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집을 주목한다
말은 스스로 말한다
― 구애영, 호루라기 둥근 소리(고요아침, 2017) ― 박방희, 시옷 씨 이야기(고요아침, 2017) ― 서석조, 각연사 오디(고요아침, 2017) ― 신필영, 우회도로입니다(천년의시작, 2017)
김남규
0. 말은 말하지 않고, 존재한다
일상 언어는 기표와 기의, 주어와 서술어, 말하는 이와 듣는 이 등 서로를 보증하거나 서로를 향한다. “A는 B다”라고 말할 때 A와 B는 연관이 있거나 연관이 아예 없어도 서로가 서로를 보증 선다. 그리고 일상 언어는 기본적으로 ‘말-건넴’을 전제하고 있다. 혼잣말 역시 나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며, 일상 언어는 항상 누군가에게 말하는 형식으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시의 언어는 어떠한가. 소위 ‘소통’을 근거로 시 역시 독자에게 말을 걸고 독자와 작가가 소통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상 시는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고 말도 걸지도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시는 시인의 것도, 독자의 것도 아니다. 시가 탄생하는 순간, 시는 작가를 살해한다. 최근 ‘화자’나 ‘시적 자아’라는 말을 쓰지 않고, ‘시적 주체’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시에서 말하는 자(화자)는 시인이 아니고 시인이 만든 가상 인물(배역)일 뿐이며, 시의 목소리는 시인의 목소리가 아니라 시인이 세운 가상 인물의 목소리다. 예컨대, 김소월이 여성적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그의 작품에 여성적 어조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김소월은 여성적 어조로 작품을 만들 필요(의도)가 있어서 여성 화자를 (각본 없는) 무대에 올린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최후에, 아니 처음부터 남아 있는 것은 작품뿐이다. 작품은 스스로 존재한다. 시의 언어도 마찬가지다. 시의 언어는 처음부터 ‘말 건넴’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시에서 말은 말하지 않고, 그저 존재할 뿐이다. 일상에서 말은 사용하는 것(有用)이고 말을 통해 우리는 세계에 속하게 되지만, 시의 말은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無用) 시 자체가 하나의 세계다. “A는 B다”라고 말할 때, A와 B는 서로를 보증하지 않고, 근원도 없다. 그저 작품 안에서 존재할 뿐이다. 예컨대 김수영의 ‘힘으로서의 시의 존재’처럼 시의 언어는 그 자체로 힘 혹은 능력(역량)이다. 따라서 작가는 글 쓸 때마다 두려워하고 절망해야 한다. 쓰면 쓸수록 작가는 작품에서 사라진다. 작품은 타자가 된다. 타자의 현현. 글쓰기가 윤리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글쓰기는 근본적으로 타자를 향한 글쓰기다. 여기서 말하는 ‘타자를-향한’은 타자를 대상으로 혹은 타자로 회귀한다는 것이 아니라, 글쓰기 자체가 타자임을 알고 쓴다는 말이다. 소위 ‘천형(天刑)’이라고 말하는 ‘시인’의 운명은, 그래서 가혹한 것이다. 수명을 갉아먹기까지 하는 모진 고통과 불면을 자처하지만, 결국 시인의 손에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무위의 글쓰기. 침묵의 글쓰기. 독자도 마찬가지다. 독자가 작품을 읽고 느끼는 여타의 감정은 시로 인해 촉발된 것이지만, 그것은 해석 주체의 문제다. 작품은 철저히 고독하게 ‘혼자’ 있다. 작품의 내밀성, 작품의 내적 실재와 끈질기게 싸우는 부지런한 독자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작품이 ‘난해하다’, ‘소통 불가능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독자의 나태함과 무지함을 은폐하려는 말일지도 모른다. 훌륭한 독자만 있을 뿐, 나쁜 작품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네 명의 시집을 읽으며 시인의 작품성 혹은 성과를 논하기 보다는, 내적 실재를 가진, 시인도 독자가 감히 범접(犯接)하기 어려운 작품을 함께 읽어보고자 한다. 그런 작품들은, 우리의 사유를 작동시키면서 모든 사물의 근원을 흔든다. 다가가는 것을 멈출 수 없으나 다가갈 수 없고, 붙잡을 수 없으나 놓을 수 없는 그런 작품. 우리는 그런 말(언어)로 구성된 세계를 ‘시’라고 부른다.
