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녕전 ⓒ 삼척동자
이웃나라 일본 수상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문제로 안팎이 술렁이던날, 일본에게는 패전일이고 우리에게는 광복의 날인 8월 15일 그 다음 날 나는 조선왕조의 신들의 궁전이라 할 종묘를 찾았다.
<야스쿠니(靖國)>라는 말에는 글자대로 만 풀이한다면 ‘평화로운 나라’라는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이름과는 달리 2차 세계대전의 A급 전범14명의 유물과 위폐가 모셔져 있다. 1869년 황군인 천황의 군대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지어졌던 ‘도쿄쇼콘샤(招魂社)’가 야스쿠니의 전신이다.
우리의 종묘는 역대 임금의 위폐를 봉안하고 제사를 드리는 나라의 신전이요 한 나라의 정통성을 부여하는 은유적 상징건축의 하나이다. 한 나라의 <종묘사직>은 왕도의 중앙에는 궁궐을 짓고 궁궐의 좌측에 종묘를 우측에사직을 짓는다는 좌묘우사(左廟右社)의 뜻과 함께 나라의 근본과 뿌리를 이르는 말이다.
강원도 삼척 미로면에 가면 준경묘(濬慶廟)가 있다. 준경묘 일대는 울창한 송림으로 산자수명(山紫水眀)한 곳이다. 이곳의 송림은 황장목(黃腸木)이라 해서 경복궁 중창 때 자재로 쓰였다.
정전 남문 ⓒ 삼척동자
준경묘는 이태조의 5대조인 목조(穆祖)의 아버지 양무장군(陽茂將軍)의 묘(墓)가 모셔진 곳이다. 미로에서 여섯 달을 머무는 동안 새벽이면 왕복 시오리 산길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준경묘에 올랐다. 경사가 급한 길을 오르노라면 숨이 턱에 차곤 했다.
새벽의 강원도 오지 산속 공기는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고 묘역에 다 달으면 맑은 약수로 목을 축였다. 풍수가들은 준경묘가 자리한 이곳을 조선 최고의 명당으로 꼽는다. 당시 전주에 살다가 삼척으로 솔가해 살던 이태조의 4대조 고조부인 <이 안사>에게 한 도승이 묏자리를 봐주면서 예언을 했다. “이 길지에 백우금관(百牛金棺)으로 양친을 안장하게 되면 5대가 안가서 천하를 경영하게 되리라” 당시 빈한했던 목조는 백 마리의 소를 구할 수 없어서 짚으로 소 모양을 만들었고 관도 목관에 금빛을 칠해서 묘를 모셨다. 예언 대로 5대손인 이성계의 조선 창업이 이루어졌다. 원래의 묘 자리가 분명치 않아 사실상 실묘(失墓)한 것을 1899년 고종 때에 현제의 자리에 묘소를 수축하였다. 전주 이씨 묘소로는 남한에서 최고 시조 묘이다.
정전 ⓒ 삼척동자
그 후 이성계의 집안은 이안사가 여진의 남경(지금의 간도 지역)에 들어가 원의 지방관이 된 뒤부터 차차 그 지역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이 안사의 아들 행리, 손자 춘이 원나라의 관리를 지냈으며 춘의 아들 자춘 그러니까 이 성계의 아버지도 원의 총관부가 있던 쌍성의 천호로 있었다. 이 자춘은 원나라의 원주민과 이주민 차별정책에 반감을 품고 고려를 돕기로 결심을 한다. 그 때 중국 대륙에서는 한족이 주 원장을 중심으로 세력을 일으켜 명나라를 세우고 원은 명에 의해 중원에서 밀려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원의 힘이 약화되자 공민왕은 반원정책을 실시하였고 이 자춘은 공민왕의 이러한 의도를 간파하여 공민왕을 만나 고려가 쌍성총관부를 치면 자신이 돕겠다고 약속한다. 그 이듬해 이 자춘은 아들 이 성계와 함께 고려가 실로 99년 만에 옛 땅을 회복하는데 일조를 한다. 이 안사는 동북면 병마사가 되어 동북면의 안정에 힘쓰다가 병사하고 그의 차남 이 성계가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 받는다. 이 성계는 1362년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쌍성총관부를 재탈환하기 위해 침입한 원의 나 하추를 격퇴시키면서 장수로서의 공식적인 인정을 받는다.
