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왜고개 성지 (서울시 용산구 한강대로40길 46, 용산동5가 2-65)
왜고개는 한자로 와현(瓦峴) 또는 와서현(瓦署峴) 이라고 불리던 곳으로, 와서가 있는 고개라는 뜻이다
와서는 조선시대 기와와 벽돌을 구워 공급하던 관청으로 1882년까지 유지되었었다
(명동성당과 약현성당을 지을 때 여기에서 구운 벽돌을 사용하였다)
병오(1846년)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시신이 잠시 머물렀다가 안성 미리내로 이장 된 곳으로, 병인(1866년)박해 때에는 새남터에서 순교한 7명의 순교자가 33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2명의 순교자가 43년 매장되었던 곳으로 천주교회 의 사적지이다
왜고개를 거쳐간 10명의 순교자 중 8명이 1984년 교황 바오로2세에 의해 성인 반열에 올랐다
이곳에는 천주교 군종교구청과 천주교 중앙주교좌 성당도 함께 있다
성당 내부 모습
구 간조 경성지점 (서울시 용산구 한강대로 42길 13, 한강로2가 112-2)
간조(間組, 하자마구미はざまぐみ)는 1889년 일본 고치현에서 설립해 러일전쟁 직전인 1903년 경부철도공사를 위해 한반도로 진출하여 인천에 근거지를 두고 영업을 시작해 1906년 한강대로 일대에 용산출장소를 설치하였다
간조는 1911년 한강철교를 시공하면서 용산과 관계가 깊어졌다
철도학교, 철도회관, 용산중학교, 제2고등여학교(현 수도여고) 등을 건축하면서 용산의 근대적 시가지 형성에 기초를 만들었다
1914년 일본영업부와 조선영업부가 분리되어 간조 조선영업부는 한강통 11번지(현 용산우체국 뒤)로 옮겨와 목조 단층건물을 지었는데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큰 피해를 입고 이듬해(1926년) 기존의 목조 건물을 철근콘크리트조 2층 건물로 개축하였 다
그때 지은 건물이 오늘날에도 남아있는 것이다
또한 이 시기 간조 조선영업부는 사세를 확장하며 간조 경성지점으로 이름을 고치게 된다
신축 건물의 완공과 함께 간조 경성지점은 1927년 용산기지 내 제20사단경리부 건축기사를 발탁하며 건축부를 신설하는 등 조선과 만주의 거점 역할을 하며 수많은 건축과 토목공사를 시행했다
물론 용산기지가 인근에 있어 군관계 건축도 많이 수주하게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아래는 간조 경성지점 사옥이 들어선 이래 시공한 건축, 토목 목록 중 일부이다
1931년 : 대구사범학교 신축
1932년 : 용산공립중학교 교사 및 도서관 신축, 예성강 교량, 진남포 석탄선적부두 시공
1933년 : 경성제1공립고등여학교 증개축
1934년 : 마포공립보통학교 신축, 황해수리조합 제4공구 공사, 강원도립 강릉병원 신축
1935년 : 용산철도회관 신축, 한강인도교 교각 공사(1934년 한강인도교 해체)
1936년 : 다사도 축항공사, 강원도립 농사시험장 청사 개축, 부산 제1잔교호 선교 신축
1937년 : 소래염전 축조공사
1938년 : 조선빌딩(반도호텔) 신축, 원산 석유정제 공장 신축
1939년 : 만포선(조선과 만주를 연결), 만포역 청사 및 관사 신축, 압록강 교량 개축
1940년 : 수색 경성조차장 건설(미완공)
1943년 : 북한 수풍댐 공사(1937~1943)
이 외에도 간조가 건축한 건축물과 시설물들은 이루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특히 일제 말기 한반도가 병참기지화되면서 수많은 한국인들이 강제 동원되는 가운데 간조가 34개소의 강제동원 현장을 운영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 건물의 사용 이력
1926년~1945년 : 간조 주식회사(間組 株式會社) 경성지점
1945년~1948년 : 미군정에 의해 용산기지 부속 건물
1948년~1950년 : 대한민국 국군에 일시 양도
1950년 경 : 북한군 지휘소
1951년~불명 : 소유주, 용도 불명
1966년 : (주)광일 모 기업 '광일화학공업사' 설립
불명~현재 : 식자재 기업 (주)광일 사옥
