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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스크랩 헝가리 부다페스트, 사슬다리와 왕궁언덕을 거쳐 중앙시장, 영웅광장으로
나무모아 추천 0 조회 228 13.07.14 08: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제48일. 2006, 06, 23(금) 부다페스트 시내 관광 제1일

 

호텔식당은 07시30분부터 시작한다. 푸짐한 뷔페음식으로 실속 있게 식사를 마치고 눈치 봐가며 간단한 점심까지 준비한다. 08시30분 숙소를 출발하여 약 1Km, 네플리게트 지하철 정류장까지 걷는 동안 넓은 골목에 자동차는 물론 통행하는 사람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쾨니베스 칼만거리 너머 동쪽에 있는 광대한 네플리게트공원은 우리말로 ‘국민공원’의 뜻이라는데 시민 사이에는 중앙버스 터미널이 있는 곳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고 한다.

지하철역 광장에 접근하니 등교, 출근하는 사람들이 바삐 돌아가며 둘레가 비로소 도시의 아침 모습으로 바뀐다. 학생 시민들 사이에 섞이어 참 오랫동안 생존 현장에서 물러나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거리에 팽배한 활기, 모처럼 느끼는 긴장된 공기가 피부 세포마다 신선하게 와 닿는다. 퇴직한지 20년이 지났다. 맥동하는 질서에서 소외된 자의식이랄까, 선망이랄까, 잠시 현기증에 사로잡힌다. 저 때, 그 시절은 직장 가는 일, 그리고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이 항상 가득했던, 그래서 까닭 없이 바빠 밖을 볼 여념이 없었던 울 속의 시간이었다. 그 결과가 좋았는지 나빴는지 지금으로선 물론 알아 낼 도리가 없다. 또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 단지 그때 정신과 육체에 팽배했던 의욕과 감수성이 젊음의 특권이었구나 하는 추억을 가슴 속 그립게 깨닫는 것이다. 이제 그런 느낌은 앞으로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남은 것은 시간밖에 없는, 그마저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이 쓸쓸해진다.

그래도 저 중에, 세상 유람하는 시름없는 팔자라고 이쪽 인생 부러워할 사람 하나 둘은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공평치 않은 세상이다. 아니 그래서 더 공평하다는 것이 옳은지도 모르겠다. 세상살이 왜 남의 것은 더 좋게 느껴질까? 제 떡은 항상 작고 주문한 음식은 언제나 다른 사람 것보다 못해 보인다. 더 갖고 싶다는 무의식적 충동이 본능이라면 그 욕망에는 한계가 없는 것일까?

‘답은 없다. 답은 존재한 일이 없다. 답은 이제부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답이다.’ 미국의 시인작가 스타인(Gertrude Stein)의 말이다. 또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했다. ‘사람은 자신이 행복한 것을 모르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다.’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죽을 때까지 풀 수 없는 인생 문답이다.

어제 연구한 결과, 지하철은 당일 24시까지 유효한 1일 권을 사용하기로 했다. 표 한 장이 1,150포린트로 메트로, 버스, 노면전차에 전부 통용된다. 매표소에서 두 장을 구입하니 승차권에 인쇄된 오늘 날짜에 x 표시를 해서 내준다. 개찰구를 검표 없이 통과하여 바로 승차장으로 내려간다. 청색인 메트로 3호선은 도나우 강의 페스트 쪽을 따라 남북을 연결 운행하는 노선이다. 오늘의 첫 번째 목적지는 성 이슈트반 대성당(Szent Istv?n bazilika)이다. 지하철을 타고 여섯 정거장을 가서 데아크 광장(De?k T?r)에서 내린다. 대성당은 한 정거장을 더 가야하지만 지하철 3개 노선이 다 통과하는 교통의 요충을 한번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데아크 광장은 헝가리 최초의 법무장관으로 1867년 합스부르크와의 대타협을 이끌어내는데 공을 세운 정치가인 데아크 페렌츠(De?k Ferenc)를 기념하여 이름 붙인 페스트지구의 중심 광장이다.

지상으로 나와 광장 주변을 돌아본다. 전면에 그리스 신전 기분을 낸 건물이 있어 사진을 찍었는데 호텔에 돌아와서 알아보니 약 100년 전에 세워진 안케르(Anker)라는 보험회사라고 한다. 별로 유서 깊은 건물은 아닌 모양이다. 이곳에도 주변 빌딩 옥상에 SAMSUNG의 로고광고가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슈트반 대성당은 앞쪽에 빤히 보이는 가까운 거리지만 오늘 시내를 얼마나 걸어야할지 모르는 처지라 힘을 아끼기 위해 다시 메트로를 타기로 한다. 1일표를 갖고 있으니 오늘 하루는 자주 탈수록 돈을 버는 것 같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메트로 3호선으로 한 스톱을 더 가서 09시20분, 아라니 야노스(Arany J?nos)거리에서 내린다. 출구로 나가는 도중 프라하와 마찬가지로 불시 검표하는 두 사람의 단속반을 만나 1일표를 보이고 통과한다. 우리만 유달리 고속도로 통행권이나 승차권검사를 자주 받는 느낌이 드는데 어쩌면 그것이 정상적인 단속의 빈도인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차비 아끼려고 만용부릴 일은 안하는 것이 옳다는 결론이다.

 

성 이슈트반 대성당은 헝가리 건국 10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초대 국왕 이슈트반을 기리기 위해 1851년 페스트의 건축가 요제프 힐드(J?zsef Hild)의 설계로 기공됐다. 독립전쟁이 일어나고 건축가의 연이은 사망으로 지연을 거듭하던 공사는 미클로시 이블(Mikl?s Ybl)을 거쳐 요제프 하우져(J?zsef Hauser)에 의해 50년을 넘긴 1905년, 부다페스트 최대의 성당으로 완성됐다. 신고전주의에 신 르네상스양식이 가미된 그리스 십자평면의 건물은 길이 87.4m에 폭이 55m, 돔 정상 십자가까지의 높이가 96m이며 수용인원이 8,500명에 이르는 큰 규모다. 96이라는 숫자는 헝가리가 건국한 896년의 96을 의미하는 것으로 서쪽 강가에 서있는 국회의사당(Orszaghaz)과 같은 높이이며 도나우 강변의 모든 건축물은 이보다 더 높이 지을 수 없도록 규제돼 있다고 한다. 전면 삼각 페디먼트 부분에 12사도가 조각돼있으며 양옆에 서 있는 두 종탑 중 남쪽에 무게 9.6톤인 헝가리 최대의 종이 달려있다. 정문 위에는 오른손에 홀을, 왼손에 구슬을 들고 있는 성이슈트반의 흉상이 있고 또 한

단 위의 반원 팀파눔(Tympanum)에는 왕관을 쓴 성모 마리아가 묘사돼있다.

