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팽한 대결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신라는 발해를 ‘오랑캐’로 폄훼… 고대인들의 의식에 ‘남북국 시대’는 없어
▣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최근 국사 교과서에서까지 발해와 통일신라의 시대를 남북조 또는 남북국 시대로 일컫곤 한다. “고구려도 신라도 다 같이 우리 한민족이었다”는 설명과 “발해는 고구려 유민이 세운 나라였다”는 설명을 논리적으로 연결시키면, 학생들은 발해와 신라 사이에 마치 오늘날 남북한과 마찬가지로 ‘민족적 동질성 인식’이 존재했으리라고 결론 내리기가 쉽다. 신라와 발해의 관계가 별로 우호적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학생들은 ‘남북한과 마찬가지로, 국가적으로는 대립해도 민족적으로는 동질성을 느꼈으리라’고 짐작할는지도 모른다. 과연 오늘날 남북한 시대와 비교될 만한, 문화적 동질성에 기반을 둔 남북조 시대가 존재했던가? 과연 신라인들이 본 발해인은 ‘동족’이었던가?
<다민족국가의 아름다움>발해의 문화는 당나라나 신라에 뒤지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발해 도깨비 기와. (사진/ 한겨레 이종근 기자)
1차 자료를 보면 대답은 명쾌하다. 신라인들은 발해 건국에서 말갈족들이 한 역할과 아울러 발해와 고구려의 계승 관계도 잘 인식했지만, 발해인들에 대해 정치적인 적대감을 넘어 문화적인 이질성까지 느꼈다. “신라, 고구려, 발해가 다 한민족 계통”이라는 생각은 20세기 민족주의 사학의 ‘상식’으로 통해도 7∼9세기 고대인들의 머리에 든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발해를 ‘올빼미’라 욕한 최치원
897년 당나라와 신라, 발해 등 동아시아 국가들이 다 같이 말기적 위기로 접어드는 시절에 이 세 나라 사이에 주목을 끌 만한 외교적 사건이 터졌다.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새해를 축하하는 김에 발해 왕자가 신라보다 발해의 국세가 더 강성하다는 이유를 들어 당나라 조정에서 외빈을 접견하는 순서에서 신라보다 발해가 우선돼야 한다는 요구를 과감히 한 것이다. 당나라 황제 소종(昭宗·889∼904)이 전통적으로 발해보다 신라가 당 제국에 훨씬 더 가까웠다는 사실을 인식해서인지 이 요구를 거부하자, 당에서 오래 머물렀던 신라의 최치원이 신라 조정의 이름으로 소종에게 장문의 글을 보내 당나라의 ‘신라 사랑’에 감사를 표하면서 발해에 대한 신라의 태도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북쪽 나라가 윗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심에 감사를 드리는 글)라는, <동문선>(東文選·1478)에 실릴 만큼 후대에 명성을 떨쳤던 이 글에서 발해의 기원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다민족국가의 아름다움>발해의 문화는 당나라나 신라에 뒤지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발해인들의 온돌 유적.
“발해의 원류는 고구려가 망하기 전에 본래 사마귀만 한 부락이었고, 말갈의 족속이 번영해지자 그 무리 중에 속말이라는 작은 변방 부족이 있어 항상 고구려를 복종해왔는데, 그 수령 걸사우 및 대조영 등이… 문득 황야 지역을 점거하여 비로소 진국(振國·발해 초기 명칭)이라 명명됐다. 그때 고구려의 남은 무리로서 물길(勿吉·말갈) 잡류의 올빼미들은… 처음에 거란들과 손을 잡아 악을 행하고 또 이어서 돌궐(突厥)과 통모하여… 여러 번 요수(遼水)를 건너서 항쟁을 했다가 늦게야 중국에 항복했다.”
‘사마귀만 한 부락’이나 ‘올빼미’ ‘행악’ 등의 수식어들은 발해에 대한 최치원의 정치적 적대심이 어느 정도였나를 보여주고 있으며, 발해 건국 집단과 고구려의 관계를 인정하면서도 자꾸 ‘말갈의 무리’를 강조해 그 ‘무리’와 거란 또는 돌궐(터키족 계통의 유목민 제국)과의 연관성을 부각시키는 것은 발해를 문화적으로도 이질시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고구려 정도야 최치원도 삼한(三韓) 중 하나로, 즉 신라와 어느 정도 문화 수준이 같은 존재로 간주했지만, 말갈이나 거란, 돌궐 등 북방 종족들은 그에게는 ‘문화 영역 바깥의 오랑캐’에 불과했다. 발해에 대해서도 애써서 ‘오랑캐’라는 딱지를 붙이려 했다. 비유적 표현의 거장이었던 그는, 신라에 대해 ‘무궁화 꽃이 피는 고향’(槿花鄕·근화향)이라고 표현함으로써 그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나타내지만 발해에 대해서는 고작 ‘싸리나무로 만든 화살의 나라’ 정도로 대접을 한 것이었다.
