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해설
‘세월의 무게’에서 탐색하는 서정적 자아
--취남 이재석 시집 『나의 정원 국화산방 취남정』
김 송 배
(시인. 한국현대시론연구회장)
1. 국화산방과 동행, 행복의 원류
현대시 창작에서 가장 중심적인 지향점은 그 시인의 삶에서 추출된 다양한 체험을 재생하면서 자신의 지적인 사유(思惟)의 투영으로 투명한 주제의 창출을 발현하는 것이리라. 이러한 과정에는 재생된 상상력에 현재의 실생활(real life)에서 획득한 감응들이 복합적으로 이미지화해서 상호 정감적인 언어로 현현(顯現)하는 시법(詩法)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창작하는 작품에서는 그 시인이 적시하는 메시지가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폭넓게 교감함으로써 추구하고자하는 주제가 간명(簡明)하게 정립되어 독자들의 공감 영역은 확대될 뿐만 아니라 그 시인의 창작의도가 더욱 명징(明澄)하게 나타날 것이다.
여기 취남 이재석 시인이 상재하는 시집 『나의 정원 국화산방 취남정』의 원고를 살피면서 먼저 그가 ‘시집을 내며’에서 밝혔듯이 ‘국화산방(菊花山房) 취남정(翠南亭)에서의 하루하루 무위자연(無爲自然) 벗하며 무지(無知)로 따뜻한 햇볕, 맑은 공기, 좋은 물 마셔가며, 땀 흘리며 생각나는 대로 내 마음의 시(詩)를 하나하나 구슬을 꿰매듯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세상에 빛을 보게 됨은 내 인생의 크나큰 행복이다.’이라는 그의 진솔한 정서의 내면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게 한다.
한편 그가 시창작에 심취(深趣)하면서 시에 대한 정의를 작품 「시(詩)란」에서 ‘시(詩)란 내 머릿속 저 깊은 곳에서 / 끄집어 내는 상상의 나래 // 시(詩)란 내 마음 저 깊은 곳에서 /끄집어내는 묘한 언어의 조합 // 시(詩)란 공상의 세계에서 / 끄집어 내는 표현의 사유(思惟) // 시(詩)란 우주 속에서 / 찾아내는 보석 // 시(詩)란 자연의 소리를 / 문자로 표현하는 것 // 시(詩)란 대자연의 그림을 / 생각과 마음으로 / 표출하는 대서사시다.’라는 시의 본질과 위의(威儀)를 잘 설명하주고 있어서 그가 지향하는 시정신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해뜨면 일어나 기지개 켜고
햇살 받으며 정원에 나가
밤이슬 영롱한 보석 만지며
꽃들과 안녕의 인사를 하네
방긋 웃으며 토해 내는 향기
내 마음 깊숙이 행복을 심어 주네
행복의 씨앗이 여름 지나 가을엔
아름답고 향기로운 열매를 맺어 주는 곳
국화산방(菊花山房) 취남정(翠南亭)이라네.
--「나의 삶」 전문
이재석 시인은 이 시집 표제(表題)와 같이 ‘국화산방(菊花山房) 취남정(翠南亭)’이 그의 안식처이며 삶의 근원이 형성되고 행복을 추구하면서 인생을 성취하는 터전이다. 그는 이곳에서 그는 삶의 뿌리를 내리면서 ‘행복의 씨앗’을 심고 이 씨앗의 향기와 열매로 진정한 ‘나의 삶’에 대한 의미를 탐색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 국화산방에 대한 집념은 불변(不變)이다. 그의 어조(語調)는 ‘국화산방(菊花山房)은 / 이렇게 하루를 보내며 / 행복의 열매를 맺는다.(「문수산 정기」 중에서)’라거나 ‘나는 오늘 하루 값진 삶을 위하여 / 생각하고 움직이고 자연과 더불어 /국화산방(菊花山房)에서 뜨는 해를 맞이하고 / 지는 해를 보내면서 하루를 보낸다.(「하루」 중에서)’와 같은 그의 시적 원류는 오로지 국화산방과 취남정으로 귀결되는 특성을 읽을 수 있다.
