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 장 佛家第一尊, 梵天神佛의 登場
{오합률, 네놈이 치사하게 암습을 하다니?}
혁씨노인은 갑작스런 청해존자 오합률의 암습에 경악성을
터뜨렸다.
그는 다급히 오른손을 움츠리며 몸을 피했으나 청해존자의암습은
너무나 빨랐다.
혁노인은 꼼짝없이 청해존자의 암습에 당할 판이었다.
헌데 청해존자의 왼손이 벼락같이 천마비를 집었다 싶은
순간이었다.
번쩍!
갑자기 한 줄기 핏빛 광채가 작렬하며 청해존자의 팔목을
베어오는 것이 아닌가?
이제 천마비를 잡아채면 되는데 갑자기 혈광이 쏘아오자
청해존자는 경호성을 지르며 급히 왼손을 움츠렸다.
{첩혈마황검( 血魔皇劍)!}
경악성을 토하며 청해존자는 뒤로 삼장이나 물러섰다.
어느 틈에 몸을 세운 모용천위가 한 자루 핏물을 칠한 듯
시뻘건 검신을 지닌 연검을 들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청해존자는 모용천위의 수중에 들린 핏빛 광채의 연검이
무엇인지 한눈에 알아보고 탐욕의 눈빛을 지었다.
허나 그의 마음은 조금 전 첩혈마황검의 위력에 새삼
섬뜩해져왔다.
[첩혈마황검!]
[으음... 저것이...!]
중인들은 첩혈마황검이란 말에
두 눈을 크게 뜨고 첩혈마황검을 바라보았다.
핏빛 첩혈마황검은 음산한 광채를 띠며 흔들거렸다.
문득 혜천대사가 떨리는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소시주의 성을 알려줄 수 없겠나?}
무엇 때문인지 그의 두 눈은 격동에 차있었다.
(정말 닮았어! 역시 저놈이 그녀의 아들인가?)
무영신개는 연신 철불 혜천대사와 모용천위를 번갈아보며
게슴츠레한 눈을 빛냈다.
조금이라도 안목이 있는 인물이라면 혜천대사와 모용천위의 얼굴이
어딘가 닮았다는 사실을 쉽사리 알 수 있을 것이다.
혜천대사의 물음에 모용천위는 피묻은 입가를 쓰윽
훔치며 대답했다.
{나의 성은 모용이요.}
그는 혜천대사를 쳐다보지도 않고 담사가 쓰러져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헌데 그 순간 모용천위의 눈빛이 놀라움에 크게 벌어졌다.
모용천위를 애닲은 눈빛으로 쳐다보던 혜천대사를 위시한
중인들도 그의 놀라는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며 한결같이 놀라운
눈빛이 되었다.
한 명의 허름한 노승(老僧)이 그곳에 있었다.
담사의 옆에는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게 한명의 노승이
쭈그리고 앉아 중인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담사의 전신을 살피고 있었다.
석실에 있는 중인들은 하나같이 중원무림에서 절정의
고수들이다.
이들은 십 리 밖의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청력이 뛰어났다.
그러나 이 노승은 감쪽같이 들어와 있으니 참으로 눈뜨고도
믿지 못할 괴이한 노릇이었다.
그런데 이 노승을 주시하던 청해존자와 혁사군 그리고
혜천대사의 눈빛이 무섭게 떨렸다.
그와 동시 한결같이 삼인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범천신불(梵天神佛)!}
{법공(法空)대사!}
{사숙조(師叔祖)!}
맨 마지막의 경악성은 혜천대사가 발한 것이었다.
이어 혜천대사는 무너지듯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박았다.
{소림 십칠대 제자 혜천이 사숙조를 뵈옵니다.}
그의 목소리는 격동과 경건함에 가득 차 있고 이마에 피라도 낼듯 연신 머리를 땅바닥에 박았다.
[으으!]
반면 혁노인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덜덜 떨더니 다음순간
모용천위의 손을 잡아채며 말없이 옆의 밀로의 어둠속으로 몸을 날렸다.