1. 허밍―구애영, 호루라기 둥근 소리
구애영의 시조 선집 호루라기 둥근 소리에서 우리는 일상에서 경험하고 느낀 것을 옮겨 적은 ‘일기’가 아니라, 어떤 소재와 어떤 언어가 시(가 될 수 있는)인지 시인이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시인은 일상성이 한순간 낯설어지거나 특별한 정동(情動)에 주목하기 보다는 시 자체를 본다. 시를 만들기 위해 세계와 언어를 재구성하거나 변형하지 않고, 세계 그 자체를 본다. 그것이 시가 되었다. “수련 잎을 두드리는 푸른 달빛 소나타// 떠도는 풀잎마저 그 파문에 술렁이고// 합죽선 펼쳐진 댓잎, 묵 향기에 잠이 들 듯” (「나비효과」 전문)에서처럼 시인은 수련 잎을 두드리는 파문을 ‘있는 그대로’ 본다. 여기서 ‘있는 그대로’는 물론, 주관의 세계이다. 절대적인 객관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겸손하다.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다만 사물과 사건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해석’하려 한다. 물론 의미 역시 해석 주체로부터 비롯되는 것이지만, 적어도 구애영 시인은 발견하지 않고 그저 보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나비효과」의 세계는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로 존재한다. 시인은 그저 받아 적었을 뿐이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겨울밤이 비어있네 촘촘히 적신 눈가에 천千의 별들 숨을 때 하늘 땅 이어주려는 꽃잔친 줄 알았네
부딪히지 못하여 저 홀로 깊어가는 등 울금빛으로 온몸 적셔 이어지는 적멸인가 얇은 사絲 휘장 사이로 그대 사붓거리고
눈동자로 꾹꾹, 눌러 담는 묵독의 풍경 늦은 저녁 양푼 가득 한 그릇씩 쏟고 싶네 산마을 가지취 돋는가 슴슴한 저 살내음이여 ― 「눈 내리는 유동柳洞 마을」 전문
시인은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를 패러디했다. 그러나 시인은 백석의 작품을 복사(copy)한 것에 머무르지 않고, 백석의 세계, 백석의 시언어가 존재하는 곳을 형상화했다. 시인은 백석의 작품이 아니라, 백석이라는 시인의 글쓰기 자체를 그리워하고 동경했던 것이다. 비어 있는 겨울밤, “누군가를 기다리며” “촘촘히 적신 눈가에/ 천의 별들 숨을 때” 구애영 시인은 ‘꽃잔치’를 본다. “부딪히지 못하여 저 홀로 깊어가는 등” 밑에서 혹은 앞에서 시인은 “눈동자로 꾹꾹, 눌러 담는 묵독의 풍경”을 “양푼 가득/ 한 그릇씩 쏟고”자 한다. 백석도 아마 그리했을 것이다.
너의 소리 무지개처럼 바람타고 날아올 때 횟가루 금 앞에서 일제히 튕겨 나갔어 내 마음 쿵쾅거리고, 새 운동화 꿈을 그리고
운동장 빙빙 돌며 청 백군 이어 달릴 때 손에 쥐었던 바통은 분신처럼 소중했어 하늘에 펼쳐진 풍선, 음표처럼 반짝거려
확성기 울림소리에 홑벚꽃 하르르르 그 환한 풀밭에서 펼쳐지는 꽃밥 잔치 그래도 귀 기울이며 종종종 따라갔었지
세細모래 살근살근 뜀틀대 간지럼 해도 상賞이 찍힌 공책은 끝내오지 않았어 호르르 분홍 살구 씨, 말갛게 비워낸 소리 ― 「호루라기 둥근 소리」 전문
시인에게 “묵독의 풍경”은 때로는 과거의 것, 지금 이곳의 것이 아니기도 하다. “슴슴한 저 살내음”이 나는 풍경. 시인은 유년 시절 운동회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 소리들을 하나씩 불러본다. ‘호루라기 둥근 소리’는 마치 최면의 시종(始終)을 알리는 것과 같은 기능을 하는데, 이 작품의 시적 주체는 그 최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시적 주체는 “너의 소리 무지개처럼 바람타고 날아올 때” “내 마음 쿵쾅거리고, 새 운동화 꿈을 그리”고, “확성기 울림소리”에 “귀 기울이며 종종종 따라갔었”지만 끝내 “상(賞)이 찍힌 공책은 끝내오지 않았”다. 그 아슴하고 조금은 쓸쓸한 시절. 시인이 불러왔지만, 어느새 작품은 시인(과 시적주체 마저)을 몰아내고, “호르르 분홍 살구 씨, 말갛게 비워낸 소리”만 작품 안에서 맴돈다. 그러나 최면은 깨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 작품은 ‘호루라기 둥근 소리’가 난다. 아니, 이 작품은 호루라기 둥근 소리의 세계다. 호루라기 둥근 소리의 세계가 “확성기 울림소리”처럼 우리의 귓가에 머문다. 우리를 부른다.
