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에 호랑이 새끼였나. 고기만 먹지 말고 채소도 좀 먹어." 엄마 잔소리를 요리조리 피해가며 오늘도 고기만 공략한다. 나는 타고난 육식주의자다. 고기를 사랑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 육식의 결말이 비만이라 할지라도 개의치 않는다. 고기 먹는 행복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삼시 세끼 한우를 먹는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 있으랴. 생각만 해도 행복한 상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강원도 횡성으로 향했다. '삼시쇠끼 횡성한우'가 주제인 횡성한우축제를 즐기기 위해서다. 축제는 10월 19일부터 23일까지 닷새간 횡성군 섬강 둔치에서 열렸다.
불판 위의 횡성한우
축제장은 사람들로 복작거렸다. 빨강, 주홍, 노랑 단풍 같은 옷을 입은 어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 다녔고, 가을바람이 맛있는 냄새를 실어 날랐다.
축제장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
축제장 초입에는 농·특산물 직거래 장터가 자리했다. 치악산 표고버섯, 횡성더덕, 안흥찐빵 등 횡성을 대표하는 맛 좋은 특산물이 오밀조밀 모여 있다.
횡성한우 마스코트인 '한우리' 풍선
고기만큼 빵을 사랑하는 나는 안흥찐빵 무료 시식대에 줄을 섰다. 동네 마트에서 보는 옹졸한 시식이 아니다. 엄지손가락만큼 큼직한 찐빵 조각이 시식대에 놓여 있다. 단호박 색 찐빵 한 조각을 집어 날름 입에 넣는다. 구수한 빵과 달콤한 팥소가 입에 착 달라붙는다. '집에 갈 때 찐빵 한 상자라도 사갈까?' 가격표를 기웃거리며 축제장 안으로 들어갔다.
횡성 농·특산물을 판매하는 직거래 장터
횡성한우, 널 먹으러 여기까지 왔어
축제장 안으로 들어갈수록 고기 굽는 냄새가 짙게 풍겨왔다. 향긋한 냄새의 근원지는 농·축협 횡성한우 셀프식당. 축제장에는 셀프 식당이 두 군데 있었다. 메인 공연장 좌측의 농협 셀프식당과 우측의 축협 셀프식당이 그것. 아직 정오도 되지 않았거늘 두 곳 모두 일찍부터 자리 잡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총 길이가 145m에 이르는 셀프식당에서는 횡성한우를 부위별로 골라 즉석에서 구워 먹을 수 있었다.
시중가보다 좀 더 저렴하게 횡성한우를 구입할 수 있다
그런데 식당 앞에 서자 발걸음이 멈췄다. 횡성까지 오긴 했지만 얇은 지갑을 두둑이 채워오지는 않은 탓이다. 안내원에게 물었다. "여기가 시중가보다 좀 더 저렴한가요?" 반가운 대답이 되돌아온다. "그럼요. 100g 기준, 횡성한우 시중 판매가가 16,000~17,000원 선인데, 셀프식당에서는 12,000원 선이에요." 시중보다 저렴한 가격은 셀프식당의 가장 큰 매력이다.
셀프식당 입구에 진열된 횡성한우
셀프식당에서 구워 먹는 게 귀찮다 해도 문제는 없었다. 한우전문음식점과 먹거리마당에서 육회비빔밥, 한우소머리육개장, 한우버섯불고기 등 횡성한우가 들어간 요리를 입맛대로 골라 먹을 수 있기 때문.
다양한 음식을 파는 먹거리마당
고소한 고기 냄새에 배가 고프기 시작했지만 고기를 먹기 전에 들릴 곳이 있다. 축협셀프식당 옆의 횡성한우주제관. 횡성한우를 알고 고기를 더 맛있게 먹자는 심산이었다. 10분 남짓이면 둘러보는 자그마한 규모지만, 주제관은 횡성한우의 역사, 부위, 체계적인 품질관리시스템 등, 횡성한우 관련 다양한 정보를 전시해놓았다.
