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당선자 부인 이희호[1998년 1월]

[종아니]

김대중 대통령당선자 부인 이희호

남편의 정치적 동지로 살아온 35년 고난의 세월

1998년1월 여성동아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가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야간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수없이 많은 고난을 이기고 정치 입문 43년, 대권 도전 26년만에 드디어 대통령이 된 김당선자 뒤에는 평생을 남편의 ‘정치적 동지’로 함께 가시밭길을 헤쳐온 이희호 여사가 있었다. 이제 청와대 안주인이 되는 이희호 여사는 대통령이나 정부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을 찾아 조용하지만 적극적인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번달 모든 잡지에 꼭 들어가야 하는 기사가 바로 대통령 당선자 부부 인터뷰다. 그런데 선거는 마감이 코앞에 닥친 18일이라 준비할 시간이 빠듯하다. 막판의 낌새를 보아하니 이회창 후보와 김대중 후보 두사람 가운데 하나가 될 것 같은데, 누구도 정확한 예측은 할 수 없었다.

    김대중 후보쪽을 맡아 이희호 여사 인터뷰 섭외를 했지만 선거 막판이라 너무 바쁘다며 서면 인터뷰로 대신하자는 답변이 돌아왔다. 김후보가 되었다고 가정하고 “당선 소감이 어떠십니까” 하고 서면으로 물어본다? 아무리 생각해도 맥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팽팽한 접전 끝에 당선되었을 때의 감격적인 순간을 어떻게 미리 얘기할 수 있단 말인가.

    12월19일 새벽 김대중 후보의 당선이 확실시 되었을 때 ‘무작정’ 일산 김후보 집으로 달려갔다. 집 근처에는 경찰차가 여러대 서 있고 집 앞 골목에는 10여 명의 전경들이 몸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일일이 신분증을 검사하며 통제하고 있었다. 대통령 당선자와 후보의 신분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골목에는 수십명의 지지자들이 모여 있었다. 18일 밤부터 모여들기 시작한 사람들은 밤 11시가 넘어서면서 김후보가 대세를 굳혀가자 “김대중” “대통령”을 연호하며 주위는 온통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지지자들은 연호하는 사이사이에 ‘목포의 눈물’ ‘사랑해 당신을’ ‘선구자’ 등의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겨우 통제선을 뚫고 집안으로 들어가자 마당에는 2백여 명의 내외신 기자들이 대통령 당선자의 첫 모습을 보도하기 위해 진을 치고 있었고, ‘일요일 일요일 밤에’ 촬영을 위해 개그맨 이경규, 축구 해설가 신문선, 탤런트 최진실도 와 있었다. 집안으로 들여놓지 못한 축하화분도 즐비했다. 김영삼 대통령도 새벽 3시경 축하전화를 한 데 이어 조홍래 청와대정무수석을 보내 난화분을 전했다.

    많은 사람이 들어차서 그렇기도 했지만 김당선자의 일산 집은 생각보다 좁았다. 기와에 빨간 벽돌로 이루어진 외관도 주변의 다른 집들에 비해 수수했다. 사람들을 밀치고 들여다본 거실에는 낡은 소파와 벽시계 뿐 이렇다 할 꾸밈도 없었다.

미국 유학시절 이여사

    김당선자는 전날 밤 8시반 경에 집에 돌아온 후 2층 서재에 올라가 전혀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자정을 넘기면서 당선이 확실시되자 부인 이희호 여사와 함께 기자회견문을 검토하고 향후 정국구상에 몰두하느라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마당에서 이희호 여사를 수행하는 김희선 국민회의 대외협력위원장에게 전화를 했다. 지난달 이여사 인터뷰때도 만났고 그동안 여러차례 통화를 해서인지 오전 8시에 당선자가 국회 기자회견장으로 출발하고 나면 이여사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8시 드디어 김당선자가 이희호 여사와 나란히 현관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집앞에 모여 있던 지지자들 사이에서 환호와 박수가 터졌다. 대통령 당선자의 첫 모습은 상기돼 있기보다 담담해보였고, 이여사도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 듯 약간 어색한 표정이었다.

    “여기 보세요” “이쪽도 좀 봐주세요” “손 좀 들어보세요”

    대통령 당선자 부부의 첫 모습을 찍기 위한 사진기자들의 경쟁이 불을 뿜었다. 담장 위에 올라가고 정원수를 밟고 난리가 났다. 그 모습을 본 한 당직자는 “이거 대통령 집을 다 부숴놓네” 하고 중얼거렸다.