혁노인의 갑작스런 행동에 모용천위가 무어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혁노인은 재빨리 그의 수혈을 점혈 하고는 그대로 쏜살같이
석실 밖으로 날아갔다.
청해존자는 혁사군처럼 공포에 질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역시떨리는 몸을 간신히 추스리며 황망히 냉유도를 데리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이윽고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자 석실 안은 기이한 침묵에
사로잡혔다.
태허천존 황보승과 무영신개 동추평은 공손히 허리를 숙인
다음 말없이 경건한 얼굴로 허름한 노승을 주시했다.
황보가혜는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꿇어 엎드린 혜천대사의
엄숙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과 자신의 부친 태허천존, 그리고 동추평의
숙연한 표정에 말문을 닫고 말았다.
백 년 전,
어느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인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 수백 명의 무리가 침입했었다.
그자들은 저 서장 성숙해(星宿海)에 근거지를 둔 마교(魔敎)의 마인
들이었다.
그들은 옛날 자신들의 개파조사인 마승(魔僧) 마니(魔尼)가
소림의 육조(六祖)의 혜능(慧能)에게 패한 설욕을 하기 위해
소림사를 야습한 것이다.
당시 소림의 장문방장은 각생(覺生)대사로서 그날 밤 침입자
에 의해 숨을 거두고 오명의 장로를 비롯 이백여 명에 가까운 제자들이
죽어갔다.
실로 소림 개사 이래 최대의 치욕이었다.
그로부터 삼일 후,
법자(法字)의 항렬인 소림십팔나한(少林十八 羅漢)이 소리 없이 숭산을
빠져나와 서장(西藏) 성숙해(星宿海)까지 머나먼 길을 떠났다.
그리고 소림혈사가 벌어진 후 만 한 달째인 어느 날,
성숙해의 한 계곡에서는 소림십팔나한이 수백 명을 상대로 혈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아수라장으로 변한 안의 거대한 성채의 정문 처마 밑에는
핏빛의 글씨로 마교(魔敎)라는 현판이 음산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교(魔敎)!
그렇다!
이곳이 바로 오백 년 전 마승(魔僧) 마니(魔尼)가 창건한 나후마교
(羅吼魔敎)의 성지라고 불리우는 성숙해(星宿海)의 마애곡(魔崖谷)이었다.
당시 마애곡에 머물던 마교의 제자들은 수천을 넘었으나 한
몸으로 변한 듯 소림십팔나한의 나한진(羅漢陣)은 가히 철벽이었다.
거기다가, 이들의 일신에서 펼쳐지는 소림의 칠십이종 절예는
강혼하면서도 부드럽고, 부드러우면서도 변화무쌍했다.
마교의 마공은 괴이하고 기묘했지만 이들 앞에는 추풍낙엽
이었다.
풍차같이 일정하게 회전을 그리며 십팔나한의 수중에 들린
계도가 번뜩일 때마다 어림없이 피가 튀고 팔다리가 떨어졌다.
쌓이고 또 쌓이는 시신 그리고 핏물이 내를 이루어 흘러내렸다.
소림의 제자는 실로 강하고 또 강했다.
삼주야(三晝夜),
인간이 신(神)이 될 수 없듯이 십팔나한도 피와 혈육으로 된
사람이었다.
그들은 지치고 또 지쳤다. 하나 끊임없는 마교의 제자들의
공격 이 끊임이 없으니 그들의 백색가사에도 피로 얼룩져 가기 시작했다.
돌연 이때, 십팔나한의 입에서 동시에 장엄한 범창(梵唱) 소리가 울러 퍼졌다.
{아제바라...}
일체의 사악을 쫓아내는 범창소리는 갈수록 커지고 마침내
용이 울부짖는 듯 마애곡을 뒤흔들었다.
문득 그 순간,
{아미타불... 소림의 영광이여!}
일성의 대갈성과 함게 십팔나한은 꽃잎이 흩날리듯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리고, 성난 황소가 초원을 질주하듯 마교의 제자들 속에
뛰어들었다.
살신성인(殺身成仁)_
내 몸을 바쳐 소림의 영광을 찾는다.