횡성한우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횡성한우주제관
주제관을 구경하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원래 우리 한우는 황소, 칡소, 흑소 등 품종이 다양했다. 그러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 후반, 조선총독부가 '황갈색만 한우로 인정한다'는 규정을 만들어 칡소와 흑소를 대량으로 공출해 갔다. 한우를 일소로 쓰고 왜소한 일본 소의 품종을 개량하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한우' 하면 황소가 떠오르는 데에는 슬픈 역사가 숨겨져 있었다.
셀프식당에서 횡성한우를 먹는 사람들
드디어 횡성한우를 맛볼 시간이다. 한우 판매대에서 새빨간 치마살과 꽃등심을 집어 들었다. 그것도 "1++"인 것들로. 경건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셀프식당 벽에 붙은 안내문도 꼼꼼히 읽었다. 안심이나 채끝살처럼 기름기가 적은 고기를 먼저 먹은 뒤에 꽃등심, 살치살처럼 마블링이 있는 부위를 먹으란다. 지글지글. 불판 위에 선홍색 한우를 올려놓았다. 선홍색이 점점 연한 갈색으로 변하자 입에 침이 고인다. 때깔 한 번 좋다. 센 불에 살짝 구운 뒤 소금을 찍는다. 한 점 입에 넣으면 머리 위로 '펑펑펑' 폭죽이 터진다. 일행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의 만족스러운 표정만으로도 고기 맛을 짐작할 수 있다. 말없이 눈빛 교환을 한 뒤 다시 고기 한 점을 집는다. 혀에서 녹는 시간은 단 10초. 두께가 상당한데 입에서 고깃결이 그대로 느껴질 정도로 부드럽다. 이 식사만으로도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었다. "맛있다, 맛있다" 연신 호들갑을 떨며 먹을 수밖에 없는 맛이었다.
감칠맛이 뛰어난 횡성한우
횡성한우는 왜 이렇게 맛이 좋은 걸까. 보통 큰 일교차가 고기 육질을 좌우한다는 얘기가 있다. 맞는 말이다. 일교차가 크면 소의 육질이 단단해져 맛이 깊어지기 때문이다. 횡성 역시 연평균 최고 기온 32℃, 최저 기온 -12℃로 기온 차가 크고 일교차도 뚜렷하다. 이러한 조건에서 횡성한우는 지방을 체내에 축적하며 육질이 쫄깃해진다.
횡성한우는 센 불에서 짧은 시간에 구워야 한다
횡성한우는 그 맛을 인정받아 10년 연속 대한민국 소비자신뢰 대표브랜드 대상을 받았고, 올해는 국가명품인증을 5회 연속 수상했다. 지난 8월에는 씨암푸드 캄보디아 현지법인과 MOU(업무협약)를 체결해 글로벌 한우 브랜드로 도약할 준비도 마쳤다.
밥과 반찬이 제공되는 셀프식당
으라차차, 음매애애, 축제장은 시끄러웠다
오후 2시가 되자 주위가 시끌벅적했다. 축제의 대표 프로그램인 머슴돌 들기 대회가 막 시작했기 때문. 대회는 머슴들이 무거운 돌을 들어 힘을 겨루고 그에 따라 품삯을 받던 것에서 착안했다. 경기 규칙은 단순했다. 남성은 80㎏, 여성은 40㎏의 돌을 들고 가장 멀리 이동하는 사람이 승자다. "으라차차." 예순 넘은 어르신이 바위라고 해도 될 법한 돌을 번쩍 들고 반환점인 25m를 돌자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어이쿠, 아까워서 어쩌나." 이내 어르신이 힘에 부쳐 돌을 떨어뜨리자 박수 소리가 안타까운 탄식으로 바뀌었다. 다음 도전자는 앞 참가자의 기록을 넘어서겠다며 당찬 포부를 드러낸다. "나는 가진 게 힘밖에 없어. 경기장 두 번은 너끈히 돌 수 있지요." 어르신들의 힘자랑에 공기가 후끈후끈하다.
