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信者가 본 예수
우리는 사랑의 化身으로 살다간 '남수단의 슈바이처'라
불린 故 李泰錫 神父에 대한 다큐멘터리 映畵
<울지마톤즈>를 알고 있다
그 映畵에 이어 復活이란 이름으로 映畵가 開封되었다.
이 映畵는 李泰錫 神父가 48세에 大腸癌으로 世上을
떠난 지 10년 뒤 어린 弟子들이 成長하며 벌어진
奇跡을 照明한 映畵다
그런데 이 映畵를 演出한 구수환 監督은 基督敎도
天主敎 信者도 아닌 佛敎 信者였다
그는 隱退 資金을 털어 映畵를 製作했다고 한다
佛敎 信者임에도 불구하고 카톨릭 司祭의 삶을 照明하는
映畵를 연이어 製作한 것이다
그는 時事 告發 PD 出身임에도 따뜻한 사랑을 담은
映畵를 製作한 理由를 말했다
“映畵 <울지마 톤즈>에 이어서 映畵 復活을 제작하게
된 契機가 特別히 있었나요?”
“李泰錫 神父의 兄 이태영 神父가 지난 2019년에
59세의 나이로 禪宗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깡마른 모습으로 저를 불러 두 가지
遺言을 남기셨어요
하나는 李泰錫 神父 財團을 계속 이끌어가 달라
다른 하나는 李泰錫 神父 禪宗 10주기에 동생의 삶을
整理해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李泰錫 神父의 삶을 어떻게 整理할까 고민하던 차에
李泰錫 神父가 남 수단에 작은 學校를 짓고 가르쳤던
어린 弟子들이 생각났다.
남 수단에 찾아갔더니 醫師이거나 醫大生이 된 弟子가
무려 57명에 달했다.
남수단의 작은 톤즈 마을에 神父님이 지은 허름한
學校에서 6년만에 國立大 醫大生 57명이 나온 것입니다
그 작고 가난한 마을에서 想像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以後 公務員 大統領室 警護員 言論人까지 모두 70명의
弟子들을 찾을 수 있었다.
더 重要한 것은 이 아이들이 먹고 살기 위해 의사가
된 것이 아니라 神父님 때문에 醫師가 됐고
李泰錫 神父님처럼 살아가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弟子들이 病院에서 診療하는 모습을 보니 먼저
'어디가 아프세요?'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患者 손부터 잡는 거예요.
가는 곳마다 손을 잡고 個人的인 이야기를 나눈 뒤
診療를 하기에 그 理由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弟子들이
'李泰錫 神父님이 해오던 診療 方法입니다'라고 답하더군요
. '아이들이 李泰錫 神父님의 삶을 그대로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너무 기뻐서 映畵를 本格的으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은 李泰錫 神父 弟子들이 한센인 마을에 가서
奉仕 診療를 했어요
60명 정도 사는 마을인데,
患者 300명 정도가 모였어요.
醫師가 없으니 주변 마을에서 다 消息을 듣고
찾아온 거예요.
弟子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밥을 굶으며
診療를 했어요.
어느 患者는 12년만에 診療를 받았다고 하더군요.
患者에게
'醫師가 당신 손을 잡았을 때 기분이 어땠습니까'라고
물었더니 '李泰錫 神父님이 저희 곁에 돌아온 것
같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弟子들은 '李泰錫 神父님이 우리 옆에 계신 것 같았습니다.
李泰錫 神父님 일을 우리가 대신해서 너무 기쁩니다'
라고 답했습니다.
단순히 弟子들이 좋은 일을 했다는 게 아니라,
李泰錫 神父의 사랑의 表現이 弟子들을 통해서
繼續 이어가는구나
바로 이것이 復活의 意味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映畵 題目은 <우리가 李泰錫 神父입니다> 였는데,
그 자리에서 題目을 復活로 바꿨습니다.
제가 李泰錫 神父에게 빠져든 것은 단순히 그 분의
奉仕 때문이 아니라 '苦痛받는 사람들에게 다가간 方式'
때문이었어요.
그것을 우리 社會에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한센병 患者들은 苦痛속에서도 李泰錫 神父님 이야기만
꺼내면 환하게 웃었습니다.