죽이고 또 죽이고 그리고 죽어갔다.
그 이튿날 새벽,
피투성이의 승인 한명이 비틀거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산혈해(屍山血海)_!
이곳은 인세가 아니라 아비지옥이었다.
여기저기 팔다리를 부여잡고 신음성을 발하는 중상자들,
그리고 말없는 참혹한 시신들...
중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아미타불...부처님이시여 법공(法空)이 무슨 죄를
저질렀습니까?}
그는 피를 토하듯 부르짖으며 느릿느릿하게 새벽의 안개
사이로 사라져 갔다.
자신을 법공이라고 말한 승인은 그날로부터 영원히 자취를
감추었다.
후세 사가에 의해 소림십팔천불(少林十八天佛)로 불리운
소림십팔나한...
소림사가 배출한 최강의 아라한들로 일컬어지는 그들의
신화는 그렇게 해서 하나의 비사로 전해져 온 것이다.
그들 중에 단 하나 마애곡에서 살아나온 승인이 바로 후일
범천신불(梵天神佛)이란 지고의 이름을 얻게 된 법공(法空)대사였던
것이다.
그는 혜천대사의 사조가 되는 전전대 소림방장 법호(法護)대사
의 바로 손아래 사제이기도 하다.
허름한 이 노승은 바로 손부인의 임종을 지켜본 노승이었다.
헌데 그가 바로 소림십팔천불의 일인인 범천신불 법공대사였단 말인가?
장내는 숨 막히는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법공대사는 담사는 가만히 안았다.
{아미타불... 부처님이 말하시는데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가리 라고 말씀하셨지.}
그는 혼잣말처럼 나직이 중얼거리며 슬쩍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자 그의 신형은 담사와 함께 온데간데없이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중인들은 한 동안 막연해졌다.
전대의 고인들만 법공의 이름을 알고 있을 뿐 막대승을 비롯한 현세의 인물들은 그의 모습은 고사하고 이름조차 듣지 못했다.
혜천대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미타불! 사숙조님의 금과옥언을 깊이 명심하겠습니다.}
그는 법공선사의 독백에 뜻을 깨달은 듯 나직이 중얼거렸다.
*
태행산(太行山)-!
심마니의 발길도 닿은 적이 없는 태행산의 깊디 깊은 곳에
자리한 어느 계곡,
계곡의 어둡고 짙은 그늘 속에 하나의 거대한 장원(莊園)이
묻 혀 있었다.
네 개의 기둥에 사천마왕(四天魔王)이 조각되어 있는 웅장한
대전(大殿)-!
정면 단상에는 지옥을 관장한다는 나후명왕(羅吼明王)의 석상
(石 像)이 흉측한 모습으로 대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전의 입구 문 주위에는 전륜대전(轉輪大殿)이라는 현관이
붙어 있고, 대전은 극히 음산한 정적에 싸여 있었다.
-전륜교(轉輪敎)!
그렇다!
이곳이 바로 이십오 년 전 무림맹에 의해 멸망한 전륜교의
새로운 총단이었다.
전륜교가 서장(西藏) 성숙해(星宿海)에 자리한
나후마교(羅吼魔敎)와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세간의 추측은 옳은
것이었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전륜교는 마교가 중원에 진출하기 위해
내세운 허수아비였다.
전륜교의 전대 교주 전륜천존(轉輪天尊) 모용황(慕容皇)은
바로 서장 나후마교의 장문제자(長門弟子)였던 인물이었다.
그 전륜천존 모용황이 우내삼기의 수하에서 고혼이 된지
어언 이십오 년,
옛 전륜교 총단의 터에서 멀지 않은 이곳에 새로운 전륜교의 총단,
즉 나후마교의 중원분단(中元分團)이 세워져 있는 것이다.
어둑하던 대전의 등불들이 하나 둘씩 밝아지고 수 명의
인영이대전 중앙에 놓인 거대한 팔선탁에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상석(上席)에는 언젠가 태행산에서 보았던 혈교자의
혈의여인이 오연한 자태로 앉아서 차가운 신색으로 주위를 일별하고
있었다.
