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
샤넬의 창시자, 가브리엘 샤넬(Gabrielle Chanel )은 1883년 8월19일 프랑스의 소뮈르라는 작은 마을에서 3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방랑벽이 있는 아버지는 집안을 돌보지 않았고, 아내가 죽자 그는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 세 딸을 맡겨버리고 만다. 샤넬은 수녀원에서 자라며 바느질과 부엌일을 배우게 된다. 20세기의 패션을 이끌어가리라고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바느질이 서툴렀던 샤넬은 바느질보단 바늘을 찾느라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뛰어난 패션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수녀원의 생활은 훗날 샤넬의 패션에 깊은 영향을 끼칠 미적 감각 등 많은 요소들을 쌓게 되는 시절이 되었다. 샤넬의 스타일이라고도 할 만한 흑백의 조화 역시 그때의 영향이었다. 노래를 좋아했던 샤넬은 수녀원을 나온 후 물랭이라는 작은 도시의 한 뮤직홀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이 시절에 그녀가 즐겨 부르던 `Qui qu`a vu Coco`에서 코코라는 애칭을 얻게 된다. 물랭에서 만난 부르주아 집안의 아들 에티엔느 발상은 샤넬을 상류사회로 이끌어 주었다. 이후 자유분방하고 매력적인 이 젊은 여성의 주변에는 소설가, 시인, 배우등 당대의 스타일리스트들이 자연스럽게 몰려들었으며 특히 샤넬이 보여주는 개성적인 옷차림에 반해버리고 만다. 샤넬은 발장과 또다른 후원자 보이 카펠에게 돈을 빌려 파리의 번화가 캉봉거리에 메종 샤넬이라는 이름의 모자가게를 열면서 패션 세계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 1913년 노르망디 연안의 유명한 휴양도시 도빌의 공토비롱 거리에 가브리엘 샤넬의 이름이 새겨진 상점에는 모자뿐만 아니라 옷이 진열되기 시작했다. 샤넬은 어떤 디자이너도 만들지 않았던 새로운 옷을 만들었으며, 완성된 옷은 먼저 입어보고 불편하거나 어울리지 않는 옷은 다시 만들지 않았다. 그녀만의 패션감각과 사업감각은 샤넬상점을 도빌에서 최고의 판매를 올리는 곳으로 만들었다. 또한 그 당시 남성들의 속옷으로만 쓰이던 저지를 사람들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편안하고 실용적인 여성의 겉옷을 디자인함으로써 코르셋과 거추장스러운 패티 코트로부터 여성을 해방시킨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전쟁과 함께 사라진 남자들의 빈자리를 대신해서 여성들은 일을 해야했고 더욱 편하고 실용성 있는 디자인의 옷이 필요했다. 그리고 거기엔 샤넬의 옷이 적격이었다. 전쟁으로 인한 여성들의 급격한 삶의 변화는 샤넬의 옷을 한층 부각 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샤넬의 의상은 그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중에 만들어진 샤넬의 가장 유명한 디자인인 투피스, 또는 스리피스로 구성되는 수트는 1939년까지 유행하게 되며, 1950년대 샤넬의 재등장과 함께 나타나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있다. 2차 세계대전 중 샤넬은 독일군 장교와 사랑에 빠져 부역자 색출을 피해 메종 샤넬의 문을 닫고 은퇴의 길을 걷는다.