어두움을 그슬려놓은 줄무늬 작은
달빛 스민 뜰에 앉아 허밍으로 노래하다
내 집이 꽃밭인줄 알고 한동안 부끄럽네
접시꽃에 웅크린 별, 눈 맞추다 스러진
그리움 둥글게 여민 그 껍데기 등에 지고
이슬 길 맨살로 미는 저 여린 오체투지
느릿느릿한 몸을 뒤척이려 더 아파했지
가난한 침상 같은 그늘 속 반지하방
꽃처럼 피어나고 싶어 그려보는 은화隱花의 벽 ― 「달팽이 시詩」 전문
시인은 “어두움을 그슬려놓은 줄무늬 작은” “달빛 스민 뜰에 앉아 허밍으로 노래”하는 달팽이(혹은 달팽이 같은 자신)를 본다. “내 집이 꽃밭인줄 알고 한동안 부끄”러워 하는 시인은, “그리움 둥글게 여민 그 껍데기 등에 지고” “이슬 길 맨살”로 지금까지 왔다. “느릿느릿한 몸을 뒤척이려 더 아파했”던 “가난한 침상 같은 그늘 속 반지하방”. 어느새 시적 공간은 달팽이의 ‘허밍’으로 가득하다. 이제 시인(시적 주체)이 반지하방에 기거했든 ‘오체투지’로 살아왔든 간에 그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달팽이의 허밍이, 맨살로 미는 여린 달팽이의 오체투지가 만들어내는 “은화隱花의 벽”을 보라. 그렇게 작품의 말들은 아주 천천히 ‘은화의 벽’을 만들어간다. “달빛 스민 뜰”에 달팽이의 허밍이 나지막이 들린다. 여기서 우리는 ‘달팽이=시인’이라는 독법을 멈춰야 한다. 이 시에서 우리가 해석해야할 것은 달팽이가 만드는 시이지, 달팽이라는 상징을 통해 어떤 말을 건네려는 시인(시적 주체)의 의도가 아니다. 시는 우리에게 말을 건네지 않는다. 그저 달팽이의 허밍만 들릴 뿐이다. 달팽이의 허밍만 가득한 세계, 천천히 그렇지만 무한하게 만들어지고 있는 은화의 벽. 구애영 시집의 시는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 호루라기 둥근 소리와 달팽이 허밍으로. 은밀하게 피는 ‘은화(隱花)’처럼, 우리는 치명(致命)과 매혹(魅惑)에 붙들린 채 그 안에서 철저히 무력해진다. 물론, 황홀(恍惚)도 가능하다.
2. 이야기―박방희, 시옷 씨 이야기
“생각하는 모든 사람의 이름”을 ‘시옷 씨’라 칭하고, 시옷 씨의 ‘이야기’를 연작으로 묶은 박방희 시인의 이번 시집은 사물과 현상에 대한 다양한 ‘시옷 씨’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물론,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시옷 씨를 박방희 시인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으며, 단지 시인이 (자유의지가 있는) ‘시옷 씨’를 시옷 씨 이야기라는 무대에 풀어놓았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박방희 시집의 다양한 이야기를 ‘경험’한다. 이 시집이 매력적인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야기들을 그저 보고 듣는 것에 그치지 않고 경험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경험은 그 이야기를 지각하거나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사태의 형상과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그 이야기에 주체가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그 이야기 안에서 주체가 ‘시옷 씨’와 함께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시옷 씨 이야기라는 시집 안에서 생각하게 되고, 시옷 씨 이야기는 생각하는 공간이 된다. 우리는 그 이야기 안에서 자유롭게 생각만 하면 된다.
