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방에 한 미군 병사의 6.25 참전기가 떴다. 정권의 분위기도 바뀌고 마침 유월이라 때맞춰 누가 올린 모양이다. 꽤 긴 글이지만 너무도 생생한 글이라 꽤 드물게도 끝까지 읽어 내렸다.
한국의 첫인상 부분에 눈길이 갔다. 긴 글에서 이 땅의 풍경을 묘사한 딱 한 줄.
“상륙하니, 아 그 지독한 냄새! 한국 땅에서는 논밭에 뿌려진 똥오줌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한참 후 단군 이래 최고의 번영을 보는 감동이 있었고, 그 자부심으로 자신의 전쟁 트라우마를 치유했다는 줄거리다. 글의 성격상 해피엔딩일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그 첫인상 부분은 쉽게 잊히지 않는, 자못 충격적인 묘사가 아닐 수 없다.
그때 바로 떠오른 장면들이 있다.
내 고향 대구의 변두리 비산동 때때말랭이. 변소를 정낭, 통시라고 불렀다. 성내에서 갓 시집온 형수가 무엇보다 질색을 한 그 정낭. 송판 짝에 걸터앉아 볼일을 볼라치면 텅텅 소리에 이어 튀어 오르는 똥물. 공간이 넓을수록 소리가 커지고 많이 튀어 오르게 마련이다.
정낭 한쪽에 모셔진 필수 장비인 똥장군과 지게. 우리들은 당시 ‘똥장궤’ ‘똥장궤이’라 불렀다. 긴 궤짝 ‘長櫃’든 담는 궤짝 ‘藏櫃’든 어원을 알리는 데는 표준말보다 더 훌륭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생각해도 아슬아슬하게 느껴지는 순간들…. 늘 흰옷만 입는 아버지와, 주둥이를 짚으로 틀어막은 똥장궤이의 불안한 조합. 채소밭까지의 만만찮은 이동거리, 행여 지게에서 쿵 떨어지면? 안 떨어져도 내용물이 옷으로 튀면? 아니 스미기라도 하면? 바지 끝에 가부때기를 질끈 동이고 지게를 지는 아버지의 동작은 노련하고 날렵했지만 말이다. 다행히 나와는 인연이 없는 것이, 놀고먹는 처지였지만 어린 초등학생이었으니까.
6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 동네에서 그 똥장군이 사라진다. 천지개벽 이래의 대역사가 이어져 휑한 대로가 뻥뻥 뚫리고 동네 입구에 버스가 들락거리면서 집집마다 수도가 들어오고…. 그리고 전에 없던 세금이란 것도 따라 들어온다. 문명은 공짜가 아닌 모양이다.
어느 캄캄한 밤 억수 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들리는 소리, “어느 눔이 이 지랄이고! 이눔들아ㅡ.” 아버지의 고함소리가 가까웠다 멀어졌다 한다.
똥냄새가 창호지를 넘어 코를 찌른다. 문짝을 여니 냄새나는 일렁이는 물이 마당에 가득하다. 오물세를 아껴야 했는가 보다. 동네 골목에 경계가 있을 리 없고 집집마다 대문간에 정낭이 있으니 범인 색출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적빈(赤貧)…. 땅뙈기 다섯 마지기에 우리 집은 부자 소리를 들었다.
내 나이 서른 살 때다. 운명은 엉뚱한 곳에서 나로 하여금 기어이 똥장군 지게를 지게 만든다. 지리산 칠불암, 이 강산에서는 알아주는 청정도량이었다. 평소 십여 명에 이르는 사부대중의 웬만한 먹거리는 자급자족해야 하니, 산문(山門)의 농사일이 만만찮다. 똥장군은 필수 장비이고, 나 같은 행자도 필수 인력이다. 세월 따라 똥장군의 재질은 나무에서 플라스틱으로 진화해 있었는데, 편리한 만큼 깨지기도 쉬운 당연한 이치. 어릴 때 지게 기술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나, 어설픈 동작으로 두 개나 깨먹는다. 인근 시오리 안에 찻길이 없어 보급도 어려운 산사에서.