<다민족국가의 아름다움>발해의 문화는 당나라나 신라에 뒤지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석가와 다보 두 여래가 나란히 앉은 모습을 표현한 이불병좌상. (사진/ 한겨레 이종근 기자)
고대 중국인들은 ‘싸리나무로 만든 화살’을 활쏘기에 능했던 북방 숙신(肅愼)족의 특산품으로 인식했는데, 최치원이 바로 이와 같은 인식을 상기시켜 발해가 ‘오랑캐’ 숙신과 다를 게 없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이 주장은 최치원의 개인적 견해만은 아니었다. 신라 시대의 일차 사료를 바탕으로 해서 만든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서도 발해를 신라의 북쪽에 있다고 해서 지리적인 차원에서 ‘북국’으로 부르는가 하면 ‘북적’(北狄), 즉 ‘북쪽의 오랑캐’라고 비칭하기도 했다. 신라 지배층이 보기에는 발해라는 존재는 ‘문명적 질서 바깥’에 있었던 것이다.
과연 신라 지배자들이 발해를 오랑캐로 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당시 한자 문화권의 잣대로 재단되는 발해 문화의 수준이 낮아서 그렇게 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최치원 자신이 중국의 한 친지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875년에 발해의 오소도(烏炤度)라는 유학생이 신라 유학생 이동(李同)보다 시험에서 더 높은 점수를 따서 수석의 영광을 차지한 것을 ‘신라의 부끄러움’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던가? 최치원 자신을 포함한 신라 출신 당나라 유학생들에게 통상적인 경쟁 상대는 바로 발해 유학생들이었으며, 최치원은 그들에 대해 날카로운 경쟁 의식을 가졌던 만큼 적어도 그들의 글짓기 실력을 무시하지 못했던 듯하다. 최치원이 평소 상대했던 당나라 지식인들도 발해를 ‘문화 후진국’이라고 깔볼 리는 없었다.
발해 침공에 늘 긴장 상태
712년 당에 온 발해 사신이 절에서 예불을 볼 권리부터 요구하고, 738년에는 발해 사신이 <삼국지> <진서>(晉書) 등 특정 역사 서적의 복사를 요청할 정도로 당나라와의 관계에서 ‘종교’와 ‘문화’를 앞세우지 않았던가? 마찬가지로, 758년 일본을 방문한 발해의 대사 귀덕장군 양태사는 일본인들에게 무엇보다 한시를 잘 짓는 시인으로 기억됐다. 즉, 최치원과 같은 신라의 대표적 지성인들이 발해에 대한 ‘문화적 멸시’를 애써 드러냈던 것은 발해의 후진성보다는 신라 쪽 사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다민족국가의 아름다움>발해의 문화는 당나라나 신라에 뒤지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발해 석등.
첫째, 발해가 고구려에 대한 계승 의식을 나타내는 것이 신라로서는 문제였다. 부여 계통의 고구려와 남쪽 한(韓) 계통의 신라가 언어와 풍속이 상당히 달라 이질성이 강한데다, 5세기 말부터 고구려의 망국인 668년까지 거의 한 세기 반 동안 쉴 새 없이 치열한 전쟁을 치른 바 있어 신라인으로서 고구려를 좋게 보기가 힘들었다. 고구려에 대한 이질감과 적대감은 쉽게 발해에 대한 악감정으로 이어졌다. 838∼848년 당나라를 여행했던 일본 고승 엔닌(圓仁·794∼864)이 그 유명한 <자각국사입당구법순례행기>(慈覺國師入唐求法巡禮行記)라는 기행문에서 재당(在唐) 신라 승려들이 매년 8월15일에 ‘발해에 대한 신라의 옛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큰 잔치를 벌인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도 ‘8월15일의 승리’는 발해가 아닌 고구려에 대한 신라-당나라 연합군의 승리(668년)를 가리키는 듯한데, 신라인의 의식 속에서 발해가 고구려와 같은 계통의 나라로 인식됐기에 ‘발해에 대한 승리 기념’이라고 와전됐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고구려는 신라의 적국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항복한 적국이 아니었던가? 망국 이후에도 당나라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던 고구려 왕족 안승이 683년 신라의 고급 관직인 소판(蘇判)과 김씨 성을 하사받아 신라의 금마저(익산군)에서 살게 되고, 고구려 유민 일부로 신라군의 특설 부대인 황금서당이 구성됐다. 나중에 금마저에서 고구려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진압을 당하기도 했지만, 귀순한 고구려 관료들이 신라에서 채용되곤 했다는 기록으로 봐서는, 신라는 고구려 세력들이 이미 귀부(歸附)해 통일신라의 일부분을 이루었다고 여긴 것처럼 보인다. 물론 신라 쪽의 일방적인 시각이었지만, 신라 지배자들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자랑했던 ‘삼한일통’(三韓一統)의 과정에서 고구려 사직(社稷)이 신라에 통합됐다는 것이다. 이런 의식의 소유자들이 ‘고구려 계승’을 내세운 발해를 과연 ‘고구려 명의를 도용·참칭하는 세력’ 이상으로 볼 수 있었겠는가? 바로 그러기에 신라인들은 발해 건국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과 함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것이 말갈 집단이었다는 사실에 착안해 발해를 (고구려가 아닌) ‘오랑캐 말갈’과 연결하는 것을 선호했다. 더군다나 5세기 중반 이후로 고구려의 간접 지배를 받은 말갈 부족이 고구려의 신라 침략의 첨병으로 앞장서왔기에 이들에 대한 신라인들의 평소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그러한 차원에서 발해를 ‘오랑캐 말갈’로 부른다는 것은 반(反)발해 선전의 효과적 방법이었다.
