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라벌 밝은 달밤에/밤늦도록 노닐다가/들어와 잠자리를 보니/다리가 넷이더라/둘은 내 것인데/둘은 누구 것인가/본디 내 것이었지마는/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신라 헌강왕 때 처용(處容)이 지었다는 '처용가'는 삼국유사 '처용랑망해사'에 실려 전한다. 동해 용의 아들인 처용이 헌강왕을 따라 경주에 와서 벼슬을 하던 중 어느 날 밤 자기 아내를 범하려는 역신(疫神)에게 이 노래를 지어 불렀더니 역신이 물러갔다는 내용. 겨우 8행짜리 시가(詩歌)인 처용가가 그 대중적 호소력에 힘입어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한국의 가장 소중한 문화유산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허혜정(42·한국싸이버대학교 문예창작학부·사진) 교수는 다음주 출간될 '처용가와 현대의 문화산업'(글누림출판사)에서 "세계적으로 디지털 헤리티지화에 여념이 없는 문화전쟁시대에 '처용가'는 한류붐을 타고 뻗어나갈 수 있는 한국문화의 원석과 같은 작품"이라고 지적했다.
"'처용가'는 단순히 한 편의 문학작품이 아닙니다. 텍스트에 담긴 수사(修辭)적 충격이나 처용이라는 인물의 국제성, 그리고 다양한 전승의 역사 등을 고려할 때 '처용가'는 중국과 아랍 등을 포함해 세계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핵심 문화콘텐츠이지요."
그는 "9세기에 향가로서 처음 탄생한 '처용가'는 그동안 수많은 현대시인과 작가를 포함해 각종 장르에서 미적 탐구의 표적이 되어왔다"며 "문학과 문화의 접점이라는 측면에서 현대문화산업의 미래를 담보할 거점이 될 수 있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는 저서를 통해 '처용가'로부터 생성변형된 문학적 감수성과 문화적 파장, 풍속적 자취 등을 아랍문화와의 연계선상에서 폭넓게 짚어낸다. 아울러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처용무와 연극 ,영화, 대중가요, 뮤지컬, 무용극, 울산처용제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인 문화산업 현황까지 흥미롭게 보고한다.
"'처용가'는 그 드라마틱한 내용, 노래와 춤이라는 감성주의, 처용의 정체와 관련된 신비주의 등에 힘입어 실크로드를 중심으로 한 국제적 요소를 충분히 내장하고 있지요. 예로부터 처용가가 음악이나 전통문화행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어왔듯, 현대문화의 모든 장르들을 포용하는 미디어믹스의 세계에 적용시킬 수 있는 가장 용이한 콘텐츠입니다."
한 편의 문학작품과 거기서 파생된 다양한 문화적 변용, 그리고 학술적 입론을 문화콘텐츠화시키는 '원 소스 멀티 유스' 전략에 있어서 '처용가'는 원 소스의 역할을 해낼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원천이라는 것이다.
'처용'이 아라비아 상인이었다는 학설은 1969년 이용범 교수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으나 근 30년 동안 죽어있는 학설로 치부되었다. 이 학설을 되살려 '처용'을 한국의 대표적 문화콘텐츠로 삼아야한다는 주장이 고전 문학 전공자도 아닌 젊은 현대문학 연구자에 의해 제기된 것은 학계에서도 화제가 아닐 수 없다.
"한마디로 '처용' 문화는 그 발단부터 국제성과 문화충격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그 자체로 대중의 흥미와 상상력을 담아낼 수 있는 상상력의 용광로였던 것이죠. 그는 '처용'과 아랍문화의 연관성을 지속적인 연구주제로 끌고 갈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연구자들의 도움이 있었다며 고혜선 김철웅(단국대) 윤선미(한국외대) 김승기(한국외대) 임병필(한국외대) 김명준(고려대) 교수 등을 거명했다. 현재 장경기 멀티포엠 아티스트와 처용을 주제로 한 디지털 콘텐츠를 개발하고 있다는 그는 "올 가을 아랍에서 열리는 학술대회에도 참석, 처용 전령사로서의 역할을 다할 작정"이라고 말했다.
정철훈 전문기자 chjung@kmib.co.kr
울산은 경주 감포와 더불어 신라의 해상요충으로 아직까지도 곳곳에 처용의 흔적이 남아 전하는 곳이다. 동해 용의 아들로 전해지는 처용의 존재는 처용무와 설화 뿐 아니라 망해사지와 개운포 처용암에서도 확인된다. 천년이 넘도록 민중의 의식 속에서 뿌리 깊게 생명력을 |
[서울신문]●악귀 내쫓는 처용은 해양문화의 소산
지금은 사라졌지만 연말이면 악귀를 쫓는 나례 풍습이 있었다. 붉은 탈을 썼으니 처용이 그 원조이다. 동지에는 붉은 팥죽을 쑤어 악귀를 내쫓았다. 이러한 유풍의 근원에 처용이 늘 버티고 서있다. 그 처용이 해양문화의 소산임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처용을 만나려면 울산으로 가야 한다.
