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끼니를 함께하는 것만큼 사람과 친해지기 쉬운 방법은 없다. 특히 그 상대방이 나재민이라면.
알고 보니 나재민은 이 하숙집의 셰프 역할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아침, 점심을 간단하게 챙기고 저녁은 바베큐 파티를 여는 것처럼 성대하게 차려주었다. 이동혁 말하길, 늘 이래 왔으니 감사한 마음으로 싹싹 긁어먹으면 된다더라.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하숙집에 오고 일주일이 안 돼서 3키로가 더 쪘다. 얼굴에는 때깔 좋은 기름이 꼈다. 요리할 때마다 재민아 너 안 힘들어? 좀 도와줄까? 물으면, 자신만의 작품 세계가 있다며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요리에 대한 강박이 있는 듯 했다. 혼자 일하는 걸 가만 둘 수 없는 오지랖 때문에 재료 다듬겠다고 나대다가 나재민 눈빛 한 번 받은 뒤에는 그냥 잠자코 얻어먹는 중이었다. 이동혁은 저도 깝쳐봤다가 그날 접시에 탄 고기만 올라왔다며, 말 좀 들으라고 꾸중을 주었다.
하지만 까치도 은혜를 갚는데 사람된 도리상 매번 얻어먹는 건 마음에 걸린단 말이지. 나재민이 제 요리에 손대는 걸 경계한다면, 아예 내 힘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밥상을 차려주는 방법이 있었다. 날을 잡아 내가 저녁을 책임지겠다고 단단히 일러두고 재료를 준비했다. 메뉴는 떡갈비. 대접해준다는 느낌이 팍팍 날 수 있는 메뉴 선정이었다. 유튜브 보니까 다들 15분 만에 만드는데 나라고 못할까 싶었다. 솔직히 이동혁, 황인준 몫까지 만들어야 한다는 게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이미 애진작에 생긴 단톡방에 저녁까지 쫄쫄 굶어두라 소리쳐둔 참이었으므로 묵묵히 재료를 손질했다.
"여주."
"응?"
"양파가 너무 큰 거 아냐?"
"커야 씹히는 맛이 있지."
"얘는 너무 작고. 들쑥날쑥한 게 매력인 거야?"
"......더 다지려고 했어."
나재민은 저녁을 책임지겠다는 내가 못 미더웠던 게 분명했다. 아까부터 옆에서 쪼르르 붙어 다니며 조언을 던져주고 있었다.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마치고 싶었는데, 좀 전에는 배를 홀랑 가져가서 강판에 갈아왔다. 이러면 너한테 밥 차려주는 느낌이 아니라고 해도 자기는 괜찮다면서. 그래도 도움받은 덕분에 과정이 빠르게 끝났고, 고기를 떡에 잘 말아주기만 하면 됐다. 포장을 북 뜯어서 떡을 집어 들었다. 다른 손으로는 일정량의 고기를 떼어내서 돌돌돌.
"잠깐 잠깐. 떡 안 씻어?"
잠시 휴대폰을 보고 있던 나재민이 화들짝 놀라며 내 팔을 붙잡는다.
"이거 진공포장 돼있었어."
그러니까 괜찮다는 의미였다. 진공포장이면 좀 깨끗한 거 아닌가? 거 공기 빼면서 먼지도 같이 뺐을 것 아냐.
나재민은 전혀 아닌 모양이었다. 나 저 표정 봤었거든. 김도영이 4살짜리 조카한테 백 원 3개보다 천 원 한 장이 더 좋다는 걸 설명해야 했을 때의 얼굴. 어떤 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왜.... 그러니까 육하원칙 전부를 설명해야 했을 때. 나재민은 경직되어 올라간 입꼬리를 살짝씩 떨면서 말했다.
"잘 보면 떡가루가 붙어 있고, 공장에서 온 거니까 냄새도 나지 않을까?"
"음......"
그렇단 말이지. 가루야 무시할 수 있었지만 냄새가 나는 건 꺼려졌다. 고개를 주억이며 떡을 싱크대로 가져갔다. 몇 번 휘저어주면 될 듯 하여 쌀 씻듯 세 번 헹궜는데 나재민이 뭔가 불편한 표정을 짓는다. 이쯤 되면 난 요리대회 출전자 롤이었다. 심사위원에게 책 잡힌 사람처럼 떨떠름히 물었다.
"왜?"