내부 관람은 무료다. 50종류 이상의 대리석으로 장식됐다는 찬란한 본당으로 들어서면 우선 중앙을 차지한 직경 22m의 거대한 큐폴라와 카로이 로츠(K?roly Lotz)의 모자이크가 시선을 압도한다. 동쪽 주 제단에는 1083년 시성되어 성인에 오른 이슈트반의 석상이 창에서 내리비치는 밝은 빛을 받으며 높은 단 위에 서있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입상은 헝가리의 조각가 알라요스 스트로블(Alajos Str?bl)의 작품이다. 건설 중이던 1868년에 폭풍으로 돔이 무너지는 사고가 있었으며 그 영향 때문인지 아치를 지지하는 기둥이 지나치게 커졌다는데 여러 개 작은 기둥모양으로 묶어 시각적 압박감을 처리하고 있다. 내부에 보이는 유명작가의 그림과 조각 중 잘 알려진 작품이 성당 오른 쪽 제단을 장식한 쥴라 벤추르(Gyula Bencz?r)의 성화로 성 이슈트반이 그의 나라 헝가리와 왕관을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하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주 제단 왼쪽 문을 열고 성 레오폴드(Leopold)채플로 들어가면 상여같이 생긴 정교한 상자가 놓여있고 그 안에 이 성당의 소중한 유물인 성 이슈트반의 손이 전시돼있다. ‘신성한 오른손 예배당’ 이라고 불리는 유리 상자에는 조명장치가 돼있어 100포린트 동전을 넣으면 1-2분 동안 손을 볼 수 있게 전등이 켜진다. 손목부분에서 잘린 성 이슈트반의 주먹 쥔 오른손은 그 안에 있는 또 하나의 작은 황금 유물함속에 보석과 금으로 장식되어 들어있다. 처음에는 분별하고 관찰하는데 시간이 걸려 사진까지 찍을 여유가 없으며 동전을 또 넣거나 카메라를 준비하고 다른 사람이 켜주기를 기다린다. 성인의 유체를 대하려는 엄숙한 행위치고는 어쩐지 세속적이고 치사하다는 느낌이 드는 방식이다.

 

신성한 손(Holy Right)에 대한 헝가리 사람들의 애정은 각별하여 공산정권이 이 손에 의해 무너졌다는 신념이 보편적 상식이라고 한다. 1083년부터 이슈트반 서거기념일에 신성한 손을 모시고 행진을 하는 것이 관례가 됐다는데 1988년의 950년 기일, 성당 앞 광장에 모인 5만 군중의 야외 미사에서 시작된 공산정권에 대한 저항이 그 해 내내 전국으로 확산됐고 그 물결이 다음 해 헝가리 정권 교체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기일인 8월 20일은 공휴일로 시민들은 경건하게 하루를 보낸다. 유물이 놓인 탁자에는 ‘이슈트반 왕이 1038년 8월15일 서거하여 1083년 세케스페헤르바르 (Sz?kesfeh?rv?r)에서 성인으로 시성됐고 완전한 형태로 발견된 오른 손이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는 내용의 설명문이 여러 나라 말로 적혀있다.

중앙 돔 위에 설치된 전망대에 엘리베이터로 올라간다. 입장료가 1인당 500포린트인데 경로우대로 노인요금은 400포린트다. 첫 단계의 중간층에서 내려 오른 쪽에 있는 두 번째 엘리베이터를 타고 1을 누르면 높이 65m의 정상에 닿는다. 364단의 계단을 통해 오를 수도 있으며 전망대로 나가면 비슷한 눈높이의 두 첨탑이 남북 양측으로 바라다 보인다. 부다페스트 360도의 전망이 속 시원히 전개된다. 특히 부다 쪽, 왕궁과 어부의 요새 등 언덕 경치가 도나우와 어울려 볼만하다. 사람의 개성과 마찬가지로 어떤 도시건 고유한 정서와 특성이 있다. 부다페스트라는 도시의 감각도 느껴보고 오늘 내일 돌아다닐 행로를 짚어보며 부담 없는 시간을 즐긴다.

10시40분, 대성당을 나와 정문에서 서쪽으로 곧게 뻗은 즈리니(Zrinyi)거리를 약 500m, 도나우 강에 걸린 대표적인 교량 세체니 사슬 다리가 시작하는 루즈벨트 광장(Roosevelt t?r) 까지 걷는다. 20세기 초 도나우 화물선의 하치장이었다는 이 광장이 2차 대전 말기 부다페스트를 폭격하여 큰 피해를 입힌 미국의 전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를 기념하게 된 데에는 분명 어떤 사유가 있을 법한데 자료를 뒤져도 찾을 수 없어 궁금하다. 둘레에는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건물이 몇 개 서있다. 대성당이 있는 동쪽 면의 아름다운 7층 건물이 20세기 초기에 건설된 중부유럽 아르누보(Art Nouveau)의 전형인 그레샴 궁전(Gresham palota)으로 현재 포 시즌(Four Seasons) 호텔로 사용되고 있다. 남쪽에는 최고급 호텔인 소피텔(Sofitel)이 있다. 광장 북쪽에 면한 반듯한 석조 4층 건물이 1825년 백작 이슈트반 세체니(Istv?n Sz?chenyi)가 그의 1년 치 소득을 희사하여 설립했다는 헝가리 과학 아카데미이며 1865년 네오 르네상스양식으로 완공됐다. 백작 이슈트반은 사슬다리 건설에 힘을 쏟아 ‘세체니’라는 다리 이름을 제공한 바로 그 사람으로 건물 전면 나무사이에 그의 동상이 서 있다. 동상 밑에 앉아있는 네 인물은 그가 활약 했던 분야인 무역, 항해, 산업, 농업의 상징이라고 한다. 녹지 중간에 대형 분수대가 있으며 남쪽 소피텔호텔 앞에는 국민적 현인으로 추앙을 받는 데아크 페렌츠의 좌상이 놓여있다.

 

 루즈벨트 광장에 서서 서쪽 도나우 강으로 몸을 돌리면 150m 전방에 부다페스트의 대표적 상징인 세체니 사슬다리(Sz?chenyi l?nch?d)의 석탑이 보인다. 도나우 강 서안의 부다와 동안 페스트, 두 지구를 연결하기 위해 건설된 최초의 항구적인 다리로 폭 14.8m에 길이 375m, 총 2천 톤의 중량이 높이 48m인 두개 교탑에 사슬 형 철재로 매달려있는 현수교(Suspension bridge)다. 그 전까지는 수시로 가설한 배다리를 통하여 주민들이 왕래하였다고 한다. 세체니 이슈트반 백작의 제창과 후원 아래 영국인 토목기사 윌리엄 클라크(William Tierney Clark)의 설계와 스코틀랜드인 아담 클라크

(Adam Clark)의 감독으로 1849년 개통했으며 당시 세계 최장이던 202m의 중간 단일스팬은 기술혁신의 개가이자 국력을 과시하는 증표로 명성을 날렸다. 란치드(L?nch?d)란 헝가리말로 사슬다리라는 뜻인데 주 케이블의 커티너리 곡선이 이루는 유연한 형태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조물로 평가됐고 그 위에 달려 밤을 밝히는 전구의 모습이 마치 사슬처럼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많은 해설에 적혀 있다. 다리가 완성된 지 24년이 지난 1873년, 부다와 페스트가 병합되면서 그것을 하나로 묶은 사슬다리는 세체니 백작 소원대로 통합도시의 명실상부한 중심이 되었고 1852년 설치된 네 마리의 라이온 석상이 두 교각 앞을 지키는 도시의 명물로 자리 잡았다. 2차 대전 말인 1945년 독일군이 다리를 폭파하여 사용할 수 없게 됐으나 재건공사를 거쳐 탄생 100돌이 되는 1949년, 현재 모습으로 새로운 개통을 보았다. 헝가리의 스턴트 파일럿 페터 베제네이(P?ter Besenyei)는 2001년 배면 비행으로 세체니 다리 밑을 날아 통과했고 그 이후 이 비행은 레드 불(Red Bull) 에어레이스의 표준종목으로 채택됐다고 한다.