국화산방(菊花山房)의 하루하루가
내게는 희망이요, 행복이다
내가 꿈꾸던 자연의 꽃동산
힘든 줄 모르고 가꾸기를 33년
황혼에 물들어 가는 정원에는
꽃을 좋아하시던 할아버지의 혼이 담긴
불두화와 백두산 흰 철쭉 산 동백이
내 어린 꿈을 지켜준다
꿈 따라 가꾸어 간 무지개 꿈
세월의 무게는
팔십둘의 고개를 넘어가고 있다.
--「국화산방(菊花山房)의 하루」 전문
이재석 시인은 지금 ‘팔십둘의 고개를 넘어가고 있’는 원로 시인이다. 그는 ‘내가 꿈꾸던 자연의 꽃동산‘을 33년이란 장구한 ’세월의 무게‘를 견디면서 가꾼 곳이 이 국화산방이다. 그래서 여기가 그에게서는 ’희망이요, 향복이‘라는 인생의 여운이 깊이 흐르고 있어서 그가 지향하려는 서정적인 자아(自我)의 시적 탐구가 바로 그의 진정한 인생관이며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작품 「노년의 행복」 중에서 ‘전원생활 꿈꾸던 중년의 삶 / 이곳에 뿌리내리기 삼십여 성상(星霜) / 정들이고 땀 흘려 가꾼 정원//은퇴 후 즐거움을 함께해 준 / 국화산방(菊花山房) 취남정(翠南亭)의 일상 / 80고개 넘은 노년의 행복.’과 「노년의 삶」 전문에서도 ‘가면 오지 않는 시간 / 내 젊음은 한 번 가니 // 다시 오지 않네 / 후회해 봐야 소용없는 / 지난 시간들 // 남은 여생 알차게 / 사랑을 베풀며 // 기쁨 주고 희망 주는 / 노년의 삶을 갈구한다.’는 어조로 노년의 행복의 원류를 적나라하게 적시하고 있어서 부럽기도 하다.
이재석 시인의 시적 소재는 이 국화산방과 취남정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는 매 시편마다 ‘아아, 나의 작은 천국 지상낙원(地上樂園) / 국화산방(菊花山房) 취남정(翠南亭). (「작은 천국」 중에서)’이라는 그의 생활터전과 함께 그의 사유나 의식의 흐름이 집중되고 있어서 그는 이곳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집착하면서 창작을 하고 있다.
이 국화산방은 강화도 문수산 아래 국화저수지를 끼고 각종 수목과 화훼로 장식된 아늑한 전원이다. 그가 ‘산 그림자 드리운 수채화에 / 행복을 수놓아 하늘에 걸어놓고 / 지상낙원 국화산방(菊花山房) / 하루 일을 시작한다(「문수산 2」 중에서)’는 어조와 같이 취남정의 향훈에서 서정적 자아를 탐구하고 있어서 그를 ‘국화산방의 시인’이라 불러도 좋을 것 같다.
그가 이처럼 심혼(心魂)의 원류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흐르고 있어서 간과(看過)하지 못한다.
-이곳에서 인연을 맺은 것들은 / 국화산방(菊花山房)에 새 손님으로 초대 되어 / 사랑받고 새 가족이 된다 // 그래서 국화산방(菊花山房)엔 / 세계 명물들로 가득하다. (「풍물시장」 중에서)
-온갖 꽃들이 앞다투어 / 토해 내는 꽃향기 가득한 / 국화산방(菊花山房)(「꽃향기」 중에서)
-기어이 오고야 마는 / 아침 햇살은 / 또다시 국화산방(菊花山房)을 찾아 / 복된 하루를 열어 간다(「밤 깊은 국화산방」 중에서)
-멀고 먼 지난날들 / 땀 흘리며 가꾸어 온 / 국화산방(菊花山房)의 추억들 / 한 편의 영화 속 / 행복에 젖어든다(「호수」 중에서)
-봄을 맞으려는 용트림 속에 / 오늘도 국화산방(菊花山房)의 하루해는 / 서쪽을 향해 넘어가고 있다(「봄을 맞으며」 중에서)
-국화 향기 따라 / 돌고 돌아 국화길 / 국화산방(菊花山房) 취남정(翠南亭) // 산천 정기(精氣) 뛰어난 / 호수가 양지마을 / 구름이 미소짓고 쉬어 가는 곳(「국화 향기」 중에서)
-아름다운 이 정원 / 국화산방(菊花山房) 취남정(翠南亭) / 몸은 고달퍼도 / 마음은 항상 평화롭고 / 행복하고 풍요로웠네.(「지상낙원」 중에서)
