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1장
기도를 가르치신다. 기도는 외침인가? 대화인가? 구함인가? 고해성사? 의식? 뭐 다 맞겠지. 각자 기도하는 방법과 목적이 다르다. 그랬던 기도를 하나로, 동일한 목적과 내용으로 할 수 있는 기도를 가르치신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도록 그의 나라가 임하도록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기를 죄를 용서하고 용서 받기를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한다.
그리고 떡 꾸러 온 친구 얘기가 나온다. 늦은 밤인가 보다.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닐지 모른다. 상황상, 벗으로서는 줄 수 없을지라도 그의 간청함으로 일어나 그 요구를 들어주라고 한다.
하나님은 이렇듯 우리의 간청을 간절함을 들으신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원함을 아신다. 그렇다고 내가 구하는 것 마다 들어주신다는 걸까? 그럴리가.. 하나님은 램프의 요정 지니가 아니지 않은가. 조건에 상관 없이 무엇이든 들어주는 분이 아니니까. 흔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말씀 붙드는 이들 많지 않은가.
하나님은 분명 구하는 이마다 받을거라 찾는 이는 찾으러라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거라 하셨다. 그럼 여기서 구할 거, 찾을 거, 두드릴 곳이 어딘지를 분별해야된다. 앞뒤 다 자르고 다 주신대~ 가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어떤 나라를 세우고 있는지를 알아야 거기에 맞게 구하고 찾고 두드릴 수 있겠다. 그것을 알고 내가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응답하시지 않겠나.
나도 계속 자유라 하면 내 마음대로 하는 거로 이해하고는 하는데 그게 진정한 자유가 아님을 계속 배우고 기억해 간다. 자유가 자유가 아니면 무엇일까? 내 마음대로 하고픈 것들이라고 하더라도 그게 진정한 내 원함 욕망이 아닌 경우가 많다는 거다. 이미 학습되고 매여있는 존재기에 내 원함은 거짓 욕망이요 세뇌된 생각, 마음인 거라고 한다. 이미 갇혀있는 틀 안에서 마음대로 라고 한들 진정한 자유가 아닌 거다. 그럼에도 맘 편히 이전의 방식대로 놀고 싶고 어려움 없이 관계 맺고 편한 일상을 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세대를 악하다 하셨다. 이 세대의 통치에서는 이 곳에서의 구조로는 참 자유를 살아갈 수 없다는 거다. 내 원함과 만족을 위한 관계 일상 먹거리 놀이.. 좋다. 재밌고 만족감 있고 행복하다. 이게 잘못이다 죄다는 아니지만 다른 생명을 살리지 못하는 때가 있기에..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넘어지게, 시험들게 할 수 있기에 내 유익과 만족을 위하기 보다 하나님의 방식을 구해야 된다. 내 방식이 익숙하고 편하고 좋지만 이 방식은 소위 인간의 방식이기에, 이 방식으로는 이 길을 끝까지 갈 수도 하나님 나라 일굴 수도 없다. 그러니 간절히 구하자. 예수님이 알려주신 기도로. 우리가 배운바로. 나를 위해 나로 사는 것 아니라 받은 명 따라 보내주신 이들과 살아가도록. 내가 하는 사랑 아니라 이미 받은 용서와 사랑으로. 받은 것으로 사랑하는 것 배워가자.
삶나눔
요즘 알바 알아보고 있어요. 가능한 몸 쓰고 사람 만나는 일로요. 돈을 목적으로 일 하는 것 아니니 어떤 장에서 어떤 경험, 만남 생길지 조금씩 기대하는 마음 생기고 있어요. 일상 정돈하고 규모 있게 세우는데 도움 되길 바라고도 있고요.
오랜만에 임금노동이에요. 근데 쉽지는 않군요. 근처로 알아보고 있어서 일자리가 많지는 않아요. 기존 일정들과는 겹치지 않도록 하려다 보니 시간도 일수도 제한이 있어 더 그렇지요. 그래도 조금씩 거리를 넓혀 보며 알아보려 합니다.
형제방 지내며 새로운 관계로 만나가는 시간 갖고 있어요. 그동안 개인 수련도 노동도 살림도 관계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 드러났어요. 피상적인 관계만 나이스하게 맺으며 룸메이트로 지낼 뿐이었지요. 서로에게 관심과 사랑 없이 그저 같이 지내는 관계. 옆지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어디에 관심 두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가장 가까이 만나가는 형제들이 가장 먼저 사랑할 대상임을 다시 기억하며 서로에게 관심 갖고 사랑의 실제를 쌓아가려, 살리는 관계로, 돕는 베필로 만나려 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