<다민족국가의 아름다움>발해의 문화는 당나라나 신라에 뒤지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중국 훈춘에서 출토된 삼존불.
둘째, 현실 세계에서도 상징의 세계에서도 발해는 일관되게 신라의 철저한 경쟁자였다. 현실적으로는 8세기 초 팽창을 거듭했던 발해에 대해 신라가 비상한 위기 의식을 갖고 721년 북쪽 국경에서 장성을 쌓는 등 북쪽의 침공에 준비 태세를 갖추었다. 732년 발해가 당나라를 공격하자 신라가 당나라의 부름에 적극적으로 응해 733년 당나라와 함께 발해를 협공한 배경에는 신라가 당나라의 도움에 힘입어 한강과 대동강 사이의 북쪽 변경 지역을 발해로부터 지키려는 의지가 깔려 있었다. 이에 대한 일종의 보복으로 발해도 750년대 초반부터 신라와 일본의 관계 악화를 이용해 758년부터 일본과 손잡고 신라를 협공하려는 계획을 추진했는데, 결국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신라로서는 악몽 같은 발해·일본과의 동시 전쟁이 현실화되지는 않았지만, 신라는 패강진(浿江鎭), 즉 대동강 이남 국경 지역에 있는 특수 행정 구역의 방어가 늘 초미의 관심사였다.
다민족 국가의 다양성은 귀중한 가치
발해와 첨예한 대결을 벌이던 신라로서는 당나라와의 밀착 관계가 국경 안보의 결정적인 보장이었는데, 당나라와 발해가 서로 접근하는 데 찬물을 끼얹기 위해서도 발해 건국 집단의 일부인 말갈의 ‘야만성’을 부각시키는 것은 하나의 ‘선전 전략’이었다.
최치원의 초상. 최치원은 당나라의 신라 사랑에 감사를 표하면서 발해를 ‘올빼미들’이라 욕하는 글을 남겼다. (사진/ 권태균)
상징의 세계에서는 신라도 발해도 각각 자국을 ‘문화 영역의 중심’으로, 상대방을 ‘문화 영역 바깥의 야만인’으로 간주했는데, 이들 자국 중심적 세계관 사이의 타협의 여지는 적었다. ‘구이’(九夷), 즉 주변의 모든 세력 위에 군림하려는 신라 지배자들의 야망을 담은 황룡사 구층탑이 신라 중심의 세계관을 표현했다면, 황제 명칭과 독자적인 연호 사용,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천손(天孫)임을 주장한 점 등은 발해의 자국 중심적 세계관을 표현했다. 양국 사이에 일정한 교역은 행해졌지만 불교 교단들 사이의 교류라든가 기타 문화 교류는 거의 기록돼 있지 않다. 국가 지배 세력들과 긴밀히 밀착돼 있는 양국 승려 등도 국가적인 경쟁 관계를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에게야 ‘한민족’이라는 근대적 틀을 고대에 소급해 발해와 통일신라를 동질적 ‘남북조’로 인식하는 게 쉽지만 이는 당대 사람들은 물론 후대인의 역사관과도 상충된다. 노골적으로 ‘신라 중심주의적’ 시각을 드러내는 <삼국사기>는 물론, <삼국유사>나 <제왕운기>마저도 발해를 ‘속말(粟末) 말갈’로 분류하고 발해 전말의 주요 사실만 간략하게 적는 등 발해사를 고작해야 ‘우리 역사의 방계(傍系)’쯤으로만 보는 일관된 태도를 보였다. 발해와 팽팽한 긴장을 푼 적이 없었던 신라는 공식적으로 발해를 오랑캐 이상으로 보려 하지 않아 발해 문화에 대한 자료를 거의 남기지 않았으며, 신라의 사료에 의존했던 고려 등의 사학자도 발해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신라와 발해가 ‘남북조’가 아닌, 서로에게 이질적인 경쟁 국가였다고 해서 부끄럽게 생각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발해의 문화는 비록 신라와 많이 다르고 잘 소통하지 않았다 해도, 발해인들을 ‘친척’으로 대접한 금나라 등 많은 후대 국가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등 그 역사적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신화뿐인 ‘고대 한민족의 동질성’보다는, 다민족 국가인 발해가 상징했던 다양성이 더 귀중한 가치가 아닌가?
