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안에는 정죄함이 없다
롬 8:1-4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1-4 / [성령이 주시는 생명]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죄받는 일이 결코 없습니다. 2)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능력이 죄와 죽음의 악순환에서 나를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율법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죄의 지배를 벗어나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율법을 다 지킬 수도 없거니와 또 실제로 지키려 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다른 계획을 실행하셨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사람의 몸으로 보내 우리의 죄를 없앨 희생제물로 삼으심으로써 우리를 지배하는 죄를 멸하신 것입니다. 4)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산다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며 사는 것이며 육신의 죄를 벗어나는 길입니다.
8장은 ‘정죄함이 없다’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끝납니다. 시작인 1절의 ‘그러므로’는 본 장이 1장부터 7장까지 논증의 결론임을 보여줍니다.
정죄함이 없나니(1) 바울은 1-7장까지의 논증을 통해 “정죄함이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경제적인 개념으로서 갚아야 할 빚이 모두 청산되었다는 뜻입니다. 죄인이 죄의 값을 청산할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그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죄의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이 정죄함이 없는 상태가 되는 조건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믿음으로 예수와 연합되었다는 의미합니다(롬 6:5). 머리가 물 밖에 있는데 발이 익사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수와 연합한 자는 정죄당하지 않습니다. 이는 믿는 자에게 실제로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정에서 무죄 선언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법(2) 바울은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죄와 사망의 법은 강합니다. 누구도 죄를 이기지 못하며 모든 무덤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러나 이런 죄와 사망의 법보다 성령의 법이 훨씬 강합니다. 죄와 사망이 믿는 자를 계속 지배하지 못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이 예수 안에서 이미 힘을 잃었습니다. 1절은 믿는 우리가 정죄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선언하며, 2절은 우리가 죄와 사망의 능력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육신의 연약함(3-4) 율법은 많은 기능을 합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며 안내하며 하나님의 성품을 가르쳐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율법이 우리에게 힘을 주지는 못합니다. 율법이 기준을 제시하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능력을 우리에게 주지는 못합니다. 율법이 의롭지만 우리 육신은 연약합니다. 이는 마치 햇빛이 눈 먼 맹인을 보게 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해는 그 기능을 다하지만 햇빛을 받는 사람에게 볼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우리 연약한 육신에게 의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육신의 모양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정죄를 당하신 예수의 희생으로부터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이 새 출발을 인도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 믿는 자들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기에 믿는 자들은 성령을 따라 율법의 요구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적용: 예수의 십자가 보혈은 지난날 나의 부끄러운 과오를 깨끗이 지워줍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삶의 전환점이 됩니다. 당신은 십자가에서 전환점을 마련하십니까?
출근 시간 만원 지하철. 유모차에서 계속 우는 아이와 난처한 표정의 엄마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픈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는 길이었습니다. 승객들로 빼곡한 지하철인지라, 엄마는 아이의 울음을 멈추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아픈 아이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고, 엄마는 승객들의 짜증 섞인 눈길이 두려워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한 채 죄인처럼 아이만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한 남성이 다가오더니, 자신의 휴대폰으로 아이가 좋아할 만한 영상을 틀어 유모차 앞에 놓았습니다. 그리고 대학 점퍼를 입은 한 여성은 자리를 아이 엄마에게 양보했으며 누군가는 아이가 보채다 벗겨진 신발을 주워서 신겨주기도 했습니다. 따뜻한 눈빛과 행동으로 꽁꽁 얼었던 아이 엄마의 마음을 녹여준 그들은 봄을 닮아 있었습니다.
< 설 교 >
빚진 자 인생
롬 8:1-15 / 이기복 목사
감사의 달 11월은 가을 단풍이 마지막 절정을 이루고 겨울을 준비해야 하는 계절입니다. 교회에서는 일 년 중 가장 크고 성대한 절기인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달입니다. 이맘때가 되면 가을걷이를 마치면서 따스한 불과 따뜻한 차가 생각나고 그리운 사람들이 많이 생각나는 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편지를 쓰기도 하며 지난날의 사진첩을 열어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전화나 편지를 통하여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은 계절이기도 합니다.
이 의미 있고 좋은 계절이요 전도하는 계절에 “빚진 자 인생”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롬 13:8절에 보면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도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말씀의 의미는 우리가 평생을 살면서 사랑의 빚을 지고 살 수 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즉 사랑의 빚은 질 수 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함을 받은 사람이다”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내가 다 빚진 자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의 빚을 진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할 수만 있다면 당시의 기독교를 가장 핍박하는 나라요 세계에서 가장 큰 힘을 자랑하던 로마에 가서 “할 수 있는 대로 복음을 전하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복음 전파의 꿈과 기도가 이루어지길 원하여 자진하여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인간을 가리켜 피조물의 왕관이요 만물의 영장이라고 합니다만 인간만큼 사랑의 빚을 지고 살다가 가는 존재도 흔치 않습니다. 양은 태어나 20일이면 어미에게서 젖을 뗀답니다. 그리고 스스로 초장에서 풀을 뜯으며 성장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1년이 지나야 걸음마를 시작하고 적어도 30년이 지나야 자립을 합니다. 가장 손이 많이 가는 피조물이 바로 인간입니다. 또 동물들은 죽으면서 살과 가죽을 모두 인간에게 주고 갑니다. 나무도 죽으면 썩어 거름이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죽으면서도 가장 많은 경비가 들고 수많은 사람들의 신세를 지고 세상을 떠납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사람들에게 사랑의 빚을 지고 삽니다. 빚진 자란 말은 남의 신세를 져야 하는 존재이고 은혜로 살아감을 말합니다.
1. 우리는 하나님께 빚진 인생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뜻입니다. 좋은 의미에서 빚을 졌다는 말은 사랑과 은혜를 입고 산다는 말입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없이는 한 시도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다 자기가 잘나서 잘 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조상의 은덕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시대를 잘 만났기 때문이다 아니면 운이 좋아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나의 나 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가 되기 전에는 아주 교만하고 누구보다 좋은 가문의 배경과 철저한 율법주의자였으며 당시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학자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공부를 많이 한 것을 자랑하였습니다. 젊어서부터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위치에서 큰 소리를 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자기가 잘나서 성공한 것으로 생각을 하고 교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회심 사건을 경험한 후에는 완전히 거듭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의 눈을 떴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지극히 겸손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면서 하나님 앞에 빚진 자의 자세로 살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여기에 진정한 매력이 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않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이라”는 찬송가 가사와 같이 고백을 하고 찬송하게 됩니다. 은혜를 받고 세상을 보면 세상이 달라져 보입니다. 요즈음처럼 맑고 청명한 가을하늘만 보아도 은혜가 되고 누렇게 익은 가을 들판을 보면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게 됩니다. 주렁주렁 맺힌 과일나무의 탐스런 과일들을 보아도 감사하게 되고, 가을의 아름다운 단풍을 보면서 또 단풍잎이 떨어져 수북이 쌓인 길을 걸으면서 저절로 찬양을 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됩니다.
2.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빚진 인생입니다.
본문 14절에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첫째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살았고 사명을 감당하였지만 더 나아가 모든 사람들에게도 다 빚진 자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남에게 돈을 꾼 일이 없습니다. 남에게 무슨 큰 신세를 진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을 뜨고 볼 때 모든 사람들에게 빚진 자라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 받은 사람과 은혜 받지 못한 사람과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별개가 아닙니다. 그러나 은혜 받지 않고 인간적인 생각과 감정으로만 보면 사람들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경쟁자 아니면 적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유대인들은 모든 이방인들을 적과 같이 생각하고 무시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빚을 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모님의 희생적인 사랑과 헌신 때문에 산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날과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빚을 지고 삽니다. 성장하면서 선생님의 은혜, 친구들의 배려, 나중에는 배우자를 만나고 늙어서는 자식의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병나면 병원 의사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사람들의 신세와 사랑의 빚을 지며 사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고 베풀고 배려하고 용서하고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주의 종이나 성도들에게 많은 사랑의 빚을 지고 삽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을 소중히 여깁시다. 사람을 그 무엇보다 사랑합시다.
3. 우리는 아름다운 대자연 앞에서도 빚진 인생입니다.
사람은 자연을 떠나 살 수 없고 자연의 혜택을 받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날마다 눈을 뜨면 대하는 것이 자연입니다. 대한민국 백성으로 감사해야 할 조건이 많지만 그 중에도 우리나라는 1년 4계절이 있음을 감사할 일입니다. 우리는 1년에 하나님의 창조의 위대하심을 계절의 변화와 함께 경험합니다. 우리교회는 대도시 중심부에서 공원을 낀 자연 속의 교회입니다. 이렇게 좋은 천혜의 장소에 교회를 세우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크고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나와 자연 속에서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다 경험하고 누리니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지금도 우리 주변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4가지를 값없이 주셨습니다. 그것은 단 한 가지만 없어도 살 수가 없습니다. 첫째가 햇볕입니다. 빛이 없으면 인간은 물론 만물이 생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냥 주셨습니다. 둘째가 물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중부지역이 가뭄으로 큰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물이 없으면 생물들이 생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물도 그냥 주셨습니다. 셋째는 공기입니다. 공기가 없으면 한 시도 못삽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껏 공기를 호흡하며 평생을 살아갑니다. 넷째는 대지(땅)입니다. 우리는 평생 땅에서 살다 땅에 묻힙니다. 땅에서 나는 식물을 양분으로 먹고 삽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소중하고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자연을 훼손하고 파괴하여 재앙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에게도 빚을 진 인생임을 알고 자연을 잘 보호하고 관리해야 합니다.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곳이 이 땅이고 살다가 죽어 묻히는 곳도 바로 자연입니다. 날마다 숨 쉬고 마시고 아름다운 광경을 보면서 사는 모든 것이 자연의 혜택입니다.
