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 2021
올해의 펜을 처음 구입한 건 2021년의 일입니다. 지금은 2024년이고 현재 시점에서 제가 가진 올해의 펜은 총 여섯 자루예요. 1년에 두 자루 꼴로 샀던 셈이죠. 올해의 펜을 사기 위해 참 많은 펜을 중고로 팔았습니다. 중고로 팔 펜이 없어지자 월부 끊은 다음 부분 상환을 하는 방식으로 구입했고요. 며칠 전에 고대 이집트의 월부금을 드디어 다 갚았습니다. 그러고 또 올해의 펜을 샀지요. 오늘 구입한 올해의 펜은 2009년 모델인 말총입니다. 이것이 제 생의 마지막 올해의 펜이 되기를 바랍니다.
특가는 못 참아
이 펜을 특가로 샀어요. 진열 상품 특가요. 2009년에 출품한 모델이니 15년 동안 팔리지 않고 있었던 겁니다. 매장 입장에서는 악성 재고였을 거예요. 몇 년 전에 봤을 때도 할인을 하긴 했지만 특가라고 할 만큼 폭이 크지는 않았거든요. 그리고 당시의 저는 ‘자연의 호화로움’을 주제로 한 올해의 펜에 관심이 없기도 했고요.
그런데 어느 날 그 펜이 대폭 할인하는 걸 봤습니다. 순간 혹했어요. 비싼 건 여전했지만 애초 출시 가격이 350만 원으로 최근 출시되는 올해의 펜의 가격을 생각하면 100만 원 이상이 저렴했고 거기에 특가 할인까지 덧붙였으니 이건 악성 재고니까 누구라도 어서 사가라는 생각으로 붙인 가격이었을 거예요. 그런데 저는 거기서 또 머뭇거립니다. 갚아야 할 고대 이집트 월부금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거든요.
인류의 재산이요, 친구였던 동물
말은 인류가 오래 전부터 길들여서 사육해왔던 가축입니다. 힘이 세고 길들이기 쉬워서 중요한 이동 수단이었고 군사적으로도 기병은 전략, 전술적 가치가 높았죠. 동양에서는 농사를 지을 때 소를 이용했지만 서양에서는 말을 이용했어요. 그리고 말의 고기는 지방이 적고(생말고기는 하얀 지방분이 전혀 없다) 육질이 부드러워서 아주 맛있는 먹거리로 취급되고요. 2018년 9월 카자흐 여행 중에 말 스테이크를 먹었던 적이 있었어요. 고기는 부드러우면서도 씹을 때 저항감이 느껴졌고 맛 또한 돼지고나 쇠고기에 비할 바 아니었으나 힘줄은 나이프로 썰어지지 않을 정도로 질겼습니다.
한국사의 부끄러운 면이지만 병자호란 때 조선군은 이렇다 할 싸움 없이 시간만 지나는 데다 군량이 다 떨어지자 군마를 죽여 잡아먹기까지 했으나 아사자가 속출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그 고기가 맛있을 턱이 없었겠지만). 쓰임새는 이뿐인가요? 말의 갈기나 꼬리털을 말총이라고 해서 공예품을 만드는 데 쓰이기도 합니다. 18세기 말엽에 말총으로 만든 의자 커버는 귀족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1872년이나 돼서야 기계 베틀을 사용하기 시작했고요. 또 고전 소설 허생전에서도 나오죠? 허생이 제주도로 가서 말총을 매점매석하여 망건과 갓의 가격을 10배 이상 폭등케 한 다음 막대한 이익을 취하는 대목이요. 그리고 이렇게 펜도 만들었잖아요!
