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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7장 12절 ~ 17절
O 내가 유다의 시드키야왕에게도 이 모든 말씀들대로 고하여 말하였느니라. 당신들의 목을 바빌론 왕의 멍에 아래로 가져가 그와 그의 백성을 섬기소서. 그리하면 살리이다. 12)
I spake also to Zedekiah king of Judah according to all these words, saying. Bring your necks under the yoke of the king of Babylon, and serve him and his people, and live. 12)
왜 유다민족에게 이방인인 바빌론왕 느부캇넷살에게 굴욕적으로 복종하라고 하셨을까에 대한 의문이 듭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는 유다가 바라지 않는 것을 제시하신 것으로 느껴집니다. 만약 이집트에 굴종하라고 했으면 시드키야왕은 그대로 순종하였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순종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뜻에 순종함인 것입니다.
나의 뜻과 다른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나의 뜻을 꺽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실행하는 것이 진정한 순종인 것입니다.
진정한 순종을 보시기 위하여 주께서 느부캇넷살왕을 내세우신 것은 유다의 뜻과 정반대되는 것을 제시하시고 그 모습을 보신 것으로 느껴집니다. 이러한 말씀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마음에 맞는대로의 신앙에 대한 경고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내 마음에 드는 것은 순종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갖은 핑계와 합리화를 통하여 거절하고 있지 않은 지 돌아봐야 합니다. 이는 곧 유다에게 느부캇넷살이라는 마음에 들지 않는 조건이 제시된 것처럼, 우리에게도 불편한 조건이 주어졌고, 주어질 것입니다.
백신 사기극도 우리에게 주어진 불편한 조건 제시됨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백신을 거부함으로 매우 이기적이고, 괴상한 사람 취급을 받고, 사람에 따라서는 생계의 위협까지 겪었습니다. 이러한 것이 우리의 뜻이 아닌 것처럼 느부캇넷살에게 굴복함은 유다가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백신도 조건 제시였고, 그에 따른 결과도 주어졌습니다.
유다가 바빌론에 굴복하지 않음의 결과는 참혹한 고통의 죽음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백신이라는 조건은 그것을 거부하지 못함으로 우리의 육이 참혹한 고통과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건들이 계속해서 주어지고 그 결과에 따른 댓가도 우리가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건의 그 시작은 선악과였고, 선악과의 실패를 바로잡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다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는 조건을 다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중간에 그러한 본질의 믿음의 형식 표현인 짐승의 표라는 조건도 주셨습니다. 또 그 사이에는 백신이라는 예비조건도 주신 것입니다. 백신이라는 조건에 대하여 사람들의 선택은 나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결과도 나뉘는 것입니다.
백신에서 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보듯이 짐승의 표에서도 똑같은 결과가 드러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결과도 모두가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번의 조건을 주시면서 원하시는 것은 순종이고, 여러번을 주시는 것은 우리에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순종은 나의 뜻을 죽여서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말씀에 대한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시드키야가 예레미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미련을 가졌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자신의 계획과 뜻을 신뢰하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즉 시드키야가 보기에는 그저 느부캇넷살은 강력한 이웃국가의 왕일뿐이고, 운이 좋으면 도망쳐서 후일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에 미련을 놓치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은 빈틈없이 그대로 이루어짐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습니다.
시드키야의 요행을 바라는 마음은 지금 우리에게도 있어서 내 자신의 계획을 합리화하고 말씀을 외면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당신도 알고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앞에 요행이란 없습니다. 백신을 맞고 아무일이 없는 것은 잠시 일뿐이며, 짐승의 표를 맞고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음은 파국의 대기기간일 뿐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지옥에 가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다만 백신은 조금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백신은 제시된 조건이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숭배자들이 낙태아의 세포를 배양하여 사람들 몸속에 넣어가며 저주를 하고, mRna백신으로 유전자 변형을 유도 했지만 그들은 악하지만 불완전한 사람인 것입니다.