4. 우리는 복음의 빚을 진 인생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의 빚진 자라고 고백을 하고 15절에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을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이어 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을 한 후 자신이 복음의 빚진 자임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오직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생명도 아까워하지 않고 복음의 전사로 살았습니다. 구원을 체험한 성도는 이 복음을 자기 혼자만 알고 믿고 구원받아 살 수가 없습니다. 이 귀한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선교사들이 그 어려운 선교사의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지금부터 130년 전 대한민국에 복음을 전할 선교사가 필요하다고 할 때 지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때 다른 나라로 선교를 떠나려고 준비하던 아펜젤러에게 한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길 권면한 결과 신혼의 젊은 선교사가 대한민국에 와서 감리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오늘날 세계에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대한민국의 교회가 된 것입니다. 70년 역사 속에 하늘문교회를 이룬 것은 성도들이 복음의 빚진 자의 심정으로 복음을 전하고 헌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9:16절에 “ 내가 복음을 전할 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그 열정과 심정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고 살 수가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다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질지라도 원한다고 할 정도로 강렬한 동족구원의 믿음을 고백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그냥 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복음을 전하여 주었고 누군가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금번 기회에 복음의 빚진 자의 심정으로 복음을 전하는 기회가 됩시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에게, 역사와 자연 앞에 그리고 복음의 빚진 자임을 깨닫고 사랑으로 이 빚을 갚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11월 8일은 우리에게 축복의 날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실 날입니다. 하늘문이 열리는 날입니다.
생명의 영, 해방의 영
로마서 8:1-2 / 이종철 목사
결코 정죄함이 없다
어떤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주민등록 등본을 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몇십 년 전 교회 사택에 들어가면서 전세금에 여유가 생겨서 다른 사람의 조언을 듣고 농지를 구입했던 적이 있습니다. 농지는 아무나 매입할 수 없고 현지인만 가능하기 때문에 주소를 잠깐 이전을 했습니다. 소위 위장전입을 한 것입니다. 공직자들 청문회에서 가장 많이 지적되는 죄목입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문제가 생겼습니다. 옛날 주민등록 등본에는 과거 주소를 이전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등본을 뗄 때마다 그 주소가 눈에 띄었고 마치 자기를 죄인으로 정죄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목사님이 등본을 떼었다가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과거의 주소 기록이 깨끗이 사라지고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그 해에 주민등록 전산화가 되면서 옛 주소의 흔적이 사라졌던 것입니다. 물론 여전히 기록들은 컴퓨터 안에 다 남아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게 된 것, 그것만으로도 기뻤던 것입니다.
이것이 정죄함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과거의 기록이 깨끗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죄가 잠시 감추어지는 것도 이처럼 기쁜데 우리 인생이 지은 수많은 죄들을 다 용서받는다면 그 기쁨은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 성경에서는 죄를 빚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께 빚을 지는 것과 같습니다. 빚이 조금만 있어도 마음에 걸리는데 어마어마한 빚을 평생 동안 갚아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인생에는 더 이상 기쁨이 없고 우울함과 무거움만이 지배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빚을 다 무효로 한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때의 기쁨과 자유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정죄함이 없는 은혜입니다.
정죄함이 없는 은혜에 대해서는 일찍이 다윗이 경험한 바 있습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와 불륜을 행하고 그 남편된 우리야를 살인교사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 죄에 대한 대가로 불륜의 아이가 죽었고 자신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고 몹쓸 짓을 하는 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의 죄가 다윗의 인생을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 다윗은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선물은 죄사함의 복이며, 죄사함은 우리에게 더할 수 없는 자유함을 가져다줍니다.
죄를 짓는 순간부터 우리를 정죄하는 자가 따라붙습니다. 어떤 어둠의 세력을 거론하기 전에 우리 양심이 우리 자신을 고발하고 괴롭힙니다. 오늘 말씀에서 ‘법’이란 단어가 그런 뜻이 있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 죄와 사망의 ‘법’이라 하는데 ‘법’은 ‘지배한다’는 뜻입니다. 죄를 짓는 순간 죄와 사망이 우리를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최근에 어떤 살인자가 죽기 전에 자기의 살인죄를 자백하여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10년전에 자기 회사 사장을 회사 동료와 함께 죽였습니다. 미궁에 빠졌던 이 사건은 살인자가 위암 말기의 죽음을 앞두고 자백함으로써 해결의 실마리가 풀렸습니다. 끊임없이 추격한 경찰의 집요함이 이룬 성과입니다. 이 살인자는 자기 죄를 자백하며 “눈만 감으면 사장 얼굴이 떠오르곤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평생 얼마나 괴로움을 당했겠습니까? 경찰은 자기를 추적하고 자기 양심은 스스로를 괴롭힙니다. 이것이 죄와 사망에 지배를 받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죄와 사망이 우리 인생을 콘트롤합니다. 내가 지은 죄를 덮기 위해서 더 큰 죄를 짓도록 만듭니다.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우리 삶은 망가지고 무기력해집니다.
성령의 법
그런데 오늘 말씀은 놀라운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정죄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제는 생명의 성령의 법의 지배를 받는 인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2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 죄사함의 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모신 자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1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라는 명백한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란 말과 성령 안에서란 말을 동격으로 사용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곧 성령 안에 있는 자이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2천년 전에 팔레스틴 땅에서 살다가 십자가에 달려돌아가시고 다시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반면에 성령은 그 그리스도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도록 현존하도록 만드시는 분입니다. 교회 공동체와 내 안에 임재한 성령이 바로 내가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9절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선포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는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예수를 주로 고백하게 된 것은 우리의 의지만이 아닌 성령의 역사입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존재보다 내가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났다는 더 강력한 증거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선언은 확실합니다. 느낄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것에서 우리 구원의 근거를 잡습니다. 우리 가운데 성령의 은사가 있고, 성령께서 말씀하시며, 성령의 감동을 체험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이제 죄와 사망의 왕국에서 벗어나 생명의 성령의 왕국으로 옮겼습니다. 우리 의지가 아니라 성령이 다스리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7장에서는 이를 다른 식으로 설명합니다. 전 남편의 법에 얽매여 살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남편이 살았을 때는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남편의 법에 매여 삽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이 여자는 자유를 얻습니다. 다시 결혼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 또한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남편이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한 편이 죽음으로 이제 그 법적 관계는 청산되었습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의 지배에서 벗어나 성령이라는 새 남편을 맞았습니다. 그 안에서 이제는 생명과 해방의 자유를 누리며 삽니다.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시기에 생명의 성령입니다. 죄와 사망에 얽매여 살던 우리를 자유케 하였기에 해방의 성령입니다.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은 이 생명과 해방의 성령입니까? 아니면 아직도 여전히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선언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우리는 새로운 왕국으로 옮겼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왕국의 지배를 받습니다. 전쟁과 독재와 기근으로 불안했던 나라에서 평화와 풍요와 자유와 존엄성이 살아있는 나라로 옮겼습니다. 우리 과거 또한 끝이 났습니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남편을 맞아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과거의 가난하고 불안했던 삶에서 이제는 좋은 신랑 만나 안락하고 존귀한 삶으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우리 안에 부어진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 생명의 성령에 대해서 좀 더 깊이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생명의 영
성령은 생명의 영입니다. 사망의 법과 정확히 반대쪽에 있습니다. 사망은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은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시면 우리 영이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과거의 우리는 마치 꺾인 꽃과 같았습니다. 자체 안에 양분과 수분이 있어 당분간은 살지만 서서히 죽어갑니다. 그 전 인생이 이런 죽음의 공포를 안고 살아갑니다. 사망이 지배하는 인생입니다. 우리가 성령 하나님 안에 산다는 것은 꽃이 원래의 나무에 접붙여진 것과 같습니다. 뿌리로부터 충분한 양분과 수분을 공급 받습니다. 생명의 근원과 함께 하기에 우리 안에는 더 이상 불안이 없습니다. 늘 풍요로움과 기쁨이 있습니다. 죽음은 멀리 떠나고 생명이 우리를 지배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안에 있는 부정적인 태도와 두려움들이 사라집니다.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이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생명의 덩어리입니다. 어린아이가 염세적이던가요? 어린아이가 한숨을 쉬던가요? 그들에게는 늘 기쁨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그 전 삶이 놀이이고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팔팔 뛰는 생명의 힘입니다.
지난 번에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두 가지 종류의 인간형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하나는 낙타 유형입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온종일 사막을 걸어갑니다. 낙타는 ‘너는 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으로 가득 차 괴롭게 걷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사자 유형입니다. 사자는 반항하며 ‘나는 원한다’는 자유정신으로 이제는 자기의 길을 갑니다. 좌충우돌합니다. 그런데 니체가 가장 이상적인 유형으로 들었던 것은 세 번째의 어린아이 유형이었습니다. 니체는 어린아이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어린아이는 천진난만이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으로 굴러가는 수레바퀴이고,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이다.” 온갖 미사여구를 갖다 붙이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놀이’라는 단어입니다. 즐긴다는 것입니다. 무리가 없이 자연스럽습니다. 억지로 하지 않습니다. 갈등이 없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힘입니다. 생명은 의지력을 발휘하지 않아도 안에서 자연스럽게 솟아오릅니다.
생명의 영은 우리 안에 있는 상처들과 우리 육신의 연약함을 치유합니다. 인간 안에는 면역력과 치유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프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아파야 신경이 쓰이고 그래야 우리 몸이 자가 치유를 시작합니다. 생명의 영은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무한한 힘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하셨던 중요한 일들 중 하나는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자를 자유케 한 일이었습니다. 이 생명의 역사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에 의해서 여전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생명의 영이 임할 때 우리 마음의 상처들을 드러내고 치유하기 시작합니다. 이 은혜가 넘치면 우리 육신의 질병도 치유하시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1:2) 이것이 생명의 영이 간구하는 바이며 행하시는 사역입니다.
생명의 영은 우리로 성장하도록 만듭니다. 살아 있는 것은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한참 성장기의 아이들은 매번 운동화를 사줄 때마다 그 치수를 늘려가야 합니다. 발이 크고 키가 자라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생명의 영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도록 만드십니다. 로마서 8장 29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우리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자라가고 있습니다. 오래 예수를 믿었어도 내 안에 여전히 완고한 자아와 아집만이 살아 있다면 그것은 성령 안에 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이 되기까지 성령은 우리의 인격을 자라게 하십니다.