용광사 터 (서울시 용산구 한강대로40가길 24, 한강로2가 55)
진원종(眞言宗) 고야파(高野派)에 속하는 일본인 사찰로, 1907년 영정(榮町 : 현 용산구 신계동)에 처음 터를 잡았을 때에는 용산사(龍山寺)라 하였다
1932년 5월 16일 주소를 이전하였는데, 이때 현 위치로 이전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주둔 일본군대가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 서 숨진 병사들(이른바 전몰장병)의 유골을 봉안하 는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일제가 패망한 뒤 1946년 귀속재산(적산사옥)으로 처리되어 원불교측에 넘겨져 서울교당이 되었다
♤ 융문당과 융무당
융문당과 융무당은 1868년(고종 5) 9월부터 이듬해 7월 사이에 경복궁 신무문 밖 후원(지금의 상춘재와 녹지원 일원)에 지은 건물이다
융문당은 왕 또는 문관들이 모여 글을 지으며 연회 를 하던 곳으로, 고종 때 경무대에서 실시한 과거 시험의 중심 건물이었으며, 융무당은 과거 시험의 무과와 활쏘기 시합, 군사들의 교체 훈련 및 사열 등에 사용하였다
'조선고적도보 제10책(1930년)'에 실려있는 경복궁 후원의 융문당과 융무당
1928년 융문당, 융무당이 철거되면서 더 넓어진 경무대 빈터에서는 조선박람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융문당과 융무당은 문화재에 등록되지 못하고 2006년 해체되있다가 2007년 9월 영산성지(전남 영광)에 복원되어 원불교 창립관(융문당)과 옥당박 물관(융무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 그 자리에는 서울교당과 하이원빌리지가 세워져(2009년 2월 16일 준공)
예전의 모습은 사라지고 건물 전면에 있던 보호수 (은행나무) 3그루와 전봇대만 남아 있다
삼각(맨션)아파트 (서울시 용산구 한강대로62길 32, 한강로1가 231-24)
1970년에 지어진 아파트로 3개 동(A동, B동, C동) 으로 되어 있는데,
B동이 주거공간 130세대, A동과 C동은 1층이 상가로 되어있는 주상복합동으로
9.8평부터 26평까지 평수가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아파트 내부에 한전 부지가 상당부분 포함되어 있고, 뒷쪽으로도 한전 창고부지(경성전기 용산출장 소 터)가 공지로 연접해 있다
삼각(맨션)아파트가 한전 부지를 점용하고 있어 소송까지 가는 등 갈등이 심하여 재개발(재건축)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 경성전기 용산출장소 터
1908년 설립한 일한와사주식회사의 용산사무소가 있던 곳으로, 1909년 한미전기를 매수한 후 1915년 경성전기주식회사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와사(瓦斯)는 가스(gas)의 일본식 음역어(音譯語) 이다
사무공간을 확충하기 위하여 1928년 12월 중구 남대문로에 사옥을 신축하였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에 귀속되어 국영기업으로 유지되나 한국전쟁, 시설 노후, 전력시설 부족 등의 문제로 경영난을 겪다가 1961년 조선전업주식회사 남선전기와 함께 한국전력주식회사(현 한국전력공 사)로 통합되어 한국전력주식회사가 되었다
삼각(맨션)아파트 옥상에서 내려다 본 경성전기 용산출장소 터
♤ 일한와사회사 설립 당시의 터는 현재 우리은행 용산지점과 삼각(맨션)아파트를 비롯한 여러 민간 건물들이 분할 점령한 상태이다
화랑거리 (서울시 용산구 한강대로 172, 한강로 1가 243-3 일대)
미군이 용산에 주둔하던 1950년대 시절에 미군들 사이에서 자신의 초상화를 가족에게 보내는 일이 유행하자 가난한 화가들이 이 거리에 하나, 둘 모이 기 시작하여 한 때 3백여 명이 활동했을 정도로 전성기를 이루었던 특별한 장소이다
(이중섭, 박수근도 이 곳으로 거쳐갔으며, 박완서는 미군 PX 초상화부에 근무했었다)
1960~70년대 그림이 미국과 유럽에 수출되면서 전성기를 이루며 외화벌이도 되었다
