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싱턴한인교회 김영봉 목사님의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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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쉽다"
요한일서 4:16-21
1.
네팔 대지진을 마지막으로 특별히 잔인했던 4월이 지나갔습니다. 지진이 나고 나서 처음에는 희생자가 4백여 명이라더니 지금은 6천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아직도 확인되지 않은 시신이 적지 않기 때문에 이 수치는 금세 더 불어날 것입니다. 게다가, 우기에 접어들고 있어서 전염병이 창궐하면 2차 희생자가 더 많아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번 주부터 5월 한 달을 네팔을 위한 특별 기도 기간으로 삼고 기도할 것입니다. 기도 중에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을 따라 구호 헌금에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5월 17일을 구호 헌금의 날로 정했습니다만, 그 이전 혹은 이후에라도 '네팔 지진 구호 헌금'이라고 쓰셔서 봉헌하시기 바랍니다. 모아진 헌금은 연합감리교회 구호기금 UMCOR(United Methodist Committee on Relief)에 보내어 희생자들을 도울 것입니다.
이제, '계절의 여왕' 5월이 시작되었습니다. 5월은 '사랑의 달'이라고 합니다. '어린이 날', '어버이 날' 혹은 '어머니 날' 그리고 '스승의 날'이 모두 5월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을 나누도록 특별한 날들을 정해 놓은 것입니다. 미국의 경우, Memorial Day가 5월에 있습니다. 그것도 역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사랑을 기억하자고 만든 날입니다. 신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신부는 역시 '5월의 신부'입니다. 실로, 5월은 사랑하고 사랑받기에 가장 좋은 계절입니다.
렉셔너리가 정한 이번 주 말씀을 보니, 공교롭게도 사랑에 관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성경 말씀 중에서 사랑에 대해 가장 잘 알려진 말씀이 '사랑장'이라는 별명을 가진 고린도전서 13장입니다. 이와 함께 사랑에 대해 기억해야 할 본문이 오늘 읽은 요한일서 4장입니다. 오늘 예배를 위해서 16절부터 읽었지만, 실은 4장 전체를 읽어야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7절에서 사도 요한은 사랑에 대한 위대한 선언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여기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읽을 때, 우리가 경험하여 알고 있는 사랑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짝퉁'입니다. 참된 사랑에 대한 조잡한 모조품입니다. 성경에서 '아가페'(agape)라는 말로 지칭하는 사랑은 '진품사랑'입니다. 18절에서 말하는 "완전한 사랑"을 말합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런 사랑을 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진품사랑'은 우리의 '짝퉁사랑'과 어떻게 다릅니까? 9절이 이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드러났으니, 곧 하나님이 자기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로 말미암아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진품사랑'은 십자가에서 드러난 것처럼 자신의 전부를 내어 주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아끼지 않고,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런 조건 없이, 마지막 한 방울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 정도가 되어야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그 '진품사랑'을 경험한 다음에야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짝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진품 사랑을 흉내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사랑을 하기 원한다면,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야 합니다.
2.
저는 오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중에 18절에 붙들렸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징벌과 관련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여러분은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진품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노래합니다. '진품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시기하지 않고, 뽑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고, 무례하지 않으며, 이기적이지 않고,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의 특성을 할 수 있는대로 많이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두려움'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마치 바울 사도가 실수로 빼먹은 것을 보완이라도 하는 것처럼 다른 속성은 다 제쳐 두고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피상적으로 보면, 사랑과 두려움은 별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사랑과 두려움이 공존할 수 없다는 말이 얼른 이해가 안 갑니다. 사랑과 미움은 공존할 수 없지요. 하지만 왜 사랑과 두려움이 공존할 수 없습니까? 뭔가 짝이 잘못된 것 같아 보입니다.
호스피스 사역을 시작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zabeth Kuebler-Ross)와 데이빗 케슬러(David Kessler)는 <인생수업>(Life Lessons)이라는 책에서 이 의문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줍니다. 그들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이 느끼는 모든 감정은 그 뿌리에서 두 개의 감정에 닿아 있습니다. 사랑과 두려움이 그것입니다. 행복, 만족, 평안 그리고 기쁨 같은 감정들을 캐어 들어가면 그 뿌리가 사랑에 닿아 있습니다. 반면, 분노, 증오, 근심, 가책 같은 부정적인 감정의 뿌리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는 두 개의 감정 즉 사랑과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도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사랑 혹은 두려움 둘 중 어느 하나가 마음을 지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과 두려움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사랑을 느낄 때는 두려움을 잊어 버립니다. 따라서 두려움을 느낀다는 말은 사랑이 없다는 뜻입니다. 두려움은 사랑이 없을 때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빛이 없는 곳에 어둠이 들어차듯, 사랑이 떠나고 없는 곳에 두려움이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그 마음 안에 오직 사랑만이 자리 잡도록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사랑을 받아 그 마음을 사랑으로 채우고 모든 피조 세계를 사랑으로 돌보도록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진품사랑'이 인간의 마음에서 고갈되어 버렸고, 그 자리에 두려움이 임한 것입니다. 그로 인간은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것을 철학적인 용어로 '존재론적인 불안'(ontological insecurity)라고 부릅니다. 인간으로 지어진 이상 그 영혼 깊은 곳에 스며들어 있는 두려움 혹은 불안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것도 역시 원죄의 증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존재론적인 불안은 참된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떠남으로 인해 생긴 것입니다. 사랑이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버리자 그곳에 두려움이 들어와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18절의 한 문장을 다시 보십시다.