무거운 돌을 들어 힘을 겨루는 머슴돌 들기 대회
"음매애애." 테마목장 우측에서는 밭 갈기 체험이 한창이다. 도시에 사는 내가 밭을 갈 기회가 언제 또 찾아올까 싶어 체험을 해보기로 했다. 밭 한쪽에 있는 장화로 갈아 신고 밭으로 들어섰다. 체험은 어르신이 코뚜레를 쥐고 소를 이끌면 나는 연장을 들고 뒤를 따라가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소가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니 어르신이 말씀하신다. "뭣들하고 있어. '이랴이랴' 소리를 내야 소가 가. 멀뚱히 서 있기만 하면 소가 안 가지." 반신반의 끝에 "이랴이랴" 소리를 내니 멈춰 있던 소가 드디어 움직인다. 연장은 무거웠지만 소가 앞에서 끌어주니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소가 지나간 밭에 고랑이 나고 흙냄새가 바람에 실려 왔다. 잠시나마 소 따라 밭을 갈며 대지와 호흡하는 것은 횡성한우축제에서만 가능한 경험이었다.
테마목장의 밭 갈기 체험
테마목장은 가족 나들이 장소로도 안성맞춤이었다. 색색의 백일홍이 너른 대지를 메워 축제장 내 최고의 포토존이다. 아이가 꽃밭으로 아장아장 다가가자 엄마는 아이 사진을 찍고, 아빠는 아이와 엄마의 사진을 찍었다. 단란한 가족 나들이에 마음이 포근해졌다.
테마목장 내 백일홍 꽃밭은 최고의 포토존이다
횡성한우축제의 변신은 무죄
올해로 13회째를 맞은 횡성한우축제는 여러모로 새로운 변신을 꾀했다. 그중 하나가 우폐동전이다. 축제장 여기저기서 엽전 같은 동전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동전의 정체는 횡성한우축제의 전용주화다. 횡성한우 마스코트인 한우리가 그려져 있어 귀여운 모양새를 자랑했다. 금빛 동전은 3000원, 은빛 동전은 1000원으로, 축제장 내 먹거리 구매뿐 아니라 시내 식당과 전통시장에서도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어 방문객의 편의를 도왔다.
횡성한우축제의 전용주화인 우폐 동전
색다른 변신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채끝, 우둔, 사태…. 이름은 한 번씩 들어봤지만 소의 어느 부위를 가리키는지 늘 헷갈리는 이들을 위해 준비한 이벤트. 이름하여 '발골 퍼포먼스'. 발골은 도축한 소의 살에서 뼈를 발라내는 작업을 말한다. 발골 전문가가 부스 안에서 도축된 한우를 현장에서 해체한다. 소의 넓적다리 살에 예리한 칼날이 들어왔다. 쓱싹쓱싹, 칼날이 살점을 거침없이 발라낸다. 외과의의 수술을 목도하듯, 관중석에는 긴장감이 맴돈다. 발골 장면은 스크린으로 중계되어 한우의 각 부위를 눈으로 세세히 확인할 수 있었다. 긴장감은 이내 흥분으로 바뀌었다. "4만 500원까지 나왔습니다. 4만 600원 없으신가요?" "여기 4만 600원이요!" 관중들을 대상으로 발골한 한우의 경매가 시작되었기 때문. 발골 퍼포먼스부터 한우 경매까지, 어디서도 보지 못한 진풍경이 펼쳐졌다.
올해 첫선을 보인 발골 퍼포먼스
횡성한우축제는 당일치기 가을 나들이로 제격이었다. 서울에서 1시간 30분 남짓이면 축제장에 닿을 수 있어 접근성도 뛰어났다. 축제장은 섬강 둔치를 따라 길게 이어져 있어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자연과 벗할 수 있었다. 이 좋은 계절, 흥 넘치는 분위기 속에 횡성한우를 맛보고 소 따라 밭을 갈며 일일 농부도 되어보았다. 잘 먹고 잘 놀 수 있는 횡성한우축제는 그저 둘러보기만 해도 배부른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