정전 퇴칸 열주 ⓒ 삼척동자 동북면도지휘사, 1384년에는 동북면 도원수문하찬성사가 되었으며 , 1388년에는 수상격인 문하시중의 바로 아래인 수(守)문하시중이 되었다. 원에 이은 명나라는 고려에 대해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는데다 철령 이북 땅을 차지하겠다고 고려를 위협했다. 이는 곧 명나라 역시 원과 마찬가지로 고려를 속국으로 삼겠다는 말이었다. 고려는 크게 반발하여 최영을 중심으로 명의 전진기지인 요동 정벌 주장이 나왔다. 이 성계는 이른바 4불가론(四不可論)을 내세워 요동정벌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우왕과 최 영이 이 성계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요동정벌을 독촉하자 이 성계는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논의한 뒤 개경을 향해 회군을 단행한다. 위화도 회군이 조선 창업의 단초가 되어 고려왕조는 쇠잔의 빛을 보이기 시작했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 성계는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고 자신의 4대조인 목조까지 왕으로 추존하여 종묘를 건설한다.
악공청 고주와 맞보 동자주대공 ⓒ 삼척동자
그이 들이 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라는 앞선 왕계이다. 왜 하필 4대조까지였을까? 예기(禮記)에 따르면 제왕은 4대조까지 자신을 포함해 5묘제를 택한다고 했다. 5묘제란 5대가 넘으면 위패를 태우고 1년에 한번 합동으로 시제를 지내는 것으로 대신한다. 그러나 군왕의 위폐는 영구보존해야 하므로 별도의 사당을 짓고 위폐를 옮긴다. 이 별도의 사당을 별묘(別廟)라고 한다. 그러나 후세 왕의 수가 늘어나는데 무한정 별묘를 더 지을 수가 없자 후한 대에 와서는 예법이 바뀌어 하나의 건물 안에 방을 막아 여러 개의 사당을 두는 동당이실제(同堂異室制)를 택하게 된다. 우리의 종묘도 말하자면 동당이실제의 산물인 셈이다. 종묘의 정전(正殿)은 당초에는 태실 7칸의 건물로 지어졌다. 4대 추존 왕을 모시고도 3칸이 남았다. 그러나 세종 조에 와서는 세종 자신은 막상자신이 죽으면 들어갈 태실에 여유가 없게 된다.
전사청/제례음식을 준비하던 곳이다 ⓒ 삼척동자
정전을 확장하든가 별도의 사당을 지어 신위를 옮기든가 두 가지 방법뿐이다. 정전 서쪽에 영녕전(永寧殿)을 지어서 추존왕 4대의 신위를 옮겼다. 다시 명종 때에 오면 정전과 영녕전 모두 선왕들의 신위로 넘쳐난다. 다시 봉안의 원칙이 바뀌어 진다. 5세가 지난 왕은 원칙적으로 정전에서 영녕전으로 모시되 태종이나 세종 같은 공덕이 뛰어난 선왕의 위폐는 백년 불천지주(百年不遷之主)로 영구히 정전에 봉안한다. 또 덕종(세조의 장자이나 일찍 죽었고 그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이 성종으로 즉위)이나 장조(영조의 아들 사도세자, 정조의 아버지)와 같이 실제 보위에 오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세자들도 왕으로 추존한다. 그리고 정전 가장 서쪽부터 선왕의 순으로 신위를 모신다. 영녕전에 모신 임금들은 추존 왕이거나 아니면 단명한 임금들이다. 정전에 모신 헌종부터 순종까지는 생전의 공덕과는 상관없이 5세를 넘기지 않았기 때문에 저절로 불천지주가 되었다.