해방의 영
성령은 또한 해방의 영입니다. 우리를 얽매는 죄의 법과는 정확히 반대 선상에 있습니다. 해방은 곧 자유를 뜻합니다. 내 안에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속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 안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이 오른쪽으로 가라 왼쪽으로 가라, 밥 먹으라 말라 하고 지시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우리가 노예입니까? 이래라 저래라 하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을 존중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네가 가는 곳에 나도 함께 갈 것이다. 내가 도와주리라’ 이렇게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렇게 믿으니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을 마치 자유를 제한당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냐 자유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것을 요구합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믿음은 인간을 모든 것의 자유로운 주인으로 만들며 누구에게도 예속시키지 않는다” 실제 사람들은 무언가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자기는 ‘자유다’라고 외치는 사람들도 뜯어놓고 보면 무언가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고상하다 하여도 이념이나 사상의 노예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민족이나 국가가, 아니면 어떤 인간이, 더 노골적으로는 물질의 노예가 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이념이나 사상보다 더 크신 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자유를 믿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주의 성령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 사람들은 저에게 자주 묻습니다. 왜 한신대를 선택하고 기장을 선택했느냐고 말입니다. 저는 그럴 때마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곳에는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교단은 작을지 몰라도 그곳에는 신앙과 양심의 자유가 있고, 학문의 자유가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구호가 “자유, 평등, 형제애(박애)”였듯이 인간에게는 자유가 매우 소중합니다. 교회가 권위와 질서의 수호신처럼 된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권위와 질서 이전에 교회는 자유의 정신이 그 근본바탕입니다.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선언을 들어보십시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초대교회의 자유의 정신은 유대인과 헬라인이라는 민족적 구속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종이나 자유인이라는 신분제도를 철폐하고 있습니다. 남자나 여자라는 고질적인 가부장적 제도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이 우리를 부자유하게 만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를 이렇게 비유하고 싶습니다. 기차가 자기가 달리고 싶다고 하여 마음대로 달려서는 속도도 낼 수 없고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어렵습니다. 기차는 레일 위에서 달려야 빠른 속도로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말씀은 자유를 위한 구속이요 제한일뿐입니다.
자유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풀어놓으면 무너질 것 같고 배가 산으로 갈 것 같이 염려합니다. 아닙니다.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자유도 소중한 것을 압니다. 무질서한 것 같지만 결국 합일점을 찾아갑니다. 그렇게 형성된 합의는 그 무엇보다 강합니다. 그러니 자유를 좀 지켜보는 여유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독재와 비민주처럼 약하고 비효율적인 것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처음으로 만났던 하나님은 바로 이 자유와 해방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출애굽에서 경험한 하나님은 해방의 하나님입니다. 바로 앞에 선 모세는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왕에게 보내어 이르시되 내 백성을 보내라” 애굽의 압제로부터 내 백성을 해방시키라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해방의 하나님입니다. 파라오의 압제로부터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시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자유가 감당하기 힘들었던지 끊임없이 애굽의 노예로 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배부른 돼지가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배는 좀 고플지언정 자유로운 소크라테스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하셨던 일에 대해서 누가복음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4:18-19) 주님은 죄의 포로된 자들을 자유케 하셨습니다. 주님은 삶의 무게에 짓눌린 자들을 자유케 하셨습니다. 가난하고 죄인으로 정죄된 자들을 삶의 무기력에서 끌어내어 역사의 주체로 삼으셨습니다.
님이 주시는 자유는 단지 우리를 과거로부터 풀어놓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자유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능력이 없는 자유는 더 괴로운 뿐입니다. 루즈벨트가 네 가지 자유를 역설한 바 있습니다. 언론의 자유, 종교와 신앙의 자유, 가난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온전한 자유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들입니다. 이중 가난과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가슴에 닿습니다. 아무리 자유를 외쳐도 가난과 전쟁과 파괴의 공포 가운데 있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해방의 영이신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해방시키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해방의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벙어리 귀신들린 자 앞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능력 주시는 자는 바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2)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시고 우리 자유함은 바로 이 풍요함에서 기인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가진 사람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서도 자유케 하십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주님의 사랑이 우리와 함께 하기에 우리는 어떤 사람과의 만남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다른 생각과 적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함께 있어도 두렵지 않습니다. 과거에 메이지 않고 장래 일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 우리는 창조적으로 현재를 돌파하며 미래의 그림을 그려갑니다. 그 용기와 확신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우리 안에 부어진 해방의 성령님이 우리를 모든 무기력으로부터 자유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성령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의롭다하신 이는 내 의지의 결정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십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롬8:33)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모든 싸움에서 “넉넉히 이깁니다.”(롬8:37)
더 이상 정죄는 없다
로마서 8:1-4 / 이규현 목사
성경이 다 위대한 말씀이지만 로마서 8장에 대한 찬사들이 참 많습니다. 신구약의 말씀을 통틀어서 가장 위대한 장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로마서 전체가 보석이라고 한다면 8장은 보석의 한 가운데 빛이 나는 부분일 것입니다. 8장은 구원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알려줍니다. 성경이 다 없어져 로마서 8장만 남았다 할지라도 우리는 구원의 진리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이 어떤 것인가, 내가 누리고 있는 구원이 어떤 것인가를 아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너무나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 믿고 천국에 간다는 단순한 등식으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구원의 삶을 너무나 축소하고 왜곡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로마서 8장을 통해서 구원이 얼마나 광대하고 풍성하고 깊은 것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도 로마서 8장을 계속 읽고 외우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본문 자체가 주는 강력한 은혜를 경험한다면 승리의 삶을 살 줄 믿습니다.
우리는 앞의 7장에서는 인간의 다소 혼란스럽고 복잡한 갈등을 보았습니다. 연약한 인간이 율법 아래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바울의 절규와 탄식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19,24)” 그러나 8장은 완전히 다릅니다. 갈등하며 힘들게 살았던 것만이 신앙의 삶의 전부가 아니고 전혀 다른 새로운 경험과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갈등하는 것이 신앙의 일부라면, 8장의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도 우리가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 삶의 실제인 것입니다.
오늘 로마서 8장 1절은 ‘그러므로’ 라고 시작됩니다. 이것은 바울이 그동안 설명해온 내용을 종합적으로 정리를 하면서 결론을 맺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9~11장에 또 다른 내용을 삽입하고 12장으로 훌쩍 뛰어넘습니다. 로마서 8장도 굉장히 논리적입니다. 2절도 ‘이는’(because)이라고 시작하며 1절의 이유를 설명합니다. 바울은 굉장히 감격에 겨워서 흥분하면서도 논리정연하게 진리를 말합니다. 8장은 7장의 갈등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밝고 활기차고 승리에 차 있습니다. 사실, 1절의 ‘그러므로’는 5장의 내용을 이어주는 것입니다. 6장과 7장은 몇 가지의 난제를 풀기 위해 삽입된 내용으로 보고, 실제는 5장에서 8장으로 뛰어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5장 1~2절에 보면 「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1~2)」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을 이야기하면서, 8장에서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백성들이 어떻게 그 구원의 삶을 누릴 것인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특히 8장 1절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너무도 놀라운 선포입니다. 신약성경 안에서 이처럼 아름답고 복된 복음의 메시지가 또 있을까 할 정도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이 선포는 새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평소에 죄의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은 분에게는 이 구절에 감동이 없을 수도 있고, 또 요즘처럼 죄의 문제를 잘 다루지 않는 환경 속에서는 다소 지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어떤 문제로 법적 고소고발이 되어 법적 공방을 치르고 있다면 이 부분이 와 닿을 것입니다. 검찰 조사를 받으면 사생활이 없어지고 통장 조회, 집안, 차 트렁크까지 수색을 당하고, 개인의 모든 것이 드러나고, 부르면 가야 하고,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소가 된 상태입니다. 죄의 문제가 우리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롬 1:18)」 인간의 죄에 대해 임한 하나님의 진노는 맹렬하게 타는 불 같아서 아무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고통과 저주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인간은 모두 기소가 된 상태입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으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상태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씀은 복음입니다. 무죄 판결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죄의 문제는 인류 최대의 이슈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상태에서 우리 삶의 모든 것은 비정상입니다. 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무거운 죄의 짐이 짓누르고 있을 때 누구도 기쁘고 평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합니다. 율법에서는 우리가 죄인으로 언도 받았고, 죄의 문제를 스스로 풀 수 없으며 율법을 행할수록 연약하여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것이 로마서의 대주제입니다. 8장 1절은 로마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안겨주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사실 성경 전체가 들려주는 대 주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우리를 죄인으로 취급하지 않고 의인으로 여겨주시고 구원해주신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대헌장입니다. 지루한 법적 공방과 싸움을 불식시키고 최종 선고를 내려서 그 누구도 토를 달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 감동 없이 읽을 수 없습니다. 바울이 1절을 쓸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그는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생명을 걸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를 깨닫고 새로운 빛을 본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사실 종교개혁을 할 때, 마틴 루터가 ‘오직 믿음으로(쏠라 피데)’ 이것을 깨달았을 때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 가톨릭은 행위와 노력으로 구원을 얻는다며 면죄부를 팔았는데, 구원을 얻으려고 했을 때, 그는 갈라디아서를 읽으면서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자신의 온몸을 전율하게 하는 진리의 깨달음이 자신의 심장을 관통할 때, 거기에 생명을 걸고 종교개혁을 했던 것입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눈이 열려서 율법을 행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했던 행위의 몸부림이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진리를 깨닫고 1절을 쓴 것입니다. 1절의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에서 ‘결코’는 바울의 강조를 나타냅니다. 헬라어 원문에서 보면 ‘결코’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아주 강력한 강조의 의미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절대적으로, 정죄를 당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완전하기 때문에 더 이상 어떤 것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죄인으로 취급할 법조문 자체가 없어진 것입니다.