"물에 담가 두면서 만들면 더 좋을 것 같아."
"... 떡이 너무 불지 않을까?"
"원래 불려야 돼. 바로 구우면 엄청 딱딱해서 갈라지거든."
"으응. 그래."
생각지도 못한 포인트였다. 다시 싱크대로 돌아가 물을 받았다.
쏴아아아. 달칵. 이 정도면 되려나. 비유하자면 반신욕 할 정도의 물받이였다. 완전히 잠긴 건 아니고, 떡 표면에 물이 찰랑찰랑했다.
"더 해야 하지 않을까?"
......쏴아아아아.
.......
"저기 근데 재민아."
"응."
물 받는 것까지 검사할 필요는 없잖니. 나재민은 내 어깨너머로 싱크대를 쳐다보려고 전전긍긍이었다. 물에 떡 불리는 건데 내가 불이라도 쓰는 사람처럼 굴었다. 솔직히 그렇게 어려운 미션도 아닌데 말이다. 나재민의 고민 담긴 한숨이 세 번 정도 이어졌을 때, 나는 지긋이 나재민의 눈을 쳐다보았다.
재민아.
응.
"나 혼자 만들어도 돼?"
"... 미안. 가만히 있을게."
"아니야. 그냥 혼자서 만들게. 굽는 것 밖에 안 남았으니까."
"힘들지 않겠어?"
"으응, 아냐. 너 가서 티비 보고 있어."
결국 나재민을 질질 밀어 거실 소파에 앉혀주고 리모컨을 쥐어줘서야 부엌에 혼자 남을 수 있게 됐다. 들었던 충고대로 떡을 물에 담가 둔 후 하나씩 고기를 말아 떡갈비 모양을 만들었다. 나재민 도움 없었어도 이 정도까지 만들 수 있었을 거라고 자신한다. 도움이 있었으니까 더 잘 만들긴 했지만.
꿈과 희망이 가득 찬
드림하우스로 놀러오세요
- 새로운 만남은 늘 근처에 있다 -
어느새 시간은 8시였다. 보통 저녁시간보다 30분 정도 늦었다. 밥 차려지는 냄새가 나니까 이동혁이 슬그머니 거실로 나왔다. 내가 인상 쓰고 사투를 벌이고 있으니 차마 말은 못 걸고 부엌을 곁눈질하며 티비를 시청 중이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사실을 고하자면, 나는 나재민이 부엌에서 사라진 순간부터 망해가는 직감을 받았다. 분명 맛있는 떡갈비 15분 만에 만드는 레시피라고 했는데. 팬 위에 널브러진 고기 잔해들을 숟가락으로 눌러 붙였다. 균열이 생기는 건 흐린 눈으로 넘긴다. 플레이팅 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프라이팬을 통째로 들어 식탁에 내려놓았다.
"밥 먹자."
"요올, 다 했어?"
"... 결론이 나기는 했어."
"맛있는 냄새나는데?"
순서대로 이동혁, 나재민이었다. 상차림을 구경하는 둘을 두고 방에서 쉬고 있던 황인준까지 불러냈다. 식탁에 옹기종기 모여 겉보기에는 맛있어 보인다며 칭찬을 해주고 있었다. 나재민은 내가 이렇게 해낼 줄 몰랐다며, 자식 다 키웠다는 눈망울로 나를 봐주었다. 나는 앞접시를 꺼내 가져오며 침을 꿀꺽 넘겼다. 얘들아 이제 먹어봐. 초조하게 말하자 황인준이 가장 먼저 젓가락을 들었다.
"잘 먹을게."
"응. 떡갈비가 메인 메뉴야."
내 말에 시금치로 향하던 젓가락이 우회한다. 내가 만든 떡갈비는 옛날 만화 고기의 작은 버전이었는데, 떡이 뼈다귀처럼 한쪽으로 튀어나와있고 고기는 떡을 감싸는 형태였다. 닭다리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보통은 떡을 기준으로 집어 들게 된다. 황인준도 마찬가지로 젓가락으로 떡을 푹 찔러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ㅡ후두둑, 툭.
"와우 고기낙하쇼."
"......."
이동혁 조용히 해라. 여주, 이게 무슨 일.... 나재민 너도 조용.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말했다.