-국화산방(菊花山房) 너른 정원 / 국화꽃이 만발할 때 / 국화 향기 가슴에 안고 / 행복을 수놓아 / 액자에 담아 본다.(「행복을 수놓아」 중에서)
-청록이 싱그럽게 물들어 갈제 / 파란 하늘 흰 구름 나래를 펴고 / 라일락 향기에 물든 국화산방(菊花山房)(「청록」 중에서)
-섬마을에 피고 지는 / 해당화는 아니지만 / 국화산방(菊花山房)에 핀 / 해당화 향기는 바람에 춤추며 / 코끝을 스쳐 간다(「해당화」 중에서)
-아아, 아름다운 / 국화산방(菊花山房) 아침 햇살에 농익어 가는 / 인생 후반의 정경(情景)이 아름답다.(「은빛 물결」 중에서)
-바람 한 점, 구름 한 점 쉬어 가는 국화 호수 언덕 위 국화산방(菊花山房) 취남정(翠南亭)의 뜨거운 한낮의 오후, 꽃들도 지쳐 고개 숙이고 목마른 잎들이 아우성친다.(「단상」 중에서)
-경계가 없는 국화산방(菊花山房) / 울타리도 없고 / 그 흔한 CCTV도 없네 // 자연과 내가 / 하나 되어(「경계」 중에서)
2. 인생 끝자락의 성찰적 인생론
이재석 시인은 국화산방(菊花山房) 취남정(翠南亭)을 그의 영혼의 안식처로 설정하고 인생 끝자락을 향유하면서 그는 삶과 시를 동행하면서 보람찬 인생을 구현하고 있다. ‘가는 세월 잡지 못하고 / 오는 세월 막지 못하니 / 세월은 또 그렇게 오고 간다 // 우리네 인생 또한 / 그렇게 흘러간다 // 아무리 용을 써도 / 오늘이 가고 내일이 온다 // 오늘 하루 값진 인생을 위하여. (「값진 인생」 전문)’라는 값진 인생의 영위를 위한 그 가치와 효용을 정리하고 있다.
일찍이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음미(吟味)되지 않은 인생은 살 보람이 없다.’는 명언으로 인생의 보람된 향유를 말하고 있다. 이는 ‘국화산방(菊花山房)에 피고 지는 / 꽃과 나무들 우리 부부 / 땀방울로 자라나고 / 땀 냄새 곰삭혀 향기 만들(「국화산방」 중에서)’면서 인생과 사랑과 시를 음미하는 ‘멋진 인생’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넘쳐나는 행복을 위해서 ‘흘러간 물 다시 올 수 없듯이 / 내 인생도 지나가면 / 다시 돌아올 수 없네 // 아아, 지금 이 순간순간을 / 값지게 살아가자 / 멋진 인생 만들어가자.’는 어조로 여생(餘生)의 언어로 성찰하고 기원의 의지를 명확하게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향기로웠던 내 젊은 날들
고요가 잠든 깊은 밤
주마등(走馬燈)처럼 스쳐 가는
인생 스크린
꽃잎처럼 떨어지는 추억의 편린(片鱗)들
지금 나는 어디쯤 가고 있을까
살아온 날들의 행복
살아갈 날들의 희망
밤은 자꾸 고요 속에 깊어만 가고
내 인생도 세월 속에 깊어만 간다.
--「인생(人生)」 전문
이재석 시인은 ‘인생’을 그의 사유와 지혜로 이와 같이 정리하고 있다. 그가 구사하는 ‘주마등’이나 ‘추억의 편린’ 그리고 ‘살아온 날들의 행복 / 살아갈 날들의 희망’ 등의 언어들은 그가 세월 속에서 깊어진 삶에 대한 연민이 그의 내면에서 조용히 분사(噴射)하고 있어서 우리들을 숙연의 경지로 흡인(吸引)시키고 있다.
어두움이 짙게 깔린 깊은 밤
소리 없이 눈을 뜨고 허공을 헤매이네
보이지 않는 외면의 세계
환하게 보이는 내면의 세계
나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나는 이 세상에 와서
무엇을 남기고 가는가
이제 인생의 끝자락에서
방황하는 항해사처럼
당황하지 말고 정신 바짝 차리고
거센 폭풍우 헤쳐가며
희망봉을 향해 저어 가야지
한 줄 멋진 시를 남기고 가야지.