2절은 1절에 대한 보조설명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2)」 그동안 우리를 지배하던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법 위에 다른 법이 생긴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 위에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있게 되어, 율법보다 더 큰 은혜의 법이 우리를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눈을 떼지 말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입니다. 우리의 어떤 행위나 의로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이 놀라운 선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울이 서신서에서 수없이 강조하는 문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입니다. 바울은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곳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를 사용합니다. 주석가들은 119번 나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며,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서 흘러넘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은 신약성경 안에서 드러난 비밀 열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놓치면 우리의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집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자신도 모르게 예수 그리스도를 약화시키는 경향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 행위와 노력, 열심들이 강조될 때가 많습니다. 구원은 우리가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불끈 쥐면서 확신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적으로 뜨겁다고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책임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 안에서 우리를 책임져주시며 우리 편이 되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있기만 하면 우리 삶의 어떤 것도 받아들여주시겠다는 강력한 문구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선하심과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보장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어떤 것일까요?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신자가 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분리될 수 없는 연합의 관계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들어간 이상 그리스도가 나를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그리스도 밖으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주님과의 관계를 흩트려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로마서 8장은 이렇게 결론을 내고 있습니다.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강력한 말씀입니다. 1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고, 마지막 절에서는 그 사랑에서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리스도 밖으로 끌어낼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이 세상의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하고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의 확실성을 강력하게 못 박듯이 이야기합니다. 어떤 피조물, 어떤 사건, 사망까지도,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구원을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달리는 차 꽁무니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어서 덜컹하면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구원의 완전성과 확실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적용할 것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정죄 받는 것을 해결하기 위한 인간적인 노력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나도 모르게 율법주의로 흘러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보다 행위를 강조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행위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행위에 스스로 만족하며 하나님이 나를 받아 주실 것이라 생각하고, 어떤 때는 내 행위가 부족하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실 것 같다며 감정적으로 왔다 갔다 합니다. 우리의 행위로 나아가려고 할수록 죄책감이 더 커지다가 결국은 영적으로 무너집니다. 행위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입니까? 본문 3~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3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이 말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셔서 죄를 정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위로 하나님을 만족시키려는 노력을 멈춰야 합니다. 행위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의’만이 우리를 완전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는 오직 한 가지 기준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가족 안에는 사랑의 법만 있습니다. 잘못하면 혼이 나기도 하지만 쫓아내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잘못을 해도 부자지간의 연을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녀가 잘못을 해도 수치를 가려줍니다. 징계를 해도 최종적으로는 자녀를 사랑 안으로 이끄시는 부르심입니다. 이제 우리 안에 생명의 능력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실수와 연약함이 드러나도 두려워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행위로는 소망이 없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잡는 동안에는 우리는 안전합니다.
둘째,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정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감옥 안에 갇힌 것과 같습니다. 죄로 짓눌리는 영혼의 압박으로 영혼에 족쇄가 채워져 아무것도 못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용서를 선포하고 정죄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데도 여전히 스스로를 정죄하며 자기 학대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 자기가 벌을 하며 금식도 하고 고행과 수행을 합니다. 나는 이렇게 고생해도 싸다고 합니다. 무거운 죄의 짐을 고통스러운 행위로 벗어나려는 것입니다. 흔히 죄짓고 못산다는 말은 죄 짓고 불안한 마음으로는 다리 뻗고 잘 수 없는 내적 갈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양심을 주셨습니다. 비록 죄로 인해서 우리의 양심이 병들고 무디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죄 문제 앞에서 인간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고 시달리며 아픈 마음을 갖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래야 세상을 지탱하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문제는 죄책감을 이상한 방식으로 털어내려는 것입니다. 죄 문제를 자기 힘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선단체에서 봉사하고, 거액을 기부하는 것도 죄책감을 벗어나려는 시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죄 문제가 깨끗하게 해결되었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더 많이 노력하고, 자신이 책임지려고 하기 때문에 심리적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겪는 심리적 질병 안에는 정죄감이 있습니다. <죄와 벌> 등의 세계적인 문학 작품들은 죄의 문제를 다룹니다. 이런 책이 베스트셀러로 고전이 된 이유는 인간 내면의 심각하고 큰 문제, 죄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고 난 후,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지 못해 갈등하고 방황하며 인생을 소비하는 것을 작품 속에서 보게 됩니다. 정죄감에 사로잡혀 있으면 죽고 싶습니다. 자신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우울증 환자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증상도 죄책감입니다. 죄책감이 있으면 구원의 확신도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 생활이 짓눌려 매사에 소극적이고 영적 활력이 없고 영적 변화도 경험하지 못합니다. 신앙이 좀 나아가는 것 같다가도 다시 후퇴해버립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정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로 발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장벽이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의 기쁨, 깊은 기도를 맛볼 수 없는 것입니다. 마귀가 하는 주 업무는 신자들에게 정죄감을 심어주는 일인데, 그 방식은 우리 행위에 초점을 맞추게 하는 것입니다. ‘네가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해? 너는 이미 그 사건으로 구원을 잃어버렸어. 하나님이 너를 모른다고 할 거야’ 여러분, 우리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자신을 평가하게 된다면 빠져나갈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었지만 여전히 실수하고 넘어집니다. 이럴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나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죄에 대한 형벌을 당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우리가 받을 형벌이 없는 것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너를 해방했다고 하셨습니다. 무죄로 판결이 나서 더 이상 신자에게 요구할 것이 없어진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우리가 한 치의 양보도 해선 안 됩니다. 과거의 어떤 죄에도 묶여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은 과거에 지은 죄뿐만 아니라, 지금 지은 죄와 앞으로 지을 죄까지도 포함되는 줄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의 행위는 소망이 없다고 결론이 났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지나칠 정도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이 자기의 행위에 왔다 갔다 한다면 얼마나 불안정합니까? 어떤 분은 부흥회를 할 때마다 예수 믿을 사람 일어나라고 하면 계속 일어납니다. 자기 구원이 불안해서 다시 한 번 더 확신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이렇게 희미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 감정이 흔들릴 것이 아닙니다. 불안한 사람은 그 원인이 자기감정이나 노력에 구원이 지탱되고 있는 것입니다. 1절 말씀을 강력하게 붙잡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연약해서 넘어지면 송구한 마음이 들고 부끄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영적 세계에서 너무 완벽하게 하려는 경향도 율법주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루 새벽기도를 빠진 날 넘어지기라도 하면 하나님이 나를 넘어뜨렸다면서 자기를 힘들게 합니다.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해서 인정받으려는 몸부림을 더 이상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우리에게 요구하거나 압력을 가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 주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주신 하나님과의 화평의 관계를 누리는 것입니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실수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열어놓으신 대로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그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것, 실패해도 실망하지 않고, 다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거절하지 않고 받아주시며 그 분 안에 평안과 자유와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은 성령 이야기를 많이 해서 성령장이라고 하는데, 성령이 우리를 이끌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화목하게 하시고, 그분 안에서 자유를 누릴 때 나도 모르게 죄를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이끄심으로 성령 안에서 살다 보면 더 이상 죄 문제에 연연하지 않고 승리하며 살아가는 자신을 어느 날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관계를 누리고 믿음 안에서 살아갈 때 안식과 평안과 자유가 올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좋은 성적을 내려는 부담과 압력은 다 사라지고,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영적 해방을 맞을 것입니다. 어떤 죄의 문제, 어떤 행위로도 우리의 구원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이 선언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망의 법과 생명의 법
로마서 8:1-5 / 박용래 목사
우리 인간이 존재하는 모든 세상에는 법이 있습니다. 자연에도 법칙이 있고, 인간의 생존 세계에도 법칙이 있습니다. 학교에는 교칙이 있고, 국가에는 헌법이 있고, 또 회사에는 사규가 있습니다. 인간이 사는 곳에 법이 없다면 혼란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모든 운동경기에도 규칙이 있습니다. 규칙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무효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에는 세상의 법이 있듯이 하나님이 다스리고 통치하는 하나님의 나라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습니다.
▣ 요즈음 인터넷에서 사건 사고 란을 클릭 하여 보면 지구촌 안에 흉악한 살인사건 그것도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정말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일어나서는 아니 될 끔찍한 사건까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주간에 대구에서 일어났던 초등학교 6학년 여학생은 납치 13일 만에 끝내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이 되었습니다. 지난해 가을에 무용수를 꿈꾸던 열일곱 살의 여고생은 인터넷 채팅에서 만난 20대 범인이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부인이 해산을 하는 동안 이 유부남은 한 여고생을 유인하여 성범죄하려는 것을 반항하자 무참하게 살인하고 말았습니다.
▶ 요즈음 어린이들은 길거리에서 어른을 만나거든 모른체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누가 무엇이라 물으면 의심하여 보고 대답하지 말아야하고 누가 도와 달라고 하면 따라가거나 도와주려 하지 말아야한다고 반복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유괴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어린이들을 반복해서 교육하고 훈련을 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라 착한 일을 하라 어려운 어른들을 도와주라. 옛 말이 되었습니다.
▣ 요즈음 우리나라에 신종사기사건이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현금인출기에 지갑을 놓아두면 들어온 사람이 임자 없는 지갑을 주었으니 주인을 찾아 주려고 선한 마음을 가지고 가져가지만 사기꾼은 경찰에 도단신고를 해서 현금인출기 케메라에 설치된 것으로 확인되어 경찰에 연행이 된다고 합니다.
지갑주인은 돈 몇만원 넣어 두고 몇 백 만원 돈이 들었다고 고집하여 형사처벌을 받게 되면 합의금으로 수 백 만원씩을 뜻어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착한 일을 하려다가도 봉변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일도 마음 놓고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 어떤 사람은 해외에 나갈 때 공항에서 짐 보따리 하나를 좀 들어 달라고 부탁을 해서 가지고 나가다가 공항에서 연행되었는데 그 가방에 마약이 들어 있었습니다.
