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가 떠나는 날이다. 건강히 계시라는 인사를 받고 알콩달콩 잘 살아라, 말하며 마음이 먹먹해진다. 아들 내외를 실은 차도 쉬이 떠나지 못하고 서성인다. 한참 후 골목길을 스르륵 돌아 나간다.
새아기는 결혼 후 직장 때문에 신랑을 따라가지 못하고 우리와 같이 살았다. 남편과 나는 며느리와의 생활이 신선하고 서로 몸 부대끼며 정 들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나 시집오자마자 혼자 남겨진 새색시 마음은 얼마나 추웠을까. 아침에 새아기가 밥을 안치면 내가 반찬을 만들고, 그 아이가 찻물을 끓이면 나는 찻잔을 챙겨 냈다. 아들만 키웠던 엄마라 혹 거센 말투로 마음을 다치게 할까 싶어 조심했다.
직장에 나가는 며느리의 출퇴근길을 우리 부부가 배웅하고 마중했다. 내가 출근길에 따라 나가 버스 정류소에서 손을 흔들고, 퇴근해 차를 탔다는 전화를 받으면 그땐 남편이 마중 나갔다. 추운 날은 집과 정류장 사잇길을 차로 다닐까 생각도 했지만, 두 달 후면 신랑에게 가는 새아기라 같이 걸었다. 세찬 바람은 서로 막아 주고 추우면 팔짱 껴 체온을 나누며 정을 들여갔다.
크리스마스이브에 함께 기분을 내려고 요리를 하던 중 며느리에게서 전화가 왔다. 제 신랑이 서울에서 오라고 한단다. 섭섭했다. 그제 아들이 왔다 갔고, 연말에 내려오면 제 색시를 영 데리고 갈 건데 별나다 싶었다. 이렇게 음식을 준비하는 엄마는 무엇인가 싶어 화가 났다.
저녁상을 차리고 남편과 앉으니 괜히 서글프다. 그때 펄펄 내리는 눈 속에 있는 둘의 사진과 함께 ‘화이트 크리스마스입니다. 이 사람 올라올 수 있게 허락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메시지가 날아왔다. 그제야 얘들이 두 달 전에 결혼했다는 게 깨우쳐진다. 부부 되어 맞는 첫 크리스마스라 같이 보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이해되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상을 가운데 두고 앉았다. 새아기가 처음에 혼자 남았을 땐 두려웠지만 우리가 사랑으로, 대해 줘서 편하게 살았다고 했다. 아버지 어머니와 정이 들어 신랑 따라가는게 기쁘지만은 않다고 슬며시 마음 한 자락을 떨어뜨린다. 이튿날 아침, 김치랑 밑반찬을 보낼 궁리로 분주한데 정작 아들과 며느리는 짐을 쌀 생각도 없이 태평스럽다. 친정에 가서 저녁 먹고 올라간다는 새아기가 시아버지의 재촉을 받고서야 짐을 꾸린다. 짧은 시간에 이 집 식구가 되어 떠나는 걸 망설이는 것 같아 은근히 마음이 흡족하다.
요즘은 아들을 결혼시켜 살림을 내주면 그걸로 부모의 역할은 다했다고 여긴다. 저희들끼리 편하게 살도록 놔둬야지 가서 살펴 주면 간섭으로 생각하니 신경을 쓰지 말라고 한다.
지인은 의사 아들이 결혼해서 병원 근방에 살림을 차렸는데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자식이 사는 모습이 어떤지 궁금하지만 일 년이 지나도 초대가 없단다. 아들이 좋아하는 알타리 무김치를 먹이고 싶어 담았지만, 그 집 앞 카페서 만나 건네고 돌아왔다 한다. 어떤 이는 아들을 결혼시켜 서울로 살림을 내고는 일 보러 갔다가 들렀더니 며느리가 싫은 눈치를 보였다. 그 후로 서울에 가도 아들 집에는 들러지 않고 바로 내려온다고 한다. 씁쓸하다. 빠르게 진행된 핵가족화로 벌어진 일이라지만 이래도 되는가 싶다.
결혼은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란 남녀가 만나 한 가족이 되는 의식이다. 처음엔 두 사람이 만나 정을 키우지만, 혼인 후에는 양쪽 가족이 사돈 관계로 맺어진다. 새로운 부모 형제가 생겼으니 마음을 나누고 정을 틔우려면 자주 만날 필요가 있다. 불편해도 만남의 예를 갖추어야 하며, 상대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고 더러 자신을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우리 새아기는 요즘 젊은이와 다르게 몸과 마음이 얌전하고 바르다. 음식 솜씨도 좋아 차려 내는 반찬이 맛깔스럽다. 그런데 밥상 차리고 설거지하는 시간이 너무 길다. 식재료, 기구 물 등이 더할 수 없이 좋은데 왜 이렇게나 오래 걸릴까. 어떻게 말해 볼까 생각을 거듭하다가 문득 내가 새댁일 때를 떠올렸다. 시어머니로부터 부엌에만 가면 빠릿빠릿하지 않고 느리다는 소릴 많이 들었다. 일에 자신이 없고, 실수할까, 겁이 나서 조심해 움직이는 게 어른이 보기에는 답답했던 게다. 며느리도 주방 일이 익숙지 않아 그런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손에 익어 자연히 빨라질 것이라 여기니 걱정할 게 없겠다.
우리 고유의 된장을 보자, 콩을 삶아 만든 메주를 소금물에 띄워 장물을 덜어내고 만든다.콩이 메주로 변했다가 된장이 되기까지에는 적정한 온도와 일정한 시간을 들인 발효가 필요하다. 정확한 양의 물과 소금, 적당한 햇빛과 바람, 넉넉한 옹기와 시간이 있어야 한다. 거기에다 정성까지 들어가야 잘 숙성되어 맛있는 된장이 된다.
현대인이 즐기는 커피는 말린 생두를 볶아 고루 분쇄하고 추출해야 깊고 구수한 맛을 낸다. 차의 풍부한 맛과 향도 자연 상태가 아니라 발효를 통해 분해시키고 가열하면서 생긴다. 커피 원두, 찻잎, 바닐라와 카카오 열매의 날 것에는 향기 성분이 적지만, 볶은 커피에는 팔천 종, 홍차는 오백 종, 구운 빵에는 사백 종 이상의 냄새 물질이 생긴다고 한다. 발효와 숙성의 결과이다.
된장과 차의 맛을 내는 것도, 이렇게 복잡하고 어려운데 몇십 년 다르게 살아오던 사람이 한 식구가 되는 게 어찌 쉬울까. 이 집 저 집 놓여진 상황에 따라 다양한 사정이 드러난다. 그에맞게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숙성되어야 화목한 가족이 될 것이다. 새아기가 서울에서 살면서 자주 부산 집에 내려오는 것도 결혼 초 두 달의 생활에서 서로 다른 점을 비슷하게 발효시킨 덕일 것이다.
할아버지 기제사를 며칠 앞두고 며느리가 제사장을 같이 보려고 내려왔다. 마중 나가, 귀여운 손자를 안으니 가슴이 넓어진다. 제물을 고르고 반찬거리를 사 담아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볍다.
첫댓글 며느리 에게 살갑게 대해주면, 돌아오는 정도 클 것이지요. 참으로 현명한 시어머니 입니다.
강 작가님 의 앞길이 청청하기만을 기원합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저는 참 행복한 가정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데이빗 님 께서도 공감 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찾아주심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