고구려의 맥족 鄒[몽고토착민]의 복속 민족으로 말갈족은 항상 신라에 대한 적대감정으로 대해 왔습니다 즉 고구려-백제 - 말갈/빌해는 "삼한족'이 아닌 "예맥족" 말갈 뙤놈이다는 韓民族보다는 九韓중 사나운 "북방초원지대"의 야만족으로 보는 것이 신라 신한 삼한족의 관례입니다.
드라마속 말갈족 헤어스타일
靺鞨族의 춣신은 "만주평원"의 "속말갈/ 속수말갈"과 흑수말갈로 외만주에서 발생한 민족으로 九韓의 하나로 "삼한 조선"당시에는 마한조선내 숙신/숙사 주신으로 이들은 여진족과는 달리 남부로 "몽고자치구"내로 그리고 "읍루"라는 위치로 고구려내에 복속되어 "고구려"의 하부계층민으로 북부여 북맥족 아래 "말갈족"으로 구성된 고구려 사방 6000리의 "내부 말갈족"입니다.
중국에서의 “고구려·발해는 소수민족 지방정권”이라고 하여 한국사와는 무관한 중국사의 일부로 보고 있습니다. 즉 발해는 ‘말갈족을 주체로 한 민족 정권인 동시에 당나라 중앙 정권의 책봉을 받아 당 왕조에 예속된 지방 정권’, 혹은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 정권’이라는 것입니다. 중국 정부의 공식입장을 대변하는 중국의 국정교과서에는 “발해는 당현종(唐玄宗)이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임명한 속말부(粟末部)의 수령(首領) 대조영(大祚榮)이 세운 속말말갈(粟末靺鞨)의 지방 정권’(『중국역사, 초급중학교과서』).”이라고 합니다.
이는 분명 "渤海郡"으로 발해는 하남성에 위치한 고구려 남부로 "渤海"라는 고래로 "존재하던" 곳으로 만주가 절대로 아닌 산서성남쪽의 하남성 위의 '남대방군"의 북부에 설치된 발해군입니다.
남대방군의 "신라"대륙의 남대방군이 아니고 원 고구려의 강역내의 발해군은 산서성에 위치한 발해군으로 북부입니다.
▲ 광개토태왕의 신하 유주자사 진이 다스리던 지역은 산서성 남부와 황하북부 하남성 일대였다.
즉 시대에 따라 달리 불려도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시절의 "유주지사 진"의 내용은 산서성 남부, 하남성의 북부로 발해군으로 "발해 남북 1000리"의 전체가 아니고 일부 사방 2-300리의 郡으로 발해의 출생지가 바로 발해 전체보다는 바로 "고구려"의 발해군으로 이는 당나라 등의 이야기를 봐도 고구려내 靺鞨족으로 맥족의 고구려내 복속되었던 말갈족이 발해를 세운 것으로 일부 혼성이나, 발해는 '기본 말갈족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의 통설입니다.
흔히 만주원류니까 만주평원 滿洲와 외만주에서 산서지방까지 두루 분포한 것으로 보는데 일부 여진+말갈족은 퉁구스족으로 "말갈족"의 일부는 현재는 蒙古族으로 보는 이중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즉 둘로 나뉘어서 대진국 震國[渤海]와 靺鞨로 만주로 돌아간 2개국으로 보는 것이 '삼국유사'의 서술방식입니다.
2. 만주의 말갈족이 아닌 남쪽 고구려내 말갈족 - 대진국 발해
물길인들은 문화적으로는 뒤떨어져 있었으나 군사적으로는 매우 강대하여 부여[북부 夫餘가 아니고 연나부 부여라는 椽那部]를 멸망시킨 것으로 되어있습니다(『魏書』卷100「勿吉傳」). 대부분의 사서에서 국가를 제대로 구성하지 못하고 만주일대를 살아가는 쥬신들은 강한 전투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이들 부족들을 지배하기란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들은 수많은 경제적 수탈과 정치적 압제 속에서 강한 전투력을 유지하고 그 한계상황에서는 과감히 도전하고 그들의 정치적 지배를 물리친 경우가 많습니다.