--「인생 항로(航路)」 전문
그의 뇌리(腦裏)에는 인생의 정점이 어딘가, 그리고 무엇인가를 심도(深度)있게 사색하고 있다. 그의 ‘인생 항로’에서는 허공을 헤매는 방황과 ‘보이지 않는 외면의 세계 / 환하게 보이는 내면의 세계’에서 ‘인생의 끝자락’을 항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고뇌는 ‘나는 이 세상에 와서 / 무엇을 남기고 가는가’라는 절대적인 의문에 잠기면서 ‘거센 폭풍우 헤쳐가며 / 희망봉을 향해 저어 가야지’라는 어조로 단호한 결심을 토로하고 있다.
그는 결론으로 ‘한 줄 멋진 시를 남기고 가야지.’라는 성취의 기원을 적시하면서 이제 또 다른 성찰의 언어를 표출하고 있다. 이것은 ‘죽음을 생각해 본다 / 내 나이 82세면 살만큼 살았고 / 이 세상 기쁨, 행복 누리며 살았다 / 후회는 없다(「적신호」 중에서)’는 비장한 정감적 어조에서 공감을 유로(流露)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작품 「멋진 인생」 「황혼의 문턱」 「화려한 인생」 「내 인생의 거울」 「인생이란」 「늙고 보니」 「인생은 허무한 것」 등에서 생(生)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정념적(情念的) 시혼(詩魂)을 불러일으키면서 「내 영혼의 안식처」로 형상화하는 시법을 응용하고 있는 것이다.
3. ‘자연의 소리와 향기’에 매료된 시혼
이재석 시인은 국화산방에서의 생성된 시혼들이 이제 외적인 만유(萬有)의 자연으로 시야를 넓혀서 사물들을 응시(凝視)하거나 관조(觀照)하는 심리적인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런 현상들은 이미 몸에 배인 체질과 의식의 흐름에서 자연스러운 생활 리듬이겠지만 국화산방을 포함한 자연 풍광(風光)에서 심취하는 시심(詩心)의 발현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일찍이 철학자 파스칼은 그의 글 <팡세>에서 ‘자연은 모든 것을 말할 수 있고 신학(神學)까지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그로부터 배우는 사람이야말로 자연을 깊이 존중하는 사람이다’라고 인간과 자연의 상관성에 대해서 명언을 남겼다. 이는 자연과 인간이 상호 교감하면서 거기에서 창출하는 진실이 무엇인가를 제시해주고 있어서 공감하게 된다.
이재석 시인도 이러한 보편적인 자연에서 시각적, 혹은 청각적인 무언의 리듬에서 감명(感銘)하면서 서로 화해하는 해법을 그의 시적 혹은 인간적인 진실로 수용하는 온화한 성품을 이해하게 한다.
나는 오늘도 꽃나무를 심는다
왜 힘들여 심느냐고 나무란다
이제 그만 조용히 쉬면서 살라 한다
나는 그래도 또 심으련다
삶은 끝없는 도전이니까
매일매일 변화되는 자연이 좋아
오늘도 심고 또 내일도 심으련다
자연은 내 마음의 고향
내 어릴 적 꿈을 키워 주던 곳
나 이제 늙어 팔십이 넘었어도
내 동심, 내 자연의 꿈을 키워 가야지.
--「자연」 전문
이제 그만 조용히 쉬면서 살라 이렇게 꽃나무를 심으면서 그는 오늘도 새롭게 명심(銘心)하는 의식을 발산한다. ‘이제 그만 조용히 쉬면서 살라’는 자연의 순정적인 전언(傳言)을 듣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삶은 끝없는 도전이니까’ 매일 꽃나무를 심고 있다.