경고의 말을 전하지 않은 것은 나의 불찰이었다. 고기의 갈라진 균열에 밀가루만 살짝 덧발라주면 어떻게든 붙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상하다? 황인준에게 휴지 두어 장을 뽑아 건네주며 말했다. 다른 거 먹어볼래? 이것만 이상한 걸 수도 있는데. 황인준은 볼까지 튄 잔해를 쓱 닦아내더니 읊조렸다.
"떡갈비로 스크램블을 만들었네."
"......."
"숟가락으로 퍼먹는 건가."
"그래도 맛은 있을 걸! 레시피대로 따라한 거야."
"남겨줘. 내일 아침으로 먹을게."
"...다 식을 텐데."
"저녁 약속 있어."
드르륵. 황인준이 일어나면서 의자가 끌렸다. 가볼게, 쿨하게 한 마디 남기고 외투를 입더니 나가버린다.
...잠깐.
"쟤 지금 먹기 싫어서 나간 거 맞지?"
"아하핫, 아닐 걸. 인준이 진짜 약속 있댔어. 나 룸메라서 알잖아."
"근데 먹기 싫은 것도 맞을 듯. 이거 속까지 익은 거 맞냐?"
"야. 오래 구웠거든?"
"겉은 타고 속은 그냥 생고기잖어."
"동혁아 왜 그래. 여주 너도 그만."
나재민이 양손으로 나와 이동혁의 눈앞을 가린다. 자 우리 아가들 심호흡 세 번씩 하자. 하나 두울 셋. 이제 됐지요? 손을 내리고 눈 치켜뜨고 불탄 내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어어 이게 아닌데, 오 초 다시! 라면서 진짜 오 초를 더 셌다. 그래, 이동혁 놀림은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나재민은 나를 진짜 '아가'로 생각하는 건지 손가락에 젓가락을 끼워주고 있었다. 딱 맞춰 끼워주고는 이동혁 손가락도 만지작거리며 숟가락을 쥐어준다.
"자 이제 먹자! 식겠어."
"그래 먹자. 떡갈비는... 잘 골라 먹어. 태우긴 했다. 안 익은 것도 빼고."
"익은 부분도 많아. 너도 빨리 먹어."
나재민의 말에 이동혁도 멋쩍게 밥을 퍼먹는다. 나재민이 숟가락으로 떡갈비를 퍼간다. 군데군데가 빨간데 동공지진을 일으키며 헤집어보는 게 좀 안쓰러웠다. 애써 익은 부분을 찾아 한입 베어문다.
"노력하면서까지 안 먹어도 돼 재민아."
"그건 아니야. 근데...,"
"응?"
"고기 간 안 했어?"
헉. 까먹었다. 기름 뿌리는 것도 까먹었던 터라 소금간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못했다. 찬장을 뒤져 소금과 참기름을 꺼내 종지에 부었다. 간은... 셀프란다.
"재민아."
"응."
깨달아버렸다. 요리란 얼마나 길고 힘든 고행의 연속인지. 왜 나재민이 부엌에 있는 나를 조화롭지 못하다고 여긴 건지. 가만히 있으라면 그냥 가만히 있고, 뭘 먹으라면 맛있게 먹으면 되는 거였다.
"앞으로 네 밥 맛있게 먹을게."
"좋은 생각이야."
나재민이 있는 한, 요리에 손댈 일은 없을 것 같다.
그 이후로도 나재민은 나를 혼자 요리하게 둘 수 없다며 진저리를 쳤다. 떡갈비 괜찮았다면서 격려해줄 때는 언제고. 부엌에 들어갈 때마다 얼굴에 잿빛이 싹 돌았다. 그래도 요리 낙오자에서 발전해 나재민의 요리를 돕는 조수가 되었는데, 하루에 식사만 세 끼를 먹으니 친해지는 건 단숨이었다. 서로 저장명도 바꿨다. 나는 나셰프님으로, 나재민은 김제자님으로.
나셰프는 요리뿐만 아니라 대학교 준비에서도 훌륭한 스승이 되어주었는데, 이를테면 새내기 잇템을 꾸리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옛말에 타산지석 있듯, 역방향의 도움도 도움이라고 칭한다면 말이다.
준비물 사는 거 도와준다 해서 따라갔을 때다. 체크카드 하나 챙겨서 주위에 있는 아트박스로 나섰다.
"이게 새학기 준비물이야?"
"귀엽지 않아?"