갑자기 똥장군이 그리워진다. 그리 길지 않은, 한 판의 바둑 같은 것이 인생이라면 그즈음 가장 치열한 수읽기를 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어쩌면 가장 향내 나는 시점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그리고, 그리고 말이다. 똥물이 키운 반들반들한 애호박, 엄마가 민 진짜칼국수, 부채와 풍로(風爐), 평상과 모깃불. 이런 것들이 똥장군의 무대에 같이 재연된다면 눈물 나는 그림이 되지 않겠는가.
2012년 9월 중국 산서성(山西省)을 갔을 때다. 황하의 삼문협(三門峽)을 건너 내몽골로 가는 길목을 차지하는, 한반도 크기의 산서성. 춘추시대 진(晉)에서 전국시대 한조위(韓趙魏)로 분화한 이 지역은 고대 중국의 심장부였고, 진시황 이후에는 소위 오랑캐의 남침루트가 된다. 흉노 거란 몽골 달단, 대륙의 역사에 명멸한 북방민족의 거친 숨소리와 말발굽소리가 들리는 곳, 역사를 느끼려는 자 모름지기 옷깃을 여밀 만한 곳이 즐비하다.
그리고 풍류기행의 로망인 행화촌(杏花村)이 있다. 당나라의 두목(杜牧)이 1,200년 전에 읊은 시 ‘청명(淸明)’을 모른다면, 또 그 현장인 행화촌에서 특별한 감회가 없다면 모름지기 진정한 술꾼이 아니리라.
그러나 나의 산서성 일번지는 따로 있는 것 같다. 이름하여 ‘천채면식 측소’라 할까.
행화촌에 들르기 전 점심 먹은 식당 이름이 ‘천채면식(川菜面食)’인데 사천요리 국수집이란 뜻이고, 측소(厠所, 처쑤어)란 악명 높은(?) 그네들의 전통 정낭이다.
중국을 제법 가 본 나도 처음 구경한 측소, 현대식 변소인 세수간(洗水間, 시소우젠), 위생간(衛生間, 웨이성젠)과는 글자부터가 너무 다르다. 우리도 한때 칙간, 측간(厠間)이란 비슷한 말을 사용하고 있었으니 이것도 한중 인문유대(人文紐帶)의 영역이라 할까.
급해서 먼저 들어간 여성 두 분이 얼굴색이 변해서 뛰쳐나온다. 여행에선 고약한 호사가의 심사가 작동할 때가 있다. 혼자서 용기를 내본다. ….
한마디로, 아서라 말아라. 나 홀로 작은 볼일까진 보았지만 차마 인증샷을 찍지는 못했다. 중화인민들의 얼굴들이 선명하게 다가왔으니.
어쨌든 나의 산서성 일번지를 바꿀 생각은 없다. 시쳇말로 팩트니까. 그런 만큼 오천년 유구한 역사에 똥칠한 예의 미군 병사의 무례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첫댓글 WOW....단숨에 읽고 다시 한 번 더 읽었는데요
또 읽고 싶어집니다. 재밌어요.
유년시절의 형수 아버님과이의 일화도 재미있고
정낭이라고도 불리어졌다니 정겹기까지 합니다.
메이저리그 첫 주자여서 마이너리그를 살짝
벗어나 문명의 혜택을 본 저 61년생은
선배분들의 이야기가 늘 신기합니다~
중국의 화장실 에피소드는 정말 끝이 없네요.
호도협 깊은 산골짝에 저도 흔적을 남긴
추억이 있어 웃음이 나옵니다.
선배님의 격조높은 글에 경의를 표합니다.
수고스러우시겠지만 또 부탁드려요.
학수고대 하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중국어방에
활기가 왠일인가
했더니
우리 몽연님이
똬리를 틀고 계셨군요..ㅎㅎ
중국의 화장실에
할 말은 많지만
그래도
호도협 차마객잔의
화장실에서
작은 창으로 내다보이던 야생초의 모습들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한 장면이랍니다..
중국어 공부를
튼실히 잘해나가는
몽당연필님~ㅎ
많은 활약 기대합니다..
