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강기 문이 열린다. 사십대 중반의 남자가 양복 차림새로 들어섰다. 동시에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실로폰을 두드리듯 통통 울린다.
“아빠 힘내세요, 영이가 있잖아요. 아빠 힘내세요, 영이가 있어요.”
잠옷 차림새에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머리카락, 잠이 덜 깬 모습도 너댓 살의 조막손 이이라면 예쁘다. 서툰 걸음마를 닮은 발음으로 아이는 두 손을 가슴에 엇 포개어 가며 무릎을 가지런히 앞뒤로 흔들며 노래를 한다. 다행히 예쁜 짓이 끝나도록 남자는 열림 버튼을 무례히도 오래 누르고 있다. 힐끗 본 남자의 얼굴은 전장의 승리자가 그러했을까 싶은 당당한 미소가 그득하다. 아래층 집을, 그날 난 ‘고 예쁜 집’이란 별칭을 붙여주었다.
‘고 예쁜 집’의 오늘의 메뉴는 갈치 조림이다. 호박과 감자를 적당히 깔고 갈치 몇 토막을 얹는다. 간장에 고춧가루와 마늘을 풀어 끼얹어 칼칼하게 끓인다. 자작자작 끓어오르는 국물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고 간을 본다. ‘고 예쁜 집’에서 올라오는 음식 냄새는 언제나 식욕을 자극한다. 그 냄새에 이끌려 덩달아 나도 음식을 하는 착각에 빠진다. 어제는 고등어구이, 그제는 땡초 된장찌개 날마다 바뀌는 아랫집의 메뉴에 발코니 근처를 킁킁대는 우리 집 남자는 아래층 남자가 부럽다는 낯빛으로 내게도 같은 음식을 주문한다. 음식솜씨가 젬병인 이 사람은 난감하기만 하다.
반상회 날이다. 언제나 각종 소문을 몰고 다니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어디서 그 많은 정보들을 긁어모았는지 때로는 믿거나 말거나 소식통일 때도 있지만 오늘의 정보는 꽤 믿을만하다. 아래층의 여자는 삼십 대 중반인데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하나를 데리고 재혼해서 왔다고 한다. 그리고 딸 한 명을 낳고 또 배가 불러 있다고 한다. 이번에는 아들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한다.
여자들의 쑥덕거림에는 데려온 중학생쯤의 아들은 집에서 언제나 외톨이라고 했다. 자신의 처지를 이미 알아버려서인지 가족들의 외출에 함께하지 않는다 한다. 또한, 아침마다 딸에게 아빠의 배웅을 시키는 것은 좋은데 노래가 끝날 때까지 엘리베이터 문을 잡고 있어 바쁜 아침 시간에 난감하다는 얘기들도, 했다. 같은 출입 현관을 이용하는 오십여 가구의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몇 년이나 살았건만 묵례 정도만 하며 지나쳐 누가 누군지도 확실한 구별이 안 가는 나의 이웃에 대한 무관심에 뜨끔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아는 게 힘이라지만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그날 이후 ‘고 예쁜 집’에는 우울한 기운이 감돌았다. 물론 소문을 듣고 난 후 혼자만의 상상이었다. 하지만 점점 상상을 더 해 운무가 자욱한 습한 여름날 새벽처럼 회색빛으로 다가왔다. 잠이 덜 깬 어린 딸을 곧추세워 엘리베이터 앞에서 재롱을 떨게 해야만 하는 아래층 여자.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에게는 절제된 사랑밖에 줄 수 없는 가여운 여자로 인식 되어졌다. 두 번의 실패는 없다는 의지로 다가온 섬김이란 단어는 낯설고 차갑게 느껴졌다. 가끔씩 마주치는 남자의 모습은 그러나 변함이 없었다.
몇 달의 시간이 흘러갔다. 승강기 안에서 아래층 여자를 만났다. 코발트 빛에 금사로 세로줄이 들어간 원피스 차림의 그녀는 벌써 사내아이를 출산한 지 두어 달이 지났다고 했다. 승강기 안으로 들어선 여자의 화사함과 환한 웃음을 보니 괜한 오해가 아니었나 싶었다. 편안한 표정의 그녀를 보자 오랜만에 친정 여동생의 모습을 보는 듯 반가웠다. 눈인사를 하며 총총히 사라지는 그녀는 가을하늘처럼 청아했다.
선입견 혹은 편견은 사람이나 사물을 편향된 시선으로 보게 한다. 그 틀은 보이지는 않지만 견고하여 깨기 어렵고 쉽게 벗어나기도 힘들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조심하라는 투로 저 사람은 저렇고 이 사람은 이렇다는 말을 넌지시 해 줄 때면 반갑지만은 않다. 의도하지 않게 선입견을 갖고 사람을 대하는 일이 많아지는 까닭이다. 가끔은 그에게만 맞지 않은 사람 혹은 나쁜 사람이었던 것은 아닐까 하며 직접 겪어보면 알겠지 하는 마음도 생긴다. 하지만 그 마음도 흔들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사회의 변화와 더불어 가족관계도 다양하게 형성되고 있다. 재혼 가정은 물론이고 한 부모 가정도 늘고 있다. 국내입양의 권장과 이해의 확대로 입양가정도 많아지고 있다. 요즘은 국제결혼으로 인한 다문화가정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인식은 아직 예전 수준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남과 다름을 인정해 주는 사회의 포용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한다.
나 역시 아랫집의 딸이 아빠를 유난히 따라서 재롱을 피우는 걸 오해한 것 같다. 사춘기 녀석이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은 자연스런 성장의 과정인데 재혼 가정이란 선입견만으로 달리 본 게 아닐까. 아이들의 웃음과 발 구름이 끊이지 않고 된장국이 보글거리는 왁자지껄한 가정을 남의 말 한마디에 남다른 눈길을 보내버렸다. 살면서 이러한 잘못을 얼마나 더 저지를까 생각하니 낯이 화끈거린다.
‘고 예쁜 집’의 어린 딸이 내일 아침에도 재롱을 피운다면 승강기의 문이 늦게 닫히더라도 따뜻했던 처음의 시선으로 감수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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