다리 끝에서 사진을 찍고 강위로 걸어 들어간다. 프라하의 카를교와는 달리 중앙에

2차선의 차도가 있어 자동차가 왕래하고 난간으로 분리된 양쪽에 좁은 보행로가 있다. 부다페스트와 프라하는 도심을 뚫고 흐르는 도나우와 블타바의 지리적 특성 등 여러모로 비슷한 환경을 갖고 있는 수도들이다. 그럼에도 양 도시를 대표하는 세체니 다리와 카를교에서 관광 분위기의 대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바 그 현상은 바로 교량 위 차량교통에서 비롯됐다는 생각을 한다. 세체니에는 깨끗하게 정돈된 차분한 분위기가 있지만 대신 카를에서 맛 봤던 낭만과 해방의 느낌이 없다. 450년이라는 건립연대의 차이에서 생긴 배경 탓도 있겠지만 거리 예술가와 노점상이 늘어선 차 없는 다리 위를 관광객에 밀려다니는 어수선한 혼잡이 없다는 점에서 사슬다리에는 아무래도 한 구석 아쉬움이 남는다.

다리입구 높이 3m의 받침대에 엎드려있는 사자 상은 접근해보니 상당히 큰 몸집이다. 이 사자에는 혀가 없다는 말이 널리 퍼져 조롱을 견디다 못한 조각가가 도나우에 투신자살했다는 풍설이 전해지고 있다. 정말 밑에서 쳐다보니 반쯤 벌린 입에 이빨만 보이는데 실제로는 혀가 있으며 조각가인 마르샬코(Marschalk? J?nos)도 1877년까지 생존했었다고 한다.

 

예상보다는 규모가 크지 않은 다리를 걸으며 구조를 살펴보니 커티너리로 늘어져 내린 곡선부재가 케이블이 아니고 좁고 긴 철판을 10여장씩 다발로 엮어 상하 2중으로 사용한 것이다. 5-6m 정도의 긴 철판 묶음을 큰 리벳으로 자전거 사슬 같이 연결하여 자연스런 곡선형성이 가능토록 했는데 사슬다리라는 이름이 사실은 여기서 유래된 것임을 깨닫게 된다. 뜻밖의 발견이 신기했는데 서스펜션 브리지라면 자동적으로 고강도 인장 케이블을 연상하고 철판 체인인 줄은 상상치 못했던 것이다. 철교 위를 걸어가면서 왼쪽 전면으로 부다 왕궁의 웅장한 모습이 접근해 온다.

중간쯤에서 난간에 팔을 얹고 푸른 기가 약간 도는 흙빛 강물을 내려다본다. 머릿속에 인상 깊게 남아있는 영화 글루미 선데이(Gloomy Sunday)에서 보았던 연인들의 포즈다.

‘글루미 선데이’는 헝가리의 피아니스트 레죄 세레스(Rezs? Seress)가 작곡하고 라슬로 야보르 (L?szl? J?vor)가 가사를 붙여 1933년 발표한 노래다. 음반이 출반된 지 8주 만에 헝가리에서만 187명의 자살을 불러일으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자살의 찬가', '자살의 송가'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원곡 가사는 전해지지 않고 리메이크된 것만 남아있다는데, 헝가리 정부에서 이 노래를 금지시켰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음울한 멜로디에 노랫말도 어두운 일요일, 죽은 연인을 그리며 탄식하다 자살을 결심한다는 내용이다. 야보르 가사가 아니지만 널리 퍼져있는 영어 버전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우울한 일요일 / 잠 못 이루는 시간들을, 사랑하는 이여, / 함께 지내는 셀 수 없이 많은 그림자. / 하얀 작은 꽃들은 다시 당신을 깨우지 않겠지, / 슬픔의 검은 마차가 싣고 간 곳이 아니라면. / 천사들은 당신을 다시 돌려줄 생각이 없나봐. / 내가 당신에게 가겠다면 그들이 역정을 내려나? / 글루미 선데이, 일요일은 내 온 마음 깃든 그림자로 우울하고 / 나는 모든 것을 끝내기로 결심했어. / 이제 곧 꽃과 슬픔의 기도가 다가오겠지. / 그러나 울지 말라고, 내가 기쁘게 간다고 전해주기 바래. / 죽음은 꿈이 아니야. / 그 안에서만 당신을 어루만질 수 있잖아? / 내 영혼의 마지막 숨으로 당신을 축복할거야. / 우울한 일요일이여. / 꿈이야. 그저 꿈을 꾸고 있는 거야. / 잠에서 깨어나 잠든 당신을 발견하고, / 사랑하는 이여, 당신 꿈 괴롭히지 않고 / 얼마나 당신을 원하고 있는지를 / 깊은 속에서 우러나는 마음으로 말하고 싶어. / 글루미 선데이.

독일의 영화감독 슈벨(Rolf Sch?bel)은 이 노래에 얽힌 실화를 소재로 한 바르코프(Nick Barkow)의 소설 ‘우울한 일요일의 노래’(The Song of Gloomy Sunday-1988)를 각색하여 영화로 만들었다.

1999년의 가을 날, 부다페스트의 한 작은 레스토랑이다. 80세 생일을 맞은 독일 사업가가 ‘그 노래’를 청한다. 실내를 채우는 바이올린의 멜로디. 회한에 잡긴 표정으로 피아노 위에 놓인 여자의 사진을 보던 노인이 돌연 가슴을 쥐며 쓰러진다. 놀라는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외친다. "노래의 저주다. 글루미 선데이의 저주를 받은 거야!" - 영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유대인 사보(L?szl? Szab?)와 가수인 그의 연인 일로나(Ilona Varni?)가 강렬한 눈동자를 가진 안드라스(Andr?s Aradi)를 피아니스트로 고용하면서 세 사람 사이에 기묘한 관계가 형성된다. 일로나에게 빠지기 시작한 안드라스는 생일선물로 자신이 작곡한 ‘글루미 선데이’를 연주하고 일로나 또한 그에 대한 사랑을 확인한다. 그날 저녁 독일인 단골손님 한스(Hans Wieker)가 일로나에게 청혼했다 거절당한 괴로움으로 도나우 강에 몸을 던지지만 사보에게 구출된 후 슬픔을 안고 독일로 돌아간다. 다음날, 안드라스와 밤을 보내고 온 일로나에게 사보가 말한다. “당신을 잃느니 당신의 절반이라도 갖겠어!” 두 남자가 한 여자를 공유하는 평화적인 관계가 지속되는 동안 음반으로 제작된 ‘글루미 선데이’가 히트하면서 음울한 곡을 듣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속출한다. 몸과 정신, 양쪽에 독일 나치의 장교 옷을 걸치고 한스가 돌아오면서 이들의 관계는 비극적 파국으로 치닫는다. “나는 외로울 때에만 노래해요” 하고 버티던 일로나가 한스 강요에 맞서는 안드라스를 달래려 ‘글루미 선데이’를 부르자 피아노를 친 안드라스가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고 쓰러진다. 왜 사람들은 목숨을 끊는가? 사보는 말한다. “남에게 자신의 존엄을 파괴당할 바에야 차라리 죽음으로서 존엄을 지킨다. 자존심을 꺾일 땐 죽는 수밖에.“ 유대인 사보는 한스에 의해 가스실로 보내지고 사보를 구하려고 한스에게 간 일로나는 몸을 뺏긴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떠나보낸 일로나는 아들을 키우며 꿋꿋이 레스토랑을 지킨다. 60년이 지난 후 레스토랑에서 쓸어져 최후를 마친 한스는 과연 심장발작을 일으켰던 것일까?