하지만 말총은 뻣뻣하고 짧은 데다 직조가 까다롭다고 합니다. 이 펜은 색상과 두께를 골라낸 다음 대략 일흔 가닥의 말 털들이 직물의 센티미터 단위를 구성하며 한 올씩 직조했다는 게 상품 설명입니다. 보시면 직조된 패턴이 곧게 서 있지 않고 약간 기울어 있죠? 수공업의 증거입니다. 펠리칸도 플렉시 유리를 잘라서 배럴에 붙이는 방식으로 만드는 데 이 또한 수공업이기 때문에 줄무늬 모양새가 일정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패키지가 제일 마음에 들어요. 현재의 올해의 펜과 비교하면 꼭 필요한 것만 담았달까요? 너무 크지도 않아서 보관하기가 까다롭지 않습니다. 부피가 작으니 무게 또한 가볍고요. 지금의 올해의 펜 패키지는 너무 커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보기 드문 직물 펜
직물 배럴을 지닌 필기구는 드물어도 아주 드물 겁니다. 더군다나 말총으로 만든 배럴은 그 정도가 더할 거고요! 처음 저는 이 펜을 봤을 때 질감이 매우 궁금했어요. 필기감이야 제가 올해의 펜을 가지고 있으니 썩 궁금하지는 않았지만 말총으로 만든 배럴의 촉감은 좀처럼 연상되지 않더라고요. 좀 억세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나중에서야 베스트펜에서 이 펜을 만져볼 수 있었는데 생각보다 억세지 않았어요. 음식으로 치면 쇠고기 안심에 빗댈 수 있겠습니다. 쇠고기 안심은 지방분이 거의 없어서 매우 질길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맛이 아주 뛰어난 만큼 상당히 비싼 부위입니다(반면 돼지고기 안심은 가장 싼 부위다).
2024년 6월 1일이 돼서야 이 펜을 제대로 만져보게 되네요. 올 하나하나는 제법 억셉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촉감은 부드러우며 시원하면서도 따뜻합니다. 게다가 튼튼해 보이고 윤기도 흐르지요. 배럴 전체를 말총으로 장식하지 않고 중간에 분리대를 달았는데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2005년 모델인 가오리 가죽도 그렇게 처리했는데 뭔가 이유가 있을 겁니다. 배럴이 아닌 다른 부분은 백금으로 도금했습니다. 윤기가 있는 말총과 백금의 조합은 상당한 고급감과 시원함, 그리고 넘치는 생명력을 제공합니다.
배럴 하단에는 제조사와 원산지를 각인했고 엔드 피스에는 파버-카스텔 가문의 문양을 새겼습니다. 캡탑은 다소 심심한 편인데 말총이라는 주제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됩니다. 광물을 주제로 한 모델은 엔드 피스에나마 모티프가 된 광물로 처리를 했는데 나무나 가죽, 직물 재질은 엔드 피스도, 캡탑도 이렇게 처리를 했더군요. 피스톤 노브는 같은 필링 방식을 채용한 다른 제조사들의 펜과 비교하면 길이가 짧고 작은 편입니다.
캡을 열어보면 전체 길이에 비해 그립 존이 상당히 긴 편입니다. 이렇게 긴 그립 존은 펜을 좀 더 길어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리고 볼륨이 없이 사다리꼴 모양을 하고 있고요. 밑으로 내려갈수록 점점 굵어지다가 푸른빛의 잉크 창을 지나면 나사산이 나오는데 배럴과 나사산이 붙어 있지 않고 중간에 어느 정도 공간이 있습니다. 그 탓에 캡을 체결할 때 약간의 부침이 있습니다. 나사식 캡을 체결할 때는 꼭 닫지 않는 것이 좋은데 캡이 체결되고 맞물리면서 토크(Torque)가 들어가기 때문이에요. 임계치를 넘어서는 토크가 들어가면 펜 망가지는 거고요. 그렇기 때문에 부드럽지 못하게 맞물리더라도 억지로 체결하려 하지 마시고 더 이상 캡이 돌아가지 않으면 거기서 멈추시는 게 좋습니다.
이 펜의 18k 펜촉은 펠리칸 M800의 그것과 같은 것입니다. 혹자는 펜촉이 작다고 아쉬움을 표하기도 하는데 오버사이즈가 아닌 풀사이즈 크기임을 감안하면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펜촉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다만 펜촉에 비해 피더는 좀 큰 편이에요. 피더의 역할이 잉크의 공급임을 생각한다면 더 많은 잉크를 머금을 수 있습니다.
▲'Pen of the Year 2009의 18k 금 펜촉'
이 펜촉의 실제 성능은 후술토록 하겠습니다.
오인
이 펜을 잡아보니 올해의 펜이 처음부터 그렇게 무거웠던 건 아닌 것 같아요. 어쩌다 보니 무게가 무거워지고 제품 담당자도 어느 시점부터는 이 점을 의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라고 봅니다.