[산] 강역적으로 굉장히 혼선이 있는데 갈사국[갈사 부여]는 현토, 옥저로 하북성 북부고 연나부는 연나라와 접한 평나등 고구려의 발해군지역으로 이는 "만주일대"가 절대로 아닌 료동으로 산서성내로 들어온 말갈족으로 맥족과 다른 하나의 공동체로 기원후 494년 연나부를 멸망시킬 정도로 군사적으로는 강대한 일족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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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물길인들 가운데 국가구성에 동참하지 않은 물길인들은 전쟁이 벌어지면 부족들을 중심으로 전쟁에 임했으며 전쟁이 끝나면 다시 원래로 돌아가 유목생활을 하였습니다. 각 부족들은 우두머리가 있었지만 전체를 통솔하는 큰 우두머리는 없었습니다(邑落各自有長 不相總一 :『魏書』卷100「勿吉傳」). 그것은 자연환경과 유목과 수렵이라는 경제적 배경에 원인이 있겠지요.
즉 이들은 거란, 몽고족 등과 같이 북방초원지대에서 "유목과 수렵"이라는 유목민의 생활로 왔다갔다하면서 지내는 유목민집단으로 묘사가 되고 있고 일부가 "고구려내" 발해군의 일정 토착민으로 고구려 패망후 辰國을 건국한 것으로 봅니다.
북위의 역사서인 『위서』(「물길전」)에 의하면 물길의 주변에는 대막루국(大莫婁國 : 부여국이라고도 함), 복종국(覆鍾國), 막다회국(莫多回國), 고루국(庫婁國), 소화국(素和國), 구불복국(具佛伏國), 필려이국(匹黎尒國), 발대하국(拔大何國), 욱우릉국(郁羽陵國), 고복진국(庫伏眞國), 로루국(魯婁國), 우진국(羽眞國) 등의 12개국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고대국가 체제가 아니라 부족, 또는 원시적 부족국가 정도의 단계로 생각됩니다.
이들은 물길족 /말갈족의 부족 즉 6가 6가등의 부족명으로 國을 썼으나 部族의 部로 하나의 군급단위 12개 군들의 12부족명으로 보기도 합니다, 상당히 많은 부족국가형태 즉 일체형의 국가형태라기 보다는 國으로 불리는 부족의 다양한 부족 기본 12부족은 되는 작지 않은 "말갈/물길'족의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대진의 강역
“발해국은 고구려의 옛 땅이다. … 주현과 관역이 없고 곳곳에 마을이 있는데 모두 말갈인의 부락이다. 백성들은 말갈인이 많고 원주민(土人)들은 적다. 모두 원주민으로 촌장을 삼는다. 큰 마을은 도독, 그 보다 작은 규모는 자사ㆍ수령으로 부른다. 날씨가 극히 추워 수전 농사가 안 된다.(渤海國者 高麗之故地 … 無州縣舘驛 處處有村里 皆靺鞨 其百姓靺鞨多 土人少 皆以土人爲村長 大村曰都督 次曰刺史 其下百姓 皆曰 首領 土地極寒 不宜水田 : 『類聚國史』卷193)”
료서로 감숙성 북부로 이는 間道가 아닙니다 즉 '날씨가 극히 추워 수전 농사가 안된다는 지역은 북방초원지역의 북부를 이르는 말이다.
"숙신ㆍ물길ㆍ여진 등이 실제로는 고구려ㆍ발해와 같은 뿌리임에도 불구하고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의 논문(1933)이 발표된 이후 “발해(渤海)의 지배층은 고구려의 유민”이라는 해괴한 논리로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시라토리 구라키치가 만주사(滿洲史)의 대부(代父)격이라 해도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봐야하는데 남북한의 사학자들이 아직도 이 사고 범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시라토리 구라키치가 식민사학[植民史學 : 만선사관(滿鮮史觀)]의 대부(代父)라고 핏대를 높인 사람들도 남북한의 사학자들입니다
[산] 만선사관으로 "滿洲"란? 삼수로 둘러싸인 곳으로 "눈수-속말수-흑수"의 만주평원만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간도는 만주가 아닌 신한조선강역으로 關北圖[關北道]는 間道로 8도에서 九道 1개 도가 한반도사에서 빼먹은 것으로 '間道"는 만주족 여진족 말갈족이 들어올 수 없는 신한조선 신한부여 신라의 계림주인데 무슨 개소리를 맨날 저렇게 만선사관으로 만주가 마치 만주+간도라고 하는 것은 제정신 아닌 쪽발이 정말 개새끼 백제왜족의 왜설이다.