이것이 그의 습관적인 일과이며 생활 방식이다. ‘자연은 내 마음의 고향’이라는 메시지를 확고하게 수긍한다. 이것이 ‘나 이제 늙어 팔십이 넘었어도 / 내 동심, 내 자연의 꿈을 키워 가야지.’라는 결론적 어조가 바로 그가 자연에 매료된 시혼의 발원지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고요가 나비와 함께 춤춘다 / 덩달아 흰 구름 쉬어 가는데 / 뒷산의 뻐꾸기가 고요를 깬다 // 놀란 새들이 날갯짓하고 / 나뭇잎 살랑대며 / 꽃향기 코끝을 스쳐 간다 // 소쩍새 우는 밤 / 여름은 깊어 가고 / 서산마루엔 초승달이 / 숨가쁘게 넘어간다.(「고요」 전문)’는 자연 관조에서 그의 깊은 사색의 일념(一念)을 이해하게 한다.
호수 위에 반짝이는 은물결
은가루 뿌려 놓은 듯 반짝이며
추억과 희망이 넘실대는
너른 호수 은빛으로 수놓네
호수 위에 반짝이는 금물결
금가루 뿌려 놓은 듯 반짝이며
황혼의 추억으로 반추(反芻)하며
너른 호수 금빛으로 수놓네
은물결 금물결 반짝일 때
나는 엄마 품에 안긴 아가모양
복에 겨워 행복에 물들어
끝없는 사랑을 찾아 길 떠나네.
--「국화호수」 전문
그는 다시 국화산방 맞은 편에 질펀하게 누워있는 ‘국화호수’에서 ‘호수 위에 반짝이는 은물결’과 ‘금물결’을 바라보면서 ‘황혼의 추억으로 반추(反芻)하’는 명상에 잠기기도 한다. 이러하듯이 그는 전원과 호수와 자신이 동시에 몰아(沒我)가 되어 행복과 사랑을 구가(謳歌)하는 서정적인 시인으로 안착(安着)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그는 ‘그리운 친구 술잔에 빠트리면 / 그 친구 내 맘 알겠지 // 외로운 밤 / 하늘의 달 / 호수에 빠진 달 / 술잔에 빠진 달 / 내 마음 속에 빠진 달 // 머–언 그리운 친구 / 지금 나같이 / 달 보고 술 한 잔 하고 있을까. (「달」 중에서)’와 같이 ‘호수에 빠진 달’을 보면서 멀리 있는 친구를 그리워하면서 술잔을 나누고 싶은 심경을 서정적인 시심으로 노래하고 있다.
이 밖에도 그의 자연 서정의 발상은 별과 달 그리고 구름 등 국화산방에서 관망할 수 있는 모든 자연은 그의 시적인 범주를 벗어날 수 없음을 이해하게 된다.
4. ‘꽃향기’에 도취한 전원적 서정
이재석 시인이 산천초목의 자연에만 동화(同和)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국화산방 전원에 가득 피어난 화훼류(花卉類)에서 도출(導出)하는 아름다운 전원 서정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아호(雅號)를 붙인 취남정(翠南亭) 정자 주변에서 가득 풍겨내는 꽃향기의 후각적(嗅覺的)인 이미지들은 산방 전체를 그의 서정적인 시향 (詩香)으로 흡인시키고 있다.
이러한 시법은 우리 시학(詩學)에서 감상적 오류라고 해서 이러한 자연을 인격화하는 동화와 투사(投射)라는 기법을 적용하게 되는데 시인이 모든 자연을 자신 속으로 끌어와서 그것을 내적으로 인격화하는 것과 자연속에 자신의 존재를 상상적으로 투여하는 두 가지 형태의 시법으로 자연을 인간과 합일하는 서정성 짙은 작품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온갖 꽃들이 앞다투어
토해 내는 꽃향기 가득한
국화산방(菊花山房)
라일락, 장미, 붓꽃…
향기에 취해 걷고 걸으면
행복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녹음(綠陰)의 단풍나무
그늘에 앉아 반가운 친구의
카톡을 읽는다
감미로운 음악이
꽃향기와 함께
춤을 춘다.
--「꽃향기(香氣)」 전문
이재석 시인도 이 ‘꽃향기’를 통해서 그 꽃들과 동화해서 아름답게 향유하는 모습이 서정적 자아의 탐색으로 미감(美感)의 선율을 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 국화산방에서 피고 지는 라이락, 장미, 국화, 붓꽃, 모란꽃, 해당화, 상사화 등등의 ‘온갖 꽃들이’ 계절따라 산방에서 향기를 뿌리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음악이 흐르는 곳에 / 자연이 숨쉬고 // 새들이 노래하고 / 새 생명이 꿈틀대고 // 환희와 희열(喜悅)이 어우러져 / 대지를 일깨워 /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어간다. (「아름다운 정원」 전문)’는 자연의 숨결이 산방의 환희와 희열로 동시에 잘 어우려지고 있어서 그의 시심은 더욱 깊어지고 있는 것이다.