그 옆으로 문상(文相) 모용천엽과 무상(武相) 모용천위가
앉아있고, 그들의 왼쪽 편에는 절명마존 혁사군과 또 한명의 청수한
용모의 중년인이 앉아있었다.
문득 혈의여인 시선이 모용천위의 창백한 얼굴에 멈추었다.
{너는 이 길로 천마비(天魔匕)를 가지고 성숙해로 돌아가도록
해라.}
그녀는 청아한 옥음으로 말했다.
{태상노조(太相老祖)께 범천신불이 다시 출현했다고 전하면
그분이 너에게 무언가 지시할 것이다. 화련의 일은 이 애미가 알아서
처리할 터이니 너는 지금 당장 출발하도록 해라.}
모용천위는 무슨 말을 할 듯 입술을 움직였으나 나직이 한숨을
쉬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님의 분부대로 곧 출발하겠습니다.}
그는 일어서 절을 하고는 힘없는 걸음으로 대전을 나갔다.
혈의여인은 모용천위가 완전히 나가자 문득 두 눈에서 애틋한
빛이 스쳤다.
{교주, 너무 심려 마십시오. 천위는 강인한 아이니 성숙해를
다녀온다면 천마비의 마공을 익혀 천하에 그 적수가 없을 것이외다.}
혁노인이 위로하듯이 말했다.
혈의여인은 희민한 미소를 띄웠다.
{저 놈은 다 좋은데 인정이 너무 많아서 탈입니다.}
{허허.. 교주, 사내대장부라면 독하고 비정한데가 있어야만
되나, 화련은 외인이 아니라 천위의 마음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혁노인은 담담히 말했다.
{그 일은 그렇다 치고 문제는 철불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오.
그 중놈이 우리가 강호에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단
시일 내 이곳까지 올 것이외다.}
혈의여인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 일에 대하여 생각해 둔 것이 있어요.}
그녀가 자신에 찬 표정으로 말하자 혁노인은 눈을 크게 떴다.
{우리가 그 동안 정체를 숨긴 것은 세력을 키우기 위함이었지만
무림맹과 소림의 힘을 의식했기 때문이예요. 비록 지금은 어느
정도 세력이 확보되고 계획대로 이루어 졌으나, 범천신불의
출현은실로 예상치 못했던 변수예요. 그가 나타났다는 것은 우리를
의식하고 있는 것...}
문득 혈의여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불행한 일이지만 현재 그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태상노조도 범천신불이라면 거리낌을 가지고 있는 상태이니..
지금으로서 우리의 정체를 드러낼 수는 없어요.}
혈의여인은 눈빛에 일순 기이한 광채가 스쳤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필요해요. 천마비가 우리의 수중에 들어온
이상 반년만 이 상태로 유지한다면 태상노조께서 충분히 범천신불을 대응
할 수 있는 힘을 만들어내실 거예요.}
청수한 중년인이 담담히 말했다.
{교주께서는 막북동맹을 이용할 생각입니까?}
[호호... 역시 총관(總管)의 혜지는 속일 수는 없군요.]
혈의여인은 요염한 교소를 지었다.
[그래요. 우선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막북동맹을 끌어들여
무림맹의 신경을 그쪽으로 쏠리도록 하는 거예요. 어차피 막북동맹은
우리를 위한 희생물이었으니 차라리 잘된 일이예요.]
{흐흐...}
혁노인이 혈의여인의 말을 듣고는 스산한 웃음을 흘렸다.
{그 태양제(太陽帝)인가 뭔가 하는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중원을 자기 집 안방처럼 여기는 모양인데 이번에 그 놈이 혼줄이
나겠군.}
이 말에 중인들은 한꺼번에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호호호..}
음모!
전륜대전에서 이루어진 음모는 장차 중원을 피로 물들이는
전주곡이었다.
막북동맹(漠北同盟),
수십 년 동안 중언에 진출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려온 변방의 세력이 아닌가?