팜므 파탈, 일로나의 마력일까, 글루미 선데이의 저주일까? 영화 속 도처에서 도나우와 세체니 사슬다리를 배경으로 아픈 사랑과 우울한 멜로디,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가 앙상블을 이룬다. 베토벤 5번 교향곡을 시작하는 힘찬 네 개 음보가 인생의 문을 두드리는 운명의 동기라면 반음계를 반복하며 전개되는 3연부, 글루미 선데이 첫머리는 생존의 문을 닫으라는 신호인 것인가? 아니면 저승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던가?

재차 세계대전으로 치닫는 어수선한 유럽, 격동의 시절을 살아간 세 사람, “우린 하나예요. 하나가 죽으면 모두 다 죽어요.” 하던 일로나, 연인들이 나란히 서있던 사슬다리 난간에 기대어 기억에 남아있는 은막의 여운을 확인한다. 일로나는 머리를 날리며 자전거 뒤에 사보를 태우고 이 보도를 달렸다. 비록 영화 속 이야기지만 우리가 태어난 1930년대 먼 그 시절을 잠시나마 직접 호흡해 보는 기분이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이즈음에는 ‘글루미 선데이’에 대해 자살과의 인과관계가 증명된 사실이 없고 기록도 거의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이른바 ‘도시전설’의 하나가 아니겠냐는 견해가 지배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독일 침공이 임박한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생각할 때 곡조의 우울한 분위기가 자살에 이르는 유인의 하나였다는 가능성은 부인할 수 없다고 본다. 실제로 유럽 각국에서 노래의 방송이 금지됐거나 자숙의 움직임이 있었다는 기록은 확인되고 있다. 또 한 가지 숙명적인 현상은 이 곡을 작곡한 세레스 자신이 그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1968년 1월 14일자 뉴욕타임스는 69세 생일을 보낸 헝가리의 작곡가 세레스 레죄가 전날 자신의 아파트 창에서 뛰어내려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1930년대 세레스가 작곡한 어두운 가곡 ‘글루미 선데이’가 자살을 불러일으키는 노래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세체니 다리로 도나우를 건너면 남쪽 끝에서 아담 클라크광장(Clark ?d?m t?r)으로 내려선다. 사슬다리의 건설 공사를 감독한 스코틀랜드의 토목기사인 아담 클라크를 기념하는 광장으로 자동차가 돌아가는 로터리 화단에 여러 색의 꽃이 곱게 피어있다. 공산 정권 때는 별모양으로 꾸민 붉은 화단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세체니 다리에서 마주보이는 광장서쪽 왕궁의 언덕 밑에 역시 아담 클라크가 계획한 터널의 입구가 보인다. 사슬다리가 완공된 4년 후인 1853년에 시작한 터널공사는 1856년에 보행자를 위해 개통된 후 다음 해인 1857년에 자동차용으로 완성됐다. 길이가 세체니 다리와 비슷한 350m로 비가 올 때 다리를 밀어 넣기 위한 피난처라는 농담이 돌았다고 한다. 터널의 입구도 세체니의 교탑과 어울리게 고전양식으로 되어있다.

아담 클라크광장은 헝가리 국내도로의 0Km 기점이며 서남쪽에 있는 작은 화단에 3m 높이의 하얀 도로 원표(0 Kilom?terk?)가 서있다. 1932년 설치됐던 첫 번째 표석은 2차 대전 때 파괴되었고 지금 서있는 원표는 1975년 미클로스 보르소스(Mikl?s Borsos)가 제작한 것으로 타원형 석회석에 세로로 길게 홈이 패어있다.

 

클라크광장의 서쪽은 ‘성채의 언덕’이라는 뜻을 가진 바르헤지(V?rhegy)의 급한 경사가 시야를 가로막고 있는데 터널 입구 좌측에 ‘부다바리 시클로’(Budav?ri Sikl?)라고 불리는 푸니쿨라가 설치돼있어 왕궁의 언덕을 오르내린다. 다뉴브강변과 부다 성 사이의 가장 빠르고 편한 교통수단인 이 전차는 1870년 건설됐으며 처음에는 스팀으로 구동됐다고 한다. 2차 대전 때 파괴된 것을 1986년 복구했으며 경사 48도, 높이 51m인 95m의 거리를 왕궁이 위치한 센트 죄르지 광장(Szent Gy?rgy t?r)까지 운행한다. 두개의 궤도 양옆과 중간에 보행자를 위한 계단이 설치돼 있으며 선로 위를 가로지르는 두 개의 보행육교를 두어 보도를 연결했다.

도로 원표가 있는 화단 서쪽에 경량철골과 삼각 유리지붕으로 된 매표소가 있다. 한 사람에 700포린트인 차표를 사고 승강대에서 기다리면 옛 모습 그대로의 전차가 내려와 선다. 높이가 3단인 세 칸으로 구분된 차를 타면 전망 창을 통하여 아래 세상이 내려다보인다. 출발하면 1분 남짓한 시간에 언덕 위 정류장에 도착하는데 세체니 다리와 이슈트반 대성당, 국회의사당과 오페라 하우스 등 페스트의 명승이 도나우와 함께 떠오르며 상하좌우로 확대되는 전망이 숨 막히게 대단하지만 놓치지 않으려고 두리번대는 사이에 끝나 버려 찰나의 뒤끝이 오히려 허전하다. 오른 뒤의 경치는 변함없어 찬찬히 볼 수 있으니 푸니쿨라에서는 주밍아웃(Zooming out)되는 움직임을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내려갈 때는 푸니쿨라를 타지 말고 걷거나 어부의 요새 등 다른 길을 이용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이곳에 왕궁(Kir?lyi-palota)이 세워진 것은 13세기 중간 무렵 에스테르곰에서 난을 피해 옮겨온 벨라(B?la) 4세에 의해서다. 이후 마차시(M?ty?s) 왕 시절인 15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초빙된 장인들에 의해 르네상스 스타일로 개수되면서 중부 유럽의 문화, 예술, 정치 중심으로 등장했다. 1541년 오스만제국에게 점거된 후 방치 황폐해가던 궁성은 1686년 합스부르크군의 포위공격을 받아 불에 타고 크게 파괴됐다. 1715년부터 복구를 시작한 왕궁은 마리아 테레지아에 의해 1769년 바로크양식으로 예전 모습을 되찾았지만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독립전쟁과 두 번의 세계대전, 공산통치 등, 큰 고비마다 파괴와 재건을 되풀이하며 고난의 역정을 겪어왔다. 고딕과 바로크양식이 혼재한 지금의 건물은 1966년 완성됐으나 내부 치장은 1980년대까지 계속됐다. 현재 역사박물관과 국립미술관, 국립도서관 등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파괴된 현장을 복구하면서 발굴된 많은 유물이 역사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11시40분, 죄르지 광장에서 푸니쿨라를 내리면 바로 역사상 31번의 공방전이 벌어졌다는 왕궁의 언덕이다. 센트 죄르지는 용을 퇴치한 것으로 유명한 성 게오르게의 헝가리 식 호칭이다. 승강장을 나서니 눈앞에 정밀한 세공의 왕궁 돌문과 철책이 보이고 담장의 강 쪽 끝, 받침돌 높이 독수리 같이 생긴 큰 새의 조각이 허공으로 날아오를 듯 날개를 펴고 있다. 훈족의 마지막 왕 아틸라(Attila)의 선조이며 카르파티아의 길을 일러준 투룰(Turul)이라는 헝가리 전설의 새라고 하며 1905년 쥴라 도나트(Gyula Don?th)가 제작한 이 작품은 헝가리 왕권의 상징으로 간주된다고 한다.

