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내게 종교가 뭐냐고 묻거나, 스스로의 정체성을 물을때 크리스찬이라고 답변한다.
물론, 크리스찬의 정체성은 누가 인정해주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판단이다.
그런데 스스로 크리스찬으로서의 자격이 없음도 안다.
교회나 성당 출석을 크리스찬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나는 이십대 중반 이후 30년 넘게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교회가 없기에 크리스찬은 아니다.
열 여섯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후 얼마지나지 않아 신학을 공부해 개신교 성직자가 되려는 명확한 목표와 목적이 생겼다,
그리고 그 꿈대로 신학대학에 입학했다.
이후 탄광의 광부생활을 비롯해 사회단체에서 일을하며 이십대를 보냈고, 13년이 넘어서야 간신히 학부를 졸업 했다.
그러나 여전히 크리스찬으로서의 깊은 체험을 알지 못했다.
물론 내가 그리스찬으로서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종교적인 의무감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한계가 있었고, 무엇보다 성직생활을 할 깊은 영성을 알지 못했기에 목회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교회의 출석과 별개로 내 깊은 내면에서 나오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크리스찬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할수 없었고, 굳이 부정하고 싶지도 않다.
8년 전 쯤 종교가 없는 아내가 천주교신앙을 가지고 싶다고 해서 아내와 함께 6개월동안 예비신자로서 성당에 다니게됐고 둘은 천주교 세례까지 받았다.
그러나, 아내가 세례를 받고난후 성당에 다니지 않게 되었고 나 역시 자연스럽게 다시 다니지 않게되었다.
그래서 굳이 분별하자면 개신교인이기도 하고 천주교인이기도 하다.
크리스찬과 '깨어남', 혹은 '깨달음'이란 단어의 조합은 웬지 어색하다.
대부분 깨어남이나 깨달음은 동양종교의 불교나 힌두교의 영역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물론 불교역시 깨달음의 종교라고만 할 수 없는것이 절이나 불교인들 사이에서도 부처의 순수한 가르침인 깨달음이 아니라 또 하나의 추종과 경배의 대상으로 교리화되거나, 기복적인 종교로 세속화돼 있기도 하기에 뭐라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나, 큰 틀에서 불교나 힌두교가 내면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불교나 힌두교는 깨달음의 종교라 할수 있다.
처음 생각이 아닌 나를 깨닫고 난 후 새벽 고요함속에 가슴깊은 곳에서 우러 나오는 표현하기 어려운 평화를 느끼게 되었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내가 한 기도는 "하나님 제 존재가 평화라서 고맙습니다"였다.
그러나 앞의 글에서도 간간히 밝혔듯이 많은 혼란과 , 두려움, 고통도 함께 있었다.
때론 죽어있는 듯한 느낌, 명료하지 않은 의식과 감정, 지속적인 불면, 특정한 생각의 지속적인 강박,,
그 중 혼란스러웠던 것 중 하나는 크리스찬인 내게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수가 없었다.
당시 인터넷에서 정보를 얻고자 했으나 소위 크리스찬이라 하는 분들의 대부분은 이러한 경험에 대해 악마의 저주, 이단, 사이비 등등 으로 이해했다.
집 근처 성당의 신부님에게도 용기를 내 도움을 구했으나 "기도하고 성경책 열심히 보라"는 지극히 평범한 답변뿐이었다.
결국 나는 한동안 새벽마다 잠에서 깨어 고요함 가운데 느끼던 평화의 느낌을 경험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거부하기까지했다.
이유는 내게 일어난 이러한 경험들이 크리스찬의 신앙에 맞지 않은 것이며, 잘못된 경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과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내가 할 수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 수 개월 동안은 이 이해되지 않는 경험에 대해 거의 매일 집에서 수 킬로 떨어진 성당까지 걸어가 성당입구 마리아상 앞에서 기도를 했다.