이들은 그 막북동맹을 끌어들여 무림판도에 일대 파란을
불러올 작정을 한 것이다.
과연 이들의 음모로 인해 또 얼마나 많은 애꿎은 인명이
희생될는지..!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찾아왔다.
그리고 다시 새해가 밝아오자 그동안 침묵을 지키던
무림맹의움직임이 갑자기 활발해졌다.
수십기의 파발마가 중원 각처로 달려가고 무림맹의 본산이
지척에 있는 태산 산록의 상가현(桑家縣)에는 수많은 무인들로
들끓었다.
작년에 벌어진 제남성의 사건,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처음에는
조그만 일이 구르고 굴러 나중에는 산더미같이 커졌다.
백 년 전 이 땅에서 사라졌던 마교가 부활했다.
그리고 전대의 고인 청해존자의 출현과 수 년 동안 은거
하다시피 하던 혜천대사와 태허천존이 강호에 나왔으며, 삼태상의 일인인
신검황 연주백의 죽음은 삼십 년 이래 평화를 유지해온 중원을 난세로
몰아 넣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하룻밤을 자고 나니 세상이 달라져 있더라는 말이 있듯이,
제남성의 사건으로 두 명의 이름이 중원 전역에 퍼졌다.
-흑마수(黑魔手) 모용천위!
-지옥혈룡(地獄血龍) 담사!
지옥혈풍은 범천대공 연대강을 암살한 의문의 자객인 담사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불가제일존인 법공(法空)대사의 이름은 그
누구도 거론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 이유를 몰랐고 묻는 사람도 없었으나 이미 전설
속에 묻힌 그 이름이 나온다고 해서 현세에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일월(一月)의 엄동설한,
무림맹은 쏟아지는 폭설 속에 묵묵히 버티고 있었다.
철불 혜천대사의 거처인 불령각(佛靈閣)의 문이 열리고
창백한표정의 적용화련(狄容華蓮)이 찻잔이 올려진 소반을 들고 들어섰다.
그녀의 배는 이미 상당히 부풀어 올라 있었다.
이제 산월이 그리 멀지 않은 그녀였다.
적용화련은 무영신개에 의해 이곳으로 온 이래 혜천대사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대사님, 차 드세요.}
문득 청아한 옥음이 들리자 혜천대사는 자비로운 시선으로
적용화련을 주시했다.
(허허!. 이렇게도 착하고 아름다운 아이가 기억을 상실하다니.)
혜천대사는 내심 안스러움을 느끼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적용화련은 절벽에서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지난 일은
아무것도 기억하지를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그녀 자신이 기억하기 싫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련(蓮)아, 추운데 몸조리나 하지 않고서는.. 자 이리로
앉도록해라.}
혜천대사의 따뜻한 말에 적용화련은 아련한 슬픔이 담긴 눈망
울을 깜박이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너의 기억은 곧 돌아올 것이니
너무 깊이 생각지 말고 뱃속에 있는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무리를 하면 안 된다.}
적용화련은 처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미타불...련아야, 나는 며칠 있으면 떠나야 한다. 그 전에 너에게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구나.}
혜천대사는 문득 창 밖에 내리는 눈을 주시했다.
그의 눈빛은 극히 침중했다.
{지금으로부터 삼십 년 전 소림사에는 한명의 혈기 방장한
청년승이 있었지.}
나직이 말하는 혜천대사의 표정은 우울해 있었다.
당시 삼십 팔 세였던 이 청년승은 자신의 동문 사형제들이
혹세무민하던 사교도(邪敎徒)들의 침입에 의해 죽음을 당하자
복수를하기 위해 속세로 나오게 되었다.
그 후 의인들을 규합, 사교의 무리들을 소탕하던 중 그는 우연히 중상을 입은 한 명의 여인을 구했고, 그것이 그에게 평생 씻을 수없는 회한을 안겨주게 되었다.
원래 음공(陰功)을 익힌 여인은 원수가 펼친 극양(極陽)
수법에 당해 생사가 지척에 달렸고, 여인을 구하기 위해서는 양강의
무공을 익힌 고수가 필요했다.