철책 문에 있는 계단으로 한단 낮은 중정에 내려서서 곱게 꾸민 화단을 지난다. 왕궁의 입장은 돈을 받지 않는다. 깨끗하게 돌이 깔린 테라스 동쪽으로는 도나우 강과 함께 세체니 다리와 국회의사당 등 페스트의 장쾌한 경치가 시원하게 눈에 들어온다. 전망을 즐기며 마당 끝까지 천천히 걷는다. 박물관, 미술관은 잠깐 봐서 될 일이 아니고 왕성내부도 근년에 공사를 끝낸 구조라니 아예 구경을 포기하고 외부만 돌아보기로 한다. 정원 중간쯤에 사보이아(Savoia)공자, 오이겐 공(Prinz Eugen)의 기마상이 있다. 1686년, 오스만제국을 격파하여 부다를 점령하고 헝가리 전토를 수복하는데 공을 세운 오스트리아 영웅으로 비엔나의 신 왕궁 앞에서 보았던 기마상 오이겐과 같은 인물이다. 동상은 요제프 로나(J?zsef R?na)의 1900년도 작품으로 밑 부분에 1697년 젠타(Zenta) 전투의 승전을 묘사한 동판 부조가 있다.

 

 

왕궁 동쪽마당의 끝, 강으로 향한 돌난간에서 역대 국왕이 바라보았을 전망을 즐기며 한동안 쉬었다 간다. 도나우 강을 사이에 두고 부다나 페스트에서 상대를 건너다보는 전망은 어느 쪽에서도 목표가 되는 핵심 대상(Focal point)이 뚜렷하고 서로 거리가 가까워 블타바를 사이에 둔 프라하의 경관을 능가한다는 생각이 든다.

사슬다리 너머 왼쪽에 연무로 맑진 않지만 헝가리의 얼굴, 국회의사당(Orsz?gh?z)의 당당한 모습이 보인다. 길이 268m, 폭 123m에 높이는 이슈트반 대성당과 같은 96m, 건국 1000년을 기념하여 20년의 공사 끝에 1904년 완공했으며 국회의사당으로는 영국에 이어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크다는 건물이다. 중요인물 88명의 외벽 석상과 내외벽체의 조각 242개, 691개에 이르는 집무실에 1년을 상징하는 365개 첨탑이 침봉 같이 하늘을 찌르는 웅장한 규모가 일류 호텔이 즐비하다는 페스트쪽 강변에서도 유달리 두드러진다. 외관은 네오고딕, 중앙의 큰 돔은 르네상스, 첨탑은 고딕으로 된 슈테인들 임레(Steindl Imre)의 현상공모 당선작으로 호화찬란한 내부 장식에 40Kg의 금이 사용됐다고 한다. 12세기 이래 대대로 왕가에 이어 내려온 헝가리 왕관도 2000년, 국립박물관에서 국회의사당의 중앙 돔 홀(Dom Hall)로 옮겨졌다. 윗부분은 교황 실베스테르(Silvester) 2세가 AD1000년 이슈트반 대관식 때 전수한 로마 왕관이고 아래 부분은 1074년 동로마 제국 미카일(Mikha?l)7세가 헝가리 왕 게자(G?za) 1세의 왕비에게 선물로 보낸 것이라는데 예수를 비롯한 천사, 성인 등 90개의 에나멜 그림과 각종 보석으로 장식된 금판으로 구성돼있다. 정상부 황금 십자가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특이한 형태는 헝가리 문장에도 그대로 들어가 있다. 의사당 앞에 있는 코슈트 러요시 광장에 독립과 혁명의 지도자인 라코치 페렌츠와 코슈트 러요시, 두 영웅의 동상이 서있다. 1956년 혁명 당시 부다페스트 대학생과 시민들이 소련군 철수와 헝가리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데모를 벌이다가 소련군 총탄에 쓰러져간 곳으로, 헝가리 민주 의회정치의 현장으로도 유명하다. 오늘 내일 이틀의 부다페스트 관광 중 국회의사당은 직접 찾지 않고 대안에서 구경을 끝낼 생각이라 공들여 자세히 바라다본다.

방문객이 늘어나는 전망테라스에 우리나라 단체 관광단이 두 팀 모습을 보인다. 오래간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이라 필여사가 얘기를 나누고 싶은 눈치인데 사진만 찍고 바삐 돌아나간다. 이곳에서 강 건너 사진은 오후에 찍는 것이 유리하다. 웅장한 초록색 돔의 왕궁을 바라보며 미술관과 세체니 도서관으로 둘러싸인 중정으로 들어가 사자상이 지키는 문을 통과하고 마차시분수가 있는 뒤쪽 뜰을 대략 둘러본다. 1904년에 알라요스 스트로블이 제작한 분수의 조각은 마차시 왕이 사냥하는 젊은 날의 정경이며 샘 속에서 왕을 쳐다보고 있는 여인은 왕인 줄 모르고 그를 사랑하게 된 신분 낮은 소녀 세프 일로나(Sz?p Ilona)의 가련한 모습이라고 한다. 글루미 선데이의 기억과 겹쳐 일로나라는 애처로운 이름이 부다페스트의 인상으로 남게 될 듯하다.

12시20분, 국기 게양대가 길게 줄 서있는 디스광장(Disz t?r)으로 나가 10번 버스를 타고 한 정거장 서쪽의 마차시 성당(M?ty?s templom)과 어부의 요새(Hal?szb?stya)까지 간다. 1987년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왕궁 언덕의 서쪽 부분도 궁성 못지않게 많은 재난을 겪었지만 중세의 정서를 간직한 채 유서 깊은 거리로 남아있다. 500m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라 걸어도 좋지만 1일 승차권의 효용을 최대로 즐기고 싶은 것이다. 출발하자 곧 도착한 센트하롬샤그(Szenth?roms?g)광장 중심에는 페스트 종식을 기념하여 1713년에 건립한 삼위일체의 탑이 있으며 그 동쪽에 역대 헝가리 왕가의 대관식과 결혼식이 거행됐던 마차시 성당의 높은 종탑이 솟아있다.