    김당선자는 대통령 당선자로서 첫 발언에서 “건국 이래 처음으로 여야간 정권교체가 이루어져 새로운 역사가 시작됐다”며 “그동안 경제 일변도로 민주주의가 소홀히 돼왔으나 앞으로는 경제와 민주주의를 똑같이 중요시할 것”이라고 민주주의를 강조했다. 또 “정성과 능력을 다해 선두에 서서 고난을 헤쳐나가겠다”며 비장한 각오를 밝혔다. 정치 입문 43년, 71년 첫 대권 도전 후 26년 만에 드디어 대통령이 되었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게 IMF시대를 헤쳐나가야 하는 고통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촬영과 간단한 소감을 밝힌 김당선자는 9시에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예정된 기자회견을 위해 떠났다. 그런데 이여사도 함께 나가는 것이 아닌가.

    이여사를 만날 줄 알고 사진기자와 함께 뒤처져 있다가 김후보 차량을 놓치고 말았다. 차안에서 김위원장에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전화를 걸었다. 원래 김후보만 국회로 가고 이여사는 국립묘지에서 합류하기로 했었는데 갑자기 스케줄이 바뀌었다며 다시 시간을 정해서 연락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김당선자와 이여사는
이여사 외삼촌댁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약속대로 오후에 전화가 왔다. 20일 오전 10시20분까지 일산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성동아는 대통령 당선자 부인을 단독으로 만나는구나’ 하고 흐뭇해 한 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7시경 집에서 삐삐를 받았다. 모든 인터뷰가 취소됐다는 힘 빠지는 이야기였다. 김위원장에게 확인전화를 하니 난들 어떡하느냐고 말했다. 총재 비서실에서 당분간 모든 인터뷰를 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는 것이었다. 대변인실에 물어보니 “그동안 너무 강행군을 하셔서 쉬셔야 한다”는 말을 했다.

    김위원장에게 당선이 확정되는 순간 이여사의 옆에 있었으니 당시 이여사의 표정이나 소감을 대신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한 신문에 당선이 확정되는 순간 이여사가 눈물을 흘렸다고 나왔는데 사실이냐고 묻자 “어떤 기자가 그따위 거짓말을 했느냐”며 흥분한 채 이여사는 전혀 표정이 달라지지 않고 담담해 했다고 털어놓았다.

    사실 이여사를 직접 만나지 않아도 쓸 수 있는 자료는 충분했다. 여성동아에서는 선거 전에 두번이나 인터뷰를 하며 어떻게 김후보를 도와왔는지, 어떤 퍼스트레이디가 될 것인지 이야기를 들은데다 그 전에도 선거 때마다 매번 인터뷰를 했었다.

내가 도와야 할 사람이란 믿음으로 결혼     야당 정치인 아내로 35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이희호 여사는 김당선자 못지않게 많은 고통과 시련을 겪었다. 그것은 부유한 의사집안에서 태어나 미국 유학까지 한 ‘신여성’ 이여사가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김당선자와 결혼할 때 이미 어느정도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1962년 두 사람이 결혼했을 때 신랑감으로서 김당선자의 조건은 최악이었다. 모친과 앓는 누이동생을 부양해야 했고 전처 소생의 두 아들(홍일, 홍업씨)이 딸린 홀아비인데다 거듭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후 전세방에서 어렵게 생활하고 있었다. 김당선자는 61년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으나 5?6쿠데타로 의원선서조차 하지 못하고 낭인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여사는 이화여전 문과를 다니다 44년 일제가 학교문을 닫는 바람에 다 마치지 못하고 46년 서울대 사범대에 입학해 50년 졸업했다. 54년 미국으로 건너가 58년 테네시주 내슈빌에 있는 스카렛 대학에서 사회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귀국해서 이화여대에서 사회복지학을 가르치다가 59년 부터 YWCA 총무로 일하고 있었다.

‘3·1민주구국선언’관련
구속자들과 시위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51년 부산 피란시절이었다. 당시 이여사는 대한여자청년단 외교국장이었는데 청년단 간부들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김당선자와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한달에 한번씩 ‘면우회’란 모임이 있었는데 김당선자가 그 일원으로 들어왔던 것. 하지만 그 후론 만나지 못하다가 58년 이여사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어느날 길에서 우연히 만났다.

    “인연이라고 해야 할지 신의 섭리라고 해야 할지 61년 늦가을부터 그 분과 자연스레 만나게 됐어요. 그 분과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찬성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어요. 집안에서는 ‘정치하는 사람에게 딸을 맡길 수 없다’고 반대가 대단했고, 그때 제 나이 40이었는데 ‘이때까지 혼자 잘 지내다가 왜 그런 데 시집가느냐’고도 해대고… 저는 김대중이라는 인간 하나만 보고 결혼했습니다. 그는 그때도 촌음을 아껴가며 많은 독서를 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얻은 지식을 실생활에 적응하려는 실천적 의지와 성실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점점 그의 꿈이 그저 꿈으로 끝나지 않으리란 신뢰를 느꼈습니다. 또 내가 도와야 할 사람이라는 믿음으로 결혼을 결심했습니다.”