지금 일어나는 백신후유증은 원래 예전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즉 백신은 원래부터가 기만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백신에는 알루미늄과 수은과 유리 파편이 들어가 있었으며, 백신을 맞고 심장 이상을 호소하는 일은 이번 코로나 백신부터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백신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는 것은 대규모 접종에 따른 현상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백신을 맞고도 치명적인 혈전이 발생하지 않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자기의 수명대로 그대로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인류는 계속 백신이라는 속임수를 겪으며 살아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대규모의 백신 접종쇼는 짐승의 표에 대한 체험을 시켜주신 것이며,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확실한 조건 제시인 짐승의 표를 사람들이 분별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왕과 왕의 백성들은 주께서 바빌론 왕을 섬기지 아니할 민족에게 말씀하신 것같이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으려 하나이까? 13)
Why will ye die, thou and thy people, by the sword, by the famine, and by the pestilence, ans the LORD hath spoken against the nation that will not serve the king of Babylon? 13)
위 말씀에 보면 바빌론 왕을 섬기지 않을 민족이 나옵니다. 그런데 주께서는 이 민족들에게도 주의 경고의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이는 주의 공의입니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니라. 너는 묶는 띠와 멍에를 만들어 네 목에 걸고
그것을 에돔 왕과 모압 왕과 암몬인의 왕과 투로 왕과 시돈 왕에게 보내되 예루살렘으로 유다의 시드키야왕에게 온 사신들의 손에 들려 보내고
예레미야 27장 2절 3절
주가 말하노라. 바빌론 왕인 그 느부캇넷살을 섬기지 아니하는 민족과 왕국과 그들의 목으로 바빌론 왕의 멍에를 메지 아니하는 민족을 내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그의 손에 의해 그들을 진멸할 때까지 벌하리라.
예레미야 27장 8절
에돔 왕과 모압과 암몬인의 왕과 투로왕과 시돈왕에게도 주의 경고의 말씀이 예레미야를 통하여 전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다는 것을 주께서도 아시고, 예레미야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시드키야의 마음 상태는 그러한 이방인들의 마음상태와 다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께 고하여 말하기를 "너희는 바빌론 왕을 섬기지 아니하리라." 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경청하지 마소서. 이는 그들이 거짓으로 당신들께 예언함이니이다. 14)
Therefore hearken not unto the words of the prophets that speak unto you, saying, Ye shall not serve the king of Babylon: for they prophesy a lie unto you. 14)
너희는 바빌론 왕을 섬기지 않는다. 라는 말은 시드키야왕이나 유다민족들에게 달콤한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자존감을 지켜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전의 기명들도 바빌론으로부터 다시 가져오리라라고 하는 말까지 나옵니다. 사람의 신앙으로 보면 유다가 바빌론에게 굴복을 이겨내고 조상들이 물려준 주의 전의 기명들을 다시 되찾아 오는 것은 아주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달콤한 거짓말입니다.
이는 큰 교회를 건축하고, 출석하는 교인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부흥은 사람의 신앙의 확장일 뿐인 것입니다. 교회가 커지는 것은 신앙의 바른 방향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것이 바빌론에 항복을 거부하는 것처럼 사람의 의지가 들어가 있다면 그것은 절대로 좋은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작은 골방에서 주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대형교회로 부흥한뒤에 각종 상황에 매달려 주의 뜻을 순종할 수 없게 되는 것보다 나은 것입니다.
바빌론에 굴복하여야 된다는 것이 예레미야의 주장이고, 바빌론을 물리치고, 빼앗겼던 주의 전의 기명들을 되찾아와야 한다가 당시의 선지자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이러한 두 주장을 구별하는 것이 분별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또 어떤 것이 하나님이 보내지 않았는데 스스로 말하는 것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것일까요?
O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을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은 약탈하는 이리들이라.
너희는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게 되리니, 사람이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거둘 수 있겠느냐?