 

1015년, 초대 국왕 이슈트반에 의해 세워진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 1242년의 몽골제국 침공으로 파괴된 후 그 자리에 1255년부터 벨라(B?la)4세가 고딕양식으로 새롭게 건설한 부다의 첫 번째 교구 본당이다. 벨라4세는 폴란드 크라쿠프, 비엘리치카의 소금광산에서 우리가 만나 본 전설 속의 여주인공 킹가공주의 아버지다. 마티아스 코르비누스(Matthias Corvinus)라고도 불리는 헝가리 왕 후냐디 마차시(Hunyadi M?ty?s)가 1479년 80m의 첨탑이 있는 화려한 고딕 건물로 증축했으며 두 번이나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려 성당에 그의 이름이 붙게 됐다고 한다. 예배당 외벽에 그려진 마차시왕의 문장과 내부에 보관돼 있는 그의 머리카락이 밀접한 인연을 잘 말해주고 있다. 15세기 후반, 마차시왕 시대에 헝가리왕국은 보헤미아에 출병, 모라비아를 점령하고 한때 비엔나를 함락시키는 등 최대의 판도를 실현하였고 국내에서는 르네상스 문화가 꽃을 피웠다. 성당은 16세기에 오스만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내부 장식이 철거되고 아라베스크 무늬의 이슬람 모스크로 개조됐지만 1686년 합스부르크에 의해 부다가 해방된 후 바로크식으로 재건되었다. 1867년, 오스트리아- 헝가리화약 후에 2중군주가 된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마차시 성당에서 헝가리 왕으로 대관하였다. 그때 연주된 곡이 리스트가 작곡하고 직접 지휘했다는 ‘헝가리 대관미사’다. 마차시 성당이 오늘날 네오고딕의 정교한 모습을 갖게 된 것은 1874년부터 22년간 슐레크 프리제스 (Schulek Frigyes)가 주도한 본격적인 복원공사에 덕 입은 바 지대하다. 그는 발굴된 작은 파편까지 연구하여 13세기 원형을 복구했으며 지붕의 채색타일, 첨탑의 장식 등 새로운 요소를 덧붙였다. 바로 옆에 있는 어부의 성채도 그의 작품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소련의 점령으로 성당은 다시 심한 손상을 입었지만 정부에 의해 1970년까지 대략적으로 보수가 이루어졌다.

센트하롬샤그광장에 서서 삼위일체 탑과 함께 마차시 성당을 바라보니 구시가의 환상적 분위기가 잘 느껴진다. 높게 솟아오른 하얀 탑의 조각이 마치 상아를 깎아놓은 듯, 돌을 다뤘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치 정교한 세공이다. 얼핏 체코

 

의 흘루보카 성이 연상되는 맑고 산뜻한 인상이다. 그러나 서쪽으로 돌아 성당 정면을 대하고 서니 좌측의 벨라(B?la) 탑과 주출입구가 있는 중간부분, 그리고 오른쪽의 남 탑 등 세부분으로 구분된 외관의 부조화가 뜻밖에 두드러진다. 균형이 맞지 않는 비대칭에다 층고, 형태, 꾸밈새가 제각각인 것이 개축시기와 양식이 달라 생긴 결과겠지만 보수를 맡았던 프리제스도 별다른 방도가 없었던 모양이다. 외관상 두드러진 또 다른 특징은 비엔나 슈테판대성당과 비슷한 마늘모 꼴 색채지붕으로 헝가리 특산 졸나이(Zsolnay)의 모자이크 타일이 무척 화려하다.

남측 마리아 문을 통해 내부로 들어가면서 한 사람 400포린트의 경로요금을 낸다. 입구로부터 내벽 전체가 기하학적 아라베스크 무늬로 빈틈없이 덮여있다. 가톨릭 성당에 근 500년 그대로 남아있는 이슬람 모스크의 영향이 신기하면서도 한편, 루마니아 불가리아 동방교회에 꽃처럼 만발했던 프레스코 성화가 뇌리에 떠올라 이제는 떠나왔구나 하는 어떤 상실감으로 가슴이 쓸쓸해진다. 서쪽 벽 큰 장미창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별모양으로 구성돼 있고 들어가면서 왼쪽에 있는 로레토(Loreto) 예배당에는 붉은 대리석 성모상이 안치돼있다. 그 외벽에 큰 까마귀가 반지를 물고 있는 마차시왕의 문장이 붙어있다. 회중석 좌측에 초대 왕 이슈트반의 아들인 성 임레(Imre) 예배당이 있으며 그 다음이 벨라 3세 부처의 석관이 안치된 방이다. 임레가 24세 젊은 나이로 죽은 후 계속된 수십 년 후계자 다툼을 1077년 종식시키면서 왕위에 오른 성 라슬로(L?szl?) 예배당이 주 제단 좌측에 있다. 정면 네오고딕 양식의 주 제단은 십자가와 성모 마리아상을 중심으로 성당 형상으로 꾸며져 있고 그 뒤로 둥글게 돌아간 벽체에 스테인드글라스의 창들이 달려있다.

마차시 성당에서 밖으로 나오면 강 쪽으로 눈앞에 보이는 백색 구조물이 1895년부터 1902년 사이에 축조된 어부의 요새다. 마차시 성당의 복원공사를 주도한 슐레크 프리제스 설계에 의해 정주 1천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옛날 도나우 성채 위에 구축된 네오 로마네스크와 네오고딕이 절충된 양식의 건조물이다. 중세에 어시장이 열렸던 곳으로 시민군이 왕궁을 지키는 동안 강을 건너 기습하는 적을 감시, 격퇴하기 위해 도나우의 어부들이 성채를 방비한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됐다고 한다. 강의 서쪽 둔덕을 막은 높이 70m의 석벽 회랑과 그 위에 구축된 고깔모자 모양의 크고 작은 일곱 개의 탑으로 이뤄졌는데 각 탑은 건국 당시의 마자르 7개 부족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전투가 벌어진 일은 없으며 주로 감시탑으로 사용된 모양이지만 지금은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으로 관광객의 사랑을 받고 있다.

 

마차시 성당과 어부의 요새 사이, 둥근 광장 중앙에는 1906년에 제작된 헝가리 초대 국왕 이슈트반 1세의 청동 기마상이 기단 위에 높이 서있으며 네 마리 사자석상이 지키는 훌륭한 3단 대좌에는 국왕의 생전 사적이 부각으로 묘사돼있다.

동쪽 절벽에 강을 향해 축조된 어부의 요새는 남과 북 두 부분으로 나눠진 ㄱ자 회랑이 중앙에서 ㄷ자로 연결되는데 광장에서 계단을 통해 돌난간으로 막힌 회랑 위 보루로 올라가게 돼있다. 그 두 ㄱ자의 양단과 중앙 세 곳씩 예쁜 고깔모자의 로마네스크 원탑이 서있는데 북쪽 중앙 부분에 있는 것만 특별히 큰 탑이고 부속으로 작은 탑 하나가 덧붙어있다. 2층 회랑으로 올라가려고 측 계단에 들어서니 십자형 회전대가 막고 있으며 지키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가만히 밀어보니 부드럽게 안으로 열려 2층으로 올라가 도나우 강 쪽의 기막힌 경관을 감상한다.