북
북방고토지역 만주라는 곳은 만주평원과 북방지역으로 이곳이 말갈족이 사는 곳이고 만주평원은 속여진, 속말갈이고 1860년 청이 러시아에게 할양한 外만주도 '흑수여진, 흑수말갈'의 터전입니다, 沿海州는 조선국의 땅으로 "鹿屯島= 사할린섬"으로 우리는 마치 이 외만주, 연해주, 사할린섬이 원 청나라 여진족의 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아니다, 외만주는 여진, 말갈족의 땅이나, 아래쪽 녕산, 태백산[백두산] 평정산의 남쪽은 녕산의 남쪽으로 녕남으로 신라의 계림주로 "이는 길림성"으로 한 907년의 청나라 전까지 간도협약전까지는 關北道로 조선 九道의 하나로 1908년 쪽발이가 괴뢰만주국 滿朝를 만들고는 이를 청나라 만주국으로 한 것으로 이는 날조된 역사사실로 이조시대 말기 조선국의 17세기후에 간도를 여진족에게 빼앗긴 최악의 수모다 절대로 신한조선의 절대강역인 알도 아침해빛날 간(倝)州를 신라가 발해?에게 빼앗겼다는 것은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나온 적도 나와서도 안될 절대강역으로 녕남사람은 간도로 그 탄생지를 거저 저렇게 준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전부 거짓말로 정말 말갈족이 간도에 살고 있는가? 대다수 살고 있다고 해야, 무슨 발해가 간도에 있었다고 하지 한놈도 없는 곳에 "발해 말갈"로 가져다 놓고는 무슨 개소리를 게속하는지 이해가 안갑니다.
關北圖 [관북도]로 關北道의 지도로 이 關北道는 함경북도인가요?
관북도란 말그대로 북방영토를 나타낸다. 관북도는 조선시대 초기에 제작된지도와 요계관방도를 토대로 숙종때 주로 만들었는데 숙종때 영역을 알기에 좋은 자료이다.숙종실록에 우리 서쪽에 몽골이 있다고 하엿으니 조선의 서쪽은 몽골이다.즉 대흥안령산맥서쪽이 몽골이니 대흥안령산맥까지가 조선땅이다. 관북도를 보면 송화강으로 추정되는 강이 북쪽으로 길게 나있음을 알수있다 .또한 서북방에 산맥으로 추정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대흥안령산맥으로 보인다. 또한 산맥에서 나오는 긴 강이 바로 흑룡강임도 알수있다.즉 서로는 대흥안령 북으로는 흑룡강이 당시의 경계이다. 또한 서남으로 압록강이라고 보이는데 당시의 압록은 요하로 추정된다. 즉 장백산(현재의 북한 백두산)의 서북으로 있는 강이 당시의 압록이다. 또한백두산(대흥안령의 남쪽준령에 있는 산)은 우리가 알기로 북한의 백두산인줄 알았으나 당시에 백두산은 현재의 우리가 알고 있는 산이 아닌 다른산임을 알수있다. 즉 대흥안령산맥의 남쪽에 백두산이 있고 거기에서 요하의 줄기가 나오며 그곳일대가 조선땅임을 알수있다. 숙종실록에는 백두산과 장백산 사이 보다회산에 정계비를 세워 서위 압록 동위토문이라 쓰고 청과 경계를 지었다고 하는데 토문은 관북도에 송화강의 서쪽지류로 나온다. 후대에 로국동방경영부면전도나 황조일통여지전도에도 역시 토문강은 송화강의 서쪽지류이다. 즉 동쪽으로 토문즉 송화강의 서쪽지류이고 서쪽으로 요하까지가 청의 영토이고 나머지 만주[간도]는 조선땅임을 나타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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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여진분계도에도 같은 내용 오라와 영고탑 아무르강일대가 경계이다
아무르강일대가 경계로 두만강이 바로 알무리강으로 이 두만강 하구에서 뱃길로 30분가야 "鹿屯島"로 이러한 섬 정예군 1만명이 투입될 정도로 큰 섬은 사할린섬[사슴언덕섬으로 鹿屯島]밖에 없습니다.
조선국의 강역으로 간도+연해주+사할린섬[鹿屯島]는 기본 조선국의 강역을 17세기 청나라에 의해 빼앗기고 간도는 1908년 쪽발이에 의한 간도협약으로 당한 곳이다.
물론 조선국으로 겨우 2-300년전의 강역도도 모르고 없다고 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백제왜족의 오리발작전으로 이 간도와 연해주만이라도 "원 통일신라 - 고려"의 강역에 포함된 원 신라의 강역이라고만 해도 되는 문제를 료동은 료하의 동쪽 산서성이라는 것만 알아도 이렇게 헛튼 소리를 하지를 않아도 될 것을 참으로 원망스럽다.
기본 태백산으로 녕산의 개념이 말살당한 지금으로써는 어이가 없는 일입니다.
현재의 백두산을 고조선 초기 "송화강 아사달"의 태백산으로 보기는 말이 안되는 사항이고 만주평원의 시작에서 삼수 송화강-흑수-아무르강으로...