경주가 신라의 본향임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지만, 또 하나의 본향인 울산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저 공해에 찌든 땅으로만 알고 있는 울산이야말로 경주 감포와 더불어 신라가 동해로, 세계로 나아가던 출구였다. 울산에는 동해를 굽어보던 유서깊은 절터가 남아 있다. 오늘날 울산항으로 엄청난 국제적 물동량이 오고감을 생각해볼 때, 신라 천년의 출구 역할이 지금껏 이어진다고나 할까.
호젓한 문수산(옛 영취산)을 오르다보면 망해사지(望海寺址)를 만난다. 글자 그대로 바다를 바라보는 절. 솔잎 냄새 풍기는 숲속에 부도 2기가 의연하게 서 있는데, 이 절이 세워진 내력은 삼국유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너무도 유명한 망해사지와 처용설화가 그것이다.
신라 49대 헌강왕이 개운포(開雲浦)에서 놀다가 돌아오는 길에 바닷가에서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졸지에 길을 잃어버렸다. 왕이 괴상하게 여겨 측근에게 물으니 일관이 답하되,‘동해 용의 장난이니 좋은 일을 하여 풀어버려야 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왕이 명령하여 그 용을 위해 세죽나루 근처에 절을 세우라 하였더니 홀연히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흩어졌다. 동해 용이 기뻐하여 곧 일곱 아들을 데리고 임금 수레 앞에 나타나 춤과 노래를 연주하였다. 그의 아들 하나가 임금을 따라와 국정을 보좌하였는데 이름을 처용이라 하였다. 왕이 그를 미인에게 장가들게 하였는데 역병 귀신이 밤마다 그 집에 가서 몰래 처용의 아내를 품고 잤다. 어느날 처용이 동경 밝은 달밤에 이슥히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었다.‘둘은 내해었고, 둘은 뉘해인고. 본디 내해다마는 빼앗는 것 어쩌리!’
●처용의 아버지 ‘용’에 대한 해석 분분
용은 누구일까. 학자들마다 해석이 구구하다. 조금이라도 이 분야에 조예가 있는 학자들은 저마다 구구한 해석을 내놓았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용이 해상 세력과 관련있음이 분명하다. 울주에서 조금만 북상하면 문무대왕이 동해 용왕이 되길 꿈꾸었던 동해구(東海口)가 나오고, 동해 용왕이 드나들던 감은사지가 지척이다. 혹자는 용을 외국인, 보다 정확하게는 아라비아 상인으로 보기도 한다. 당시 개운포가 국제무역항이었음을 고려할 때, 설득력이 없는 것도 아니나 증거는 없다. 혹자는 울산 바닷가에 기반을 잡고 있던 해상 호족세력으로 보기도 한다.
세종실록지리지 울산군 처용암 조에도 ‘고을 남쪽 37리 개운포 가운데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때 동해 용왕의 아들이 거기서 나왔으며, 모양이 기괴하고 가무를 좋아하여 사람들이 처용옹이라 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시대까지 전설처럼 처용암과 설화가 전승되었다. 고려시대에 학연대합설처용무 춤이 추어졌으니 역병을 쫓는 전통은 천년을 뛰어 넘어 이어진 셈이다.
설화 속의 역병도 단순한 전염병이 아닐 것이다. 당대의 ‘사회적인’ 역병을 은유한 것은 아닐까. 헌강왕조라면 신라가 돌이킬 수 없이 기울었던 때 아닌가. 처용은 역병을 물리치는 춤을 추고 있다. 처용의 춤은 흡사 무속의 악귀물림과도 같은 것이리라. 훗날 처용춤은 궁중정재로 편입되고, 민중 사이에서 제융의 역할을 도맡게 된다. 문헌기록상 무당으로 간주되는 신라 남해차차웅, 악귀를 쫓는 처용, 제액을 물리치는 제융 등은 한 가지를 뜻하는 다른 표현이 아닐까. 처용은 분명히 이두식으로 표현된 한자임에 틀림없다.