흐르는 도나우를 경계로 뚜렷이 전개된 부다와 페스트의 거리들, 특히 국회의사당과 사슬다리를 바라보는 최고의 관망 장소(Viewpoint)다. 정면으로 보이는 장엄한 의회건물은 영국 국회의사당에 붉은 돔과 지붕을 씌워놓은 인상이다. 바로 눈 아래로 요새의 석벽이 보여 성채 위에 높이 서 있음을 실감한다. 성벽 밖으로도 요새 남북에서 아치를 통해 나온 층계가 중앙에서 합쳐져 강 쪽 밑의 도로까지 내려간다. 한동안 전망을 즐기다 뒤를 돌아보니 계단 입구 회전대에 직원이 지켜 서서 입장객에게 요금을 받고 있다. 담당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우리가 들어온 모양으로 물건이라도 훔친 듯 가슴이 찔리는데 자수하기도 번거롭고 모른 척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서 어부 요새의 입장요금은 얼마인지 알지 못한다.

회랑에 놓여있는 돌 의자에 앉아 주위를 구경하며 무심한 시간을 보낸다. 여행 중 어느 한곳을 마무리하고 지나보내는 한 동안, 미풍 속에 아무 생각 없이 마냥 앉아있는 이런 시간이 그렇게 좋다. 과히 크지 않아 사귀고 싶어지는 성채, 여기저기 하얀 뾰족 탑이 아기자기 예쁜 장식과 어울려 백설 공주 궁전이나 디즈니랜드의 버섯 집 같은 동화 속의 세계다. 정다운 이국정서에 구경하는 사람들도 애들처럼 흥겨운 표정이다. 부다페스트에 들어오니 한국 관광객도 많이 만난다. 프라하를 떠난 후 20여일 만이다. 어부의 요새 서쪽에 바짝 붙어있는 구릿빛 반사유리의 커다란 현대식 건물은 힐튼 호텔이다. 구릿빛 반사유리가 신구 두 시대를 대조해 보라는 듯 고깔 탑의 영상을 거울처럼 비쳐준다.

이 언덕 밑으로는 전장 12Km의 미로 같은 왕궁동굴(V?rbarlang)이 종횡으로 뚫려있는데 석회암층이 지하수에 녹아 생긴 자연동굴에 오랜 세월 인력이 가해지며 연결된 것으로 추정한다. 비상재해의 대피시설로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하며 그중 2차 대전 때 사용됐던 주거, 부엌, 욕실, 카페 등 1,200m가 관광 투어로 개방돼 있다. 도중에 진짜 술이 흘러나오는 ‘와인의 샘’이 있어 받아 마실 수 있다고 한다. 자료를 보면 삼위일체의 광장 300m 정도 남쪽인 우리(?ri)거리와 로바스(Lovas)거리에 동굴의 입구가 있다. 또 광장 서쪽으로 500m지점, 2차 대전으로 파괴된 교회 터에는 마리아 마그돌나(M?ria Magdolna)라는 탑이 있다는데 시간이 충분치 않아 왕궁의 언덕은 이 정도에서 작별하기로 한다.

14시, 성곽 밖으로 난 계단을 통해 동쪽 길로 내려선다. 요새가 높게 쳐다보이는 성벽 밑 아스팔트길에는 관광단을 태우고 온 많은 버스가 줄지어 대기하고 있다. 이제부터 중앙시장을 찾아 갈 생각이기 때문에 페스트 쪽으로 건너갈 버스 정류장을 찾으며 언덕길을 내려간다. 시내지도를 보면 운행노선의 번호가 버스는 파란 색, 트램은 붉은 색으로 도로위에 적혀있어 목적지까지의 길을 쭉 훑어보면 이용할 수 있는 교통수단과 갈아타는 장소를 알 수 있다. 정류장 옆에 마침 구멍가게가 있어 콜라로 더위를 식히며 버스를 기다린다. 이 길을 운행하는 버스는 일방통행인 16번 하나 뿐이라 걸어온 길을 마차시 성당까지 돌아 오른 후 왕궁 앞 디스광장을 다시 거쳐 도나우로 내려서 세체니 다리를 통과한다.

강을 건너면 루즈벨트광장에서 버스를 내려 2번 트램으로 갈아타고 도나우 좌안을 따라 뻗어있는 페스트 알소(Pesti Als?)거리를 남쪽으로 내려간다. 오전에 돌아본 왕궁의 웅장한 모습이 오른쪽 대안에서 서서히 지나가고 왼쪽으로는 페스트의 번화가 바치(V?ci) 거리의 크고 작은 빌딩이 바람같이 스쳐간다. 프라하에서 비셰흐라트를 찾아 블타바 강가를 트램으로 내려가던 생각이 난다. 꼽아보니 20일 전인데 몇 달은 지난 듯하다. 에르제베트(Erzs?bet)다리를 통과하자 강에는 크루즈의 유람선이 떠있고 그 너머로 바위가 들어난 겔레르트 푸른 언덕이 보이기 시작한다. 다음 철교 자유의 다리(Szabads?g h?d)가 시작하는 푀밤(F?v?m) 광장에서 트램을 내린다. 부다페스트의 최대 옥내마켓인 중앙시장 (Nagycsarnok, Mercato Centrale)이 있는 곳이다. 도로에 올라서서 자유의 다리를 겨냥해 사진을 몇 장 찍고 돌아보니 어느새 필여사의 모습이 사라졌다. 평소 같으면 지리에 어두워 건물을 찾지 못할 텐데 자석에 끌리 듯 시장으로 흡수돼버린 것이다. 장마당을 만나면 작동하는 동물적인 후각이 있는 모양이다.

기차역이나 관청 같은 외관의 시장건물은 마치시성당 복원 작업에 슐레크 프리제스와 함께 참여했던 헝가리 건축가 페츠 사무(Pecz Samu)의 설계로 1890년대에 건설됐으며 지붕재료도 성당과 동일한 졸나이타일이 사용되고 있다. 내부면적이 1만 평방미터, 높이 20m의 천정까지 1, 2층이 터져있는 거대한 하나의 공간이며 지하와 각 층이 계단과 에스컬레이터로 연결돼있다. 신선한 오색 과일과 야채로 생기가 넘치는 내부로 들어서서 잃어버릴까봐 입구를 계속 주시하고 있던 필여사를 손쉽게 만나고 시장 구경에 나선다. 벌써 부근을 정찰했는지 필여사가 길을 앞선다. 지하는 도나우를 통해 운반된 생선을 취급하는 수산시장과 큰 슈퍼마켓이다. 육류와 싱싱한 계절과일, 다과 류, 와인 등 생활필수품이 진열된 1층 매장을 천천히 돌아본다. 각종 파프리카, 토카이 와인, 세게드지방의 살라미 소시지 등 헝가리를 대표하는 특산품이 푸짐하게 놓여있다. 우선 그 동안 벼르던 토카이 와인을 한 병 구입하고 필여사는 흰색 가지같이 생긴 파프리카를 골라 산다. 높직이 노출된 지붕과 기둥의 철골 구조물을 바라보며 에스컬레이터로 2층에 올라간다. 벽체를 따라 네모로 돌아간 매장의 넓게 터진 공간 중앙에 육교 같은 상가 복도가 있어 양쪽을 연결하고 있다.

각종 간이음식점이 늘어선 식사 코너가 가까이 있어 점심을 먹기로 한다. 냄새와 연기로 가득 찬 좁은 통로는 식탁에 앉은 사람, 서서 먹는 사람, 지나는 사람, 각색인종이 뒤엉켜 북새통을 이루고 말 그대로의 먹자판이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간신히 구석 한 자리를 차지하고 흐뭇한 기분으로 구야시(Guly?s)를 주문한다. 구야시는 소고기와 야채에 파프리카를 넣어 매운 맛을 낸 육개장 비슷한 칼칼한 국물로 딸려 나온 쌀밥과 함께 오래간만에 개운한 맛을 즐긴다. 식당가에서 우리나라 여학생 두 사람을 만났다. 하도 반가워 필여사 이야기가 길어지기에 점심을 먹었다는데도 생선튀김을 한 접시 시킨다.

