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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구의 몸이 스테이지 바닥에서 전방회전낙법으로 구르며 충격을 완화시킨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갔다. 하지만 시선을 들어 앞을 본 그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떠올랐다.
통로의 중앙에 장신의 사내 하나가 그를 보며 소리 없이 웃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그의 몸이 좌측으로 꺾이더니 테이블 사이를 헤집었다.
한이 옆에 있던 빈의자를 밟고 뛰어 올랐다. 테이블 두 개를 단숨에 건너 뛴 그가 강철구의 머리위에서 떨어졌다. 달리며 뒤를 곁눈질하던 강철구의 몸이 멈추는가 싶더니 그 자리에서 공중에 떠 있는 한에게 오른발 뒤차기를 했다. 하는 짓과는 다르게 깨끗하고 정확한 발질이었다.
바닥에 내려서던 한이 왼손을 뻗어 강철구가 차올린 다리의 발목을 잡았다. 그의 몸이 쭈욱 늘어나는가 싶더니 오른손 수도가 강철구의 뒷목에 떨어졌다. 반쯤 몸을 돌린 상태로 자신의 목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쳐오는 그의 손을 보고 아연실색한 강철구가 몸을 뒤집었다.
쇠로 만든 집게에 잡히기라도 한 듯 상대에게 잡힌 발목은 빠질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의 몸이 180도로 허공에서 뒤집히며 자유로운 발이 한의 복부를 차올렸다. 한의 수도가 강철구의 목을 치면 그도 상대의 발길질에 복부를 걷어차여야만 했다. 양패구상의 수였다.
한의 얼굴과 강철구의 얼굴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강철구는 상대가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소름이 쭈욱 끼쳤다. 한이 잡고 있던 강철구의 다리를 왼편으로 내던졌다. 항거할 수 없는 힘이 강철구의 몸을 왼편으로 밀어내며 그의 몸이 90도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의 오른발이 허공을 찼다. 한의 왼쪽팔꿈치아래에 강철구의 가슴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퍼억"
"으흑"
"쾅"
벼락치는 소리가 나면서 명치에 한의 팔꿈치가 꽂힌 강철구의 몸이 홀바닥에 사정없이 처박혔다. 그의 머리맡에 한이 가볍게 착지하고 있었다. 강철구의 입에서 거품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놀라 쳐다보던 사람들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끝이 났다.
강철구가 뒤차기를 하는 다음 순간 그의 몸이 홀에 처박히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빠르게 진행된 일장의 박투였다.
음악소리가 그쳐 있었다. 김철웅이 있는 스테이지를 쳐다본 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얼굴이 무표정해졌다. 그의 주변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엄습하는 한기에 몸을 떨어야했다. 민간인을 대상으로는 좀처럼 드러내지 않던 기운, 살기였다.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김철웅은 쇠뭉치 같은 주먹에 얼굴을 얻어맞고 스테이지바닥에 쓰러지고 있었다. 충격이 꽤 컸는지 상체를 일으키는 그의 눈이 풀려 있었다. 한은 김철웅을 한방에 뉘인 상대를 쳐다보았다. 외국인이었다. 그는 쓰러진 김철웅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듯 제자리에 서 있었다. 2미터는 되어 보이는 흑인이었다. 팔뚝 하나가 한의 허벅지굵기만 했다. 얼마나 운동을 했는지 온 몸의 근육이 부풀어 올라 터질 것만 같았다. 주먹하나가 김철웅의 얼굴 삼분의 이를 가리고 있었다.
김철웅의 체구도 작은 편이 아닌데도 저 흑인에 비하면 어른과 아이 같았다. 한의 눈길이 스테이지를 훑었다. 급변한 상황이 순간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눈이 강철구와 함께 춤을 추던 여자를 보았다. 그녀는 정신없이 주변의 외국인들에게 영어로 떠들고 있었다. 그녀가 하는 말을 들은 그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여기서 부터는 영어로 말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들은 마피아예요, 저들이 제 애인을 납치하려고 해요!"
그녀는 절박한 어조로 주변에 있는 외국인들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홀에 앉아 있거나 스테이지에 있던 외국인들이 서서히 김철웅을 에워싸고 있었다.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린 김철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한다. 그래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누군가에게 맞아 스테리지를 굴렀다는 현실을 인식하자 수치와 분노로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옆에 외국인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설마 그가 자신을 공격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경계하고 있었다면 이렇게 쉽게 상대의 주먹을 얼굴에 허용할 그가 아니었다.
한이 정신을 잃은 강철구를 오른쪽 어깨에 걸터메고 스테이지로 올라갔다. 비명을 지르는 사람도 경찰에 신고하려는 사람도 없었다.
마치 한밤의 이벤트라도 구경하는 듯 사람들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분위기가 한의 평정심을 흔들었다. 이곳은 한국땅이고 자신은 한국인인 것이다. 그런데 같은 한국인들도 자신들 편이 아니라 외국인들 편이었다.