그 당시 청년승은 동정지체에다 양강의 무공을 수십 년 동안
수련한 사람이라 그는 즉시 치료를 시작했다.
그러나 여인의 상처는 엄중했고 음양합벽(陰陽合壁)의 방법이
아니면 도저히 치료될 수가 없었다.
승인은 불문의 제자가 아닌가?
이어 승인은 한 동안 갈등을 했으나 결국 그녀를 살리기로
결정했다.
불경에도 이르기를 한 생명을 구하는 것은 칠층보탑(七층寶塔)을 쌓는
것보다 더한 공덕이라고 하질 않았던가?
결국 그 청년승은 여인과 음양교합을 하여 그녀를 사경에서
구하게 된다.
그 후 상처가 치유된 여인은 모든 사실을 알고는 그 승인에게
말했다.
{당신이 어떠한 신분이시든 간에 저의 생명을 구해 주고 저의
몸을 가졌으니 신첩으로서는 당신을 지아비로 모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절을 했으나 승인은 거절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비록 사문을 뛰쳐나와 살계를 어겼으니 파문됨은 당연한 일,
허나 그의 마음속은 영원히 사문의 제자였으며, 그는 불문의 제자였다.
이에 여인은 그의 마음을 들릴 수 없음을 알자 피눈물을
뿌리며저주를 퍼붓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헌데 그로부터일 년 후 여인은 한 명의 아이를 안고 다시
그를 찾아왔다.
여인은 아이를 안은 채 피눈물을 흘리며 청년승에게 애원을 했다.
{이 아이는 당신의 아이예요. 자식을 위해서라도 당신은
환속에서 저와 함께 살아주세요.}
그러나, 이번에도 청년승은 자신이 불문의 제자라는 이유로
그녀의 애원을 물리치고 말았다.
혜천선사의 눈에 뿌연 막이 덮였다.
{아미타불...그 후 그 승인은 평생을 죄책감 속에 살아왔지.
그 당시의 일을 후회하면서...}
적용화련은 이야기의 청년승이 바로 혜천대사 본인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그 여자 분은... 그 후 어떻게 되었나요?}
적용화련이 묻자 혜천대사는 땅이 꺼질 듯한 탄식을 토했다.
{그 후의 일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그들 모자(母子)는
당시 세상을 도탄에 빠트렸던 사교(邪敎) 무리의 수뇌였던 지아비와 부친의 원한을 갚겠다고 그 승인에게 검을 겨누고 있지.}
말을 끝낸 혜천대사는 차분한 표정으로 적용화련을 주시했다.
{련아야, 내가 너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만약이라도..
너의 지아비가 천하에 몹쓸 사람이라도 그를 포용해야 한다는 마음에서
들려준 것이다.}
적용화련의 눈망울이 파르르 떨렸다.
{혹시... 저의 신세에 관해..}
{그런 뜻에서 한 말이 아니다. 사람의 앞일이란 예측할 수
없는 법 너의, 관상으로 보아 사내로부터 괴로움이 많을 것 같기에
노파심에서 한 소리니 깊이 생각지는 말아라.}
적용화련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대사님의 금과옥언을 명심하겠습니다.
헌데 그 여자 분의 이름은 어떻게 되나요?}
한 순간 혜천대사의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지그시 두 눈을 감은 그는 한 동안 입을 굳게 다물었다.
적용화련이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괜히... 쓸데없는 것을 물어서.}
문득 혜천대사가 천천히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아니다. 그녀의 이름은 연운설(燕雲雪)이었지.}
이 말에 적용화련은 일순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혜천대사는 적용화련의 행동에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련아야, 왜 그러느냐? 몸이 아픈 것이 아니냐?}
{아...아니예요. 다만 그 이름은.. 어디선가 들은 것 같아요.}
적용화련이 황망히 대답하자 문득 혜천대사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문득 이때, 나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문 밖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사, 황보승입니다.}
혜천대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적용화련이 문을 열었다.