@요석 요석님 중국어방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석 앗...요석님 와라락~ 반갑습니다.
맞아요...그 유명한 화장실.
창밖 소담스레 보이던 풍경이 선합니다.
천장의 나 다녀갔노라 형형색색 한국 방문객들의
요란한 리본+낙서 행렬.
객잔의 친절한 쥔장과 집 풍경
그리워지네요.
잔잔한 미소로 염려해주셨던 요석님
보고 싶습니다~
@피터리 남의 처마 밑에서
축하인사를 드리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피터리님의
존재감이 뿜뿜입니다..
객들도 찾을 수 있는 좋은 방으로
만들어주세요..
축하드립니다..
재미?
최고의 찬사로 듣습니다.
사실 그 한 단어에 저도 심혈(?)을 기울입니다.
작년 가을 대구의 한 문예지에 실린 글입니다.
중국어와 중국여행과 기행수필, 삼박자가 서로 어울리게 하는... 제법 괜찮은 취미죠?
하모요.
최고십니다~
대단한 필력이십니다.
평범한 외모..
조용한 성품..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한중인문유대"라는 대목에 시선이 갑니다.
가까운 이웃이니 문화도 섞이고..
글도 섞이는 게 당연하겠죠.
어렸을 때 배웠던 한자가 중국에서 쓰고 있는 문자라고 생각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중국에 첫 발을 내딛고 나서야..
"많이 다르구나"하고 느꼈거든요.
사실 좀 억울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렵게 배운 한자였는데..
중국은 이미 간자체로 모두 바뀌었고..
길거리의 간판에 적힌 글자의 반도 읽지 못하는 문맹인이었으니까요.
앞으로 선배님에 기대어 많이 학습해 보겠습니다.
좋은 글..감명있게 잘 읽었습니다.
한중인문유대란 말은 박근혜대통령 시절에 유행했지요.
뻣뻣한 시진핑을 상대하는 우리의 문화적 자존심이 담겨있다고 할까요.
문맹이란 표현은 지나치겠지요.
간체자나 번체자나 어차피 같은 글자이고 마지막 5%의 노력만 기울이면 됩니다.
중국여행 가실 때는 간체자 번체자 대조표 한 장을 가져가면 좋습니다.^^
비산동 ...
얼마만에 들어보는지
비산동에서 태어나고
비산국민학교 다녔습니다
옛날엔 날뫼, 날미라고 불렀죠.
1954년 仁智국민학교에 입학할 때는 군부대에 학교를 징발 당해 가교사에서 입학식을 하고, 이듬해 현재의 교사로 신축 이사했죠.
물론 당시의 초록 벌판은 회색의 바다로 변했지요...
물메선배님 멀리 대구에서
참석 하신것도 저로선
놀라웠고..
한 10년은 젊어 보이셔서
또, 놀라웠고..
자기 소개 시간에
48세 나이에 중국어를
독학으로 배우시고
중국여행하신
체험담 들으며
놀라웠는데
글까지 이렇게 재미있게
쓰신거 읽으며 제가
중국어방 모임에
참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입니다~^^
앞으로 선배님의 중국에
관한 여러 이야기들
기대 많이 하겠습니다~^^
일이십년 젊은 사람들과 자주 섞이니 그런 모양입니다?
나이꺼정 기억해 주시니 황감합니다.
잿밥에 관심이 있다꼬
저는 보라님이 좋아하는 2차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제야 읽어봅니다.
수준이 남다른 글에 조심스럽게 흔적 남깁니다.
중국이라고 십수 년 전에 장가계에 갔던 기억 뿐.
화장실 똥깐,
사방이 트인
기억은 납니다.
청도가 고향이고,
고교와 대학을 대구에서 공부하신
저의 아버지처럼 아주 다부진 인상이셔서 친근해 보였습니다.
자주 글 올려주세요.^^
글 솜씨가 상당해 보이는데요.
쉽고 재밌게 쓰려고 노력은 하는데 글 쓰기는 참 어렵네요.
중국 얘기 가끔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