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을 믿는다는 것, 유일신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 말씀 본문 : 출애굽기 20:3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
어제 영화 <듄 2>를 보고 왔습니다. 사람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를 만나고 나서 어떻게 노예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인지. 사막이 녹지가 되는 꿈, 그런 그들의 오랜 소망을 지금 당장 힘으로 실현시켜줄 메시야가 가져오는 세상이란 결국 어떤 것인지도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대타자의 현존을 향한 "이성의 종교적인 중지"는 매번 주체의 희생을 요구한다는 말씀을 스크린을 통해서 보게 된 것 같았습니다. 그들 부족과 땅의 번영, 그리고 적의 섬멸을 향한 광기는 생명과 삶을 티끌처럼 쓸어가고 있었습니다.
작년, 성서세미나를 통해서 포이에르바하가 이런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이미 배운 적이 있었습니다. 인간이 자신이 가진 고귀한 능력을 신에게 투사한 것이 기독교 신이라고 했었지요. '자신의 능력을 신에게 투사할수록 자신은 초라해진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무섭고 심판하는 존재다. 인간은 끊임없이 그 하나님 두려워 떨면서 자기 자신이 스스로 자유스러운 존재로서 자신의 삶을 도모하는 능력을 하나님에게 내맡겼기 때문에 그 앞에서 무력한 존재, 끊임없이 재단에 바쳐야 하는 존재가 된다. 종교가 자신에게 제공할 구원을 빌미로 현실의 삶을 착취당하고 삶 자체가 빈곤해 지는 것이다. '하고요. 기독교 뿐 아니라 종교에 대해서 비판하는 사람들은 종교가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것에 대해서 비판한다고도 했습니다.
종교를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 입각해서 설명하면서, 소위 초자아로 형성된 아버지에 붙박혀 있는 행위라고, 강박행동이라고 했던 프로이트에 대한 언급도 생각이 났습니다. 이런 것들이 현실의 종교적 행태라고 했던 내용도요.
그러면서 그때 우리도 그렇게 신앙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기를, 공동체를 돌아보면서 반성해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기독교가 기독교인을 노예로 만들고 있다면 우리도 그 비판에 참여해야 한다. 어떤 면에서 기독교 신앙에서 그런 반성하는 태도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진리' 진리를 향한 용기. 질문하지 않으면 개혁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신앙은 질문을 독려하는 힘. 질문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허위를 믿게 된다.'고 했습니다.
요 며칠 출애굽기 20장 3절 말씀으로 교인주관예배를 준비하면서 나는 왜 교회 안에서 이미 다 듣고 나누고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말씀들을 다시 접할 때마다 매번 생경하고 모르겠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을 '신'을 통해 지금 당장 쉽게 얻고 싶다는, 나의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지난 2월 13일. 목사님이 페이스북에 공유하신 글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이 쓰신 그 글의 마지막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독교가 유신론이라고 생각하는 신앙인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에 자신들은 유신론자라고 안이하게 생각한다. 그들은 확률이 거의 없는 내기를 걸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수한 신들 중에 단 '하나'이기 때문이다. 최근 종교다원주의자들은 무수한 신들이 '모두 하나'라는 데 내기를 걸고 있다. 이런 생각이야말로 십계명은 안중에도 없는 완벽한 무신론이 아닐까? 십계명은 분명 인간이 섬기는 무수한 신들이 있으며,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는 '나'로 지칭된 단 하나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기독교는 유신론이라고 생각하는 거개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이 바로 그 단 하나, 유일신이라고 편한대로 믿는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야말로 제일계명이 경계하는 것이다. 오히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는 계명은 네가 나라고 믿고 섬기는 신을 부정하라는 것, 네가 섬기는 신은 내가 아니라는 것, 유일신 신앙의 확률은 무신론 속에서 거의 적중된다는 것이다. 네가 신으로 섬기는 존재를 부정하고 또 부정하라! 무신론을 고집하라! 그리고 그처럼 철처한 무신론 속에서만 마주칠 수 있는 공백과 대면하라! 오로지 철저한 무신론자만이 대면할 수 있는 공백을 만난다면 너는 단 하나인 나를 섬기고 있는 것이다.
근대성은 비록 퇴행하고 있지만 나는 아직 절망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말기인 이 세계에 온갖 잡신들이 날뛰고 있지만 나는 어떤 신에게도 절하지 않을 것이다. 근대적 정신도 그렇지만, 제일계명이야말로 지극한 불가능성을 통해 드러나는 구원의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성서세미나에서 목사님이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습니다. 신을 믿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어떤 신비스러운 존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신을 믿는 것일까. 하고요. 그리고 작년 부활절에 목사님이 하신 말씀도 이 질문에 연결해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사망하는 순간을 기록하는 마가복음 16장 33~41절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예수의 절규는 말 그대로 '타자의 부재'를 선언한다. 예수가 숨지는 순간 성전 장막은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진다. 이 장막은 인간이 견딜 수 없는 하나님의 타자성을 가리는 장치였다. 이 타자 하나님은 항상 스크린의 효과로서만 존재했다. 신은 장막 너머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장막으로 가려짐으로써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성전 장막은 환상 스크린이다. 십자가의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장막의 효과로서 존재하는 하나님을 부정한다. 신앙은 환상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무신론적 계기를 갖고 있다. 신앙이 끊임없이 자기 변화를 하나님이 그러신 것처럼, 신앙이 단절을 통해서 도약하거나, 도약이 아니더라도, 변하는 어떤 지점을 내포한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라고만 철썩같이 믿는 존재가 아니라, 어디에 있냐고 항의하고 절망할 줄 아는 존재여야 한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이 세계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가치체계와 심각하게 맞서는 삶을 선택하는 것.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실재'와 대면하는 경험. 하나님께서 지켜주는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존재하지 않는 세계와 대면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십계명 중에서도 제일계명은 가장 간단하다고 생각했던 구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웃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성경공부를 하면서부터 이 구절이 복잡하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세속적인 내 시선으로는 이런 신앙의 삶이란 너무나 두려운 것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매혹하는 이 말씀이 이웃교회라는 이 공동체 안에서 나를 어디로 이끌 것인지 삶으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질문이 또 생겼습니다^^;;;
[질문1]
라깡의 대타자와 프로이트의 초자아, 거의 같은 개념 맞지요? "그러나 진정한 세계의 밤에는 희생할 주체조차 존재하지 않습니다. 희생할 것이 있다면 아무것도 중지된 것은 없습니다." 이 문장은 제게 많이 많이 어려웠습니다. ㅠㅠ 공백 속에서 진리를 발견한 존재가 주체 아닌가요? ㅠㅠ
[질문2]
실존과 현존은 뭐가 다른가?
[질문3]
근대적 정신이란 대체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