2층에는 헝가리 명산인 헤렌드(Herend)와 졸나이의 도자기제품, 마티오(Maty?), 칼로차(Kalocsa)의 전통자수를 비롯하여 목각, 의류, 식품 등 기념품을 판매하는 매장이 즐비하다. 여행이랍시고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고 마지막 도시에 이르렀으니 뭐가됐든 가족들 선물을 챙길 시점이다. 값비싼 명품 브랜드는 눈요기로만 끝내고 세체니 다리가 들어간 T셔츠를 치수별로 골라 산다. 물건 값을 치르는 사이 필여사가 꿀벌 건강제로 알려진 프로폴리스(Propolis)도 몇 개 구입한다. 1층 끝에 있는 70 포린트의 유료 화장실을 들른 후 16시30분 시장을 나선다.

푀밤 광장에서 49번 트램을 타고 데아크 광장까지 간 후 유럽대륙 최초의 지하철 노선인 황색 1호선으로 갈아타고 영웅광장으로 향한다.

축조된 역사가 오래된 탓인지 깊이가 얕게 느껴지는 승차장으로 내려가 부다페스트의 샹젤리제라는 안드라시(Andr?ssy)거리 밑을 달려 북동쪽으로 일곱 정거장을 간다. 헝가리 정착 1000주년을 기념하는 1896년, 바로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된 그 해에 건조를 개시하여 1929년에 완공한 영웅광장(H?s?k tere)은 시립공원(V?rosliget) 정문 앞에 있는 부다페스트 최대의 광장으로 1896년 만국박람회가 개최됐던 장소다. 흔히 런던의 트라팔가르(Trafalgar)와 비교되지만 지상으로 올라와 눈에 들어온 광장은 남쪽을 제외한 3면이 공원에 둘러싸여 사람이 작게 보일 만큼 허전하게 넓은 공간이다. 사진을 찍으며 자동차 도로를 건너 안으로 접근한다.

중앙에는 천년기념탑인 코린트식 기둥이 한 가닥 솟아있으며 그 정상 지구본에는 헝가리 왕관과 교황의 2중 십자가를 치켜든 가브리엘 대천사가 36m 높이에 날개를 펴고 광장의 구심점으로 서있다.

서기 1000년, 이슈트반은 로마교황 실베스테르(Sylvester) 2세로부터 왕관을 받은 기독교 성직자로 왕국을 세웠는데 이때 가브리엘이 교황 꿈에 나타나 조언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탑 밑에 서 있는 7인의 기마상은 40만의 마자르 민족을 우랄 남쪽에서 카르파티아 분지로 인도한 일곱 족장의 모습이고 그중 중앙에 위치한 인물이 이슈트반의 선조인 부족장 아르파드다. 탑을 가운데 두고 그 좌우로 부채꼴의 커다란 열주회랑이 대칭으로 서있으며 헝가리 역사를 만든 군주 8명, 그리고 6명의 장군과 정치가 등, 14명의 영웅 동상이 한쪽에 7명씩 연대순으로 놓여있다.

 

 

좌단이 초대국왕 이슈트반이고 그 옆이 9대 국왕 성 라슬로이며 몽골 침공 후 국내를 재건한 벨라 4세가 다섯 번째에 서있다. 오른쪽 회랑의 두 번째가 중세 헝가리 최성기를 구축한 마차시 1세고 여섯 번째가 독립운동의 지도자 라코치 페렌츠 2세다. 14개의 동상 밑에는 각자의 행적을 묘사한 동판 부조가 붙어있다. 이 광장의 건설이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 제국 시대에 진행된 관계로 다섯 개의 동상이 오스트리아 사람이었으나 2차 대전으로 기념비가 파괴된 후 재건과정에서 헝가리 인사로 대체됐다고 한다. 지금 혁명지도자 코슈트 러요시가 서있는 맨 오른쪽은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있던 자리다. 철거된 동상 중 헝가리 국민의 경모를 받았던 마리아 테레지아의 동상은 지금도 인접한 국립미술관 옆 카페에 놓여있다고 한다. 좌우 열주회랑 상부 양단에도 하나씩, 상응하는 4개의 조형물이 있는데 왼쪽 끝의 노동과 부를 뜻하는 낫 든 남자와 씨 뿌리는 여자 조각에 어울리게 오른쪽 맨 끝에는 지식과 영광의 상징인 금붙이 든 남성과 야자 잎을 든 여성의 조각상이 있다. 또 안쪽 두 단부에는 뱀 채찍으로 남자가 모는 전쟁의 전차와 야자 잎을 들고 여인이 부리는 평화의 이륜마차를 대응시켜 놓았다. 영웅광장의 기념비는 건축가 알베르트 쉬케단츠(Albert Schikedanz)가 제작했고 동상은 조각가 죄르지 잘라(Gy?rgy Zala)의 작품이라고 한다.

천년 기념탑과 아르파드 기마상의 정면에는 무명용사의 추념비인 커다란 네모 대석이 철책에 둘러싸여 놓여있으며 "국민의 자유와 국가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들을 기념하여" 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헝가리 동란에서 소련 침공에 저항하다가 1958년 처형된 너지 임레의 재매장식이 거행된 1989년 6월, 25만의 군중이 모여들었다는 이 광장은 국가의 주요행사가 열리는 성스러운 곳이며 헝가리를 방문하는 각국 귀빈이 참배하고 꽃을 바치는 장소이다.

광장의 남측에는 1895년에 문을 연 예술궁전(M?csarnok)이 서있어 주로 국내작가의 현대회화나 기획전이 개최되고 북측에는 1906년에 건립된 미술 박물관(Sz?pm?v?szeti M?zeum)이 있어 유럽 다른 나라를 포함한 외국예술가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그리스의 코린트식(Corinthian order) 열주로 된 신고전주의 양식을 하고 있는 두 건물은 모두 영웅광장 기념비를 계획한 알베르트 쉬케단츠가 설계한 것이다.

영웅광장의 좌우와 후면을 포위하고 있는 시립공원에는 루마니아의 바이다후냐드(Vajdahunyad)를 모방한 성이 있으며 동 식물원과 서커스, 유원지 등 볼거리가 적지 않다는데 시간이 늦어 오늘 일정은 이만 끝내기로 한다.

17시40분 출발, 오던 길을 되돌아 데아크 광장을 거쳐 메트로 3호선으로 20분 만에 네플리게트 지하철역에 도착한다. 여전히 조용한 골목을 걸어 숙소에 도착한 시간이 18시20분, 샤워로 몸을 식힌 후 토카이 와인과 파프리카를 곁들인 저녁식사로 피로를 푼다. 농축된 감미에 약간 새큼한 맛이 느껴지는 황금빛 와인, 변변치 못한 미각으로 품평이라면 주제 넘는 일이고 일언이폐지, 맛있는 술이라는데 이견이 없다.

 

전체 여행기, http://www.skksun.pe.kr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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