바깥에는 태허천존(太虛天尊) 황보승을 위시하여 여장을 한
청초한 모습의 황보가혜, 수려한 미모에 약간 매서운 기질을 풍기는
북천일미(北天一美) 뇌옥연, 그리고 당문의 소보주 당송과 용문검부의
백상천이 서 있었다.
태허천존을 제외한 네 사람은 적용화련의 미모에 흠칫
놀랐다.
흑요석같이 빛나는 애절한 눈망울, 옥으로 빚은 듯한 섬세한
이목구비...
아름답다.
한 떨기 난초와 같이 청초하면서도 기품을 간직한 그녀의
자태에 당송과 백상천은 한 동안 얼이 빠졌다.
비록 아이를 가져 배는 불러있으나 그 가련한 자태가 한결 더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다.
황보가혜의 미모와 뇌옥연의 미모도 절세적이지만 적용화련에
비한다면 어딘가 모자람을 느끼게 만들었다.
중인들이 들어오자 적용화련은 말없이 물러갔다.
황보가혜는 적용화련이 나가자 재빨리 물었다.
{백부님, 저 언니는 누구예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호기심이 잔뜩 서려 있었다.
{아미타불.. 나도 저 아이에 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 동시주
가 우연히 그녀를 구해 데려왔는데 기억을 상실했기 때문에 과거의 일은
하나도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다.}
{어쩜 그럴 수가...!}
황보가혜는 동정어린 표정으로 다급히 말했다.
{그럼 저 예쁜 언니는 과거를 하나도 모른다는 말이예요.}
혜천선사는 흐뭇한 미소를 뗬다.
{그래, 그러니까 앞으로 네가 잘 대해 주도록 해라.}
{호호...염려 마세요, 백부님. 나에게 이렇게 예쁜 언니가
생기다니? 이름이 어떻게 되요?}
{글쎄, 이름도 기억을 하지 못해서.... 당분간 수련(水蓮)이라
고 부르기로 했다.}
황보가혜가 벌떡 일어섰다.
{련언니라.. 나는 련언니와 이야기 하겠어요.}
그녀는 재잘대다가 밖으로 훌쩍 뛰어나갔다.
실로 천진난만한 행동이었다.
태허천존은 혜천대사를 보며 고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저 놈이 아직 철이 없어서.}
{그런 소리 말게. 혜아야 말로 아직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아이 아닌가?}
혜천대사의 칭찬에 태허천존은 내심 흐뭇함을 느꼈다.
문득 뇌옥연을 위시하여 백상천과 당송이 공손히 혜천대사에게
절을 했다.
{삼가 대사님께 인사드립니다.}
혜천대사는 담담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나는 절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니 그만 두게.}
한 가닥 부드러운 잠력이 삼인의 허리를 세웠다.
세 사람은 절을 하려고 했으나 어쩔 수 없이 허리를 세웠다.
혜천대사는 뇌옥연의 얼굴에 시선을 멈추었다.
{뇌소저에게는 내가 무어라고 할 말이 없구나.}
뇌옥연은 문득 처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니예요. 대사님은 최선을 다하셨어요.}
뇌옥연이 말했다.
{지금은 비록 연공자님을 살해한 흉수가 달아났지만 결코
저의 손을 피할 수는 없을 거요.}
그녀는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으음...이 아이의 원한이 극에 달하니 장차 이 일을...
헌데 사숙조님께서 왜 그 자를 데리고 가셨는지...}
혜천대사는 내심 의문을 느꼈지만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백시주께서는 안녕하신가?}
백상천은 낭랑히 대답했다.
{저의 할아버님께서는 언제나 대사님의 염려에 강녕하십니다.}
혜천대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당송에게도 안부를 물은 후
태허천존에게 차분히 말했다.
{연락은 다 전해졌는가?}
그때 두 여인이 조용히 실내로 들어섰다.
바로 황보가혜와 적용화련이었다.
그녀들의 수중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이 들려
있었다.
{가만..젊은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끼리 어울려야지.}
혜천대사는 신형을 일으켜 세웠다.