정전 마당 박석 ⓒ 삼척동자 이렇듯 까다로운 법식을 따라서 종묘는 여러 차례의 증축을 거친다. 지금의 종묘는 1834년 증축 때 만들어진 것으로 태실만 보면 정전은 7칸에서 4칸씩 3번 확장해 19칸으로, 영년전은 6칸에서 시작해 두 차례 증축을 거쳐 16칸이 되었다. 현재 정전 19칸에 19분의 왕과 30분의 왕후를, 영녕전 16칸에 15분의 왕과 17분의 왕후 및 조선 마지막 황태자인 고종의 아들 이은(李垠) 부부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실로 조선 500년의 신들의 궁전이라 할 만 하다. 도성 축조와 대소 전각 문루를 작명하던 정도전이 이성계에게 보고하지 않은 비밀이 하나 있다. 종묘의 정문을 창엽문(蒼葉門)이라 지어놓고 그 내력을 보고하지 않은 것이다, 창엽문에는 조선이 28세로 끝나는 비밀이 숨어 있었다. 창(蒼)자를 해자하면 艸 八 君의 합자이므로 스물여덟 임금이라는 뜻이다. 엽(葉)자도 艸 世 十 八의 네글자의 합자이므로 역시 28세라는 뜻이 된다. 조선 마지막 황태자 이구와 방자 여사가 마지막 스물여덟 번째로 봉안되었다.
정전 남문(신문) ⓒ 삼척동자 지금 종묘 정문에 창엽문이라는 현판은 없다. 정도전 그는 알고 있었지만 이성계의 진노를 두려워 숨긴 것일까? 아니면 후세에 누군가 글자 놀이로 지어 낸 이야기일까? 종묘는 정전과 영녕전이라는 두개의 중심영역을 갖는다. 나머지 재궁(어숙실)이나 향대청 등은 두 신전에 제사를 드리기 위한 부속공간들이다. 종묘에는 의미 있는 두개의 길이 있다. 하나는 신도(神道)이고 또 다른 하나는 어도(御道)이다. 신도는 혼령만이 드나드는 길이고 어도는 제주인 임금과 세자의 길이다. 두 길은 모두 전돌 판을 가지런히 깔았다. 신령은 정신만 있을 뿐 몸이 없기 때문에 신도의 폭은 전돌 2개 폭의 좁은 길이다. 방향만을 가리키는 상징으로서의 길이 정전과 영녕전 마당의 중앙을 관통하여 각각의 신문(神門)으로 이어지는 외줄기 길이다.
신도와 어도 ⓒ 삼척동자 임금은 어도를 통해 정전이나 영녕전의 동문만을 출입할 수 있고 신들의 문인 남문을 드나들 수 없다. 종묘의 정문에서 시작된 어도와 신도는 향대청과 망묘루(望廟樓) 앞의 연못을 지나 우측으로 꺾어 제궁으로 이어진다. 향대청은 제례에 사용하는 향, 초, 패를 보관하는 곳으로 제향에 나갈 제관들도 여기서 대기를 한다. 망묘루는 왕이 제향시 이곳에 들러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을 추모하고 나라와 백성을 돌보고자 마음을 가다듬는 곳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의 건물이다. 망묘루 옆 향대청 동남 모퉁이에는 따로 담장을 둘러 독립된 영역을 형성한 공민왕 신당이 자리한다. 조선왕조의 묘궁 안에 고려왕의 사당이 있다는 사실이 의아스럽다. 공민왕은 반원 자주 개혁정치를 이끈 개혁군주였다.
망묘루/왕이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을 추모한다. ⓒ 삼척동자
이 성계 정도전 등의 조선 개국파들도 따지고 보면 공민왕의 중용 덕에 중앙정계에 등장할 수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공민왕 사당에는 이 성계의 보은의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제궁은 임금이 목욕재계하고 제사 집전을 준비하는 곳이다. 다시 어도는 제궁의 서쪽 문에서 시작하여 정전의 동문을 향한다. 종묘의 어도는 그 자체가 의례이고 질서이다. 종묘의 정전과 영녕전 그리고 부속 사당 들인 공신당(功臣堂)과 칠사당(七祀堂) 공민왕(恭愍王) 신당(神堂)이 모두 감실(龕室)형의 건물들이다. 정면에만 목조의 문과 창이 달릴 뿐 나머지 3면은 모두 두꺼운 전돌 벽으로 폐쇄된 마치 동굴과도 같은 건물들이다.