帝(제)의 도읍을 太白山(태백산) 아래 天坪(천평)으로 하였으니 서울(徐菀)이라고 하였고, 帝(제)의 城(성)을 壬儉城(임검성)이라고 하였다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서 천제를 지내고 고조선의 건국을 고하고 도읍을 "태백산 아래 천평"으로 하였다 과연 이 천평은?
戊午五十七年. 命築天坪外城, 天坪在吉林東部巨野.
戊午(무오, BC2343) 57년. 天坪(천평) 外城(외성)을 쌓도록 명하였다. 天坪(천평)은 吉林(길림) 동부 큰 들판에 있다.
寧古塔의 위치 또한 녕산 = 태백산이 있는 곳인데 이를 전부 현 백두산으로 하면 전혀 위치가 맞지가 않습니다.
만주원류고의 靺鞨로 "이는 渤海 -震國"이 아닌데 잘못 그린 것으로 靺鞨의 위치로 만주평원에 제대로 두고 있습니다.
3. 新羅는 신한 夫餘로 부여6가 = 신한 6부라는 사실을 왜곡한 결과
문제는 신라의 주강역은 남삼한의 사로 신라만이라고 하는 착각입니다.
아사달주는 분명 현 료녕성으로 그 이북과 한반도는 신한조선 = 신한 부여로 신라의 주강역으로 예맥족이 들어와 살 곳이 아닙니다 즉 몽고토착민인 예맥족 만주족 여진, 말갈 거란? 키이타이라는 유목민은 북방초원지대지 왠 간도에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왜곡입니다.
고구려 료동 경계면 "료하의 동쪽 산서성 분하을 찾아야지 왜 간도에 만주라는 개념은 쪽발이의 조작으로 만주평원만이 滿洲지 왜 아침해빛날 간(倝)州로 들어와서 똥누고 있는지? 이에 대한 철저한 검증과 절차로 "고구려 벽화"가 아니다 사출도가 어째서 고구려 문화인지? 수렵도는 왠 말인지? 즉 소수맥 등 貊이 어째서 韓族의 주족이 되어 있는지? 등등 의문이 아니고 왜곡 말살입니다.
료서 는 "료하의 서쪽"이면 섬서성과 감숙성이지 왜 1929년 짱개인 蔣介石 개새끼의 료녕성 료하? 료의 난하라고 하는 개소리 정말 짱개 개새끼로 客家족 미친 짱개똥새끼의 대만병신족의 개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미친 개새끼다.
료하[遼河]는 오직 黃河로 이를 자꾸 어디다 가져다가 놓은지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 없습니다, 즉 료주의 수분하 句麗로 고구려 료동 경계 1000리 [400킬로미터]면 태원 근교로 太原이 東胡로 료주의 평양 료양인 줄 알면서도 현재 산서성 省都로 태원인 줄 알면서도 료동으로 침입한 예맥족인 고구려 鄒는 현재도 "몽고민족' 나라이름 추로 이러한 한문을 읽으면서도 계속 몽고족과 한민족은 九韓이나 그 문화적인 특성 특히 "한쪽 발을 쭉 뻣고 절을 한다??" 고깔 모자 弁[牟]를 쓰는 것이 蒙古族의 특징이지 이게 한민족 상투문화다? 이상한 이야기로 전부 요상망측한 추측으로 사방 2000리에 기원후 고구려-위의 전쟁으로 고구려도 대단히 큰 타격으로 사방 1000여리로 기원후 3세기입니다.
말도 안되는 그림으로 기원후 4세기라는데 과연 위나라와 전쟁후에 백제의 전성시대로 올라간 지역이 한강이북지역?? 이는 전혀 맞지 않는 것으로 참혹하기 그지 없는 신라와 가야의 오그라진 모습에 식민사관의 절정입니다.
기본 삼국 대륙삼국의 지도로 間道는 계림도독부로 계림주는 제발 신라로 인정을 해주어야, 그리 많은 인구가 살지도 않았던 1500년전의 상황을 고려하면 좀 시원시원하게 그리면 어디가 덧나냐? 정말 번데기 木子들로 정말 축소지향적 "번데기 거시기"족이다, 이어녕부터 아마도 다 신체검사를 해서 번데기 펴서 얼마나 늘어나는지 아니면 눈깔이 삔 씨족이면 전부 눈깔을 빼서 다시 박아주어야 할 문제가 심각한 일입니다.
이 대륙 고구려-백제/재서와 신라 /재동이라는 대륙의 고구려 북부, 남으로 남동부는 신라, 남으로는 백제면 그래도 이러한 기본 사방 1만리의 그림속에서 삼국전쟁의 지명으로 보고 이야기해야지 대방 하나 몰라서 帶로 태행산맥 동서 띠[帶]조차 인정을 못한다?? 참으로 요상한 엘리트 엘리스나라다.