가브리엘 코코 샤넬(1883 ~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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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은 패션은 사라질지라도 스타일은 남는다 라고 종종 말하곤 했다. 조오지버나드 쇼는 샤넬을 현존하는 세상의 가장 중요한 두명의 여성중에 한명 - 다른 한명은 마리 퀴리-였다. 이라고 언급했다. 그녀는 카리스마적인 미인이었으며 타고난 운동가였고 놀랄만한 장인이었다. 그녀의 성공을 그녀가 가진 개성적이 스타일이 국제적으로도 수용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을 ꡒ20세기 가장 합당할 정도로 , 자신이 이룩했던 스타일과 성공을 자신이 적절한 때와 장소에 있었기 때문으로 돌렸다. 샤넬 스타일은 우아함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동시에 한때에는 우아함과는 거리가 먼 개념으로 인식되던 편안함, 넉넉함, 그리고 실용성에 기초를 두고 있다. 샤넬 스타일은 많은 남성적인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것은 굉장히 여성스럽게 보인다. 이 스타일은 널리 퍼져있기 때문에 시종 빌려 은 듯한 바지와 위로 올린 소매가 달린 스웨터만 입고 있는 , 자기 자신을 유행에 뒤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여성도 의식적으로 이 스타일의 창시자의 자신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을 상기하세 된다. 샤넬의 스타일은 이미 그녀보다 오래 살아남아 있으며, 지난 시절동안 계속해서 뉘앙스와 적절성을 발전시켜오면서, 그것이 탄생되었던 20세기보다 더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징후를 보여주고 있다. 샤넬의 가장 유명한 디자인, 즉 수백가지로 변형되었던 그 디자인은 투피스와 때로는 쓰리피스로 구성되는 슈트이다. 1차대전 기간동안에 처음 만들어져서 1939년까지 계속해서 유행했던 이 슈트는 50년대에 다시 리바이벌 되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인기있는 디자인이다. 비록 샤넬이 남성복으로부터 많은 디테일을 따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슈트는 전혀 모방적이지 않았다. 이 슈트는 보통 저지, 벨벳, 실크, 샤므즈, 또는 트위드로 만들어져 부드러웠으며 남자양복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슈트들은 모두 걷기에 편하도록 주름을 넣은, 무릎까지 오는 스트레이트 스커트와 사람들이 포켓이 있었으면 하는 자리에 포켓이 달려있고, 실제로 잠글 수 있게 되어있는 소매단추가 있는 박스형 가디건 자켓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요소들은 샤넬 슈크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불변하는 실용적인 특성들이다. 1954년 이후에는 자켓에 무게를 더해주는 금색체인과 브라스 단추와 함께 키워드와 기본이 사용되었다. 샤넬은 자켓의 단추를 깨워서 입어햐만 하는 슈크에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추를 채우거나 또는 채우지 않고 오픈해서 입거나, 어깨에 걸치기만 해도 항상 보기 좋게 보이는 자켓을 디자인했다. 그래서 그녀는 이것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전체의상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부분이 되는 블라우스들을, 슈트의 안감과 매치되는 직물이나 또는 슈트와 비슷한 컬러로 프린트되거나 칼라와 커프스가 달린 티하나 없는 하얀 색상의 것들로 재작했다. 오늘날에도 많은 여성들이 이러한 룩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에 이 스타일은 50년대와 60년대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제 새롭게 시작하려는 많은 디자이너들에게 있어서는 크게 의지할 수 있는 대들보와 같은 요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넬의 크리이드 마트는 단순하면서 검은 드레스이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한 이 드레스들은 재간과 포로포션이 이루어낸 마법의 산물이다. 그녀는 새로운 테일러드 디자인에 전통적으로 우아함을 주는 요소라고 여기고 있던 레이스,, 툴, 자수, 또는 부드럽고 가벼운 실크를 사용했다. 이 단순한 검은 드레스 위에는 같은 직물로 만들어진 가디건을 입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밖에 무엇인가를 하나 더 입으면 옷치장을 지나치게 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샤넬이 패션계에 뛰어든 처음 몇 년간은 지나친 옷치장을 무척 혐오스럽게 생각하던 때이다. 샤넬은 디자인 창작활동을 함에 있어서 항상 실용적으로 전환시켰다. 그녀는 자신의 모델들에게 직접 천을 쒸어놓고 작업했는데, 그녀는 동작에 따라 직물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확실히 알게 될 때까지 모델들에게 몇시간이고 그들의 손과 발을 흔들어 보라고 지시했다. 그녀는 여성들이 다리를 꼬꼬 않거나 자동차를 편하게 타고 내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스커트에 주름을 넣었다. 그녀는 팔을 더 자유스럽게 움직일 수 있도록 역설적으로 암홀을 높고 딱 맞게 재단하였다.