이삿짐 풀어놓고 벽에 못을 박으면
생활은 시작되고 타관도 고향 된다.
그렇게 못 박힌 하루하루가 일생이 되는 거다. 「시옷 씨 이야기 3—이사」 전문
새로 이사 온 집 벽에 못을 박으면 “생활은 시작되고 타관도 고향”이 된다. 벽에 못을 박으면서 ‘입주(入住)’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이 세계에 못을 하나씩 하나씩 박기 시작한다. 인간관계, 직업, 여가생활, 취향, 종교 등등 우리는 세계를 선취(先取) 혹은 선취(選取)하면서 세계-내-존재(In-der-Welt-sein)가 된다. 그 못 하나하나가 모여 ‘일생’이 되는 것인데,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생각한다. 우리 자신이 박은 못은 무엇인가. 그 못은 제대로 박은 것인가. 잘못 박은 것이라면 빼낼 수 있는가. 우리가 박은 것인가. 우리가 박힌 것인가 등등. 우리는 못에 빙의되어 또는 못을 박는 일에 빙의되어 생각한다. 우리가 이사 온 이 세계는 우리에게 적합한가.
아침이 일찍 와서 밤을 보고 물었다.
“캄캄한 네 속에는 무엇이 들었느냐?”
“눈 뜨고 못 볼 것들이 다 들어 있지.”
아침은 주저하다 새벽을 앞세웠다.
미명 속에 벗은 모습 가릴 수 있도록…….
뒤이어, 더딘 걸음으로 아침이 찾아왔다. 「시옷 씨 이야기 4—아침」 전문
이번 박방희 시인의 시집에는 다양한 인물과 사물이 말을 하고 행위를 한다. 물론, 어느 정도 시인이 각색하고 구성한 세계겠지만, 그 세계 전부를 시인의 것, 시인을 조물주로 보아서는 곤란하다. 그렇게 보면, 결국 시는 선(仙)의 경지에 이르고 마는데, 우리의 세계는 여전히 속(俗)된 곳이라 ‘섣불리’ 선의 세계로 초월하기 어렵다. 초월의 다른 말은 외면이기도 하므로, 우리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여기서 먹고 싸우고 사랑해야 한다. 그러니, 우리는 “눈 뜨고 못 볼 것들”을 가리려는 ‘미명(未明)’이라는 이름 아래 ‘미망(迷妄)’을 경험하거나 눈을 감는다. “더딘 걸음으로 아침이 찾아”오도록 우리의 ‘캄캄한 속’을 얼마나 캄캄한가. 아침과 밤, 그리고 새벽이라는 세 가지 시간 변화. 어두움(숨겨짐)과 밝음(밝혀짐). 그것이야말로 세계이자 삶 아니겠는가. 지금 「시옷 씨 이야기 4」는 새벽안개로 가득하다. 「시옷 씨 이야기 6―횡단보도」도 마찬가지다. “20초 만에 건너는 허방 많은 사다리”인 횡단보도는 “천길 벼랑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어” “아뿔싸! 하는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수시로 내걸리는 눈물 젖은 붉은 등”은 “비명횡사한 목숨”을 조문하기 위해 켜지는 것이니, “바닥에 누운 사다리”인 횡단보도가 바로 “황천 행 열차”다. ‘비명횡사한 목숨’에 대한 다양한 상징과 해석을 뒤로 하고, 우리는 허방 많은 사다리 위에 서 있다.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천길 벼랑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이곳에서 황천 행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 이야기가, 시가, 말이 황천 행 열차가 되어 우리에게 온다.
“사람들은 한 음절의 말들을 좋아하죠.
해, 달, 별, 땅, 물, 흙, 꿈, 봄, 등
심지어 술이나 돈을 드는 사람도 있고요.
나 역시 한 음절로 된 말을 좋아해요.