오해가 있다손 치더라도 기분이 좋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에게 한방을 맞고 쓰러졌던 동양인이 일어나 파이팅 자세를 잡는 것을 본 프랭크 스티븐스 중사는 피식 웃었다. 마피아 치고는 옷차림이 후줄근해서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틀이 잡힌 자세였다. 사실 저기서 시끄럽게 떠드는 여자말처럼 상대가 마피아든 아니든 상관은 없었다.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고 앞에 있는 한국인은 조금 운이 없는 것이다. 한이
뭐라하기도 전에 김철웅의 몸이 프랭크의 전면으로 달려들었다. 프랭크의 거구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풋워크로 좌우로 이동하며 해머를 연상케하는 그의 주먹이 번갈아 김철웅의 얼굴에 작렬했다. 양팔을 들어 상대의 주먹을 막은 김철웅은 양팔의 감각이 마비되는 느낌을 받았다.
가드를 했음에도 달려들던 그의 몸이 그 자리에 멈췄다. 정통으로 맞았으면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김철웅의 뛰어들던 몸이 멈춘 순간 프랭크의 오른손 주먹이 훅이 되어 김철웅의 턱으로 파고 들었다. 김철웅의 눈이 강렬하게 빛났다. 프랭크의 훅을 귀밑으로 흘리며 그의 오른손이 상대의 겨드랑이 밑으로 파고들었다. 여유있던 프랭크의 안색이 변했다. 그의 몸이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잡히면 피할 수 없다는 유도의 기술, 엎어치기였다.
"퍼억"
"쿠웅"
클럽이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신장 2미터에 15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거구가
스테이지에 누워 있었다. 김철웅의 손에 잡혀 거꾸로 허공을 한바퀴 회전한 프랭크의 몸이 머리부터 스테이지의 홀에 떨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김철웅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프랭크 스티븐스는 평범한 군인이 아니었다. 허공을 돌며 자신의 몸이 거꾸로 된 상태에서 추락할 때 그의 해머같은 주먹이 김철웅의 턱을 강타했던 것이다. 프랭크의 옆에 김철웅의 몸도 사이좋게 누워 있었다.
한의 눈에서 불꽃같은 살기가 일었다. 억지로 막으려면 못할 것도 없었지만 그는 고참의 기분을 이해했고 존중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홀의 한곳을 응시했다. 그가 바라보는 곳에서 그와 비슷한 체구를 가진 금발의 백인이 천천히 일어서고 있었다.
프랭크 스티븐스가 쓰러지는 순간 주변의 시선이 집중되었던 사람이고 이곳에 모인 사람들중 가장 강한 기운을 풍기는 자였다.
특수전부대 소속의 리 스톡턴 대위는 기분이 상했다. 오늘 이곳에는 자신의 부하 40여명이 모여 있었다. 수주일에 걸친 힘든 훈련을 마치고 부하들과 함께 회식을 하는 자리인 것이다.
그는 스테이지로 걸어 나갔다. 입구쪽에 있던 백인 한명이 지배인과 말을 하는 모습이 보였
다. 지배인의 모습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곧 클럽의 입구가 닫히고 실내의 모든 불이 켜졌다.
"와아아아!"
"휘익, 휘익"
"쿵쿵쿵쿵"
리가 스테이지에 서자 환호성과 박수, 휘파람소리가 클럽안을 뒤흔들었다. 완연한 축제 분위기였다. 백인 특유의 흰피부에 금발을 가진 그는 강인함과 섬세함을 두루 갖춘 30대 초반의 미남이었다. 거기에 특수전부대 동양무술부문 교관이기도 했다.
클럽 안에 앉아있는 사람은 없었다. 외국인이건 한국인이건 모두 일어나 스테이지 주변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기대로 가득찬 눈들이 스테이지로 쏟아지고 있었다. 거기에 한과 김철웅에 대한 관심 같은 것은 끼어들 여지가 없어 보였다.
"자네들은 누군가?"
군인 특유의 끊어지는 말투였다.
"대답이 필요한가?"
한의 음성은 차가왔다. 그는 드물게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상대는 대답을 필요로 하지 않고 있었다. 징벌을 내리려는 자의 형식이다. 그가 이렇게 무시당해 보기도 처음인 것이다.
같은 백인이었다면 일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우리 기분을 망친 것에 대해 사과를 한다면 그냥 보내줄 수도 있다. 물론 내 부하를 저렇게 만든 것에 대한 대가는 치러야 하겠지만."
동료들이 스테이지 밖으로 끌어내고 있는 프랭크를 가리키며 리가 말하자 한이 말없이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켜보던 한국사람들의 얼굴에 놀람의 기색이 떠오르고 리의 부하들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한의 오른손 중지가 꼿꼿이 서있었던 것이다. 뻑큐다.
리가 먼저 움직였다. 그의 심장은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지만 몸의 움직임은
냉정했다. 흔들림이 전혀 없다. 고수였다. 세 걸음에 2미터 정도 떨어져 있던 그들 사이의 간격이 사라졌다. 단숨에 거리를 좁힌 리의 좌우 스트레이트가 한의 얼굴을 강타하고 있었다.
