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봉독 : 갈6:17
* 말 씀 : 예수의 흔적을 가지라
요사이 인기 있는 드라마 중에 ‘추노’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도망친 노비들을 잡는 추노 꾼에 관한 내용입니다. 신분이 노비로 전락하게 되면 이마나 몸에 노비를 상징하는 문신을 새깁니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쇠를 달구어서 몸에 문신을 만드는 것입니다.
노비가 싫어서 도망을 쳐도, 당시에 노비를 전문으로 잡는 추노꾼들이 있어서, 양반들이 도망친 노비에게 현상금을 걸고 잡기를 원하면, 죽이던지, 아니면 산채로 잡아와서 온갖 못된 짓을 시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자신을 소개하기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편지를 씀에 있어서 거의 막바지에, 아니 덧붙여서 마지막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7절에 ‘이후로는’이라는 말은 ‘덧붙여서’, ‘마지막으로’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사실 우리가 예전에 편지를 쓸 때에, 덧붙여서 마지막으로 쓰는 말들은 어떤 내용입니까? 본문에서 정작 말하려고 하는 중요한 내용과 버금가는 가치와 중요성을 가지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편지를 마쳐감에 있어서, 다시 한 가지 중요하게 덧붙여서 할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7절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입니다. 여기에서 ‘흔적’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티그마’로서 이것을 좀 더 분석하면 중성・명사・목적격・복수로 쓰였습니다. 즉, 흔적이 여러 개란 말입니다.
이 말은 고대세계에서 종교적인 문신이나 노예표시를 가리키는 흔한 단어였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종교적인 문신이나 노예표시를 하였다고 보기에는 힘듭니다. 이것 보다는 도리어 사도로서 고난을 당하는 동안 그의 몸에 남겨진 상한 흔적들을 염두에 두고 사용한 낱말입니다. 하나의 상한 흔적이 아니라 여러 개의 상한 흔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흔적이 있습니까? 있다면 과연 몇 개의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까?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사람들은 영광받기는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상석에 앉기는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좋은 일, 기쁜 일, 남이 잘 알아주는 일을 하기는 좋아합니다. 그러나 비난받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 나쁜 일, 궂은 일, 남이 알아주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은 싫어합니다. 많이 힘들고, 수고해야 하고, 때로는 욕을 먹어야 하는 일은 하기 싫어합니다.
저는 최근에 감동적인 책 한권을 읽고 있습니다. 목회자인 한사람으로서 정말 저를 부끄럽게 만드는 한 사람에 관한 책입니다. ‘그 청년 바보 의사’에 나오는 안수현이라는 내과전문의입니다. 그는 우명한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명망가나 의료계의 권위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학계에 업적을 남긴 의학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똑같은 나이 33살에 예기치 못한 불의의 사고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평범한 의사이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아쉬워합니다. 그에 대한 추억을 잊지 못하고 그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는 ‘참 의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흔적을 가진 참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에콰도르의 선교사이었던 ‘짐 엘리엇’이라는 분이 한 말입니다. ‘하나님, 마른 막대기 같은 제 삶에 불을 붙이사 주님을 위해 온전히 소멸하게 하소서. 나의 하나님, 제 삶은 주의 것이오니 다 태워주소서. 저는 오래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다만 주 예수님처럼 꽉 찬 삶을 원합니다.’
월간지 <교회성장> 3월호에 의미 있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새 신자들이 교회에 정착하면서 가장 바라는 점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바른 신앙생활’이란 대답이 28%로 가장 높았습니다. 그 다음이 ‘사랑이 가득한 성도모임과 교제’로 20%였고, ‘섬김과 실천이 있는 교회’가 14% 그 다음이었습니다. 무엇입니까? 62%가 예수의 흔적을 보기를 원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 예수님의 흔적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 중에 많겠지만, 지금 당장 세 사람이 떠오릅니다. 예수님, 바울, 안수현 전문의입니다. 그리고 저 뿐만 아니라 오늘 한국교회 안에, 아니 우리 교회 안에 예수님의 흔적을 가진 분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17절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입니다. 왜 바울을 괴롭히지 말아야 합니까? 그는 예수님의 흔적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곧 예수님을 괴롭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흔적이 하나가 아닌 여러 개를 가지는 분들이 됨을 통해서 이런 놀라운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