그녀는 자신들이 더 자랄지도 모른다는 착각속에 빠져있는 고객들과 새로운 길이가 유행하게 되면 옷단을 내서 그 유행에 맞추며 더 아름답에 보일것이라고 생각하는 고객들을 비웃었다. 따라서 그녀는 옷단을 많이 넣지 않았다. 그녀는 보기에는 좋아 보이지만 피부에 닿는 촉감이 좋지 않는 직물은 사용하지 않았다. 또한 그녀는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온을 위해 코트에 수에이드나 모피를 안감으로 넣었다. 그녀는 이렇게 실제적인 디테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한편 그녀의 옷에 숨겨진 특징, 즉 그 옷을 입는 여성들이 자신의 옷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도록 해주는 자신있는 멋을 불어 넣었다. 단순하면서 움직이기 편하다고 해서 그 자체만으로 불멸의 스타일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샤넬의 스타일을 다른 것들과 뚜렷이 구별되게 하는 것은 디테일의 완벽한 발란스과 액세서리 였다. 이미테이션 보석은 샤넬이 의상을 디자인하기 오래 전부터 존재했었다. 스러나 이것은 유행하는 진짜 보석들을 흉내낸 모조물에 불과했으며 그것을 위한 패션은 존재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여성이 걸치고 있는 보석과 약과 질은 그 여성이 보호자로부터 얼마나 잘 돌보아지고 있는가를 나태내주는 표시였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진짜 보석의 이미지는, 그것을 걸칠 당사자인 여성들의 역할변화와 더불어 변화되었다. 전쟁기간 동안에는 과시적인 겉치례가 천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전쟁후에는 여성들이 새롭게 이룩한 자립을 향유하게 됨에 따라 이미 진주 목걸이가 반드시 그녀의 보호자나 또는 안전한 미래를 보장받는 허세와 독립을 말해주는 것으로 장난스럽게 걸릴 수 있었다. 샤넬은 자신이 달고 있는 것과 비슷한 보석들을 그녀의 고객들에게 만들어 주었다. 그것들은 진짜 보석일 수도 있었고 때로는 모조품이 섞여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녀의 보석에 관련된 모든 것은 과거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것들이었다. 그녀는 여러개의 보석이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스타일은 좋아했으며 그 중에는 크고 작은 보석들이 합쳐져 있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한 파운드나 두 파운드의 모조품이 포함되어 있는 준보석들도 있었다. 그녀는 이 보석들 모두를 그녀의 슈트중 하나 위에 쌓아 놓았으며 여러 개를 한꺼번에 그것도 대낮에 달기를 즐겼다. 그녀는 돈과 그다지 관계가 없는 허세부리지 않는 스타일을 창조했으며, 그 효과는 즉시 그리고 굉장하게 나타났다.
어린시절...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여성 꾸뛰리에인 샤넬은 1883년 8월 19일에 프랑스의 소뮈르라는 마을의 한 병원에서 태어났다. 가브이엘- 그녀의 출생증명서에는 보뇌르라는 미들 네임이 나나타 있지 않다. -기 겨우 12살일 때, 드녀의 어머니는 죽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돌아다미녀서 포도주를 파는 행상이었는데 그는 그녀와 그녀의 여동생을 수녀원으로 데리고 가 거기에 맡긴 후 미국을 떠낙ㅆ으며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샤넬은 18살에 자신의 인생을 시작하기 위해서 그 수녀원을 떠났다. 그녀는 그 무렵 양복점에서 보조원으로 일하게 되었지만, 그녀는 뮤직 홀의 가수가 되기를 더 열망하고 있었다. 코코라는 그녀의 애칭은 그녀가 즐겨부르던 뀌 꾸와 뷰 코코와 코코리코라는 두가지 노해의 곡명으로부터 따온 것이다. 샤넬의 가수로서의 생을 시작해보려고 시도했던 오베르뉴라는 도시는 작은 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여러 가지 제한적인 것들을 보충해 줄만한 몇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 연대 장교중의 한면인 에티엔 발잔은 스포츠맨이며 말 농축가였는데, 그는 곳 젊은 코코를 눈여겨 보게 되었으며 샤넬이 25살인 그 무렵부터, 그는 그의 애인이 되어 그의 성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발잔의 집은 그의 수많은 나양친구들과 그들의 패셔너블한 정부와 창녀가 모여드는 장소였다. 그녀가 호화로운 이 환경속에서 딪고 설 발판을 얻게 되었을 때, 젊은 코코 샤넬은 말 위에서나 게임에서 보여준 그녀의 용기 뿐만 아니라 도전적인 태도를 지닌 그녀의 두드러진 미모로 인해 타인들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이러한 그녀의 태도를 자신을 다른 정부들이나 창녀들과 구별되도록 하겠다는 그녀의 결심과, 그녀가 상류층을 흉내내는데 취미가 없다는 사실을 과시하려는 욕망, 그리고 그녀 주위에 있는 남자들이 무관심하고 자신감있는 태도를 의식적으로 찬양하고 있었다는 것에서 기인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을 고집함으로서 미래의 스타일을 예언해주는한 스타일을 이루어냈다.
출발..... 여성들은 샤넬이 자신이 쓰려고 만든 모자에 감탄했으며 그것과 똑같은 모자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샤넬은 1908년에 1충에 있는 발잔의 파리 아파트에서 단순하게 장식된 모자들을 팔기 시작했다. 1910년에는 발잔의 친구이자 폴로경기 흥행업자인 (그리고 샤넬의 새이인이기도한) 보이 카펠이라는 영국인이 자신과 비슷한 샤넬의 진지한 열망을 이해하고 그녀를 위해 깡봉 거에서 작은 샵을 내 주었다.
