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남성 잔 파버(70)와 아내 엘스 판 리닝겐(71)은 50년 가까이 해로했다. 지난 3일(현지시간) 두 의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두 사람은 치명적인 약물을 주사해 나란히 저세상으로 떠났다. 이 나라에서는 이른바 '듀오 안락사'가 합법이다. 드문 사례였는데 매년 갈수록 많은 네덜란드 커플이 이런 식으로 세상과 작별하고 있다고 영국 BBC가 29일 전했다.
잔과 엘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 사흘 전, 북부 프라이슬란드의 노을 진 마리나 옆에 주차한 캠퍼밴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둘은 유목민처럼 옮겨 다니는 삶을 좋아해 결혼생활 대부분을 캠핑카나 보트에서 지냈다.
잔은 BBC 기자에게 “우리는 때로는 돌들을 잔뜩 쌓은 것, 주택에서 살고 싶었는데 잘 먹히지 않았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남편은 만성 등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아내는 치매를 앓아 문장 하나도 제대로 입 밖에 낼 수 없어 힘겨워했다. 아내는 힘겹게 서 있었는데 몸이 자꾸 기울어졌다. 그녀는 머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아주 좋은데 끔찍하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유치원에서 처음 만나 평생을 사랑하며 지내 온 사이였다. 잔은 네덜란드 청소년 국가대표 하키 팀에서 활약한 적이 있으며, 나중에 코치 일을 했다. 엘스는 초등 교사 훈련을 받았으며 두 사람 모두 물과 보트, 요트를 좋아해 늘 함께 했다.
잔은 화물선을 사들여 네덜란드의 운하를 이용해 물품을 수송하는 사업을 벌였다. 엘스는 외아들을 낳았는데 아들 이름은 공개하지 말 것을 신신당부했다.
1999년 무렵, 내륙 화물 사업은 경쟁이 매우 심해졌다. 잔은 10년 이상 해 온 중노동 때문에 등에 통증을 엄청 느꼈다. 2003년 등 수술을 받았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진통제를 먹지 않으면 더 이상 일할 수 없었다. 엘스는 여전히 가르치느라 바빴다. 때때로 두 사람은 안락사에 대해 얘기를 나눴는데 잔은 신체적 한계 때문에 너무 오래 살고 싶지 않다고 가족에게 설명하곤 했다. 이 무렵 부부는 네덜란드의 '죽을 권리' 조직인 NVVE에 가입했다.
잔은 “많은 약을 먹으면 좀비처럼 살게 된다. 해서 나는 내가 갖고 있는 통증과 엘스의 질환을 모두 그만 둬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그만 둔다는 말은 삶을 멈춘다는 의미다.
2018년 엘스가 교직에서 은퇴했다. 초기 치매 증상이 보였지만 의사를 만나는 일조차 마다했다. 아마도 아버지 역시 알츠하이머로 세상을 떠난 것을 생생히 지켜봤기 때문이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녀의 증상을 그냥 넘길 수 없는 시점이 왔다.
2022년 11월 치매 진단을 받았는데 엘스는 곧바로 진찰실에 남편과 아들만 남겨두고 문을 쾅 닫고 가버렸다. 잔은 "아내가 성난 황소처럼 분노하더군요"라고 말했다.
엘스가 자신의 몸 상태를 알게 된다고 해서 나아질 리는 만무했다. 부부와 아들은 듀오 안락사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에서는 안락사와 조력 자살 모두 합법이다. 자발적으로 요청하고,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린다는 점을 의사가 확인하고, 개선의 여지가 없다는 점이 확실하면 허용된다. 조력 자살을 신청한 모든 사람은 두 의사의 평가를 받은 뒤 처음 내려진 평가를 교차 검증하게 된다.
지난해 네덜란드에서는 9068명이 안락사로 죽음에 이르렀는데 대략 전체 사망자의 5%에 해당한다. '듀오 안락사' 건수는 33건, 66명에 이른다. 한 쪽 배우자가 치매를 앓고 있어 동의를 표명할 능력이 있는지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이 빚어지면 사안은 더 복잡해진다.
로테르담에 있는 에라스무스 메디컬센터의 로즈마린 판 브루쳄 박사는 “많은 의사들이 치매를 앓고 있는 환자의 안락사를 시행하는 문제를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잔과 엘스 주치의도 주저했다. 실제로 안락사 통계를 봐도 의사들이 망설일 만하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1000명당 치매 환자는 336명이었다. 해서 치매를 앓는 환자들의 "참을 수 없는 고통"의 법적 기준을 어떻게 충족시킬 것인가?
