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홍건적과 왜구의 격퇴
김흫조(興祖:17세) 김 정(정, 17세) 김윤조(胤祖:17세) 김회조(懷祖:17세)
김도탁, 17세. 김순조, 17세. 김 조, 18세. 김정무, 19세.
김 수(17세. 김조간,18세. 김적선, 17세. 김덕선, 17세.
김종선, 17세. 김덕룡, 17세. 김덕봉, 17세.
김인우 18세. 김갑우 18세. 김삼우 18세. 김시우 18세.
김남우18세. 김성우 18세. 김 정18세.
14c 중엽에 원나라가 쇄퇴하자
중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반란군의 한 무리가 홍건적이다.
중국 북쪽지방에 일어난
홍건적 10여만 명이 원나라에서 쫓겨서 고려에 두 차례나 처들어왔다.
왕은 경상도의 안동과 상주등지 까지 두 번이나 피신하였다.
개성은 이들에게 함락되고 궁궐도 거의다 불타버리는 피해를 당하였다.
고려의 최영, 정세운, 이성계 등이 이들을 격퇴시켰다.
왜구는 쓰시마에 근거를 둔 일본의 해적이다.
일찍부터 우리나라 해안지방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일삼았다.
공민왕 때는 강화도까지 약탈하고 개경까지 위협을 했다.
서해의 해상 운송이 어렵게 되자, 국가 재정이 궁핍하게 되었다.
왜구는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 지방까지 침입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고려는 왜구를 막기위해 외교적 노력을 벌렸으나
효가를 거두지 못하고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최무선은 화포를 만들어 진포(금강하구) 전투에서
왜선 500여 척을 불살랐다.
최영은 홍산(부여지방)에서 이성계는 황산(남원지방) 둔지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
박위는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섬을 정벌하여 그 기세를 꺾어 버렸다.
김흥조(興祖:17세 문간공 광재의 아들)는
중현대부 군기감에 있을 때
홍건적이 침입하자, 임금을 호종한 공로로 공신록에 책봉되었다.
김정(精, 17세)은
공민왕 18년 밀부사 상호군(정3품)으로
요승 신돈을 주살하려고
흥조와 함께 모의하다가 탄로되어 유배도중 살해당했다.
문민공 김광철의 아들 김회조(懷祖:17세)는 는 통헌대부 판도판서 해양군.
동생 김도탁(都卓:17세)은 광정대부(종2품)에 추증.
김윤조(胤祖:17세)는
김흥조의 아우로 형과 함께 요승 신돈을 제거하려다
발각되어 형은 살해 당하고,
제주도로 은거하여 제주도 입도조가 되었다
문민공 김광철의 아들 김회조(懷祖:17세)는 는 통헌대부 판도판서 해양군.
동생 김도탁(都卓:17세)은광정대부(종2품)에 추증.
김순조(順:17세)는 녹사공 김광로의 아들로 경상도 병마절도사.
김조(眺: 18세)는 순조의 손자로 삼척부사.
김정무(丁:19세)는 순조의 증손자로 전라 병마절도사.
화평부원군 김석견의 아들 김수(粹:17세)는 해양군으로 보해졌고,
그 아들 김조간(祖衎:18세)은 판도판서를 지냈다.
김승진의 아들 삼형제의 장남 김적선(적선:17세)는 병마절도사,
둘째 김덕선(덕선:17세)는 문하시중을,
셋째 김종선(종선: 17세)이 경상감사를 지냈다
밀직사사 김중간의 첯째 김덕룡(덕룡:17세)은 사복시사를,
둘째 김덕봉(덕봉: 17세)은 사의 벼슬을 지냈다.
광리의 아들 갑우 ‧남우 삼우 ‧시우‧ 인우(18세)가 모두 뛰어났다.
인우(18세)는
공민왕 11년 홍건적의 난 때 임금을 모시고 호종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동왕 13년에 우정승 홍언박과 같이 일등공신에 녹훈되었다.
그 뒤 밀직부사에(종2품) 승진되고 봉익대부 전리판서.
일등공신에게는 초상화를 걸게 하고, 부모와 자식에게 3등급 작위를 올려주고,
아들 한 사람에게 1품 벼슬을 주었다.
또 마부 5명, 파수병 7명을 거느리게 하고,
자손을 음직에 채용하였으며 밭 100결, 노비 10명을 주었다.
갑우(18세)는 공민왕, 갑우(18세)는
공민왕 19년 대장군으로 명나라 황태자 생일에 천추사가 되어 다녀왔다.
공민왕 22년(1372) 11월 대호군으로 제주도에서 조정에 바칠
말 50필을 몰고 명나라에 가는 도중 말 2필을 잃어버렸다.
다른 말로 채워 바쳤으나 황제가 대노하여 받아 들이지 않고
공민왕을 책망하자 돌아와 통역관 오극충과 함께 주살되었다.(고려사)
이 사건으로 형제들이 연좌되어 여러 지방(전남 ‧경남)으로 좌천되어 살았다.
19년 대장군으로 명나라 황태자 생일에 천추사가 되어 다녀왔다.
삼우(18세)는
벼슬이 상서였고 묘는 실전하여 산청군 신동면 가슬리에
설단 하고 원일재를 지었다.
시우(18세)는
공조판서를 지냈으며 갑우의 일로 연좌되어 벼슬에서 물러났 다.
(합천 영창리 설단)
남우(18세)는
공조판서를 지냈으나 갑우의 사화로 연좌되어 관직에서 물러 났다.
김성우(成雨:17세)
는 왜구를 무찌른데 공로가 큰 광산김씨로 들 수 있다.
약관의 18세에 절충장군(정3품)에 제수되었다.
충정왕 3년(1351년)에 도만호 겸 전라 충청 양호 초토사에 발탁되어
왜구토벌의 왕명을 받고 출정하였다.
전주,나주, 부령 등 전라지역 왜구를 무찔렀다.
우왕 6년(1380년)에 진포구의 왜선 5백여척을 함몰시켰으며
임주, 한주, 서주지구에 침입한 왜구도 진압하였다.
내포지구에 왜구가 칩입했다는 급보를 받고 출전해 소탕을 하니
서해안 여러 곳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40년에 걸처 왜구의 소굴이 된 지역을 소탕하고, 군둔전을 두고 군마 키우며
생포한 왜구는 노예로 삼아 노역에 충당하기도 하였다.
장기간을 외구의 침입에 대비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성계 등극 소식을 듣는다.
왕조의 멸망 소식을 듣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로 타고 오던
말의 목을 자르고, 장군역시 그 자리서 자결을 하였다.
지금도 보령군 군드리 모랭 마을에 조잠이란 마을이 있고,
옥마봉 남서고개에 사혁이란 재가 있다. 사역이란 김성우의 호이다.
김 정(鼎:18세)은
충청, 전라도 찰방을 지낼 때의 공으로
추성 보리공신에 책봉 되고 중대광 광성군에 봉해졌다.
아들 약채, 약항, 약시 삼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광산김씨사. 광산김씨약사.
2023년 5월 편집자, 선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