는, 과, 을, 이, 도, 같은 토씨들로서
언제나 주목받지 못하는 말들이랍니다.” 「시옷 씨 이야기 38—가장 좋아하는 말」 전문
우리는 “해, 달, 별, 땅, 물, 흙, 꿈, 봄” 등의 1음절의 단어를 좋아한다. “심지어 술이나 돈을 드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시옷 씨는 “는, 과, 을, 이, 도” 같은 ‘토씨’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언제나 주목받지 못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모든 글자들의 받침”을 좋아하는 이유로 “아래가 받쳐주지 않으면 위란 없는 거거든요”(「시옷 씨 이야기 39―받침」)라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토씨와 받침의 세계보다는, 명사나 주어의 세계에 거주하고자 한다. 주목받기 위해서다. 물론 주목 받는 말들을 좋아한다고 해서 나쁠 것도 없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 각자의 그릇이 있으니 그에 맞춰 살아갈 뿐이다. 말도 그와 같다. 그러나 ‘시옷 씨’는 주목받지 못하는 말들에 주목한다. 같은 처지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동정 때문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 속에서 시옷 씨와 함께 우리는 ‘토씨’들을 생각해본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토씨였는가. 누군가가 나에게 토씨가 되지 않았는가. 나는 누구인가. 결국 질문에 답하지 못한 채 질문은 또 다른 질문을 낳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 ‘힘’을 시인의 의도로 보기에는 시인을 너무 높인 꼴이 되니, 결국, 모든 게 이야기 때문이다.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이야기를 경험하고 생각한다. 말은 결국 이야기다. 말의 여러 기능과 목적이 있지만, 시옷 씨 이야기에서 말은 이야기를 만들어 그 안에서 존재하고 있다. 독자 역시 그 이야기 안에서 마음껏 존재한다. 그러나 이야기가 독자와 작가에 선행한다. 태초부터 이야기가 있었다.
3. 겨냥―서석조, 각연사 오디
서석조 시인의 시조 선집 각연사 오디에서 우리는 하나의 지점으로 향하(려고 하)는 힘과 의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 지점은 역사적 사실 또는 특정한 대상으로 보이는데, 그 강렬한 ‘힘에의 의지’가 시를 견인하고 있다. 현실은 “기우는 수평을 바로 잡을 이 목책”(「장보고」)이 필요하고, 현실은 “장군의 칼날 아래서 졸음 겨운 오늘”(「천강 장군 생각」)이기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시인은 “천 년도 잠시잠깐 실국(失國)의 한도 한 줌 바람” “연잎에 앉았다 가는 빛의 그늘”(「빛의 그늘」)을 보면서 그 ‘빛의 그늘’을 형상(形像)하는 일, 즉 시쓰기가 시인을 붙잡으면서 동시에 붙들려 있는 듯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시인은 시에 다가가는 것을 멈출 수 없으나 다가갈 수 없고, 붙잡을 수도 없으나 놓을 수도 없는 그 상태. 그 비인칭의 상태에서 ‘황홀(恍惚)’을 경험한 나머지, 시인은 그 상태가 시인을 시 바깥으로 내쫓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시쓰기에 몰입(沒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깊이를 모르거든 전설로나 남겨두라 물과 뭍 어름에는 부표 하나 띄워놓고 근근이 오금을 펴다 물너울에 걸리는 하루
돌아올 기약 저쯤 숨비소리 풀어내고 시리고 저린 걸음 구들목을 파고들 때 이어도 이어도사나 불침번을 서는 결기
아무려면 얼붙으랴 도저한 파랑지문 멀고 먼 북천이 보석 별로 뜨는 밤에 무연한 아귀 한 마리 경계망 갉는 소리 ― 「이어도」 전문
‘이어도’는 그런 곳이다. “깊이를 모르거든 전설로나 남겨두라”고 말하는 곳. “긴긴 세월 섬은 늘 거기 있어 왔다. 그러나 섬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섬을 본 사람은 모두가 섬으로 가 버렸기 때문이다. 아무도 다시 섬을 돌아온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청준, 이어도)인 그곳. 제주도 사람들의 낙원과도 같은 곳. “돌아올 기약 저쯤 숨비소리 풀어내”는 제주 해녀들이 노래로 불렀던 그곳. “이어도 이어도여, 요내 노야 부러진들요, 내 손목이야 부러질 소냐, 한라산에는 곧은 나무가 없을쏜가, 이어도요 이어도요.”(제주 해녀 노래)하고 이어도는 노래로 존재한다. “멀고 먼 북천이 보석 별로 뜨는 밤”이면 “무연한 아귀 한 마리 경계망 갉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곳. 신화화된 공간이자 탈현실화된 공간 불귀(不歸)의 섬 이어도. 우리는 작품에서 신비(神秘)를 경험하게 된다. 작품의 말은 이 세속의 말이 아닌 저쪽 혹은 저세상에서 온 듯하다. 공간이 신성하니, 말도 신성해진다.