아무리 사정을 하고 억울한 사정을 호소해보지만 알지도 못하는 감옥으로 보내져서 수 년 동안 끔찍한 조사를 받아야 했는데 가족들이 알고 대사관에 협력을 구하면서 아무리 호소를 해도 해결이 되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요즈음은 착한 일을 하려다가도 큰 봉변을 당하는 세상이기에 착한일도 마음 놓고 할 수 없는 불행한 세상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살아갈 세상이 얼마나 더 잔인하고 어두워지고 타락해져갈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살기가 무서운 세상이 되는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10년 20년 후 세상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롬 3: 10-13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는 두 가지 법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8장 2절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1) 사망의 법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지금까지 세상은 죄와 사망의 법에 노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 알베르 카뮈의 소설 ‘오해’라는 이야기 가운데 인간의 불행은 바로 죄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이렇게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유럽의 한 외딴 들판에 여관을 짓고 생활하는 모녀가 있었는데 어머니는 이곳에서 어렸을 때 집을 떠난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가난과 고독에 시달린 모녀는 어느 날부터 이상한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습니다. 부유하게 보이는 남자 손님에게 독약을 먹여 살해한 후 금품을 빼앗고 시체를 강물에 던져버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말쑥한 차림의 한 청년이 여관을 찾아왔습니다. 모녀는 청년에게 독약을 먹인 후 시신을 강물에 던져버렸습니다. 여인은 지갑에서 돈을 꺼내다가 피살자의 신분증을 보고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바로 자신이 지금까지 애타게 기다려온 아들이었습니다. 여인은 살인해서 아들을 던져버린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을 했습니다. 오빠를 죽인 여동생은 “범죄는 결국 무서운 고독일 뿐”이라고 외치며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청년은 고향을 떠난 후 크게 성공해서 어머니와 여동생을 만나러 귀향하던 길이었는데 불행하게 어머니와 여동생의 이해 살인당하고 그것을 뒤 늦게 알게 된 어머니와 여동생이 함께 자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죄의 삯은 사망이라 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범죄의 유혹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영국에서 평생 구걸만 하던 할아버지가 어느 집주인을 찾아 햄버거 사먹을 돈을 얻은 뒤에 감사의 표시로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먼지 묻은 바이올린을 줬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주인은 바이올린의 먼지를 닦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것은 1704년에 제작된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바이올린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노인이 바이올린의 가치를 알았다면 굶주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뭘 지니고 있었는지 몰랐기 때문에 평생구걸인생을 산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살과 살인사건은 모두가 생명의 존엄성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육체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영적인 존재라는 그 가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육체만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 에토믹(atomic), 이 원자를 발견할 때에 그것이 원자폭탄을 만들겠다고 발명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발명할 때는 좋은 데에 쓰려고 발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원자 폭탄이 되어 수많은 생명을 해치는 살인 무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세계에서 결국 인간의 과학의 마지막은 파멸을 향하여 달음질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 하나님 없는 과학은 결국은 파멸을 향하여 가고 마는 것입니다. 식물인간이 되어서 100세를 살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누워서 의식도 없이 연명을 하는 것은 사는 것이 사는 것 아니라 불행일 뿐입니다.
▶ 하나님은 인간에게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주셨고 인간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인간이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율법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롬5: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율법이 없다면 인간은 죄를 깨달을 길이 없습니다. "
마치 거울을 보지 못하면 자신의 모습도 자신의 얼굴도 알 수 없습니다.
거울을 보아야 자신의 얼굴이 더러운지 깨끗한지를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통하여 인간은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고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죄 없이 선을 행하고자 몸 부림 처 보았지만 율법이란 거울을 통하여 자신을 바라보면 자신에게는 선은 없고 죄만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21)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합니다 그것은 나는 선을 행하고자 하지만 내 속에는 <선은 없고(18) 죄만 있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이란 거울을 보고 자신을 고치고자 몸부림 쳐 보았지만 자신은 더러운 죄에 빠져 있다는 절규입니다.
▶ (24)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사도 바울의 절규만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절규가 될 것입니다.
▶ 7:10에서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 그 율법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 자체는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한 것이 분명한데 그 율법이 내게 주어졌을 때 온전히 행한다면 인간이 행복해지고 <생명>에 이르게 하는 법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대로 행할 수 없게 되자 도리어 그 율법은 인간에게 <죄와 사망의 법>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하고 바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율법이라는 거울을 만들어 주셨지만 인간은 그 율법이라는 거울로 자신을 온전하게 선하고 의롭게 살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 앞에 가면 인간은 율법이라는 법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느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율법이라는 법 앞에서 심판을 피해갈 자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도 바울은 죄와 사망에 이르게 하는 율법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은 결국에는 율법이라는 법이 되고 말았습니다.
2) 생명의 법이 있습니다. (롬8:2)
▶(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 사도 바울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일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인간은 모두 죄와 죽음의 법아래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을 받고 생명의 법아래 살아가게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8:1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하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은 원자폭탄보다도 더 위력이 있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사망의 법아래 있는 사람이 이제는 정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 왜 그렇습니까.?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에 이르게 하는 율법에서 해방을 받고 생명의 법아래 살아가는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 아래에서 해방을 받고 생명의 법아래 살아가게 되었기에 우리는 다시는 정죄함 받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할 수 없는 죄와 심판과 멸망에서 복음은 우리를 해방시키었고 자유를 주었고 다시는 정죄함 받지 아니하는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 그냥 해방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해방시켜 주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사망의 법아래 있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생명의 법을 주시기 위하여 엄청난 희생으로 사랑을 부어 주셨습니다.
▶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사망에 빠진 인간의 죄 값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몸 버려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들의 죄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나와 여러분의 죄 문제를 해결하여 주셨고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시어 생명의 법아래 살게 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롬 8:1- 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기만 하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됩니다.
여기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한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자신의 죄인 됨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로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하는 것, 믿음을 말합니다.
▶ 우리에게는 예수 생명이 있습니다. 성령의 생명의 법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 죄 함이 없습니다.
오늘아침 주님은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는 죄와 사망의 법아래 살아가는가.?
아니면 성령의 생명의 법아래 살아가는 냐 ? 주님께서 묻고 계십니다.
오늘 내안에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다시 23절을 보세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우리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지 못한 사람에게는 영생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주 밖에 있는 사람은 영생이 없다는 말입니다.
▶ 오늘 그리스도 예수 안에 라는 말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 당신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답은 둘 뿐입니다. YES, 아니면 NO에요. 아멘. 아니면 노맨 입니다.
◑ 만일에 우리가 YES라고 대답을 한다면 다음의 질문에 대답을 해야 됩니다.
▶ 당신은 우리 주 예수님을 위하여 살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왜 못하는가?
주님은 당신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시었는데. 당신을 위하여 피 흘려 죽으신 것인데 그가 이 세상에 사신 것도 당신을 위하여 사신 것인데 당신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있다면 진정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고 주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 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자는 말씀입니다.
왜 우리가 정죄를 당하지 않습니까? 왜 우리가 죄와 사망의 법아래서 해방을 받게 된 것입니까.?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이루어 놓으신 것을 오늘 우리 가운데 적용하는 성령님의 역사를 말합니다.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이 내 안에 찾아 오사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죄와 사망의 법아래 놓였던 너를 구원하셨다. 얼마나 놀랍고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저는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보다 더 감격스럽고 놀라운 사건은 없습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심판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강물같이 흐르는 기쁨과 주님이 주신 생명의 법에 따라서 살아갑니다.
바울에게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감격한 것입니다. 그래서 환난과 핍박과 죽음 앞에서 강하고 담대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바울의 확신은 바울만이 가질 수 있는 확신이 아니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져야 할 확신입니다. 그러면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가져야 할 확신은 어떤 확신일까요?
◑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1절하)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를 공격할 수는 있지만 우리를 대적하여 구원의 반열에서 끌어내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또 이 말은 오늘이라는 영적인 전투에서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왜 원수 마귀가 우리를 대적하지 못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편이 되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우리 다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우리라는 말 대신에 각자의 이름을 넣어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 를(을) 위하시면" 감히 누가 우리를 정죄하며 대적하리요.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한 번 하나님이 선언하시면 취소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두 번 다시 우리에게는 정 죄 함이 없습니다. 결코 정 죄 함이 없습니다.