{황보시주, 우리는 자리를 옮기지.}
태허천존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들이 대사님의 거처도 빼앗았군...하하...}
그는 유쾌히 웃음을 터뜨리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천웅대전(千雄大殿)!
무림맹의 의사청인 이곳에는 지금 이십여 명의 승(僧),
도(道),속(俗)의 사람들이 다섯 개의 둥근 탁자 주위로 앉아 있었다.
그 천웅대전으로 혜천대사와 태허천존이 들어왔다.
대전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오십대가 넘게 보이는
사람들로 구파일방의 장문인들과 강호의 명숙들이었다. 이들은
혜천대사와 태허천존이 들어서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혜천대사는 전 실내의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 늙은 사람이 비록 부처님의 자비로 그 동안 편안한 생활을
해왔으나 결국 속세의 감정을 버리지 못하고 이렇게 여러분들에게
번거로움을 끼치게 되니 민망스런 마음 한량 없습니다.}
혜천대사가 정중히 합창 배례를 했다.
그러자 중인들은 강호에서 유명한 정도명숙들이고 일파의
장문이지만 강호무림인들이 존경하는 혜천대사에게는 이들도 함부로
대할 수 없어 모두 가볍게 허리를 숙이며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성격이 열화 같고 한 자루의 칠환도(七環刀)로 명성을 떨치는
갈원(葛院)이 말했다.
{노선사께서 중원무림을 위해 무림첩(武林帖)을 발부하셔서
중지(衆智)를 모으자고 하셨으니 이것은 무림동도들로부터 추앙을받을
일입니다.}
혜천대사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한다.
{이 늙은이는 다만 중원의 평화에 조그만 도움이라도 될까 해서
여러분들을 초청한 것인데 갈대협께서 이렇게 칭찬 하심은 설 곳을 모르
게 하십니다, 그려.}
그는 잠간 말을 끓더니 다시 계속한다.
{우선 시장하실 터이니 모두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혜천대사는 먼저 자리에 앉았다.
혜천대사는 먼저 자기 앞에 놓인 술잔을 들고 말했다.
{여러분들이 이 늙은이의 청을 받고 이렇게 와 주신데 대하여
우선 이 잔으로 여러분의 노고에 치하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에 여러 사람들도 일어나 몸을 굽혀 각기 자기 앞에 놓인
술잔을 들고 단숨에 들이킨다.
이어 잠시 서로 수인사가 오갔다.
실내에는 무당파의 장로 태극도인(太極道人)을 위시하여 구파
일방의 고수들과 동추평, 북천뇌보의 총관 천남검(天南劍) 뇌종의(雷宗義),
용문검부의 창룡검옹(蒼龍劍翁) 등, 평소에 보기 힘든 고수들도 있었다.
{여러분, 이 늙은이가 이렇게 여러분들을 초청하게 된 것은
다름이 아니고...}
잠시 말을 멈춘 혜천대사는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막북에서 웅거하고 있던 태양제(太陽帝) 막리극이 변황무림인(邊荒武林人)들을 규합 중원을 침범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사실은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중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혜천대사는 말을 중단하고 다시 한 번 모든 사람들을 한 번 훑어보고 다시 말했다.
{이에 이 늙은이 조그만 힘이나마 보태어 막북동맹을 물리치기위해 여러분의 도움을 호소하는 바입니다.}
태극도인이 일어서며 말문을 열었다.
{막북동맹은 중원무림의 적, 우리 무당은 온 힘을 기울여 혜천대사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일어나 동조를 표했다.
초경 무렵부터 시작된 천웅대전의 회의는 밤새 계속 진행되었다.
막북동맹이 중원을 침입한 것은 한 달 전의 일이었다.
태양제를 주축으로 막북 대소십이파가 연합된 막북동맹은 일류
고수만도 수백 명, 그 외 수하들까지 합쳐 일만에 달하는 강력한 세력이었다.
이들은 현재 하북성과 사천성의 경계에 포진하고 있는데 사천성에는 벌써 사천장문을 주축으로 아미(蛾嵋), 종남(終南), 청성(靑城) 삼파의 고수가 막북동맹과 부딪쳐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현재대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