금강역사 콧구멍에 불침 한번 놓아 버리면
범종루 들어 메쳐 천 년 종을 울게 할까
너에게 닿는 길이면 눈 딱 감고 귀 딱 막고
바람이 몰아쳐도 단풍이 흐드러져도
법당문 닫아걸고 꿈일까보냐 부처님
저 감국 바위를 안고 뜨거워질 어느 천 년에
보고 싶다, 이 축담에 X표 하나 그려놓고
어느 외진 길 돌아들다 나처럼 주저앉아
짓붉은 낙엽 한 잎의 경을 읽고 있을 사람 ― 「관룡사에서」 전문
우리는 지금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몸매로 우리를 무섭게 내려 보고 있는 금강역사(金剛力士)를 지나가고 있다. 불법과 사찰은 수호하고 있는 수문장(守門將)이 범종루를 들어 메치면 천 년 동안 종이 울릴 지도 모른다. 작정하고 나선 관룡사. “너에게 닿는 길이면 눈 딱 감고 귀 딱 막고” 가야 한다. 너에게 가는 길, 너에게 가는 이 시간에만 오로지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람이 몰아쳐도 단풍이 흐드러져도” “법당문 닫아걸고” 침묵하고 계신 부처님. 그러나 시적 주체는 “감국 바위를 안고 뜨거워질 어느 천 년”이라고 말할 만큼 ‘천 년’동안의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부처님은 침묵하고 계신다. (신은 언제나 침묵하고 계신다.) 천 년을 기다려도 너는 오지 않을 것이지만, 시적 주체는 “축담에 X표 하나 그려놓고” “어느 외진 길 돌아들다 나처럼 주저앉아” “짓붉은 낙엽 한 잎의 경을 읽고 있을 사람”인 너를 기다리고자 한다. 불가능의 가능성. 천 년을 기다려도 너는 돌아오지 않겠지만, 혹시 천 년을 기다리면 네가 돌아올까. 천 년을 기다릴 수 있다면, 무엇을 (당)해도 괜찮다는 강한 정념(pathos)이 작품에 깃들어 있다. 감국 바위를 안고 천 년을 기다려도 좋으니, 어느 외진 길 돌아들다 주저앉아도 좋으니, 네가 돌아올 수 있다면야. 너를 볼 수 있다면야. 그리움의 힘이 너무 큰 나머지 천 년을 감내할 수 있다니. 그리움은 천 년 동안 노래가 되어 세상을 떠돌 것이다.
1. 아침 해를 쏘아보다 까맣게 먼눈으로 맨땅바닥 걷어차다 다리도 작신 부러져 그 봐라 아무나 못 해 살쾡이가 남긴 자국
2. 시위 당긴 팔꿈치에 코피 터진 사람들 온 마을 문패 잡고 피 칠갑을 해대자 묘지의 혼령들마저 살 떠는 밤이 된다
이제 야만의 시대 벽면 액자 다 부서지고 외계에 주파수 맞춘 뿔 돋은 영웅들 세상 깊이 판 해자를 둘러 시위 소리만 나는 성
3. 부레옥잠 꽃잎 위에 청개구리 한 마리 햇살을 비껴 돌며 사방을 겨냥하다 무자수 지나는 참에 혼비백산 흔적 없다 ― 「겨냥」 전문
말은 겨냥한다. 말 자체가 시위를 떠난 활이니, 힘 그 자체다. 말은 작품 안에서 시위를 떠난 활처럼 어디론가 ‘쏜살같이’ 뻗어가고 있다. 회전 없이 목표물을 향해 날아가는 활. 무시무시하다. 아침 해가 우리를 쏘아보고 있어(“아침 해를 쏘아보다 까맣게 먼눈”) 고작 “맨땅바닥 걷어차다 다리도 작신 부러”질 뿐이다. 자연이 우리를 노리고 있다. “시위 당긴 팔꿈치에 코피 터진 사람들”은 “온 마을 문패 잡고 피 칠갑”을 한다. “묘지의 혼령들마저 살 떠는” “야만의 시대”―사람이 사람을 노리고 있다. 그러나 이제, 겨냥은 강한 자의 특권이다. “깊이 판 해자를 둘러 시위 소리만 나는 성”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그 성 바깥에서 성으로 진입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서로가 서로를 겨냥하지만, 아무래도 성 안쪽이 바깥보다 유리하다. 강한 자, 가진 자만 겨냥할 수 있다. “부레옥잠 꽃잎 위의 청개구리”는 사방을 겨냥할 수 있지만, 우리는 부레옥잠이 아닌, “햇살을 비껴 돌”수 없는 도시에 살고 있다. 그렇게 겨냥은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혹은 강한 쪽에서 약한 쪽으로 향한다. 겨냥은 기본적으로 목표물을 전제로 진행되는 것이지만, 저 ‘청개구리’처럼 사방을 향한다. 더 정확히 말해, 목적은 있지만 목표는 없다는 것이다. 시도 그렇다. 시의 말은 사방을 향한다. 당겨진 시위의 탄성력으로 활이 나아가듯, 시인의 시쓰기에서 말이 나아간다. 다만, 시인은 그저 시위를 당길 뿐, 활이 어디로 나아갈지는 모른다. 어느 정도 방향만 짐작할 수 있겠다.