그렇게 보였다. 한은 상체를 갈대가 휘청이듯 흔들었다. 리의 주먹이 양쪽 귓가를 스치며 지나갔다.
코앞에 얼굴을 들이민 리의 턱을 향해 한의 오른쪽 팔꿈치가 무섭게 솟아 올랐다.
리의 상체가 쓰러지듯 뒤로 휘어졌다. 상체가 뒤로 휘어지며 그의 무릎이 한의 사타구니를 쳤다. 한의 왼손이 리의 무릎을 막으며 굽었던 팔꿈치가 펴졌다. 오른손 수도가 리의 이마로 떨어졌다. 리의 안색이 변했다. 변초의 신속함이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리의 몸이 그 상태에서 빙글 90도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다리와 허리의 힘이 무서웠다. 한의 공격이 무위로 끝나면서 그의 우측반면이 리의 공격권안에 들었다. 리의 몸이 반대로 뒤집어졌다. 그의 두 다리가 번갈아 한의 허벅지와 얼굴을 찍었다. 한의 몸이 바람처럼 일보 전진했다. 허공을 찬 리의 오른발이 휘어지며 한의 뒷목을 쳤다.
한의 몸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상대는 고수였지만 김석준보다 낫다고는 말할 수 없는 자였다. 승부를 끝낼 때가 되었다. 앉은 채로 몸을 돌리 그의 눈에 다리를 회수하며 빠르게 이보 뒤로 물러나는 리의 모습이 들어왔다. 상대의 주저앉는 동작이 너무 빨라서 리는 상대의 모습을 놓쳤다. 위험했다. 하지만 그의 판단은 너무 늦었다. 한의 몸이 바닥에서 솟아오르며 물러나 자세를 잡는 리의 가슴으로 뛰어든 것이다. 리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쿵"
"흐윽"
"우지끈!"
스테이지 밖으로 튕겨나와 테이블과 의자를 부수며 쓰러진 것은 리였다. 한의 몸통공격이 리의 몸을 4-5미터 밖으로 날려버린 것이다.
"................."
클럽안이 정적에 잠겼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몇 명은 리에게 다가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한에게 다가들었다. 그들의 눈길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한이 김철웅의 앞을 막아섰다. 그의 눈에 비웃음이 떠오르고 있었다. 정말 화난 것이다. 그때였다.
"멈춰!"
리였다. 가슴을 부여잡고 부하의 부축을 받고 일어서는 그가 손짓으로 부하들의 행동을 제지했다. 입가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본래 흰 얼굴이 시체처럼 창백했다.
"보내줘라!"
"소대장님, 하지만 이자는...."
누군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말하자 리의 시선이 말을 한 자를 향했다. 프랭크 만큼의 덩치를 가진 백인이 리의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눈길을 돌렸다.
"강자다. 내가 진 싸움이고, 더 이상 추해질 수는 없다."
리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천천히 한의 주위에서 물러났다. 한이 김철웅의 몸을 몇군데 건드리자 김철웅이 정신을 차렸다. 머리를 흔들며 일어선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물러나고 있는 사람들을 본 그는 자신이 정신을 잃고 있는 사이에 무슨 일인가가 벌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었지만 한을 노려보고 있는 저 금발의 백인입에서 조금씩 흐르고 있는 피를 보면 자신의 추측이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한의 부축으로 일어선 김철웅의 몸이 곧 바로 세워졌다. 턱을 맞은 충격이 커서 기절하긴 했지만 그가 그리 오래 쓰러져 있던 것은 아니었다. 한과 리의 대결은 30초도 안돼서 끝이 났던 것이다. 김철웅이 강철구의 몸을 어깨에 걸쳤다. 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여자의 말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은 알겠다. 당신은 누군가?"
"우리는 경찰이다. 형사지!"
리의 눈이 다른 의미의 놀람으로 크게 떠졌다. 실수였다. 기분에 취해 연유를 파악하지 않았다. 수년 동안 이곳에서 파견근무를 했지만 자신들에게 이런 식으로 나오는 한국인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자신들이 한미행정협정의 적용을 받는 군인이라고는 하나 한국경찰의 범인체포과정을 방해했으니 엄밀히 따진다면 공무집행방해였고, 일이 확대된다면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될 소지도 있었다.
지금 상황이라면 리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바보라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은 바보가 아니다.
"이 일은 여기서 끝내자. 그대들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도 사실이니까."
한의 말을 들은 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시원스런 자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중앙의 통로에 있던 자들이 모두 길을 비켰다. 한이 김철웅을 돌아보았다. 이제 귀가시간이다. 강철구는 아직도 거품을 문 채 김철웅의 어깨에 짐짝처럼 얹혀 있었다. 클럽을 나서는 그들을 보는 리의 시선에 알 수 없는 빛이 스쳐 지나갔다. 한과 리의 인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금은 두 사람 모두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