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방초정(金泉 芳草亭)은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 83번지에 있으며,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었다가, 보물 제2047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 선조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낸 연안이씨 11세손 이정복(李廷馥, 1575-1637)이 조상들을 추모하기 위해 1625년 원터마을에 지은 2층 누각이며, 현재의 위치보다 국도 쪽으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1689년 퇴락한 것을 그의 손자 이해(李垓)가 중건하고 1723년(경종 3) 여름 홍수에 유실된 것을 4년 뒤 1727년(영조 3)에 중건하였다가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파손되었고, 1736년의 큰 홍수로 유실된 것을 1788년에 가례증해(家禮增解)를 저술한 바 있는 이의조(李宜朝)가 현재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2층 이익공계 5량가 팔작지붕에 마룻바닥을 일정하게 높여 지은 중층 누각형식의 정자로, 2층 가운데 1칸을 온돌방으로 만들어 꾸몄으며, 주로 호남 지역의 누정에서 자주 보이는 것처럼 가운데 부분에 사이기둥을 세우고 사방에 벽을 쳐서 문짝을 달았으며, 나중에 몇 가지의 구조물들을 첨가되었다. 화강암 장대석 기단 위에 막돌로 초석을 놓고 온돌방을 구성하고 있는 누 상부의 네 기둥을 제외하고는 모두 원주를 세웠다. 그리고 기단의 네 모서리에는 지붕의 추녀를 받들고 있는 둥근 활주가 있다.
호박돌과 같은 자연석을 층층이 쌓아 구들과 고래를 둔 온돌을 방 하층부에 만든 다음 굴뚝과 아궁이를 앞과 뒤에 각각 설치하여 난방을 할 수 있도록 하였고, 사면이 개방된 정자는 통상적으로 겨울에 이용 효율이 떨어지는 데 반해 계절의 변화와 기능의 요구에 맞추어 마루와 방을 통합하거나 분리하여 쓸 수 있도록 하였다.
앞에는 최씨담(崔氏潭)이라 불리는 커다란 방지(方池)가 꾸며져 있으며 그 안에 2개의 섬이 있다. 방초정 앞 최씨담(崔氏潭)은 현재까지 알려진 국내 지당 중 방지쌍원도(方池雙圓島)의 전형을 보여주는 유일한 정원 유구로 마을과 감천 사이에 있다.
최씨담에는 이정복의 부인 화순최씨(和順崔氏)와 관련된 설화가 있다. 화순최씨는 화순인 최율(崔律)과 상산김씨(商山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17세에 연안이씨(延安李氏) 이정복과 혼인했으나 신행 전에 임진왜란을 만났다. 왜적이 들이닥치자 죽더라도 시가(媤家)에서 죽겠다고 하고 김천시 감천면 하로에서 가족과 함께 구성면 쪽으로 피난을 갔다. 상원리 상좌원에 있는 시가에 갔으나 이미 시가 식구들은 피난을 떠나고 아무도 없었다. 수소문 끝에 선대의 산소가 있는 능지산에 있음을 알고, 그쪽으로 가던 중 왜적을 만나게 되었다. 이때 ‘깨끗하게 죽는 이만 못하다.’고 생각한 최씨는 여종 석이(石伊)에게 자신이 입었던 옷을 벗어 부모님께 전해주기를 당부하고 자기는 명의(明衣:죽은 사람이 입는 옷)로 갈아입고 깊은 못에 몸을 던져 정절을 지켰다. 여종이었던 석이도 주인을 따라 함께 빠져 죽으니 후에 사람들이 그 연못을 최씨담이라 부르게 되었다.
방초정 옆에는 이정복의 부인 화순최씨의 정려각(旌閭閣)이 있다. 1632년(인조 10)에 정려(旌閭)가 내려지고 인조가 손수 쓴 정려문이 하사되었다. 1764년(영조 40)에 정문(旌門)을 세웠다. 1812년(순조 12)에 여각을 고쳐 지어 현재에 이른다. 정려각 옆에는 여종의 비각인 ‘충노석이지비(忠奴石伊之碑)’도 세워져 있다. 정려각과 같은 시기에 세워졌으나 앞문에 묻힌 것을 1975년 방초정 연못을 보수할 때 발견하여 여각 앞에 세웠다.
최씨부인이 물에 빠져 죽고난 후 신랑 이정복은 벼슬 임지에서 돌아와 부인을 잊지 못해 여러 해 동안 웅덩이 곁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후손을 봐야한다는 문중의 권유로 훗날 재혼은 하였으나, 연못 옆에 정자를 지어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부부의 인연을 영원토록 함께 하기를 기원하였다. 그렇게 먼저 간 부인을 그리워하면서 지은 정자가 방초정이며, 웅덩이를 확장하여 개축하고 최씨의 연못이라는 의미로 최씨담이라고 명명했다.
당시 중수기와 중건기 그리고 상량문 등에 담긴 내용으로 건립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건축 내력을 비교적 충실하게 추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자의 위치와 형식 그리고 건립 동기 등을 통해 씨족 마을을 운영해 나가는 당시 문중의 공동체적 삶의 단면도 함께 엿볼 수 있다. 특히 현 정자의 중건 인물이 영·정조 때 영남 노론 학단을 대표하는 예 학자로 「가례증해」를 발간한 이의조란 사실을 고려할 때 정자의 역사적인 가치가 높다.
방초정은 후대 이루어진 보수공사를 통해 몇몇 부재들이 교체되기는 하였지만, 기둥 상부에 결구된 이익공 포작과 충량의 결구 및 가구형식 등 전체적인 건축 수법이 대체로 조선 후기의 양식을 따르고 있어 1788년 정자가 중건될 당시의 모습을 잘 유지한 채 보존상태도 양호하여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의미에서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가치가 있다.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1815~1900)가 '방초정에 걸려 있는 시판에 차운하여 시를 짓다(芳艸亭次板上韻)' 에서 방초정의 경치와 화순최씨의 정절을 읊었다.
이름이 방초정인 정자에 아름다운 경치 새롭고
방초정 그 풍경이 다시금 아름다와,
芳草名亭麗景新
뜰 가득 돋은 풀을 보니 옛 사람 생각나네.
滿庭芳草憶前人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우리 온통 화목한데,
至今一室團和氣
살펴보니 그 해 봄의 일을 헤아리겠네.
認是當年子諒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