코코 샤넬의 성공가도 2년 후에는 그녀의 샵샵에 모자와 함께 드레스 주문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그녀의 첫 번째 작춤에는 저지로 만든 짙은 감색 드레스와 하얀색 오간기 칼라가 달린 검정색 벨벳으로 만들어진 드레스가 포합되어 있었다. 특히 샤넬은 저지로 드레스를 만듬으로서 명백하게 최고의 직물이 아니면 ꡐ꾸뛰르ꡑ를 만드러 내지 않는다는 당시 꾸띄르들의 규정을 속였다. 그후, 몇 년 동안, 샤넬은 그 당시에 프랑스 제일의 휴양지였던 도빌과 비아리츠에 그녀의 부띠끄들을 새로 오픈하였으며, 파리에 있는 부띠끄도 리츠 호텔의 길 건너편에 있는 깡봉가의 더 큰 건물로 옮겼다. 그녀의 고객들은 본질적로 샤넬이 입고 있는 것과 같은 의상들과 바닷가에서 격식을 차리지 않고 입을 수 있는 의상들을 사기 위해 그녀의 부디끄를 찾았다. 즉, ㅜ그녀는 꽃무늬가 프린트된 실트를 잘라내어 그것을 투위드로 만든 타켓의 탈라와 커프스에 아플리테 하였으며 코트의 안감을 그 안에 입는 드레스와 어울리는 직물로 만들었고, 벨트와 버튼 그리고 라벨에 꽂는 꽃들의 색상과 무늬를 일치시켰다. 30년대가 시작되면서 냐엘의 이브닝 드레스는 더 길어지고 더 여성스러원졌으며 30년대 말에는 완전히 환상적인 것이 되어JT다. 그녀는 여름용 이브닝 드레스에 전에는 평상복이나 란제리를 만들 때 사용되던 직물에, 이와는 대조적인 은색 장식용구 구멍을 내거나 모조 다이아 몬드로 만들어진 어깨끈같은 번쩍거리는 소재를 결합시킴으로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또한 린넨, 면 오간디, 그리고 영국풍 자수로 만들어진 행커치프를 하용하기도 하였다. 이런 드레스들에는 얇은 레깅스가 달려 있었는데 샤넬은 이것을 60년대에 라이벌했다. 1937년에 샤넬은 극장에서 여성들이 자신의 파트너옆에 앉았을 때 무척 작아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키를 더해질 수 있도록 디자인도니 머리장식들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튤지로 만든 캔디모양의 장식, 실크로 만든 꽃, 그리고 명백하게 샤넬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는 리본으로 만든 나비매듭등이 있었다. 그녀는 그녀가 남자답다는 생세상사람들의 견해에 영향을 받아d서 이브닝 드레스를 더욱 로맨틱하게 디자인했다. 때때로 그녀는 어깨끈이 없고 러플과 주름장식이 있는 풍만한 스커트와 고래수염으로 빳빳하게 한 바디스가 달린 이브닝 드레스를 만들기도 했다. 또한 샤넬은 꼭또가 디자인한 무늬가 프린트된 집시 그레스와 러플로 된 삐에로 칼라가 달린 큐트들을 발표했다. 1927년 처음으로 자신이 만든 모조보석을 소개했던 샤넬은 이때부터 이 분야에도 정성을 쏟기 시작했다. 그 액서서리중 어떤 것들은 많은 노란색 금과 변형된 진주, 그리고 거칠고 가공되지 않은, 일부러 금이 가도록 한 보석들이 사용되면서 그 크기는 점점 커져갔고, 더 비잔틴풍으로 되어갔다. 그러나 다른 것들은 결코 비잔틴풍으로 보이지 않았는데 에나멜 칠이 된 나뭇잎과 꽃들로 만들어진 진주 목걸이가 여기에 속한다. 그녀는 큰 버튼 타입의 귀고리와 작은 보석들이 연결된 체인과 함께 뒤얽힌 여러줄의 구슬 목걸이를 달았는데, 이것들은 그녀의 특징이 되었다. 그녀는 또한 진짜 보석들이 사용한 액세서리들도 만들어냈다. 1932년에는 그녀가 발표한 디자인에는 티아라와 이마위에 드리우는 다이아몬드 술장식이 포함되었다, 1935년애는 그녀는 말타 십자가와 같은 형태에 크고 울퉁불퉁한 보석들이 박히고 아이보리색으로 표현되는 그녀의 유면한 커프스를 걸치고 사진을 찍었다. 샤넬의 나이가 60세에 가까워졌을때 그녀의 위대한 성공은 확고해졌다. 그녀는 영국의 웨스크민스터 공작과 연애사건을 일으켰고 또한명의 공작 윈저와는 좋은 친구사이가 되었다. 전설적인 모든 유명한 사진작가가 그녀의 사진을 찍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만든 옷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파티에 가고 레스토랑 같은데서 그녀에 주위를 돌렸으며 그녀를 소개받기를 원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인용했다.