두려움은 징벌과 관련이 있습니다.
여기서 '징벌'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말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떠남으로 인해 우리에게 하나님은 낯설어 지셨습니다. 하나님이 낯설어지면 온 세상이 모두 낯설어집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자주 혹은 가끔 자신이 우주에 내던져진 미아가 아닌가 하는 느낌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낯선 세상에 홀로 내버려졌는데, 과연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대할지 두려워집니다. 하나님을 떠난 것으로 인해 혹시나 하나님이 혹은 이 세상이 자신을 해치지나 않을지 두려워하게 됩니다.
3.
이렇게, 인간은 누구나 이 세상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납니다. 다행히도, 태어난 후에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자라게 되면 그 막연한 두려움 혹은 불안감이 축소됩니다. 이 세상이 자신에게 악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믿습니다. 그러한 믿음이 강할수록 적극적으로 자신을 열고 세상으로 나갑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들도 여전히 '혹시나?' 하는 세상에 대한 의구심을 품고 살아갑니다.
반면, 자라면서 상처와 아픔을 반복하여 경험하면 그 막연한 불안감 혹은 두려움이 확인되고 강화됩니다. 세상이 혹은 신이 자신을 해칠 것이라는 의심이 맞았다고 결론을 냅니다. 이런 사람은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그 안에 숨어듭니다. 상처 받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동굴 안에 숨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두려움은 점점 더 커지고 불안은 증폭됩니다.
이런 점에서 '사랑'의 반대말은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사랑'의 반대말이 '미움'으로 나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이유는 그에 대한 사랑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사랑 받고 싶은 마음이 있기에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말합니다. 미워하다 지쳐서 사랑하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사랑'의 반대말이 '두려움'이라고 말합니다.
실로, 누구에겐가 포기 당한다는 것, 누구에게 버림 받는다는 것, 나에게 중요한 누군가가 나에게서 모든 사랑의 노력을 중지한다는 것, 그것처럼 두려운 것은 없습니다. 그 대상이 중요할수록 두려움은 더 커집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 혹은 '포기'가 맞습니다. 나에게 주어졌던 사랑이 박탈되고 남은 빈 자리에는 두려움이 들어찹니다. 누군가 나에게서 사랑을 거두워갈 때 "나는 사랑받을만한 존재가 아니다"라는 느낌이 압도합니다. 그 순간 두려움과 불안에 짓눌립니다.
제이슨 그레이(Jason Gray)라는 가수가 있습니다. 현대 기독교 음악(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을 하는 작곡가 겸 가수입니다. 이제 40을 갓 넘은 제이슨은 지금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 음악가 중 한 사람으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가 쓴 노랫말과 음악이 듣는 이들의 마음에 깊고 강한 울림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강한 울림을 만들어내는 이유는 그가 걸어온 험한 인생 여정 때문입니다.
그는 미혼모에게서 태어납니다. 다행히 나중에 생부와 생모가 결혼을 하지만, 가정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계속되는 갈등과 다툼 끝에 제이슨이 여섯 살 되던 해 부모가 이혼을 합니다. 얼마 후 어머니가 재혼을 합니다만, 양아버지는 마약과 폭력에 물든 조직 폭력배였습니다. 양아버지는 가족들에게 거침없이 폭력을 행사했고, 견디다 못한 어머니는 다시 이혼을 합니다. 술집에서 노래를 하여 연명하든 어머니는 그 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회심 후에 그의 어머니는 복음 성가 가수가 됩니다. 제이슨도 15세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합니다.
제이슨은 가장 감수성이 예민할 시기에 어린 아이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수 많은 상처와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말을 더듬는 언어 장애(stutter)를 얻었습니다. 자칫하면 깨질듯한 어린 시절에 폭력이 일상이었드니, 그의 마음 속에 쌓인 상처와 아픔이 얼마나 크고 많겠습니까? 어린 아이에게는 부모가 세상의 전부입니다. 부모에게 사랑을 받으면 세상이 나를 환영해 준다고 생각하지만, 부모에게서 상처를 받으면 세상은 나를 원치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존재론적인 두려움'이 증폭되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제이슨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어릴 적에 받았던 상처와 아픔을 치유 받습니다. 치유되고 나서야 제이슨은 자신의 내면에 있던 두려움이 자신을 얼마나 무력화시켰고 또한 결박시켰는지를 알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마음에 들어차게 되자 마음을 온통 채우고 있던 두려움과 불안이 사라졌습니다.