그럼으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롬 8:33 -39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8: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을 받았으니 이제부터 생명의 법아래서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리신 이와 영
로마서 8:1-11, 에스겔 47:1-12 / 정영구 목사
로마서 8장은 7장이 가지고 있는 인간의 비참함 아니 인간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의 딜레마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쫓아가려고 하지만 우리 가운데 육신의 법으로 죄의 법이 생각 보다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없고 그래서 오히려 내 안에 있는 그 죄의 법이 나를 이끌고 나를 조종하고 있는 그런 인간의 비참함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인들처럼 비참한 사람들도 없을 것입니다. 율법의 남편과 은혜의 남편이라고 하는 두 남편을 우리가 만나고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아예 구분을 하지 못하니까 그냥 동물적 감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영에 속한 사람은 영이 주도하는 삶으로 살기 때문에 자유함과 자신의 온전함과 완전함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누구에게도 정죄 받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끼어있는 육신에 속한 사람은 어떤 때는 영으로 어떤 때는 몸으로 살 수밖에 없는 자신의 비참함, 그 비참함을 경험하면 경험할수록 도망가기를 원하고 도망가기를 원하니까 늘 문제에 대해서 직면하기를 거부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삶으로 살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은 그 비참함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드러나는 순간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없음이 하나님께서는 할 수 있음으로 우리 가운데 하나님만 보게 할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라고 하는 그 자체는 좋은 것이 아닌데 그 고난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아버지 집을 기억나게 할 수 있는 그런 통로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로마서 8장은 갑자기 결론처럼 얘기합니다. 인간의 비참함과 하나님의 거룩하심 이 딜레마 속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육에 속할 것인지 영에 속할 것인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육신에 속한 내 상황 자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사실은 정죄함이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비참함이라고 하는 것 자체는 어떤 의미에서는 다 내가 느끼고 내가 경험하고 지금 내가 너무나 힘든 그 상황이지만 사실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방정교회에서는 교회가 가지고 있는 말씀의 진리만 사실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모호함은 다 그림자와 같은 것이라고 다 가짜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느끼고 내가 보고 있는 것은 가상의 현실이라고 하는 어떻게 보면 사실이 아닌 것에 대해서 슬퍼하고 비참하고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힘들어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사실이 무엇인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고 2절에 보면‘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해방하였고 해방하고 있고 해방할 수 있는 그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부터 영원까지 이미 너희들은 해방자의 삶으로 살 수 있는 사실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사실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내가 지금 몸으로 경험하고 있는 이것이 사실인 것처럼 그래서 그것이 비참하고 내가 곤고하고 내가 그래서 슬프고 내가 그래서 아프고 내가 그래서 상처 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제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을 것이고 해방되었다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 이 사실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문제는 In Christ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입니다. 오늘 말씀에 In Christ 라고 하는 의미를 8장 1절부터 11절 까지에서는 세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 하나님의 영이 내 몸에, 내 안에 거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했다고 하는 의미는 에베소서 1장으로 가면 태초에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선택하시고 예정하셔서 내가 누구인지를 아주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찌질한 나, 넘어져 있는 나, 아픈 나, 그것을 우리가 시실인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영화 <매트릭스>를 보면 주인공 레오가 매일 양복 입은 사람들에게 쫓겨 다니고 그 사람들 보다 어떻게 하면 더 빨리 움직일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데 자기가 총을 맞고 죽는 순간에 그리고 다시 눈을 뜨는 순간에 그 사람들이 다 부호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상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8장은 총 맞은 것처럼 진짜 죽어봐야지 이 세상이 다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관계했던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fact가 아니라 다 가짜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데 우리는 진짜인 것처럼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빨리 도망갈까 어떻게 하면 그들을 피할까 어떻게 하면 그 속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로마서 8장은 그 얘기를 합니다. 너는 이미 하나님의 법으로, 이미 성령의 법으로, 이미 생명의 법으로 해방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셔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밝혀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신 일과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다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는 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육신의 율법의 요구는 우리가 온전하고 완전하게 살아가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너 완전해, 너 온전해.’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이루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무엇인가 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곤고했습니다. 내가 무엇인가 이루려고 하기 때문에 이루지 못해서 비참해지고 이룬 것 때문에 자만심을 가지고 내가 누군가를 짓누르고 살아가는 인생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때문에 내가 절대 자존감을 가지고 있다면 오늘 예수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가운데 임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행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내 안에 계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는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주셨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살리신 이의 영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살리신 이의 영이 거하시는 것을 통해서 마지막 11절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다시 부활하는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살리신 영이 나를 다시 살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 하나님 앞에 거룩한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 saint라고 거룩한 사람이라고 처음부터 칭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거하시고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거하시고 살리신 이가 내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내가 그 삶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성도, 거룩한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카돌릭은 대단한 어떤 신비를 이루거나 순교를 했을 때 그 사람을 saint 성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사실 성경은 살리신 영이 있는 사람은 다 성도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비참하고 곤고한 육신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로마서 8장에서 계속 얘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생각’입니다. 영어로 얘기하면 mind 이고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진리지식이라고 할 수도 있고 내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 앞에서의 선한 의지라고 할 수도 있고 내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 앞에 기쁨, 온유,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생각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그렇게 얘기합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그 육신의 일을 생각할 때 마다 사망에 이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고 영의 일을 생각하는 자는 생명과 평안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사실을 보지 못하고 계속 가상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을까요? 생각의 변화입니다. 생각의 변화를 성경은 metanoia 회개라고 얘기합니다. 엄밀히 따지면 metanoia, 마음을 바꾸지 않은 자가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지 않은 자입니다.
내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정죄함이 없고 해방된 자라고 하는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자가 아니라 여전히 현실이 중요하고 여전히 그림자가 내 마음을 빼앗는다고 이야기하고 있고 여전히 어떤 순간 순간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현실이 전체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생각입니다.
성경은 그래서 우리에게 회개에도 두 가지 회개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는 후회하는 마음의 과거적 영성의 회개가 있다면 앞으로 올 것까지도 회개할 수 있는 미래적 영성의 회개, 구원에 이르는 회개입니다. 어떤 분이 회개를 경건하게 슬퍼하는 마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비참한데 왜 비참한가? 하나님을 바라는 마음 때문에 내가 하나님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내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마음을 바꾸지 않는 것이 고집입니다. 인생을 살아봤던 자기의 경험이 전체인 것처럼 자기가 가지고 있는 수준이 전체인 것처럼 절대 마음을 바꾸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음만 바꾸면 되느냐? 사실 이 생각의 변화는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거듭남이라고 말씀합니다. born again입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서 거듭난 존재라고 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거듭남이라고 하는 새로운 존재,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내가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하늘의 존재로 살지 않으면 여전히 세상의 것으로부터 갈팡질팡 내가 갈지자로 허공에다 주먹질하면서 내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하실 때 하나님이 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도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오셨을 때 주님의 영이 내 마음에 임할 수 있도록 내가 주님 안에서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오늘 이 로마서는 살리신이의 영, 이 회개와 거듭남을 선물로 주신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인생에 해방자로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영어로는 Helper입니다. 돕는 베필입니다.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으시려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마다 멘토이신 성령, 내 친구이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 배우자로 주님은 내게 오셔서 우리를 날마다 살리시고 죽을 몸도 살릴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3장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이 성령의 충만함을 통해서 내 비참하고 곤고한 삶에서부터 벗어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에스겔이 꿈을 꿉니다. 에스겔이 환상을 봅니다. 에스겔서를 잘 보시면 계속 성전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여호와 삼마라고 하는 하나님의 구역을 주시면서 그 구역을 통해서 나오는 것이 무엇일까? 오늘 읽은 47장에 보면 성전에서 나오는 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물이 어떤 때는 발목을 어떤 때는 무릎을 어떤 때는 허리를 어떤 때는 사람이 건너지 못할 강만큼 물이 흘러넘쳐서 그 성전에서 흐르는 물 때문에 치료가 되고 변화가 되고 새로운 생명이 시작된다는 환상을 본 것입니다.
저는 비참함을 가지고 있을 때 마다 이 되살아나는 능력의 성전에서 흐르는 물의 신앙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 내 안에 계신 살리신 영을 믿는 신앙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그 배, 속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를 통해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기를 원하시는데 내 안에 살리신 영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흘러넘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은 발목수준으로 어떤 사람은 무릎 수준으로 어떤 사람은 허리수준으로 어떤 사람은 사람이 건너지 못할 강만큼의 수준으로 넘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생수의 강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만큼 그 안에서 생명이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무릎은 무릎의 수준만큼 생명이 일어날 것이고 큰 강은 그 안에서 어부들이 고기를 잡으면서 생업을 할 정도로 엄청난 성령의 생수의 강이 흘러넘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세 가지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 성령의 운행하심을 살리신 이의 영을 내가 인격적으로 인정하고 받는 것입니다.
생각의 변화입니다. 내가 주인인 것처럼 살았던 인생에서 한번쯤은 주님이 주인 되시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사람의 뜻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내 마음을 내어줄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진펄과 개펄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진펄과 개펄은 생명이 나지 않는 땅입니다. 말씀에 보니까 ‘그 진펄과 개펄은 되살아나지 못하고 소금땅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진펄과 개펄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밟으면 밟을수록 늪처럼 빠져 들어가는 땅입니다. 그 땅은 물이 흘러 들어가도 생명이 나지 않는 땅입니다.