은퇴... 그러나 2차세계대전은 이 모든 것을 사라지게 했다. 1939년 에 샤넬은 그녀의 부띠끄의 문으 닫고 은퇴해서 주로 스위스 생활을 했다. 그녀는 여기서 독일군 장교와 사랑에 빠졌다는 이유로 자신을 체포했으며,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샵을 문담음으로서 전쟁기간 동안 이득을 얻으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무시해버린 프랑스에 대해서 원한을 품고 있었다. 패션은 아주 세련되고 인공적인 디오르의 ꡐ뉴룩ꡑ을 받아들였다. 이번에는 전쟁이 여성들로 하여금 자유스러운 행동과 이미지를 억압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즉 전쟁이 끝났지만 몇 년후에는 여성들이 기분전환과 욕망의 만족을 원하게 되었다.
컴백.... 어느 누구도 코코 샤넬이 컴백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1984년에 샤넬은 우선은 은퇴생활의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여, 그리고는 향수판매가 저조해짐에 따라 다시 패션계에 등장하게 되는데, 이 완벽한 타이밍으로 평소 그녀의 감각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이미 뉴룩이 준 충격은 약화되고 있었다. 샤넬이 남성디자이너가 만든 어리석은 겉칠레와 타이트한 코르셋으로부터 다시 한번 여성들을 해방시키도록 샤넬을 위한 무대가 같추어졌다. 패션 잡지들은 처음에는 그녀를 비난했지만, 다시 한번 이 입을만한 옷들을 소리 높여 요구하는 여성들의 엄청난 숫자를 무시할 수 없었다. 샤넬은 하얀 칼라와 커프스가 달린 검정색 또는 짙은 감색의 슈트들을 계속해서 제작하였으며 더 섬세하고 더 아름다운 파스탤조의 트위드로 만들어진 그녀의 앙상블중 많은 것들도 이 무렵 만들어졌다. 컬러리스트로서의 그녀의 명성은 커져갔다. 그녀는 소매가 딱 맞도록 하는 것과 같이, 색에 있어서도 그렇게 되도록 요구했다. 그녀의 슈트에 있는 천으로 만들어진 포켓, 커프스, 라펠, 그리고 옷단의 가장자리에는 이것들과 어울리거나 대조되는 브레이드가 둘러져 있었다. 저녁에 입을 수 있도록 디자인된 옷들은 - 이당시에는 종종 스커트보다 바지가 큰 인기를 끌었는데 - 한가지 색상이거나 또는 무늬가 있는 벨벳, 금속 브로케이드 또는 전체적으로 세퀸으로 수놓여진 실크로 남들어졌다. 샤넬은 슈트를 좋아했으며, 자신처럼 가슴이나 히프가 작은 듯한 몸매를 좋아했다. 그녀의 가장 탁월한 슈트 실루엣은 이러한 몸매를 가장 아름답게 보이도록 해주는 실루엣으로서, 그것은 허리 바로 아래까지 내려오는 스트레이트 자켓과 무릎 바로 아래까지 오는 스트레이트 스커트를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녀는 스틸레토 힐이 유행하던 시대에, 낮은 굽이 달린 두가지 색으로 된 슬링 백 펌프스를 세상에 소개했는데 이 구두는 걷기에 편한 실용적인 것이었다. 1957년에 처음 선보여진 체인으로 된 손잡이가 갈린 누빈 가죽으로 된 샤넬의 솔더 백은 손을 자유스럽게 해주는 것으로 핸드백을 드레시하게 변형시킨 것이었다. 샤넬 자신은 리츠 호텔로부터 길 하나를 건너 깡봉가 31번지로 향하는 나들이에 부츠를 신음으로써 실용적인 패션을 시작했다. 또한 그녀는 쉬폰으로 만들어진 이브닝 드레스인 ꡒ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산들바람ꡓ을 부활시켰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녀는 자신이 항상 만들었던 것과 같은 의상들을 그들이 입고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하느라 아주 바브고 그것에 만족하고 dLT는 것처럼 보이도록 치장시켰다.