모든 것을 전지전능한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과 고통의 과정들을 통해 역설적이게도 나를 포기하는 것과 내 맡기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리고 점차 나의 이러한 깨어남, 깨달음 경험은 소수였지만 그리스도교의 깊은 영성이며 지금도 그 영성의 맥이 수도원 등을 통해 흐르고 있다는 것과, 내 안의 또다른 '나', '신성'을 경험하는 것은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에서 하나님과의 합일, 일치로 표현되며 신비신학의 줄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주류는 수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이러한 깨어남, 깨달음, 즉 영성의 부분에 대해서는 늘 비판적이었고 인정하지 않았고, 핍박해 왔고,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대부분의 교회와 성당들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교리를 믿고 추종한다.
그러나 교리나 믿음은 신을 가르키는 손가락일 뿐 이며 안내자일뿐이다.
하나님은 개념이나 교리를 넘어있는 그 무엇이다.
하나님을 자신의 개념이나 교리의 틀안에 가둘때 하나님은 작아지고 난폭해진다.
하나님은 주체적으로 경험될 뿐이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평화, 생명, 기쁨, 텅빔과 충만,,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
예수께서 가르친 회개, 거듭남, 구원,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 내 안에 있는 깨달음이고 열반이고 해탈이었음에도 이 전엔 이 가르침들을 알지 못했다.
굳이 하나님을 개념으로 정의하라 한다면 하나님은 온 우주이며, 일어나는 모든 것, 알파와 오메가이다.
하나님 아닌 것이 없다.
그러기에 시시비비할 것도 없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하나님이고, 은총이다.
첫댓글 어제 저녁 에크 하르트 톨레의 '삶으로 다시떠오르기' 북클럽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천주교 신자이신 분의 질문이 있었습니다.
자신은 크리스찬으로 영지주의는 이단으로 알고 있는데 톨레가 영지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에 대한 의문이었습니다.
제 답변은 "영지주의를 한마디로 정의할수 는 없지만 영성에 대한 경험적인 앎을 중요시하는 점에서 깨달음을 이야기하는 불교와도 유사한 성격의 신앙공동체 였다는 것과 교리나 맏음체계역시 톨레가 이야기 한 생각의 영역이므로 이 생각의 영역을 벗어난 경험의 영역이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교리체계를 신앙으로, 그리스도교의 진리로 받아들이는 대부분의 크리스찬으로서는 이 믿음체계를 부정한다는 것이 정말 어려울 뿐더러 불가능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자신의 생명보다 더한 전부일수 있습니다.
저역시 그랬습니다.
상당한 혼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내가 아닌것을 알게된후 점차 교리나 믿음체계는 진리가 아니며 진리는 그 너머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신앙, 신, 믿음은 교리에 지적 동의가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작년 9월에 이 부분에 대해 쓴 글이 있어 올립니다
오늘 우연히 평화나무님의 소를 찾아서라는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일이 손에 잡히질 않고 마음이 고파 한동안 앉아 있다가 심도학사에 들어왔었고 님이 쓰신 위의 글을 읽었지요. 저는 홍현택이라 합니다. 최근 나눔방에 제가 쓴 졸저에 대하여 알리는 글을 올렸지요.
저는 30대 초반 가톨릭 신자가 되었고 지금도 그러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불선의 경계는 깨었고 자유롭습니다. 같은 것을 자기식으로 달리 얘기할 뿐이라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주제넘게 제 책을 일독해 주시면 어떠실까 권유해 봅니다. 소를 찾아서 이후 다시 쓰지 않겠다 하셨는데 참지를 못하셨네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재작년 마지막 글을 올리고 카페를 탈퇴했었습니다.
그리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작년 말 김경승 선생님 근무하시는 곳에 방문하게돠었고 그 만남을 계기로 다시 카페에 가입했습니다.
글을 다시 올리는 이유는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플러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싶은 약간의 바램일 것입니다.^^
선생님의 책을 이해할 수준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꼭 일독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다 ㅡ파우스트ㅡ
고뇌의 과정이 아름답습니다!
공감해줄 수 있는 친구가 그리웠겠습니다.
호호님이 함께해 주셔서 좋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난 것이라 생각합니다.
역설적이게도 혼란과 고통의 그때가 가장 절실하게 신을 찾았던 때였습니다. ^^
늘 감사합니다.
늘 기쁜날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