전체 무게는 78g, 본체는 45g 정도입니다. 가벼운 것은 아니지만 못 쓸 정도로 무거운 것도 아닌 것 같아요. 제가 가진 올해의 펜 중에서는 가장 사용성이 좋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율이 좀 다를 뿐 플랫폼은 큰 차이가 없다'
길이를 보면 이제까지 리뷰했던 올해의 펜보다 아주 근소하게 더 깁니다. 그 차이는 1mm 이내이기 때문에 의미 있다고 보기는 어렵죠. 소재의 차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뭐가 잘못된 거지?
양두구육(羊头狗肉)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양 대가리를 걸고 개고기를 판다는 뜻이지요. 즉 겉과 속이 다른, 겉은 그럴 듯하나 내실은 그렇지 못하단 의미예요.
말이라는 동물로부터 연상되는 역동성과는 달리 필기감은 전혀 역동적이지 못합니다. 옥의 티요, 아픈 손가락이 이 필기감입니다. 미화와 악평 하나 없이 있는 그대로 말하면 무색무취합니다. 종이를 움켜쥐고 달리는 필기감도 아니고, 종이 위를 적은 마찰로 우아하게 미끄러져 나가는 필기감도 아니에요. 그렇다고 어느 정도의 벌어짐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어쩌면 종이 탓일 수도 있어요. 시필한 노트는 로디아 스프링 노트인데 이 노트는 단위 면적당 무게가 90g인 데다 코팅까지 돼 있어서 펜이나 잉크에 따라서 스키핑을 일으키거나 필기감의 우둔한 부분을 두드러지게 하는 데가 있어서 추후에 제가 주로 쓰는 노트에 써보려 합니다.
여섯 자루의 주인
올해의 펜이 처음 나온 건 2003년이고 제가 올해의 펜을 처음 알게 된 건 2004년입니다. 2004년 모델은 호박인데 당시 가격이 250만 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는 10만 원짜리 펜도 비싸서 덜덜 떨던 때여서 저걸 누가 사서 쓸까 싶었는데 그게 제가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20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 올해의 펜 여섯 자루의 주인이 된 제 모습을 보니 격세지감이라고 할 만한 것 같아요.
제가 올해의 펜을 더 살지 사지 않을지는 알 수 없으나 더 이상의 구매가 없기를 희망합니다. 돈도 돈인데 패키지가 너무 눈에 띕니다. 제 방 책장 위에 올해의 펜 패키지가 다섯 개나 있습니다. 옷장 위에는 이번에 구입한 말총 패키지가 놓여 있고요. 한 자루 정도는 눈 감고 봐줄 수 있겠지만 두 자루는... 두 자루 구입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내년에는 절대로요. 올해의 펜이 아니어도 내년에는 해외여행 계획이 있어서 구입을 극도로 억제해야 합니다. 쉽지는 않겠지만요.
첫댓글 리뷰 잘 봤습니다. 올해내로 7번째 올해의 펜을 구입하게 되시기를 바라마지 않겠습니다. ^^
제가 다시 올해의 펜을 구입하려면 시간이 꽤 지나야 할 거예요. 만약 내년에 사게 된다면 저는 여행을 포기해야 합니다.
너무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역사적인 귀한 펜 영입을 축하드리구요~
내용이 아주 실해서 유용하고...
올해의 펜 갖구싶은 마음이 하늘을 찌르네요😆⚡️🔥
아하하, 이 기회에 한 자루 어떠신가요?
멋진 펜과 정성스럽게 쓴 글 잘 봤습니다.
재질 문양 그리고 스토리 모두 소중한 한정판들이네요 ㅎㅎ
네, 소중한 것들이라 올해의 펜 만큼은 반드시 남기려고 합니다.
올해의 펜들을 줄 세워놓은 마지막 사진을 보니 확실히 특색있고 멋있네요. 고가의 펜이라고 꼭 좋은건 아니겠지만 저도 언젠가 작성자님처럼 펜을 모을수 있는 날이 있으면 합니다. 좋은 펜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시간은 많습니다. 언젠가는 원하는 펜들을 구축하실 수 있을 거예요.
세월의 흐름속에서 사랑과 관심이 묻어있는 펜들이라뇨ㅎ 귀한 콜렉션입니다 정말ㅎㅎ
귀하지 않은 콜렉션은... 없지요. 아하하...
이 펜이 나온지 벌써 15년이나 되었네요. 시간 참 빠릅니다. 처음 봤을 때 어떻게 말총을 소재로 채택할 생각을 했을까 놀라기도 했습니다. 멋진 펜 축하드립니다. ^^
올해의 펜은 정말이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것들로 만들어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