현대 샤넬 하우스 거장, 칼 라거펠트.... 1971년에 샤넬이 죽은 후에도 샤넬이 죽은 후에도 샤넬기업은 샤넬의 독듵한 스타일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은 의상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냈다. 최근에 샤넬 부띠끄는 샤넬 그녀 자신이 살아있었다면 아마도 그렇게 했음직한 방식으로 새로운 활력을 얻고 있다. 즉 그 부따끄는 과거로부터 몇가지 아이디어를 소생시키고 새로운 세대와 새로운 분위기의 실루엣을 수용할 수 있도록 이 아이디어를 개조했다. 이와 같은 것을 이루어낸 디자이너가 바로 탈 라거펠트였다. 샤넬 부띠끄가 품위있는 슈트와 드레스로 70년대를 안전하게 유지해온 반면에, 라거펠드는 대답하게 프로모션하, 색채, 액세서리의 사요으 그리고 샤넬의 다른 디테일들을 강조했다. 샤넬의 유명한 핸드백은 현재 세퀸으로 수놓아져 있으며 폭 좁은 검은 드레스를 돋보이게 해준다. 그리고 샤넬이 오디푸스 렉스의 무대의상을 제작할 때 사용했던 실패와 드레스제작 도구들이 지금은 귀고리와 목걸이가 되었다. 또한 샤넬의 아프트를 장식했던 코로맨들 스크린은 보석으로 꾸며진 이브닝 그레스의 바디스로 변형되었다. 샤넬이 컴백했을 당시와 아주 비슷하게 라거팰드의 새 컬렉션도 처음에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기자들이 그의 컬렉션들을 사진 찍고 그것들을 소개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샤넬의 신화는 단지 지속될 뿐 아니라 그것은 여전히 살아있다. 단순한 검은 드레스와 모조 보석, 그리고 샤넬넘버 파이브를 소유했던 여성들 기억과 의상의 기능이 먼저이고 아름다움은 그 다음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패션에 계속해서 소재를 공급해주고 있다. 샤넬 스타일의 케마는 그녀가 그것을 시작한 이래로 거의 모든 뀌뛰리에들에게 영향을 주어왔으며, 오늘날 대부분의 드레스에서 그것이 드러나고 있고 계속해서 변형되고 재해석이 되고 있다. 발렌시아가 그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발을 한 것처럼.... ꡒ샤넬은 영원 불멸한 폭탄이다.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그녀의 위력을 약화시킬 수 없다.ꡓ
샤넬 스타일, 자유의 상징 트위드 슈트 ‘모방은 할 수 있지만 카피는 못 한다’. 샤넬 슈트는 심프랗게 보이지만 수많은 기술과 노력이 담겨 있다. 신체에 자유로운 움직임을 주는 절제 되고 심플한 옷, 샤넬의 모던한 직선 라인 의 슈트에는 슬림한 보디가 가장 잘 어울렸고 그로 인해 그때까지 미의 상징이었던 풍만한 몸매는 완전히 과거로 사라지게 되었다. 모드를 지배해 온 귀부인들이 말살되듯 그녀의 혁신으로 여성미의 기준은 오나전히 무너졌고 심지어 가슴이 풍만한 여인은 천을 감아 가슴을 납작하게 만들 정도였다. 샤넬 슈트는 당시 하나의 ‘발명’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그녀의 수트는 상식을 벗어나 tal지를 전혀 쓰지 않았고 마치 한 장의 천과 같이 안감과 겉감을 봉제해 내었다. 필요없는 장식은 배제하고 ‘재봉틀보다 정확하고 섬세한’ 기술자들에 의해 정성스런 수작업으로 완성되었다. 특히 스코틀랜드에서 짜여진 트위드를 사용해 최초의 슈트가 만들어진 것은 1920년대. 그 이후로 여러번의 수정이 가해지면서 전세계 여성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재클린 (케네디 대통령이 피격될 당시 그녀는 샤넬 슈트를 입고 있었다), 로미 슈나이더, 잔느 모로 등이 샤넬 슈트의 열렬한 팬이었다. 샤넬은 슈드의 우아한 코디네이션을 위해 botus 액세서리를 디자인 하거나 진주 목걸이와 코디하는 것을 즐겼다. 이 외에도 경콰한 느낌의 펠트 모자, 흰색 카멜리아, 블랙 새틴 리본, 골드체닝늬 퀼팅 핸드백, 블랙 토의 베이지 컬러 샌들은 ‘토털 룩’ 의 개념을완성시킨 요소가 되었다.