어머니의 재능을 이어받은 제이슨은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음악가로 성장합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묵상하며 주옥같은 노래들을 만들어 부르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인 "Fear Is Easy, Love Is Hard"(두려움은 쉽고, 사랑은 어렵다)는 노래를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이 노래는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요한일서 4장 18절에 대한 제이슨 그레이의 간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노래는 이렇습니다.
4.
Fear Is Easy, Love Is Hard 두려움은 쉽고 사랑은 어렵다
Turn on the T.V. for the evening news They got plenty to fear and nothing to do Another somebody who's gone too far Makes you want to put up your guard Fear is easy, love is hard 저녁 뉴스를 보려고 T.V.를 켜니 두려워할 일은 무척이나 많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없다 또 누군가는 선을 넘어 멀리 갔고 그것을 보고 당신은 문을 걸어 잠근다 두려움은 쉽고, 사랑은 어렵다
So we draw up another dividing line We label each other and we choose a side Peace could come at quite a cost So we won't build a bridge across Fear is easy, but love is hard 그래서 우리는 경계선을 또 하나 긋고 서로에게 표를 붙이고 내 편을 찾는다 평화를 얻으려면 상당한 값을 치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건너갈 다리를 짓지 않는다 두려움은 쉽고, 사랑은 어렵다
Fear will leave you hiding in the dark But love will bring a light into your heart So do not be afraid, do not be afraid 두려움은 당신이 어둠 속에 숨게 있게 만든다 하지만 사랑은 당신 마음에 빛을 비춘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I'm sorry baby is what he should've said But she wouldn't listen even if he did They'll die without forgiveness soon But no one wants to make a move When fear is easy and love is hard "미안해 여보"라고 그는 말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다 해도 그녀는 듣지 않았을 거야 그들은 용서를 주고받지 못한채 곧 하고 죽을지도 몰라 그런데도 누구도 먼저 사과하려 하지 않아 두려움은 쉽고 사랑은 어렵기 때문에
Fear will leave you hiding in the dark But love will bring a light into your heart So do not be afraid, do not be afraid 두려움은 당신이 어둠 속에 숨게 있게 만든다 하지만 사랑은 당신의 마음에 빛을 비춘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It's hard to bring your heart to a world that can break it To offer love to those you're afraid will forsake it But a well-defended heart is always looking for a fight In a lonely war against an endless night But love can bring a light 당신의 마음을 깨뜨릴지 모르는 세상에 마음을 여는 것은 어렵지 당신의 사랑을 버릴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사랑을 주는 것도 어려워 하지만 잘 대비된 마음은 언제나 싸움을 청하지 끝 없는 밤을 끝장내기 위한 외로운 전쟁 속에서 하지만 사랑은 빛을 비추어 준다
Fear will leave you hiding in the dark But love will bring a light into your heart So do not be afraid, do not be afraid 두려움은 당신이 어둠 속에 숨게 있게 만든다 하지만 사랑은 당신의 마음에 빛을 비춘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It comes down to a simple choice Shouting devils or a still small voice One is spreading fear and dread Oh but love has always said Do not be afraid Do not be afraid Do not be afraid Do not be afraid 결국은 간단한 선택이야 아우성치는 악마인지 아니면 세미한 음성 사이인지 두려움과 공포를 퍼뜨리는 아우성인지 아니면 사랑은 항상 이렇게 말하지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5.
제이슨 그레이가 쓴 이 노랫말을 읽고 또한 영혼 깊게 호소하는 음악을 듣고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적어도 세 가지 진실을 깨닫고 자신을 깊이 돌아 보아야 합니다.
첫째, 우리 모두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두려움의 정체를 보았기를 바랍니다. '진품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분리됨으로 인해 생겨난, 낯선 신과 낯선 세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말입니다. 언젠가 알지 못할 어떤 초월적인 힘이 나를 공격할 것 같은 두려움, 말입니다. 신이니 천국이니 하는 것은 다 헛소리라고 부정하고 살지만, "언젠가 그 신 앞에 서서 신을 부정하고 인생을 허비한 것에 대해 책임 져야 한다면 어찌지?"라는 두려움, 말입니다.