마태복음 7장 15절 16절
위 말씀에 나오는 거짓 선지자들이 입고 나아오는 양의 옷이 바로 우리를 속이기 위하여 듣기 좋은 말을 의미합니다. 듣기 좋은 말은 사람을 속이는 말입니다. 지금도 유트부에 보면 많은 돈독이 오른 사람들이 조회수를 위하여 사람들이 듣기를 원하는 말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확증 편향입니다. 즉 증거로 확인된 사실보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원하는대로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당시의 유다사람들은 바빌론을 물리치고 빼앗긴 주의 전의 기명들을 되찾아와야 한다는 말이 그들의 귀에 통쾌하고 시원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한국사회에 독버섯처럼 자라나는 유트부의 확증편향성의 왜곡은 사람들을 극단적으로 만들고,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도록 속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실을 제대로 보려면 나의 생각 즉 나의 확증편향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와 당시의 선지자들도 그 열매, 즉 사실관계로 구분이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 자신의 말을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워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에게도 많은 추종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생각하고 믿어버리는 유다왕과 그의 백성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것입니다. 진실을 외면하고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대로 믿어버리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에게 속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당시의 시드키야와 그의 백성들에게 없었던 성경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의지 이전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항상 생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백신 부작용이 없는지를 접종자가 어떻게 스스로 알수있으며, 백신 1차를 맞고 죽거나 다치지 않았다면 2차 3차도 문제가 없다고 어떻게 단언합니까? 일반인의 의료행위의 권유는 현행법상 불법인데다 결국 성도들에게 러시안 룰렛을 권유하는 것이 됩니다. 백신에 대한 진실이 드러나는 지금 자신의 무능과 좋지 않은 열매에 대해서 회개하지 않음도 그들의 열매인 것입니다.
위의 사람의 말이 틀리고 잘못되는 이유는 사람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틀린 말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지 않은 자들이며, 동시에 양의 옷을 입은 이리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거짓된 열매를 보아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이는 진실보다 자신이 원하는대로 생각하고 믿기를 원하는 마음때문입니다. 시드키야의 고집이 바로 이런 모습이며, 시드키야의 고집은 비참한 결말을 맞게 됩니다.
이러한 양의 옷을 입은 자가 내면의 우리안에도 있습니다. 그것은 형식의 예배를 강조하는 주일 성수와 십일조입니다. 교회에 나가는 것과 말씀에 기록된 십일조를 하는 것이 안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입니다. 주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를 외면하고 이런 것을 바라는 마음은 형식의 예배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본질의 불순종에 대한 양심의 책망을 깊숙히 감춰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곧 본질의 불순종을 감추기를 원하고 그렇게 생각하고 믿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한국교회성도들이 성경책은 읽지 않으며 교회예배 참석은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교회문화에 더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의 결과는 불을 종이로 감춘다는 중국속담처럼 시드키야의 처한상황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는데도 그들은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니 내가 너희를 몰아내고 너희와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을 멸망케 하리라." 하셨나이다. 15)
For I have not sent them, saith the LORD, yet they prophesy a lie in my name; that I might drive you out, and that ye might perish, ye, and the prophets that prophesy unto you. 15)
나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저에게도 있습니다. 전도를 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서 저의 의지와 욕심이 들어가면 그 결과 즉 열매가 좋지 못함을 느낍니다. 이는 저에게서도 일어나는 일이지만 모든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일로 느껴지며, 그런 모습이 목격이 되는 것은 제 자신에게서나 다른 사람에게서나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람의 뜻은 악하며, 선을 이루지 못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뜻이 선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것이 가장 좋은 선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저도 글을 쓰면서 이글이 저의 의지와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지 항상 고민하게 됩니다. 글에 대한 의무감을 버리려하고, 쓰여지는대로 그대로 하려고 합니다.
내가 또 제사장들과 이 모든 백성들에게 고하여 말하였느니라.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들에게 예언하여 말하기를 "보라, 주의 전의 기명들을 이제 곧 바빌론으로부터 다시 가져오리라." 하는 너희 선지자들의 말에 경청하지 말라. 이는 그들이 너희에게 거짓을 예언함이니라. 16)
Also I spake to the priests and to all this people, saying, Thus saith the LORD; Hearken not to the words of your prophets that prophesy unto you, saying, Behold, the vessels of the LORD'S house shall not shortly be brought agains from Babylon: for they prophesy a lie unto you. 16)
너희(you)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너희(you)는 유다의 왕과 그의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너희는 그들에게 경청하지 말고 바빌론의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살리라. 어찌하여 이 성읍이 황폐케 되어야겠느냐? 17)
Hearken not unto them; serve the king of Babylon, and live: wherefore should this city be laid waste? 17)
하나님의 말씀이 목회자들에게 주장에 있지 않고, 이방인왕에게 섬기라는 한 명의 선지자인 예레미야에게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 자신의 신앙적 견해는 사람의 의지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신학적인 견해로는 당장 바빌론을 물리치고 주의 전의 기명들을 되찾아오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으로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주장으로는 우리가 멸망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만이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신앙이 사람의 의지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의 전통이 되며,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이 없는 파멸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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