4. 무위(無爲)—신필영, 우회도로입니다
시집의 맨 앞에 놓인 작품을 통해 우리는 신필영 시인의 시집 전체를 갈무리해볼 수 있다. “노래/ 혹은 울음으로/ 제비노정 분주한 날// 대자보 내걸듯이 이르고자 할 바 있어// 이 땅이/ 들썽거린다/ 들풀 한창/ 시푸르다”(「봄, 正音」). 유성호 평론가가 작품 해설에서 언급했듯이 ‘정음(正音)의 미학’이 시집 전체를 관류(貫流)하고 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감각적인 언어가 시집 전체를 이루고 있는데, 특히 시집에서 주목할 점은 시집 작품 대부분에서 시인은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기 위해 애쓴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시인은 무위(無爲)의 글쓰기를 지향하면서 동시에 작품은 무위(無爲)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무위(無爲)’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곳, 아무것도 완성되지 않은 이 무위의 깊이야말로 존재의 깊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처음과 끝도, 생성과 소멸도 없는 무위는 존재의 무한함을 조금이나마 엿보게 한다(유한자가 무한을 얼마나 볼 수 있겠는가). 이 무위의 공간은 침묵과 고독의 공간이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너무 많은 말이 숨겨져 있다.
입동으로 잎이 든다,
허공에 몸을 놓아
지는 일 하나에만
정진하고 있는 사이
나무는 밝아진 귀로
바람의 말 듣고 섰다 — 「동안거」 전문
음력 10월 15일부터 이듬해 1월 15일까지 승려들은 외출을 금하고 수행에만 전념한다. 원래 수행자들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생활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우기가 되면 땅속에서 작은 벌레들이 기어나오기 때문에 길을 다니다 보면 벌레들을 밟아 죽일 염려가 있었다. 그래서 석가는 제자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우기의 3개월 동안 돌아다니는 것을 중지하도록 했는데, 여기에서 안거(安居)가 유래하였으며, 한국에서는 기후 조건에 따라 여름의 3개월과 겨울의 3개월 동안을 안거 기간으로 삼게 되었다. 이 안거 기간 동안 수행자들은 ‘면벽수행’처럼 최대한 말을 아끼고 수행에 정진해야 한다. 그러나 무념무상에 이르기 위한 좌선 혹은 참선은 오히려 깊은 깨달음과 고차원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 “지는 일 하나에만// 정진하고 있는” 나무조차 “밝아진 귀로// 바람의 말 듣고 섰다”. 침묵으로 귀가 밟아져서 바람의 말까지 들을 수 있는 경지. 나무는 그저 “허공에 몸을 놓아” 지는 일 하나에만 정진하고 있을 뿐이었다.
