 入爲同知摠制, 俄遷吏曹參判。
을사년에 도총제에 임명되었다가 예문 대제학·의정부 참찬으로 옮기고, 정미년에 어머니가 죽으매 상례에 부도를 쓰지 아니하였다. 복을 마치고 다시 도총제가 되었다가 이내 이조 판서 로 옮기고, 다시 병조 판서 로 옮겼는데 술에 취하여 말을 달리다가 떨어져서 이내 죽으니, 나이는 57세였다./ 乙巳, 拜都摠制, 轉藝文大提學、議政府參贊。丁未, 母歿, 治喪不用浮屠。服?, 復爲都摠制, 尋轉吏曹判書, 遷兵曹判書。 醉酒馳馬而墜, 尋卒, 年五十七。
성품이 후중하여 겉치레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궁하든지 통하든지, 얻든지 잃든지 일찍이 기쁜 빛이나 노여운 빛을 나타내지 아니하며, 치산함을 일삼지 않았으며, 여러 가지로 벼슬을 거쳤으되 항상 빈사의 지위를 띠고 있었으므로 더욱 부지런하고 삼가기를 더하였다./ 性厚重, 不事文飾, 窮通得喪, 未嘗喜?, 不事産業。累歷諸任, 常帶賓師之任, 益加勤謹。
부고가 들리니 임금이 놀라고 슬퍼하여 특히 위해서 거애하고 3일 동안 철조하였다. 부의로 쌀과 콩 모두 50석을 주고, 동궁도 부의로 20석을 주었다./ 訃聞, 上震悼, 特爲擧哀, 輟朝三日, 賻米豆幷五十石, 東宮亦賻二十石。
예조 정랑 정척에게 명하여 호상하게 하고, 또 지신사 허성으로 하여금 예장의 가부를 의논케 하니,/ 命禮曹正郞 鄭陟 護喪, 又令知申事 許誠 議禮葬可否。
좌의정 황희·우의정 맹사성·찬성 허조 등이, “수隨의 직위로는 비록 예장하는 예에 미치지 못하오나, 이미 은혜를 더하여 거애까지 하였사오니, 예장을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고 말하므로,/ 左議政 黃喜、右議政 孟思誠、贊成 許稠 等以爲: “ 隨 之職事, 雖不及禮葬之例, 旣加恩數擧哀, 宜用禮葬。”
드디어 유사有司에 명하여 장례를 다스리게 하고, 시호를 문정이라 하니,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함이 문이요, 몸을 공손히 가지고 말이 적음이 정이었다. 아들이 넷이 있으니 구종·서종·복종·길종 이었다./ 遂命有司?葬。諡 文靖, 學勤好問文, 恭己鮮言靖。子四: 曰 龜從、筮從、卜從、吉從。세종 12년(1430) 4월 18일 (資料出處: 世宗實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