진펄과 개펄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상처를 집중해서 보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내 주관으로 판단합니다. 그것이 고집이고 개펄과 진펄과 같은 땅입니다. 염려와 두려움과 불신과 죄책감과 체면과 자랑이라고 하는 진펄과 개펄이 되지 않는 마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들이 참 신기합니다. 같은 책을 읽었는데도 작년에 읽은 책과 올해 읽은 내용이 다른 것 같습니다. 똑같이 앉아서 같은 말을 들었는데 다르게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사실을 사실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다 자기의 주관으로 듣기 때문입니다. 주관으로 듣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이 진펄과 개펄처럼 하나의 또 다른 늪이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늪이 있습니다. 어떤 순간에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님의 일도 성령이 나를 이끄시는데도 끝까지 고집을 피우는 내 마음의 늪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 라고 하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내 마음 때문에 슬퍼하고 절망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한테 진리지식을 주셨습니다. 정죄함이 없을 것이고 해방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메인자로 살 이유도 없고 내가 스스로 정죄하고 살아갈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누구에게도 정죄 받지 않을 것이고 영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덕을 세우기 위해서 인내하고 기다릴 뿐이지 어떤 것에도 메여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내가 가지고 있는 경험으로 진펄과 개펄과 같은 내 마음의 늪을 만들지 않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세 번째 이 물은 성전에서 흘러나오는데 ‘성전’(몸)을 귀하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성전이 텐트, 장막이었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은 사람들한테 다 보이는 성전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의 몸이 성전이라고 얘기하고 계십니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이 가끔씩 사람마나 흐르고 있는 독특한 파동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만나서 아무 말도 안했는데 뭔가 느껴지는 것이 다르다고 말합니다. 하물며 안 믿는 사람들도 그렇게 얘기하는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몸이 성전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서 물이 흘러 나와야 합니다.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치유하고 생명을 변화시킬 수 있는 그런 생명의 물이 내 내면으로부터 내 속사람으로부터 이미 그렇게 시작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갈 때 마다 트러블메이커가 되고 내가 갈 때 마다 갈등이 시작되고 내가 갈 때 마다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발목수준만큼이라도 내 안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샘물이라면 토끼가 와서 세수라도 할 것입니다. 엄청난 생수의 강이 터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발목수준에서 생명을 살리는 내 수준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 몸입니다. 그래서 몸의 신앙이 기독교신앙의 핵심입니다. 부활의 신앙이 몸의 신앙입니다. 몸으로 내 배에서부터 내 내면에서부터 하나님의 생수가 터지는 것을 경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 해방의 본성
로마서 8:1-9 / 곽선희 목사
캐나다에 빅토리아 대학의 교수로 있는 K. R. Bradley 교수님께서 Slaves and Masters in Roman Empire 라고 하는 유명한 책을 저술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노예와 주인' 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그는 다년간 로마의 문화를 깊이깊이 연구하는 가운데 '로마의 문화라는 것은 곧 노예와 주인의 문화다. 그 관계에 있다' 라고 그렇게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당시 로마의 인구의 삼분의 일이 노예였습니다. 우리가 로마를 방문하면 2000년 전에 있었던 굉장한 문화 유산을 볼 수 있습니다. 원형극장을 비롯해서 그 많은, 엄청난 그 장엄한 유적들을 보면서 우리는 감탄합니다만은 한번 더 생각해보면 이건 전부 노예가 만든 것입니다. 노예가 설계하고 노예가 지었고요 이런 것들을 만들기 위해서 엄청난 많은 노예가 죽어갔습니다. 우리는 그 노예들의 핏자국을 보는 겁니다. '인류가 무엇을 건설했다'고 볼 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나'하는 그 처참한 모습을 우리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올시다. 그 노예와 주인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fides 와 obsequium, 두 마디로 요약이 됩니다. '충성과 복종' 오직 '충성과 복종' 그것이 노예와 주인의 관계였습니다. 저들은 말할 수 없는 비인간적 대우를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철학자들의 글 속에도 나옵니다. '노예와 당나귀는 같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당나귀는 내 말을 못 알아 듣고 노예는 말을 알아듣는다' 이렇게까지 말했어요. 우리는 보기가 민망해서 혹은 그림이라던가 영화로 나올 때 보면 간단하게 옷을 그 치부를 가리운 옷을 입혀서 나옵니다만은 원래 노예는 옷이 없었어요. 신발도 없고 옷도 없이 그렇게 해서 일을 시키고 그리고 집이라고는 그저 움막 같은데 외양간처럼 만들어 놓고 지푸라기를 넣어 줬어요. 거기서 그대로 자야 했고요. 노예가 서로 말을 하면 거기서 또 문제가 생기니까요 일체 말을 못하게 했어요. 듣기만 하고 말을 못하게. 그래서 말을 아예 못 배워 버려서 그냥 "웅웅웅" 이렇게 했던거죠, 동물처럼. 말도 언어까지도 빼앗아 버렸어요. 오로지 '충성과 복종' 이것만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그같은 로마의 운명을 이루게 되었다 하는 것입니다. 말을 잘 안듣던가 하게 되면 뭐 체형을 가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죽이거나 팔아먹던가 정 고약한 노예라고 하면은 일벌백계로 길거리에다 세워놓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어요. 수많은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이것이 노예입니다. 그의 지식도, 그의 건강도, 그의 정조도, 그의 도덕성도 다 주인의 것이요 생명까지도 주인의 것입니다. 마음대로 주인이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어요. 이것이 노예입니다. 생각하면 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노예생활 속에도 "노예 해방"이라는 말이 있었어요. 해방될 수 있는 길이 있었어요. 이것은 인도적 차원에서 말해주는 것이 아니고 보다 더 철저한 충성과 복종을 얻어내기 위해서 이루어진 수단이었어요. 그게 무슨 말인고 하니 아주 당근과 같은 거예요. 고분고분하게, 온유하게 또는 자발적으로 충성하고 철저하게 복종하면 주인이 자비를 베풀어요. 그 어느 순간에 좋은 주인을 만나면 노예에게 자유를 줍니다. 더구나 세상 떠나기 전에 자기를 위해서 한평생을 수고한 가장 충성된 노예에게 얼마간의 재산을 주면서 자유하게, "너는 이제부터 자유다" 이러한 노예 해방의 특권을 얻기 위하여 생각이 있는 노예들은 더욱더 충성을 다했다는 거죠. 한평생 충성을 다했어요. 자유의 길을 바라보고. 언젠가 자유의 특권이 주어지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충성을 했다. '그 충성이 오늘의 로마의 문명을 만들었던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럴 것 같아요.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수십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는 가운데서 길들여진 노예가 있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문화화 된 노예. 이제 해방이 되었지요.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은 그는 절대로 자립할 수가 없었어요. 오로지 충성과 복종만 해왔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말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어요. 아무 생각도 없어요. 그래서 모처럼 자유를 얻었다가도 자립할 수 없어요. 인격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자립할 수 없어서 다시 옛주인에게 가서 "나를 노예로 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하고 다시 노예 생활을 했다는 거 아닙니까? 이 얼마나 비참한 얘기입니까? 또는 밖에 나와서 성공한 노예가 있었어요. 얼마간의 재산을 가지고 아주 힘써서 악착같이 일을 하고 수고해서 부자도 되고, 지위도 얻고,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우리가 아는 유명한 예술가들 가운데도 노예 출신이 있고요 심지어는 노예 출신 가운데 왕도 있어요. 자,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들이 노예 생활에서 노예화된 노예의식 때문에 욕망과 무질서와 폭력과 나태, 방탕의 노예가 되는 거예요. 타락의 노예가 되요. 네로 황제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결국은 노예에서 황제까지 올라갔지만은 그 마음속에는 여전히 노예 근성이 있더라고요. 그는 자유인이 아니었어요. 자기도 말할 수 없이 괴롭고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었죠.
오늘 본문에 보면은 인간의 노예상태를 간단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있다' 하는 겁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서 헤어나지 못하는 인간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혹 자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비참한 것은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죄와 사망의 노예가 되어 있더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자유인이 아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말입니다. 가난한 자는 자유인이 아니다. 내가 아무리 자유하고 싶지만은 가난하다 보니 이 소중한 자유를 반납해 버리고 얻어먹을 수밖에 없잖아요. 무식한 자는 자유인이 아닙니다. 유식한 자에게 매여 살 수 밖에 없잖아요. 더 중요한 것은 죄인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8장 34절에서 말씀합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 이라고요.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을 때, 회개하지 아니한 죄가 그 마음을 다스릴 때, 그는 저주 의식에 매입니다. 가책 의식에 매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다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그런 노예상태에 살아갑니다. 어느 사이에 거듭거듭 죄를 지을 수밖에 없도록 그렇게 말이에요. 그런 상황 속에서 끌려가게 된다는 말씀이죠.
실존주의 철학자 싸르트르는 '실존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네가지 자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투기적 자유입니다. 미래를 향해서 자신을 개방하고 과거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서 미래를 향해서 자기 몸을 던져버릴 수 있는, 과거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그 미래를 향해서 자기를 던지는 그런 자유, 통쾌한 자유지요. 그러나 여러분, 과거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유인이 어디 있습니까?
또 하나는 선택의 자유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넓은 선택의 영역을 지니고 살아갑니까? 흔히 말하는 영어의 "I have no choice"라는 말이 있어요. 선택이 없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은 그 순간 노예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선택의 여유를 가지고 삽니다. 그리고 내가 선택하는 것은 내 마음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현재적으로. 간혹 그런 분들이 있더만요. 결혼생활을 하면서도요 '그저 할 수만 있으면 이 사람하고 안 살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어찌할 수가 없잖아.' 그리고 만부득이 살아갑니다. 그야말로 선택이 없습니다. 이거 뭐 팔자거니 하고 삽니다. 그건 자유인이 아닙니다. 유행가 가사처럼 죽었다 다시 태어나도 당신의 아내가 되겠소, 그게 바로 자유인입니다. 항상 현재적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현재적으로 아내를 선택하고 남편을 선택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미 선택한 데 대해서 나는 선택권을 포기하고 '에라, 모르겠다. 그냥 사는 데까지 살자.' 그건 자유인이 아닙니다. 벌써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걸 잊지 말아야 되요. 계속적으로 넓은 중에 자유롭게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세번째는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됩니다. 내가 선택했으니 책임을 지는 자유인이어야 합니다. 선택을 어정쩡하게 해놓고 책임을 안지겠답니다. 책임이 없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한 내 책임을 내가 넉넉하게, 그것도 기쁨으로 져야합니다. 그 사람이 자유인이요. 뿐만 아니라 연대성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 자유가 남의 자유를 속박해서는 안되는 거예요. 내가 자유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자유를 보장해줘야 됩니다. 그런 자유여야 참 자유죠. "나는 자유다" 하고 휘젓고 다니는데 많은 사람에게 억압을 주고 불행함을 주고 불편함을 준다면 그건 자유인이 아닙니다.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명예욕과 지위욕과 물욕을 극복할 수 있으면 달인이 된다" 하는 말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요새도 보면 그 별것도 아닌 명예욕의 노예가 되가지고 어느 사이에 저렇게 비참해지는 것을 보고요. 지위욕, 그거 대단합니다. 좌우간 국회의원에 한번 출마했던 사람은 죽기 전에는 그 욕심을 못 버린대요. 아편보다 더 하다고 그러대요. 그 지위에 대한 정치적인 욕망, 여기에 노예가 되어가지고 처절해지고 제 명에 못 가는 사람 많죠. 어찌 생각하면 그것도 큰 병입니다, 이게. 물욕, 욕심이 그렇게 많아요. 이게 얼마나 비참한 것입니까?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이 네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여자와 술과 마약과 도박. 그 중에 제일은 도박이니라. 여러분 무슨 말인 줄 알겠습니까? 잘 모르시죠? 도박이라는 거, 생각하면 그 얼마든지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잖아요. 안하면 그만 아니요. 그런데 아니치 못하는 거예요. 이거 한번 빠진 사람, 죽기 전에 못 고칩니다. 정말 힘듭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이걸 못 고치는 거예요. 담배 그것도 그렇잖아요. 담배 하나 끊는 것, 아니 그까짓 것 안피우면 그만이지 뭐. 근데 그걸 못 끊는 거예요. 그리고 비행장에 가보면 한쪽 구석에 앉아가지고 요렇게 하고 빨고 있는 거 보면 불쌍하기도 하고 가련하기도 하고. 왜 이 모양이요? 사람들이 말이요…… 이게 노예가 된 거예요. 어찌 생각하면 우리 자유인으로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니요. 안하면 그만 아니오 그까짓 거. 그런데 그걸 못하는 거예요. 이것이 남의 얘기처럼 들립니까? 여러분 마음속에도 뭔가, 지금 당연히 그러지 말아야 할 일을 가고 있어요. 해서는 아니 될 일을 하고 있어요. 당연히 해야할 일은 또 하지 않고 있어요.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깊은 죄악이요. 죄와 사망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요.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그것은 스스로 자유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스스로 자유하지 못한다. 내가 이렇게 깊이 빠져 들어가서요 어느 사이에 이렇게 비참해졌는데 내 스스로 빠져나오지를 못해요. 의식이 노예화 되고 성품까지 노예로 바꾸어졌을 때, 다시 돌이키기가 어려워요.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1958년인가 봅니다. 그때 서울 안에 십자매 바람이 불었어요. 모조리 십자매를 키우면 돈 번다고 해서 제가 시무하던 교회에 여전도사님이 혼자 사는데 방안에다가 십자매를 엄청나게 많이 키웠어요. 그거 치우라고 그래도 "아이구 뭐 심심한데 뭐." 그러고 키우더니 이게 값이 떨어졌어요. 아주 망조가 들었는데 할 수 없이 십자매를 놓아주었지요. 새장 안에서 태어나 자라난 십자매를 이제 창문을 열고 나가라고 했는데 어떻습니까. 이 자유, 십자매가 새장 안에 있을 때는 쿠렁쿠렁 하더니 이걸 열어놓고 나가라고 그러니까요 나가 가지고 뱅뱅 돌다가 다 집안으로 다시 돌아 왔더라구요. 그리고 살지 못하더라고요. 이걸 알아야 됩니다. 어느 사이에 우리가 노예화 되어가지고 살았어요. 자유하지도 못할뿐더러 자유를 지킬 수가 없어요.