저는 李泰錫 神父를 존경스럽게 만들거나
그를 보고 感動받게 하려고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살았던 삶은 누구든 現實에서 실천할 수 있는
삶이라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영화 <울지마 톤즈>에서는 李泰錫 神父의
삶을 통해
'어떻게 사는 것이 幸福한 삶인가'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下心의 리더십과 경청하고 共感하고 眞心으로
대하는 態度 共同體를 所重히 여기는 실천이
李泰錫 神父의 生涯였지요.
영화 <울지마 톤즈> 에서는 이런 삶에서 感動을
느낀다면 日常에서 실천해 보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은 李泰錫 神父의 삶을 따랐고,
결국 그가 世上을 떠난 지 10년 뒤 李泰錫 神父와
같은 삶을 사는 감격스러운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우리가 李泰錫 神父가 됐을 때 社會는 굉장히
幸福해질 수 있다는 것이 復活의 核心이에요.
저는 最高로 幸福한 저널리스트라고 생각합니다
그 분이 없었다면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요?
하고 싶은 건 많은 데 삶은 뜻대로 안 되고
不滿 투성이었을 텐데 말이죠.
그 분을 통해 이야기하며 즐겁고 하는 일에
굉장히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李泰錫 神父에 관한 휴먼 映畵
宗敎 映畵를 製作하게 되셨습니까?”
“사람들은 이 映畵 復活이 宗敎 映畵라고 부르지만
이건 굉장히 강한 告發 映畵예요.
世上에서 가장 强力한 告發은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고발 프로그램을 製作해도 누군가를 變化시키는
건 어려웠는데, 이 映畵를 통해 많은 분들이 變化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映畵를 통해 우리 社會에 하나의 基準을
提示했다고 생각합니다.
聖職者의 性暴力 問題 권력 分爭 世習 이슈가 나올 때마다
'李泰錫 神父처럼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라는 글들이
나왔습니다
李泰錫 神父가 聖職者에 대한 하나의 기준이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부 醫療陣들과 敎師들, 政治人들에 관한 社會的
問題가 터져 나올 때에도 醫師로서 敎育者로서
指導者로서의 바람직한 像으로 龜鑑이 되더라고요
個人的으로는 映畵 興行보다도 이런 部分에서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감독님은 佛敎 信者라고 들었습니다.
카톨릭 司祭인 李泰錫 神父에 관한 다큐멘터리 映畵를
계속 製作하는 理由가 있으신가요?”
“宗敎의 役割이 무엇일까요?
絶望하는 사람들에게 希望을 줘야 하는데
李泰錫 神父는 그 삶 그대로였습니다.
法服입은 스님이든, 禮服 입은 목사든 司祭服을 입은
神父든 宗敎는 사람들에게 希望을 주고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役割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李泰錫 神父님의 삶을 보며 그것을 느꼈습니다.
어느 날 정진석 樞機卿이 感謝牌를 주신다고 해서
訪問을 한 적이 있습니다.
대화 중에 제가
'저는 톤즈 마을에서 예수를 보았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상하잖아요?
佛敎 信者가 예수님을 보고 왔으니까요.
'당신이 본 예수는 어떤 분이었습니까?'라고 물으시기에
'제가 본 예수님은 대단한 분은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제 마음에 있는 분이었습니다.
톤즈 聖堂은 여기처럼 으리으리하지 않습니다
허름한 聖堂에 벽은 포를 맞아서 구멍이 뚫렸는데
사람들이 聖堂만 들어오면 얼굴이 밝아지는 걸 봤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의 힘이라 생각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
李泰錫 神父의 고결한 삶이 世上을 바꾸어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톤즈를 통해 李泰錫 神父의 예수적 삶과 같은
모습을 보며 感動과 感銘을 받습니다.
그분이 韓國人이라는 것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病魔로 너무 일찍 世上을 떠나 안타깝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해 奇跡을 만들어낸 李泰錫 神父를 追慕합니다
그의 고결한 삶이 韓國의 國會議員들한테도
전해져 제발 서로 미워하지 말고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三千里 江山에 新綠이 우거지는 季節 6월이 왔습니다.
지금 韓國이 처한 政治 現實과 醫療事態를 보며
李泰錫 神父의 犧牲的 삶은 많은 것을 생각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