오래전에 이어령 교수는 ‘꽃은 인간의 마음을 아름답게 만들어주고 꽃은 침묵의 언어로 사랑과 평화와 인정을 그리고 꿈을 가르쳐 준다’라고 어느 글에서 피력한 바와 같이 정원에 만발한 꽃들은 소박하지만 지순한 사랑을 제공하고 무엇인가 우리들에게 위안과 희망과 기도의 사색의 자세를 이끌어주는 열정과 강렬한 생을 안내하는 매체의 신선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봄이면 짙은 초록 잎이 사랑스러운데
봄이 가면 잎도 사그라들고
여름 되면 연분홍색 꽃이 피는데
무슨 사연 그리 많아
꽃과 잎은 서로 영원히 못 만나나
전생에 무슨 사연 있어 애달픈 사랑
한 뿌리 한 생명
서로가 그리워하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만나서는 안 되는
무슨 사연 그리 슬플까
엄동설한 이겨 내고 잎 나고
무더위가 기승부리면 잎 지고
연분홍 수줍은 꽃망울 터트리는
애달픈 사연
아아 가슴 아픈
사랑의 뒤안길.
--「상사화(相思花)」 전문
다시 이재석 시인은 그 많은 꽃 중에서도 ‘상사화’에서 눈길을 멈춘다. 상사화는 ‘꽃과 잎은 서로 영원히 못 만나’는 전설적인 사연이 있다. 이러한 이미지나 상징은 ‘전생에 무슨 사연 있어 애달픈 사랑’이며 그리움이다. 그는 이 ‘애달픈 사연’에 감동하고 슬픔과 수줍음과 ‘가슴 아픈 / 사랑’을 한탄(恨歎)하고 있는 갓이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이재석 시인의 여리고 순정적인 내면의 진실을 이해하게 된다. 시의 주제는 어디까지나 인본주의(humanism)를 이탈하지 못한다. 인간 내면의 진실이 바로 작품의 숭고한 정신으로 여과(濾過)없이 투영되어야 하는 작법상의 고뇌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열여덟 순정(純情) 아가씨 입술 같은 / 꽃들의 향연 / 고려산 진달래 군락지 // 저만치 반음지(半陰地)에서 / 수줍어하며 립스틱 바르고 피어나 / 내 입술 찾아드는 수많은 군상(群像)들 // 진달래 반 사람 반 / 온 산이 아우성이네.(「고려산 진달래」 전문)’라는 ‘진달래’의 ‘반음지’라는 척박한 생장과정에서도 ‘열여덟 순정(純情) 아가씨 입술 같은’ 향연으로 앞의 ‘상사화’와는 다른 이미지로 형상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 밖에도 그 많고 다채로운 화훼들을 열거하지 못하지만 산방내에서 맑은 공기를 내뿜는 다복솔, 단풍나무 등등 수목류(樹木類)에서도 그는 새벽 이슬이나 아침 햇살, 꽃찾아 모여든 벌과 나비, 새싹 움트는 소리, 산새 지저귀는 소리, 산방위에 떠있는 구름 등등 ‘자연의 하모니 무위자연(無爲自然) / 보아주는 이 없어도 홀로 행복하네(「이름 없는 꽃」 중에서)’라는 자족(自足)의 전원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재석 시집 『나의 정원 국화산방 취남정』 읽기를 마무리해야겠다. 그는 80평생 세월의 무게에서 인생의 끝자락이라는 성찰의 인생론을 국화산방에서 동행하는 행복 추구에서 인생의 향기를 안분지족(安分知足)의 만끽(滿喫)으로 인생관을
궁극적으로 정리하는 노장(老壯)의 시혼이 더욱 빛나는 작품들이 우리들의 공감을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시의 목적은 진리나 도덕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지만 로마의 옛 대시인 호라티우스의 말대로 ‘시는 아름답기만 해서는 모자라고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필요가 있고 듣는 이의 영혼을 뜻대로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명언을 우리 시인들은 항상 새겨두어야 할 것이다. 시집 출간을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