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연혁
한산(韓山)은 충청남도 서천군(舒川郡)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 때에는 마산현(馬山縣), 우두성(牛頭城)이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가림군(嘉林郡: 林泉)의 영현이 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한산으로 고쳤다. 1175년(명종 5) 감무(監務)를 두었고 홍산(鴻山)을 겸임하였고, 후에 지한주사(知韓州事)로 승격되었다가 1413년(태종 13) 한산군(韓山郡)이 되었다. 1895년에 지방제도 개정으로 홍주부 한산군이 되었다가, 1896년에 충청남도 한산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서천군에 병합되어 지금은 한산면으로 남아 있다.
성씨의 역사
한산이씨(韓山李氏)는 한 뿌리에서 각기 시조를 달리하는 두 파로 분화되었다.
한산이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호장공계(戶長公系)의 시조는 고려 숙종 때 권지호장(權知戶長)에 오른 이윤경(李允卿)이다. 이윤경은 한산 지방에 토착하여 세거해온 호족(豪族)의 후예로 고려 중엽에 향리(鄕吏)의 우두머리인 호장(戶長)을 역임했고, 5대에 걸쳐 호장직을 세습하여 오면서 명문의 기틀을 다졌다.
한편 한산이씨의 중시조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이며 그의 아버지가 바로 가정(稼亭)이다. 이곡은 이윤경의 5대손으로 당대의 대문장가이며, 우탁(禹倬) 이동(易東),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경학(經學)의 대가였다. 그는 1320년(충숙왕 7) 문과에 급제하고 원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하였는데 원의 벼슬로는 중서성좌우사원외랑(中書省左右史員外郞)을, 고려에서는 벼슬이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올라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이색이 1362년 홍건적의 난 때 왕을 호종(扈從)한 공으로 세워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한산으로 하였다.
권지공계(權知公系)의 시조 이윤우(李允佑)는 고려시대에 문과에 올라 권지문하사사(權知門下司事) 혹은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侯)를 지냈는데, 왕의 신임을 얻어 동생 이윤경과 함께 각각 한산이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호장공계의 족보에는 두 사람이 형제였다는 내용이 없다.
4세손 이무(李茂)가 충렬왕조에 사설직장(司設直長)이 되고 신호위낭장(神虎衛郎將)으로 공을 세워 대호군(大護軍)에 오르고 광정대부(匡靖大夫)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에 이르러 한주군(韓州君)에 봉해진 이후로 후손들이 한산을 관향으로 삼았다.
호장공계(戶長公系)의 세록(世錄)편에는 이윤경을 시조로 하고 있으나 그 이전에도 선조가 있었겠지만 지금은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또한 권지공계(權知公系)의 세록편에서도 이윤우를 시조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조 이전은 전하는 바가 없어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윤경과 이윤우가 형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한산이씨는 이들을 시조로 각기 분파되었으며 그 중 이곡·이색을 배출한 호장공계의 후손이 크게 번창하였다.
분적종 및 분파
호장공계(戶長公系):
감찰공파(監察公派)
공무공파(恭武公派)
광목공파(光牧公派)
문열공파(文烈公派)
문혜공파(文惠公派)
순절공파(順節公派)
양도공파(良度公派)
직강공파(直講公派)
진목공파(晉牧公派)
집의공파(執義公派)
총제공파(摠制公派)
판중추공파(判中樞公派)
권지공계(權知公系):
경력공파(經歷公派)
동추공파(同樞公派)
통례공파(通禮公派)
한천군파(韓川君派)
현령공파(縣令公派)
주요 세거지
강원도 회양군 상북면 목곡리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마장리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온동리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봉봉리
충청북도 청원군 북일면 주성리
황해도 해주군 서변면 지동리
황해도 서흥군 용평면 월탄리
황해도 연백군 유곡면 이포리
전라북도 옥구군 성산면 도암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한산이씨는 42,005가구 총 136,615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