    두사람의 결혼생활은 김당선자의 정치역정에 비례해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여사는 유신의 장막이 드리워진 72년부터 82년 미국으로 망명할 때까지를 외로웠고 잊혀진 곳에 있었던 시절이라고 회상한다.

    “80년 5월17일 확대비상계엄령이 선포되기 전이었어요. 아무것도 모른 채 방안에 있는데 남편이 들어오더니 ‘놀라지 말라. 날 붙잡으러 왔다’고 하며 옷을 입고 나가더군요. 너무 놀라 응접실로 나가보니 30여 명의 군인들이 남편의 목에 총을 겨누고 있었어요. 그렇게 남편을 연행해가고 나서 온집안을 샅샅이 뒤져서 닥치는 대로 물건을 가져갔습니다. 남편뿐 아니라 큰아들과 시동생, 비서, 경호원 등도 다 연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집을 완전히 포위하고 분가해 사는 며느리조차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1963년 막내아들
홍걸씨를 얻었다

    김당선자뿐 아니라 이여사 역시 테러와 협박, 가택연금, 미행과 도청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이여사는 여성단체 회장직을 맡고 있었는데 이런저런 외압으로 포기해야 했다고 한다.

    “82년까지 YWCA연합회 이사를 맡고 있었는데 정보원들이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만나는 사람들까지 뒷조사를 하고 다니니 단체에 미안해서 결국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또 집에는 도청이 되기 때문에 마음놓고 전화도 못하고 살았어요. 저는 괜찮지만 통화하는 사람이 피해를 입을 수 있잖아요.”

비서들이 못하는 따끔한 얘기를 전달할 것

1990년 단식투쟁을 하다
탈진한 김당선자를
병원으로 옮기고 있다

    이여사는 저서 <나의 사랑 나의 조국>에서 “정치하는 사람이라 굴곡이 많을 줄은 짐작했지만 이렇게까지 힘들게 살 줄은 몰랐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한번도 결혼을 후회한 적이 없다고 한다.

    이여사는 김당선자가 옥에 갇혀 있을 때 양말과 속옷까지 꼭 다리미질을 해서 넣곤 했다. 감방 안은 구겨져 있는 상태일 것이므로 차입하는 물건들만이라도 반듯한 것을 넣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고 겉옷에는 언제나 향수를 뿌렸다. 감방냄새를 조금이라도 덜 맡게 해주고 싶어서였다.

    남편이 옥고를 치를 때는 옥바라지를 했고 가택연금 중에는 말동무가 되고 미국 망명시에는 후견인이 되었던 이여사는 단순한 내조자가 아니라 동지였다. 여성운동가답게 이여사는 내조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 대신 동반자나 동역자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두사람의 수평적인 관계는 김당선자 자택의 문패에서도 느껴진다. ‘김대중’ 옆에 ‘이희호’가 나란히 걸려 있다.

    김당선자가 여성문제에 이해가 깊고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도 이여사의 영향이 크다. 김당선자는 첫 기자회견에서 모든 차별을 없애겠다고 말했다. 남녀평등의 실현도 그중 하나이리라.

칠순의 나이에도 이여사는
컴퓨터를 능숙하게 사용한다

    이여사는 이번 선거전에서 다른 후보부인들처럼 다소곳이 “남편을 잘 부탁한다”고 하지 않고 강연과 거리연설을 통해 여성의 정치 참여와 법적 지위 향상의 필요성, 정권교체의 당위성을 강조하면서 남편이 대통령이 되어야 함을 역설하고 다녔다.

    이여사가 청와대 안주인이 되면 대통령 영부인의 모습도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이여사는 인터뷰 때마다 고아원이나 양로원 방문같은 소극적인 역할에서 벗어나 관련공약을 감시하고 정책 반영 여부를 확인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이여사는 또 측근들도 감히 진언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김당선자에게 따끔하게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선거에서도 주위에서 그분에게 지지율이 70%라고 말할 때 ‘주위에서 하는 말을 무조건 믿지 마라. 40%밖에 안된다’고 솔직히 얘기했습니다. 앞으로도 비서들이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제가 할 겁니다. 그래야 나라가 바로 가지요.”

글·이혜련 기자／사진·이종승, 전영한 기자

[종아니]

이희호 없는 '김대중 신민당 대통령 후보'는 있을지언정 '김대중 대통령'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감히 주장해봅니다.. 불쌍하고 부족한 사람에게는 사랑을 베풀고 부정한 권력에 대쪽 같았던 여걸이라는 생각을 지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