울어 산을 넘는 절집 종소리거나
그 길섶 돌아앉아 향을 빚는 산국이거나
익히고 잦힌 생각들 운을 떼듯, 어슬녘 — 「석남사」 전문
“울어/ 산을 넘는/ 절집 종소리”나 “그 길섶/ 돌아앉아/ 향을 빚는 산국”은 모두 “익히고/ 잦힌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 서로 무심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으나, 각자의 역할과 임무에 소홀하지 않는다. “묏새도 울지 않아 깊은 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는 정지용의 「장수산 1」처럼 ‘고요’가 가득한 석남사. ‘판단정지(epochḗ)’할 수밖에 없는 이 곳. 아무 것도 알 수 없고 아무 것도 판단할 수 없는 이 곳. 그러나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이 가득하다. 그 ‘무엇’은 마치 가만히 있는 창가 커튼이 흔들리듯, 불면에 시달리면서 나의 ‘있음’을 자각하게 되는 순간 ‘출몰(出沒)’한다. 그러나 이 ‘무엇’에 집중하면 할수록 우리는 두려움에 몸서리치게 된다. ‘무엇’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작품 「석남사」에서 무심한 듯 들리는 ‘종소리’와 산국이 빚는 ‘향’이 느껴질 때, 그래서 그것의 있음을 알고 또한 나 자신에 대해 ‘회의(懷疑)’할 때, 우리는 이 작품이 만들어낸 존재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게 된다. 물론, 헤어 나올 수 없다.
순간을 멈춰 세워 길이 된 얼음 폭포
불가청의 고함 소리 동아줄로 엮어놓고
절벽에 발톱 찍으며 몸을 밀어 올린다
시위를 당기는 듯 지그시 굽힌 뜻은
장차 곧게 펴겠다는 네 보법의 고된 선택
시작은 끝을 위하여 언제나 겸손하다 — 「장수하늘소」 전문
“길이 된 얼음 폭포”는 “순간을 멈춰 세”운 것이고, “불가청의 고함 소리 동아줄로 엮어놓”으면서 “절벽에 발톱 찍으며 몸을 밀어 올린다”. 장수하늘소도 이와 같아서 “보법의 고된 선택”으로 “시위를 당기는 듯 지그시 굽힌 뜻”으로 나아간다. 정지되어 있는 하나의 사진처럼 보이나, 우리의 눈을 찔러 들어오는 그 ‘무엇’이 있다. 물론, 그 ‘무엇’은 아무 것도 아니고, 우리를 자극하는 것도 아니지만, 우리는 그 ‘무엇’이 ‘있다(有)’는 것에 쉽게 눈을 떼지 못한다. 우리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렇게(혹은 그렇게) 있으니, 우리의 있음을 어떻게 견뎌내야 할지, 우리는 그 무시무시함을 자주 잊고 산다. 아니, 외면하려 노력한다. 이렇게 신필영 시집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무위(無爲)의 세계는 우리로 하여금 잊고 있었던(혹은 외면하고자 했던) ‘존재의 깊이’를 가늠하게 한다. 그것은 사물과 현상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의미 그 자체이기 때문에, 우리가 다 아는 말로 언술되어 있다고 해도, 그 말은 우리가 이전에 알고 있는 말이 아니다. 잘 알고 있는 말과 상황이 낯설어지는 이 시간. 이 시간을 우리는 독서라고 부르기도 하고, 글쓰기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결국 끝까지 남는 것도 작품이고, 끝까지 이기는 것도 작품이다. 여기서 시인도 독자도 좌절하게 되고 절망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철저히 유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원에 문제를 제기하는 작품은 무한하다. 말 역시 무한하다.
5. 말은 스스로 말한다
우리가 시집을 읽을 때, 우리는 손쉽게 시인의 목소리와 얼굴, 그리고 시인의 감정을 읽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미 작품은 시인을 살해했고, 작품은 곧 독자인 우리도 살해할 것인데, 우리는 순진하게 그렇게 시인이 (잘) 살아 있다고, 우리도 아무 일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 자체가 착각이자 오독이다. 작품은 끝까지 존재한다.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것은 말 자체가 아니라, 존재다. 그러나 존재는 침묵의 방식으로 말을 건다. 그때 다시 말이 되고자 하는 것은 존재이고, 그리고 말은 존재가 되고자 한다. 존재의 존재성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 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에서 말하는 자는 어느 누구가 아니다. 말(존재)이 스스로 말을 하는 것이다. 말은 구애영 시집의 경우 ‘허밍’으로, 박방희 시집의 경우 ‘이야기’로, 서석조 시집의 경우 ‘겨냥’으로, 신필영 시집의 경우 ‘무위’로 말을 한다. 모두가 다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 그 힘에 ‘특히’ 매혹되는 자를 우리는 ‘시인’이라고 부른다. ◆
김남규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외 수상. 시집 집그리마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