공산주의 치하에 있던 나라들을 방문해 봅니다. 공산주의 40년, 50년동안 했지요. 이제 자유를 얻었어요. 해방이 됐는데 왠걸요. 어느 사이에 인간성이 완전히 타락이 되어 버렸어요. 변질돼 버렸어요. 하나같이 게으르고 불신실하고 무책임하고. 공산주의의 이론이 뭡니까? 내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거예요. 가난한 자는 가난한 이유가 부자 때문이라는 거죠. 그게 바로 혁명이라는 거요. 혁명이 뭡니까? 내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그만 체질이 돼 가지고 자기 책임을 질 줄을 몰라요. 무책임해요. 그리고 소리만 지르면 뭐가 되는 줄 알아요. 우리도 간간이 보면은 나라를 향해서 뭐 달라, 뭐 달라. 그거 누가 주는 겁니까? 나라가 줄려면 세금 받아야지요. 주는 자 없이 어떻게 받는 겁니까? 기회의 평등은 잃어버리고 성과의 평등만 주장하는 거예요. 달라고 소리만 지르는데 뭘 가지고 주자는 얘기요? 일도 안하고 월급은 달라구요? 어디 이런 세상이 있습니까? 그 강도지! 이게 그만 체질화 되어버렸어요. 어느 사이에 성품화 되어버렸어요. 그 속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자유케 하는 자의 역할이 있고야 자유할 수 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십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는 정당한 값을 지불하고 자유할 수 있습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는 결코 자유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8장 36절에서 인자가 자유케 하면 자유하리라. 아들이 자유케 할 때만이 자유하리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하나님의 율법적 요구를 충족케 하시고 비로소 자유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리고 성령과 말씀으로만이 자유를 지켜갈 수 있는 것입니다. 자유는 얻기보다 지키기가 더 어려운 거예요.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가 나를 자유케 하는 것이지 내가 스스로 자유하는 게 아니요. 그가 나를 자유케 하는 것이죠. 내가 스스로 자유할 수는 없는 것이에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바로 이 길 외에는 자유함이 없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사랑의 영입니다. 이 속에만 진정한 자유함이 있습니다.
여러분, 나 자신의 자유를 다시 한 번 점검해 봅시다. 여러분은 얼마만큼 자유하십니까? 얼마나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까?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까? 사랑의 자유가 있습니까? 내가 나를 이기는 확실한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해방 56년 동안 자유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이것이 정치적인 자유라고, 경제적인 자유를 얻어보겠다고 '잘 살아보세'를 외쳐보았습니다. 그래서 자유했습니까?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하기 전에는 자유는 어느 곳에도 없는 것입니다. 노예 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자유가 있었고요 감옥에 있으면서도 자유인이었습니다. 권력의 보좌에 앉아서도 그는 자유인이 아니었어요. 부자라고 자유인이 아닙니다. 유식하다고 자유인이 아닙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한 사람만이 자유인입니다.
여러분, 옛날을 잊어버리지 맙시다. 그러나 옛날에 매여서는 안됩니다. 옛날에 아팠던 사정, 그 과거를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만은 그것에 매여 끌려가서는 안됩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지불된 엄청난 대가를 다시 확인하면서 자유의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자유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니에요. 진리의 길과 사랑의 길을 모르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니에요. 진리와 사랑과 생명과 성령의 역사 안에 진정한 자유함이 있는 것을 확실히 알고 여러분, 세상이 어떻게 흔들려도 여러분의 심령에는 무한한 자유함이 있어요. 거기에 창조적 역사가 있는 것이올시다.
생명의 성령의 법
로마서 8:1-6/ 피종진 목사
우리 인간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는 법이 있습니다. 자연에도 법칙이 있고, 인간의 생존 세계에도 법칙이 있습니다. 학교에는 교칙이 있고, 국가에는 헌법이 있고, 또 회사에는 사규가 있듯이 하나님이 다스리고 통치하는 이 세계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은
첫째, 죄의 법에서 해방시켜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죄를 범하면 그 죄로 인해서 반드시 대가를 따르게 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또 인간이 죄를 범할 때에 평안이 없어집니다.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시 38:3) 만약 성령에 의하여 죄의 법에서 해방을 받으면 그 때부터 죄로 인한 가책과 불안과 공포에서 생수가 강같이 흐르는 기쁨을 체험하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평안을 잃고 살까요? 그것은 환경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가진 소유가 적어서도 아닙니다. 좋은 환경과 많은 재물을 가지고도 마음에 기쁨이 없는 사람들은 다 죄로 인해서 평안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땅에 많은 사람들이 평안을 잃고 삽니다. 그 이유는 있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없어야 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죄입니다. 이 죄는 물로 씻어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끓는 물에 삶아도 없어지지 아니합니다.
성령의 법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주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며, 모든 죄와 허물에서 사함을 얻게 합니다. 우리가 죄인인데 왜 정죄를 받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성령의 법이 죄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었기 때문입니다.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한다고 말씀했습니다(잠 28:3). 또 영혼에 화가 있게 됩니다. “그들의 영혼에 화가 있을찐저”(사 3:9) 여기에서 그들은 죄의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5:14에 보면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18년 된 병자를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질병의 원인은 부주의해서 오는 것도 있고, 마귀가 주는 것도 있고, 하나님의 징계로 주는 것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로 임하는 병은 죄를 회개하면서 고침을 받습니다. 그리고 고침을 받았다가 또 죄를 범하면 그 병이 다시 올 수도 있습니다. 모든 죄에서 해방을 받음으로 질병까지도 치료받는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 태어났기 때문에 죄 문제를 해결하는 길만이 영생의 길이고, 구원의 길이고, 천국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는 죄를 사하기 위해서 제사 율법을 정하시고 양이나 소나 비둘기의 피를 흘리게 해서 속죄 받는 예식을 행하게 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단 번에 드린 어린양으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또 그 모든 죄를 자백함으로 죄에서 해방을 받게 하였습니다. 죄는 바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더러운 존재요, 가장 위험한 존재요, 가장 무서운 존재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이 죄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셔야 됩니다. 죄의 법에서 해방을 받을 때 마음의 평안과 즐거움이 회복될 줄로 믿습니다. 축복이 함께 하고 형통한 길이 열릴 줄 믿습니다.
둘째,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줍니다.
사망에는 육신의 사망과 제2의 사망이 있습니다. 사실 육신의 사망은 누구나 다 겪게 됩니다. 그러나 더 무서운 죽음은 제2의 사망입니다. 저는 지난번 대구 지하철 참사에서 유족들의 가슴 아파하는 모습들을 보고 참 가슴이 아팠습니다. 사실 육신이 물에 빠져서 혹은 불에 타서, 교통사고로 혹은 질병 등 사람은 여러 형태로 육신의 사망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심장이 멈추는 날, 숨이 끊어지는 순간 그 뒤에는 아프지 않습니다. 숨이 있는 동안에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2의 사망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세세무궁토록 고통을 당하는 영원한 지옥의 형벌입니다. 성령의 법은 이런 제2의 사망에서 해방시켜줍니다.
시편 23:4에 보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1:8에 보면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지옥을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살아있어서 그 세계를 접하지 않으니까 당장에 잠시 머무는 육신의 세계에만 비중을 두고 살지만 육신의 사망 이후에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는 제2의 사망이 있습니다.
죽음이란 육과 영이 이별하는 순간입니다. 육은 흙에서 왔기 때문에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영은 예수를 믿는 자는 천국, 믿지 않는 자는 지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지 않는 가족과 친척은 물론 이웃과 민족, 세계의 미전도 종족에게 힘써 전도해야 합니다.
셋째, 보증으로 인을 쳐줍니다.
여러분, 법적인 문제에 있어서 제일 시비가 걸린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사실이라 할지라도 도장을 찍지 않았든지 싸인을 친필로 안했다면 그 서류는 다 묵살되고 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내용이 뭔지도 모르고 함부로 도장을 찍어주어 패가망신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싸인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거기에 모든 법적인 문제가 좌우되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인치신 것은 만고불변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으로 ‘너는 내 아들’이라고 인쳐주셨습니다. 하늘 나라 시민 즉 천국 백성으로 인쳐주셨습니다. 영원히 사탄에서 승리할 자로 인쳐주셨습니다.
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보증을 받습니다. 고린도후서 1:22에 보면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성령으로 인침을 받게 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에베소서 1:13에도 보면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받을 것이다’가 아니라 이미 믿는 자는 인침을 받았습니다. 그 인침은 하늘에서 보증해주고, 천군 찬사가 보증해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30에 보면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인치심은 1년, 2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속의 날까지 보장을 받게 하십니다. 저 천국에 이를 때까지 그 효력은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세상 것은 기한이 지나면 말소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의 인치심의 약속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요한계시록 7:3에 보면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루가 천년같이 천년이 하루같이 오래 참고 기다리시면서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고 천국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성령의 법으로 말미암아 인침을 받고 구속함을 받은 자는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고, 영의 생각을 하고, 성령의 열매 즉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명의 성령의 법은 우리를 죄의 법과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주고, 보증으로 인을 쳐주셨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죄와 사망의 법에 결박되어 평안이 없고 불안과 고통 속에 살아가는 자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여 저들도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전도에 힘쓰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