대진국으로 발해군을 위치로, 고구려 옛 땅 사방 6000여리를 회복했다느 것도 산서성과 료서의 섬서성과 감숙성 남북 2000리고 동서 3000리 아니 더 늘려도 "동서"지 남북으로 무슨 간도를 맨날 똥누러 들어왔다고 하는 것 자체가 웃긴 이야기입니다, 먹이가 맛있는 곳으로 눈이 가지 맨날 밍밍한 곳에다 왜 똥을 누고 질엘하고 있냐고 도올아. 정말 화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大震國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41)섬서성 동천시(陝西省 銅川市)도읍지
부여부(扶餘府)(42)감숙성 평량시(甘肅省 平凉市)
솔빈부(率賓府)섬서성 빈현(陝西省 彬縣)
중경현덕부(中京縣德府)(44)섬서성 인유현(陝西省 麟遊縣)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46)섬서성 대려현(陝西省 大荔縣)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46)섬서성 순화현(陝西省 淳化縣)
박평(博平)(47)산서성 임분시(山西省 臨汾市)
중산(中山)(48)산서성 평요현(山西省 平遙縣)
안릉(安陵)(49)하북성 석가장시(河北省 石家莊市)
연주(延州)(50)북경시 동성구(北京市 東城區)
동평부(東平府)(52)섬서성 농현(陝西省 隴縣)
물론 이 비정한 섬서성, 감숙성 위주의 료서지역을 정확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대진국"의 위치가 왜 연해주와 간도여야 하는지 이유를 대라는 것으로 대료[大遼]도 료주면 산서성과 료서지 키이타이 북방 초원지대 유목집단이 무슨 할 일이 없어서 "간도"에 똥누러 오는가 말이다. 정말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간다.
신라도 사방 4000리 韓중에 사방 2000리는 주면 안되냐고?: 백제 대 신라로 대등한 게임을 하면 안되냐고? 맨날 신라 사방 100리다 언제까지 小邑으로 만들어 똥통 요강에 부용국으로 斯盧國에서 벗어나냐고? 72국 해도 사방 100리로 12국이면 사방 1200리는 줘야지 이건 뭐 사방 100리가 언제까지? 기원후 5세기?
이 고구려 강역부터 틀렸는데 무슨 한국사를 연구를 하고 질엘하고 있는지? 백제의 濟는 도대체 어디야?
비류(沸流)는 동생 온조와 함께 패수(浿水:요하)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러 살았다. 마침내 온조왕은 백제의 강역을 구획하여 정했는데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고, 남쪽은 웅천(熊川)을 경계로 하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이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백제의 동쪽에 낙랑(樂浪)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었다.
구당서의 고구려 남북 2000리 동서 3100여리 사방 6200여리는 "산서성'과 료서인 섬서성과 감숙성일대로 그 위치가 고구려 남으로 海를 건너 "백제"가 그 동남으로 신라가 즉 동쪽과 해를 건너 남동쪽에 신라가 즉 황하를 두고 삼국이 맞물린 상태인데 이 海 =渤海와 황하 료하의 중심으로 마한 54국이 재서로 해의 서쪽이 마한인데 백제가 정복 기원후 9년이후에 4세기까지 마한 54국을 차례로 정복한 것으로 그 강역이 그리 넓지 않았고 이를 확장한 것으로 오월 절강성 오흥군의 변산일대로 남부여/사비로 전부 대륙에 위치한 백제지 한반도내에는 가야를 정벌하기 위해 백제-왜 연합군?이 침입하고 거정으로 호남지역에 거점이지 수도가 있었다는 내용은 전무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료서로 산서성 이외에 "섬서성 감숙성" 재서로 저 터어키까지 가도 이를 다 적으라고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가 뭐냐고? 전혀 합당한 사유도 없고 말갈족이 우리나라 신라, 신한족인지도 모르고 九韓이니 다 말갈, 여진 거란, 예맥족의 전 돌궐까지? 예맥족은 몽고족으로 그럼 대원제국까지 적국 아니냐?
自我와 彼我의 구분이 전부 안되는 이유는? 아예 없애라, 그럼 그게 백제왜족 개쪽발이 木子 전주 이가와 좃나단 좆가 유태짱개족의 개병신족들의 유태족 만세, 아직도 정신을 못차린 쪽발 유태짱개들을 보면서도 하나도 때려잡지도 못하냐? 정말 저런 유태석근 개쌔끼 말종 호로새끼를 그냥 목사라고 봐줘야 하나? 참으로 한심한 백제유태왜족들이다 정말 저건 때려죽여야할 매족매국노집단이야. 욕단 좃단 좃가면 지 혼자 가지, 꼭 엘이랑 다 데리고 유황지옥불행을 같이 가자..웃긴 개똥먹고 자란 유태개쌔끼들 개봉 주이쉬씨들이다 유태영모? 유태영익 유태동식 유태석근 이 柳씨는 류관순 믿도 날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