1980년대 이후 중국의 그림 대량 생산으로 인해 저렴한 값에 그림이 팔리기 시작하면서 그림시장이 위축되어 손님들이 자연스럽게 줄어들게 되었다
최근까지만해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삼각지 (서울시 용산구 한강대로 지하 185, 한강로 1가 228-1 일대)
삼각지는 애당초 삼거리나 사거리와 같은 길의 갈래를 뜻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용어이며, 실제 로도 이곳 삼각지는 삼거리가 아니라 처음부터 사거리(보기에 따라서는 오거리)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원래 한강, 서울역, 이태원 방면으로 통하는 세모난 땅이란 데에서 나온 지명이지만 현재는 사각지四角地라고 해야만 할 것이다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용산구편, 1980년)
1906년 일본군 병영지 조성과정에서 탄생한 군용 도로가 남대문정거장(현 서울역) 쪽에서 곧장 내려 오는 철도와 한강통 도로(현 한강대로)가 용산역 방면으로 이어지기 전에 크게 꺾어진 곳이다
삼각지교차로가 '로터리'로 변신한 것은 1837년 여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939년 봄(4월 말)에 완공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존속되다가 1967년 1월 입체교차로를 착공하여 그해 12월에 준공하여 재변신하였다
4방향(한강, 서울역, 용산, 이태원) 입체교차로 시설로는 우리나라 최초였다
(연장 1085m, 노폭 7.5~15m, 건설비 2억3천만원)
1994년 입체교차로가 철거되어 평범한 네거리 교차로로 환원되었다
♤ 돌아가는 삼각지
작곡가 배상태가 배호가 살고 있는 청량리 집으로 악보를 들고 찾아가자, 신장염으로 투병 중이던 배호가 노래가 좋다며 4시간 동안 연습 후 의자에 앉아 1967년 3월 16일 녹음하였다
(이 노래는 남진, 남일해에게 바쁘다며 거절을 당하고, 가수 금호동에겐 구닥다리라는 혹평을 받았다고 한다)
서울에 있는 방송국에서는 배호가 무명가수라고 방송 거절을 당하고 배상태가 대구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KBS 전속가수였던 경력이 있던지라, 대구 KBS 국장이 "고향 사람 노래를 안 틀어 줄 수 없다"며 틀어준 것이 히트하게 되었다
(KBS에서 전국 각지의 방송국을 연결해 노래를 들려주며 이야기를 나누던 '가요 릴레이'라는 프로 그램에서 틀어진 것이 시초였다)
용산역을 출발하여 한 바퀴 돌아 삼각지까지 오늘도 일정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우리 님들 모두모두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ㅁ^
첫댓글 용산아리랑 그동안 연재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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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호 가수 참 노래 잘 불렀던 기억. 돌아가는 삼각지, 안개낀 장춘단 공원….. 구봉서가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때 단골로 틀어주던 노래였습니다. 어느 해던가… 정말 안개가 자욱하고 비가 오던 저녁이었는데 마침 장춘단 공원 옆을 지나는데, 버스에서 나오는 그 음악이 정말 기가 막히게 분위기가 맞았던 기억입니다…. 역사 속에는 대중 문화도 있어야 재미있네요. 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
^ㅁ^
서빙고에서 태어나
아버지 따라서 삼각지 가던기억,
참으로 유익한정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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