세기를 넘어 돌아보았을 때 샤넬 룩이 주는 가장 큰 의미는 바로 스녀의 창조 정신의 바탕에 여성을 해방시키려는 의지가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여성의 손을 해방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체인 숄더백, 다리가 길어 보이는 베이지색 샌들, 다리를 더 날씬하게 표현해 주는 샤넬 라인의 창조는 편안하지만아름다운 옷과 액세서리로 여성의 생활에 자유를 주려는 샤넬의 사상 자체이다. 특히 그때까지만 해도 남성용 속옷으로만 사용되었던 저지를 사용해 여성의 겉옷을 디자인한 것은 코르셋과 딱딱한 패티코트로부터 해방이고 20세기 모던 패션의 시작을 알리는 ‘혁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향수를 사랑했던 샤넬은 “향기가 없는 여인에겐 미래가 없다”는 폴 발레리의 유명한 말을 즐겨 사용했다. 그녀에게 있어 귀 뒤, 어깨 또는 팔목에 몇 방울의 향수를 뿌리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 한 일상중 하나였다. 샤넬은 또한 “입맞춤을 받기 원하는 곳에 향수를 뿌려라”고 말할 정도로 여성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향시의 매력에 심취해 있었다.
여성 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1921년의 일이다. 샤넬의 조향사 에르네스트 보의 도움으로 향수 N。5를 발표하게 된 것. 내추럴 에센스의 여러 가지 인공 알데히드 향의 조화로 섬세한 향기가 나는 샤넬 N。5. 인공향 알데히드에 대한 모든 편견은 눈 녹듯 사라지고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베스트셀러, 향수의 대명사로 칭해지고 있다. 당시 샤넬 N。5 의 명성은 전세계로 처져 파리가 나치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 군인들이 N。5를 사기 위해 파리 캉봉가 31 번지 샤넬 부티크 앞에서 5백미터가 넘는 줄을 섰다고 한다. 마릴린 몬로의 잠옷을 대신 했다는 일화로 유명한 N。5는 이름과 디자인에 있어서도 놀라운 특징을 가지고 있다. 샤넬에게는 심플하지 않은 것들은 모두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는데 특히 지나치게 감정석인 로코코 시대의 향수들이 대표적, 그녀의 첫 번 째 향수는 샤넬이 조향사에 의해 만들어진 샘플 중 5번째를 5골랐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샤넬은 이런 심플한 이름게 걸맞게 심플하고 다이내믹한 에메랄드 컷의 깔끔한 향수병을 원했다. 샤넬은 보드뤼샤쥬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마지막 조향사이다. 보드위샤쥬는 제품 밀봉을 증명하기 위해 얇은 막으로 향수병을 씌우는 전통이다. 보드뤼슈라고 하는 얇은 막은 왁스를 입힌 실로 고정되며, 이 모든 과정은 수개월간의 훈련이 필요할 만큼 고도의 기술력을 필요로 한다. 게다가 모든 패키지의 하이라이트는 향수 뚜껑 앞에 샤넬 마크를 찍는 것. 검은 왁스 스틱에 불을 붙여 녹인 뒤 CC 마크를 찍음으로써 모든 패키지가 끝난다.
칼 라거펠트의 젊은 샤넬 이미지 샤넬의 행운은 83년 칼 라버펠트를 영입함으로써 시작된다. 1938년 함부르크에서 출생한 그는 63년 이후로 이탈리아, 독일, 일본에서 프리렌서 디자이너로 명성을 쌓았고 특히 펜디 모피 컬렉션을 창작했다. 예술 자굼에 관심이 많은 그는 영화 ‘바베트의 만찬’ 의 의상을 맡았었고 수많은 오페라와 공연에 직접 팜여하기도 한 열정적인 성격의 소유자. 코코가 세상을 떠나자 샤넬은 아틀리에의 스태프나 디자이너에 의해 이러져 왔지만 이전의 컬렉션을 그대로 복습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시대에 뒤처지고 잇었다. 고민 끝에 칼 라거펠트가 영입되었고, 시작부터 그 소시으로 패션계는 떠들썩하기에 충분했다. “과거의 요소를 바탕으로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한다” 는 괴테의 말을 모토로 한다는 그는 샤넬을 현대화시키는 능력을 성공적으로 발휘했다. 그는 샤넬이 젊음을 되찾는 비결은 ‘조합의 묘미’라고 표현했다. 샤넬의 정신을 추출한 에센스의 젊은 어시스턴트들의 아이디어와 자신을 적절히 조화시켰다는 것이다. 당시 ‘한물 간 메종(칼의 표현대로라면)’을 떠맡은 진의를 그는 이렇게 말한다. “샤넬에는 정신적 유산이 있다. 샤넬 모드는 박물관적인 발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여성이 추구하는 것을 캐치해 낸 시대의 창조물이다.” 그는 새로운 모험을 즐기는 타입으로 샤넬이 현대화되는 것을 에너제틱하게 추진해왔다. 메종의 낡은 전통과 관습을 모두 버리고 샤넬이 창조한 것 중에서 금속 단추. 체인, 퀼팅백, 카멜리아, 샌들 등을 현대에 응용하는 것에 희열을 느꼈다. 아줌마 스타일이 되지 않도록 블루진과 펑키한 헤어스타일을 제안하고 코코가 싫어하던 미니스커트까지 과감하게 채택 하기도 했다 때론 거의 악취미(?)에 가까운 파격도 거침없이 더해 샤넬을 대담하게 리뉴얼 했다. 결국 거리에는 CC 로고가 넘쳐났고 샤넬 붐이 부활했다.