판 브루쳄 박사는 초기 치매의 많은 사례는 자신의 삶을 끝내는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용태가 나아졌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지 불분명하다고 설명했다. “충분히 의사를 표현할 수 있어 안락사를 실행할 의지가 있는 의사와 정신 숙련도에 전문인 (2차) 의사까지 설득할 수 있다 해도 그것만으로 안락사를 고려할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는지 실존적인 두려움이 나온다."
주치의가 개입하고 싶지 않다고 하자 잔과 엘스는 모바일 안락사 클리닉 'the Centre of Expertise on Euthanasia'에 접근했다. 이 센터는 지난해 네덜란드의 조력 자살 가운데 15%가량을 관장했다. 그리고 평균 신청 승인 건수 가운데 3분의 1정도였다.
커플이 함께 삶을 끝내고 싶어하면 의사들은 한 쪽이 다른 쪽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점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버트 카이저 박사는 두 차례 듀오 안락사 사례를 다뤘는데 한 사례의 남성이 아내를 윽박지르는 것으로 의심해 여성만 따로 불러 얘기를 나눴다. "그녀는 아주 많은 계획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남편이 위중한 것을 알지만 덩달아 죽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에 따라 안락사 과정은 중단됐고, 남성만 자연사했으며, 아내는 여전히 살아 있다.
네덜란드에서 몇 안되는 안락사 반대론자인 프로테스탄트 신학대학 헬스케어 윤리학과의 테오 보어 박사는 완화 의료(palliative care)의 발전 덕에 안락사의 필요성은 덜어진다고 지적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의사에 의한 살인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필요하긴 하다."
보어 박사를 걱정하게 만드는 것은 '듀오 안락사' 사례가 갖는 임팩트다. 전직 네덜란드 총리 부부가 연초에 함께 죽는 길을 택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세계 언론이 주목했다. 보어 박사는 "과거 몇 년 듀오 안락사 건수가 20여건이었는데 함께 죽는 일을 영웅시하는 경향이 생겨났고, 의도적 살인에 대한 터부가 특히 듀오 안락사란 개념에 이르면 사라진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잔과 엘스는 어쩌면 캠퍼밴에서 계속 살아갈 수도 있었다. 너무 빨리 죽었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엘스는 "아니 아니 아니 나는 알 수가 없다. 내 인생을 살았다. 더 이상의 고통은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잔은 “우리는 인생을 살았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다. 우리는 멈출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뭔가 다른 것이 있다. 엘스는 스스로 죽고 싶은지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의료진의 평가를 받았는데 만약 치매가 더 진전됐으면 달라졌을 것이다.
아들에겐 어느 쪽이든 쉬운 일이 아니다. 잔은 "여러분의 부모가 죽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을 것"이라면서 "눈물 바다였다. 우리 아들은 ‘더 좋은 시기, 더 좋은 날씨가 올 것'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아니라고 본다”고 못박았다. 엘스도 같은 심정이었다. "어떤 다른 해결책도 없다."
안락사 의료진과의 만남 전날, 엘스와 잔, 아들과 손주는 모두 어울려 지냈다. 실용적인 측면에서 잔은 캠프밴의 특이한 점들을 설명하며 팔 준비를 하라고 아들에게 말했다. 아들은 "그 뒤 난 엄마와 해변을 걸었다. 아이들은 놀고, 농담도 주고받았다. 아주 이상한 날이었다"면서 "저녁 만찬을 들었던 기억이 나고, 난 우리가 함께 마지막으로 나눈 만찬을 지켜보며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고 말했다.
지난 3일 월요일 아침, 모두가 그 지역 호스피스에 모였다. 최고의 친구들과 두 사람의 형제들, 아들과 며느리도 함께 했다. “의사가 오기 전까지 두 시간 정도 함께 있었다. 추억 거리들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음악을 들었다.”
엘스를 위해 트래비스의 'Idlewild'란 노래를, 잔을 위해 비틀스의 'Now and Then'이 흘러나왔다.
아들은 “마지막 30분이 힘들었다. 의사들이 도착했고 모든 일이 재빨리 돌아갔다. 정해진 대로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돌아봤다.
엘스 판 리닝겐과 잔 파버는 의료진이 관장하는 약물주사를 맞고 나란히 숨을 거뒀다. 둘의 캠퍼밴은 아직도 주인을 찾지 못해 아들은 당분간 처분하지 않고 휴가 때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쓰기로 결정했다. "결국은 팔 것이다. 우선 가족들의 추억을 보존하고 싶은 것이다."
Travis - Idlewild ft. Josephine Oniyama (youtube.com)
The Beatles - Now And Then (Official Music Video) (youtub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