공신당/역대 왕들의 공신 83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 삼척동자 하얀 박석들로 마감된 바깥의 마당과 기단의 밝음에 대비되어 한 줄기 빛조차 없는 암흑의 내부가 마치 산자들의 공간과 죽은 자들의 공간으로 나뉘어 있는 듯 하다. 그 산자와 죽은 자의 공간 사이는 제3의 중간 공간인 퇴 칸이 자리한다. 열주들이 마치 기둥에 연결된 창방을 팔로 삼아 신들이 어깨동무라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지붕만 있고 벽은 없는 중간지대, 몸체는 외부에 속하고 지붕은 내부에 속한 내부도 외부도 아닌 퇴 칸은 그래서 바깥보다는 어둡고 안보다는 밝은 어슴푸레한 공간이다. 정전과 영녕전의 측면과 뒷면은 이중 전돌 벽으로 쌓아 육중한 성곽의 모습을 보인다. 정전의 뒤 쪽은 길게 뻗은 벽체와 지붕의 처마와 뒷마당 축대 이 세 개의 직선이 마치 철길처럼 뻗어 나가 무한대의 끝에서 만나는 소실점을 이루고 있다. 정전의 뒷벽은 분절이 없는 하나의 벽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영녕전의 뒷면은 칸칸이 세운 기둥을 노출시키고 그 기둥 사이로 벽돌 벽을 쌓았다. 정전 벽의 연속과 영녕전 벽의 분절의 대비가 마치 정전의 통 지붕과 지붕 중간이 솟은 영녕전 지붕의 차이로 다가온다.
정전 후벽 ⓒ 삼척동자 벽돌이 우리 건축에 본격적으로 쓰인 시기를 수원 화성 축성 때부터라고 본다면 이 벽돌 벽체는 종묘가 병화로 불탄 임진왜란 이전에는 적어도 판벽이거나 사고석 화방벽으로 쌓은 것을 후대 어느 시기에 와서 벽돌로 바꾸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종묘의 건물에서는 산자들의 궁궐에서 보이는 장식이나 기교는 볼 수 없다. 서양의 신들의 궁전처럼 화려한 조각이나 장식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다포양식의 중첩된 첨차와 쇠서로 화려하게 꾸몄을 법 하지만 간결한 초각으로 그친 이익공 집이다. 종묘 하면 그 숲을 빼 놓을 수 없다. 강원도 원주 시 신림 면은 한자로 神林이라 쓴다. 신이 깃든 숲이라는 뜻이다. 당산나무를 중심으로 2만 여 평의 숲이 있다. 옛 조상들은 당산나무나 성황나무를 자연신으로 여겼다. 당산나무를 둘러 싼 신림은 신이 깃든 숲이자 신의 공간과 세속의 공간을 분리하기 위한 숲이다.
판문, 이익공, 초익공 ⓒ 삼척동자 종묘의 숲은 대표적인 국가의 신림이다. 와의 신위를 모신 신성한 공간을 속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숲을 두르고 신격을 부여했다. 왕을 곧 신으로 여기고 신이 깃든 숲을 정성스레 보호했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난 경주 나정 숲, 경주 김씨 시조 김 알지가 태어 난 계림, 고구려 소수림왕릉 주변 수림 등도 국가가 신성을 부여한 신림이었다. 종묘의 숲 또한 신성하다. 종묘에 들어서면 연못 앞에 거대한 참나무 하나가 종묘의 숲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그 연못에는 향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연못 속에는 소나무를 심는 게 일반적이지만 ‘사당’인 종묘에는 향나무를 심었다. 조상께 향을 올린다는 뜻이다. 잘 자란 참나무 숲이 정전과 영녕전을 호위하고 있다. 갈참나무 잣나무 느티나무 벚나무 밤나무 물푸레나무 단풍나무 층층나무가 무성하다. 갈참나무 잣나무 그늘에는 때죽나무와 팥배나무가 자라고 그 아래엔 맥문동이 숲을 이룬다.
쪽동백 열매 ⓒ 삼척동자 종묘에는 꽃나무가 드물다. 궁궐 후원이 산자를 위한 숲이었다면 종묘 숲은 죽은 자를 위한 숲이었다. 꽃계단을 만들고 알록달록한 꽃나무로 장식한 궁궐 후원과 달리 일체의 장식을 금했다. 건물에는 요란한 단청을 입히지 않았고 뜰엔 정자나 누각을 세우지 않았다. 정전 가는 길 숲 에는 때죽나무라고 부르는 쪽동백의 푸른 열매가 알알이 달려 있었다. 봄이면 하얀 꽃이 달리는 쪽동백 이야 말로 종묘에 어울리는 나무다. 조선왕조 5백년의 역사와 정신이 살아 숨쉬는 종묘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또한 종묘 제례와 종묘제례악은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되었다. 우리만의 문화유산이 아닌 인류 전부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 아닐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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