영원한 패션 아이콘, 샤넬의 비밀 ‘화려함이란 심플한 요소를 눈에 띄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샤넬은 스타일이다. 패션은 유행에 따라 변하지만 스타일은 변함이 없다’. ;여성들은 멋부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 덕택에 얼마나 많은 남자들과 패션 회사들이 살아가는가!‘ 가브리엘 샤넬이 했던 몇몇 말들을 통해서 샤넬만의 매력과 생존 비결을 짐작할 수 있다. 동료들에겐 마드모아젤, 가까운 사람들에겐 코코라고 불렸던 가브리엘 샤넬(1883-1971)의 야망은 자유를 추구하는 여성, 관습을 타파하는 여성들을 위한 옷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른바 여성스러움의 새로운 정의를 유행시킨 것, 샤넬은 코르셋, 챙이 넓은 모자, 타이트 스커트 대신 그을린 얼굴, 짧게 자른 머리, 통이 넓은 바지. 짧은 검정색 드레스, 숄더백, 캐주얼 정장 등 단순하고 실용적인 우앙함을 여성들에게 선사했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넉넉하고 행복한 편은 아니었지만, 파리의 캉봉 거리에 샤넬 모드를 연 1912년부터 인생이 달라졌다. 당시까지만 해도 남성의 속옷으로 쓰였던 저지 소재를 실용적이고 편안한 여성의 겉옷으로 변모시킨 것은 패션사의 큰 뉴스였다. 디자이너인 동시에 사업가, 사교계의 여왕 등 모든 역할을 소화한 샤넬은 유명한 귀족, 예술가 등과 친분을 지니게 되었으며 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기도 했다. 꼴레뜨.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콕토, 웨스트민스터 공작 등이 친구로 알려져 있다. 현재 샤넬의 디자이너인 칼 라버펠트는 건강한 기회주의자 또는 절충주의자로 불린다. 그는 검정코 구두, 누빔 핸드백, 금색 단추, 체인과 가죽을 엮어 만든 벨트 등 기존 의 샤넬 전통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현대적으로 변형시켰다. 그는 “나의 사랑하는 코코는 반항적이며 변덕스런 모습의 코코이다. 작품을 디자인 할 때는 언제나 그런 코코를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앞으로 일어날 패션 역사의 일부가 되고 싶다고 했던 샤넬의 꿈이 실현된 걸까?
샤넬 Chanel
샤넬을 대표하는 로고는 말할 필요도 없이 두개의 C가 서로등을 대고 겹쳐져 있는 로고. 직사각형으로 얽힌 금빛 버클과가죽이 안으로 지나가는 체인, 연속적으로 다이아몬드나 헤링본모양의 누빔 처리 등이 샤넬을 대표하는 이미지이다. 샤넬의 의상에서는 버튼이 그 로고를 대신하고 있는데, 코코(가브리엘샤넬의 애칭)가 동경하던 장교들의 유니폼에게 영감을 받은 장교들의 둥근 금빛 버튼이 그것이다. 그리고 또한 코코가 가장 좋아했던 카모마일(동백꽃) 역시 샤넬을 대표하는 중요한 이미지이다. 그 제조 방법이 특이해 샤넬의 진품과 명품을 구분할 때이 카모마일 꽃이 달린 제품들은 쉽게 구분할수 있는 정도이다. 동백의 꽃잎 하나하나를 하트 모양으로 잘라 특수하게 샤넬에서제작된 다리미로 주름을 잡고 꽃 모양을 만들어 작업을 하는데,언제나 수작업으로만 작업을 하고 있어 하나의 꽃을 만드는데 한 시간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이러한 생전의 샤넬을 지금은 칼 라거필드가 이어받아 전통과 현대미를 잘 조화시켜 놓고 있는데, 그래서 조금 더 전위적으로또는 캐주얼하게 표현되기도 하며 현대 여성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출처 : 인터넷 , 편집 : 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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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언니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