망해사와 처용설화의 실체를 증명해주는 망해사지의 부도(위)와 삼국유사의 망해사 설화를 토대로 그려진 망해사지 벽화(가운데). 처용 설화와 더불어 울산의 역사성을 담은 또 다른 설화가 치술령 은을암에 어린 박제상의 일가의 충절이거이와 이를 기리는 유적(아래)이 아� |
●공해 찌든 처용암에도 상록수는 우거져
망해사 바로 옆에는 늠름한 청송사 3층탑이 있다. 너무도 당당하고 의연하여 감히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이 장중한 석탑이다. 거기서 더 올라가면 문수사가 있으니 울산이나 부산 사람들이 영험하다 하여 쉬도 때도 없이 찾아든다. 삼국유사 전편을 통하여 영험한 문수보살은 노파로 변신해 기행을 일삼는다. 처용과 문수보살, 신라인이 창조한 인물군이 영취산을 점령하고 있는 셈이다. 청송사지와 문수사 가는 길은 지금이야 경관이 가려져서 바다가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그 옛날 신라인들은 국제항 개운포 풍경을 굽어보면서 이 산을 올랐으리라.
망해사지를 보았다면, 반드시 처용암을 찾아야 할 터인데, 아서라, 그냥 지나칠 수도 없고, 차마 찾아갈 수도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황성동 세죽리 앞바다의 처용바위는 신라 천년의 역사를 고증하고 있건만 석유화학단지의 공해로 바다는 찌들고, 보상금을 받아 쥔 마을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없다. 제를 지내는 당집의 나무도 시들어 처용바위의 처지를 말해주고 있다. 시비(詩碑)도 세워 두었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나마 매립이 되어 처용바위 자체가 사라질 판인 것을.“매립이 되더라도 처용암만큼은 반드시 보존하는 방향으로 지킬 것”이라는 김광오 울산시 공보관의 말에서 그나마 작은 희망을 얻는다.
처용암이 있는 세죽나루는 한적한 어촌에 불과했다. 공단이 들어서면서 근로자를 상대로 하는 횟집들이 번창하기 시작했다.90년대 초반까지 동해의 온갖 횟감이 팔리던 횟집도 이제 서서히 문을 닫는 판국이다. 더 이상 지독한 냄새를 견디지 못해서다. 그러나 생명의 힘은 그토록 무서운 것일까. 처용암 위에 빽빽하게 들어선 팽나무 사철나무가 사철 상록의 잎그림자를 바다에 드리운다. 처용암 지척에는 상록수림으로 유명한 춘도도 있어 동백나무숲이 그대로 전해진다. 바다 경관이 무너졌음에도 나무들은 제 역할을 다하며 마지막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해마다 10월이면 처용암에서 울산의 문화축제인 처용문화제도 열린다. 처용제의를 비롯하여 처용콘서트, 처용합창제, 처용얼굴 그리기 등등 처용을 기리는 행사가 열려서 글 모르는 아이들도 울산에서만큼은 처용을 알고 있다. 공장으로 둘러싸인 개운포에 포로처럼 갇혀 있는 처용암을 보노라면 근대산업화가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결단낸 그늘진 면을 보는 것 같아 무척 마음 아프다.
출처 :서울 신문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81&aid=0000025115
첫댓글 이번 년도 국문과 연합엠티 때 했던 장기자랑이 생각이 나네요 ㅎ 동기애들이 처용가를 가지고 연극을 했었는데, 많은 호응도 얻고 재미있었어요 ㅎㅎ
하핫~진짜 재미있었는데^^ 처용은 악귀인 줄 알았는데 아라비아 상인이라니....새롭네요^^
다양한 사진자료까지 있어서 흥미롭게 잘 봤어요.^^
처용이 아라비아 상인이라는 설은 예전에도 들은 적 있었는데 여기서 이렇게 보니 새롭네요^^ 좋은 자료 잘 읽었습니다.
처용이 아라비아상인이라는 설을 저는 이번에 처음알았네요. ㅋㅋ 아 너무 재밌는데요 ㅎㅎ
"경주가 신라의 본향임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지만, 또 하나의 본향인 울산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저 공해에 찌든 땅으로만 알고 있는 울산이야말로 경주 감포와 더불어 신라가 동해로, 세계로 나아가던 출구였다. 울산에는 동해를 굽어보던 유서깊은 절터가 남아 있다. 오늘날 울산항으로 엄청난 국제적 물동량이 오고감을 생각해볼 때, 신라 천년의 출구 역할이 지금껏 이어진다고나 할까." 저도 이제까지 경주가 신라의 본향이라고 생각했는데, 또 하나의 본향인 울산이 있었다고 하니 새롭네요. 그동안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배워갑니다. ^^
생소한 내용이었는데 처용가에 대해 좀 알고 있어서 흥미롭네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