그것에 더하여, 그동안 살아오면서 겪은 실패와 상처와 거부와 냉대와 폭력으로 인해 우리 안에 쌓인 두려움을 보았기를 바랍니다. 나는 지금의 나대로 환영받고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고 하는 생각에서 오는 두려움, 말입니다. 내가 그래도 몇몇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는 이유는 나에게 무엇인가가 있어서 그렇지, 그것이 없어지면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말입니다. 과거에 받은 거부의 경험 때문에 더 이상 누구에게도 마음을 활짝 열지 못하게 만드는 두려움, 말입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이 클수록 오히려 멀리하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강할수록 그 사람에게 못되게 굽니다. 돌아 보니, 마음 속에 숨겨진 두려움이 나의 생각과 결정과 말투와 행동을 결정해 왔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둘째,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일상처럼 겪은 상처와 폭력으로 인해 제이슨의 영혼 안에서 굳어진 두려움의 돌덩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때 녹아지고 해체된 기적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어릴 적에 얼마나 두려움이 컸으면 언어 장애가 생겼겠습니까? 지금도 말을 할 때는 여전히 말을 더듬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노래할 때는 언어 장애가 사라집니다.
여러분 중에는 제이슨처럼 두려움의 문제가 심각한 분들도 있을 것이고 그 문제를 별로 느끼지 못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일 뿐입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의 영혼 깊은 곳에는 하나님을 떠나 삶으로 인해 생긴 '존재론적인 불안'이 똬리를 틀고 자리잡고 있습니다. 또한 삶의 여정에서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로 인해 만들어진 두려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 걸음은 십자가 앞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진품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경험하면 낯선 신을 향해 "아빠"라고 부르게 됩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고 나면, 이 세상이 더 이상 낯설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하늘 아빠'가 만들어 놓으신 놀이터로 변합니다. 그 놀이터에 때로 불량배들이 나타나 행패를 부리지만 '하늘 아빠'가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것을 압니다. 그 믿음이 제이슨이 말한 "잘 대비된 마음"(Well-defended heart)입니다. 그 마음을 가지면 제이슨이 노래하는대로 내 마음을 깨드려버릴 수 있음을 알면서도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고, 내 사랑을 버릴 수 있음을 알면서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행할 수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진품사랑'을 본받아 이제는 참된 사랑을 실천하기를 소망하고 다짐하고 또한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전에 우리가 사랑이라고 이름짓고 행하는 일들은 전혀 사랑이 아닙니다. 기껏해야 '친절'이요 '선대'입니다. 나에게 잘 하는 한도 안에서 혹은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도 안에서 잘 해 주는 것입니다. 혹은 '욕망'이요 혹은 '집착'입니다. 그런 것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서 사랑 비슷한 것이 나오려면 먼저 십자가 앞으로 나와 하나님의 '진품사랑'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We love because He first loved us.
인간은 누구나 사랑에 배고프고 사랑에 목마릅니다. 그렇기에 곁에 있는 사람을 진실되게 사랑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한 일입니다. 겉으로 보면 다들 행복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제이슨의 유년기와 청소년기처럼 일상이 상처와 아픔으로 가득 차 있는 인생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가정이 많습니다.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이며 얼마나 큰 죄를 짓는 것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모릅니다. 오늘 성령께서는 사도 요한의 말씀과 제이슨의 노랫말을 통해 우리를 깨우쳐 주십니다. 사랑하라고! '진품사랑'을 본받아 참되게 사랑하라고!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사랑에 깨어나십시다. 사랑의 계절인 5월만이 아니라 우리의 남은 인생이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의 힘으로 움직여지기를 소망하십시다. 곁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숨겨져 있는 두려움과 불안을 확인시키고 증폭시키는 못된 삶을 이젠 그만 합시다.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맛볼 수 있도록 말하고 행동하기를 소망합시다. 그것이 사랑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이 점에 있으니, 곧 우리로 하여금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담대해지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신대로 또한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기 때문입니다(17절).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어떻게 사셨습니까? 그분 안에 있는 '진품사랑'으로 오직 사랑만 하며 사셨고 사랑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 때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두려워 떨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사랑'의 반대말은 '두려움'이고, '사랑'의 동의어는 '담대함'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고 그 사랑 안에 거하면 사랑이 쉽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에게는 제이슨의 노랫말처럼 두려움은 쉽고 사랑은 어렵겠지만, 하나님의 '진품사랑'을 품은 사람에게는 사랑이 쉽습니다. 우리에게 사랑이 아직 어려운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알아 사랑이 점점 쉬워지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주님이 사신 것처럼 살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진품사랑'의 원천이신 주님
주님의 십자가에 저희의 마음을 엽니다.
그 완전하신 사랑을 비추어 주시어
저희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두려움을 몰아내어 주소서.
저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오직 사랑에서만 나오게 하시고
오직 사랑을 위해서만 사용되게 하소서.
사랑의 능력으로
이 땅에서는 담대하게 살고
마지막 심판대에 설 때에도 담대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