그야 귀엽긴 하다만. 나재민은 반려식물이라는 마리모를 추천해주고 있었다. 물에 동동 뜨는 날을 운수 대박인 날이래, 설득하는 모습을 보고 이마를 짚었다. 로또는 믿어도 마리모는 미덥지 못했다. 조용히 옆 섹션으로 넘어가 문구류를 탐색했다. 필기하려면 포스트잇이랑 삼색 볼펜은 기본으로 사둬야겠지. 집에 남아있는 볼펜을 생각하며 새 것을 살지 고민하는데 나재민이 저 멀리서 불렀다. 여주, 여주 와봐.
"이거 하나씩 살까?"
나재민 손에 들린 건 왕대가리 토끼 볼펜이었다. 끄트머리에 털이 북슬한 토끼 머리가 인형처럼 매달려 있는.
"필요할까?"
...절대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시험 기간에 힘들 텐데 귀여운 볼펜 쓰면서 스트레스 풀어야해."
나재민이 초롱초롱한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얼굴 옆으로 들고 있는 토끼랑 좀 닮은 것 같다. 토끼 눈에 별이 각각 세 개씩 박혀 있었는데, 매장 조명이 너무 환해서 그게 제일 똑같았다. 필수품만 살 거라고 말하려던 마음을 접고 대꾸했다.
"이건 귀 쪽이 좀 찌그러져 있는데? 여기 고양이도 있네."
"고양이보다 토끼가 더 귀여워."
"고양이가 더 귀엽거든."
"와 여주 뭘 모르네? 토끼가 백 배 귀여워."
"내가 뭘 모른다고? 이동혁한테 영통 걸어. 뭐가 더 나은지 물어보게."
.......
안 받는데? 나재민이 입을 삐죽였다.
"큼. 어쩔 수 없지. 쨌든 토끼가 더 나아."
"어?"
"아 아니, 고양이. 말 실수야."
"무의식적으로 토끼가 더 귀엽다고 생각했구나."
"절대 아니거든?"
"정말? 그럼 넌 고양이 사. 난 토끼 살게."
그렇게 얻은 수확은 왕대가리 토끼 앤 고양이 볼펜, 마리모 두 쌍, 커밋 포스트잇, 줄노트 한 권. 나재민에게 이상하게 휘둘린 것 같다는 찜찜함은 묻어두고, 나머지 필요한 것들은 개강 이후 사기로 결정했다.
개강보다 미리 찾아오는 건 새내기라면 무조건 가야 한다는 새내기배움터 날이었다. 돌고 돌아 추가 합격한 탓에 오리엔테이션도 참석하지 못했는데, 새터는 필참 행사라길래 부랴부랴 신청했었다. 처음으로 대학 동기들을 만나는 자리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떨렸다. 괜히 목소리도 한 톤 높여서 말해야 할 것 같구. 노파심에 짐을 챙기다보니 기내용캐리어까지 손을 뻗었는데, 이동혁이 기겁하며 너한테 필요한 건 딱 하나라면서 캡모자를 푹 눌러씌웠다.
"2박 3일인데 이것만 챙겨?"
"어."
"바디워시는?"
"친구꺼 빌려. 너 같은 애들 사백 명 있어."
그럼 텀블러는? 너 보부상이야? 가면 많이 돌아다닌다는데 나 물 많이 마시잖아. 그냥 몰래 빠져나가서 마시고 와. 속옷은? 야씨 왜 보여줄라 그래. 넣어둬 그건. 앗 그러게 응. 결국 나재민까지 합세해서 짐을 배낭 하나로 압축한 뒤에 올바른 새터 준비생이라고 칭찬받을 수 있었다.
"나 갔다올게."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나재민이 걱정 묻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쁜 선배들 천지삐까리니까 그런 놈들 있으면 웃으면서 먹금하라고. 삼수생이라 누가 말 안 걸어줄까 걱정하고 있는데 차라리 그런 게 걱정이면 살 만 하겠다.
"게임에 맛들리지 말고."
그거 다 독 된다. 게임 없는 술자리가 최고야. 이동혁이 읊조리고는 손을 흔들었다. 어엉 그래.
인준, 너는 인사 안 해? 나재민이 황인준 어깨에 기대면서 말했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티비 시청 중인 나재민, 이동혁, 황인준. 차례대로 인사를 건네니 황인준에게도 자연스레 순서가 돌아간 것처럼 느꼈나 보다. 황인준의 난감한 표정이 보였다. 어, 해야.... 거기까지만 듣고 현관문을 닫았다. 나재민 아니었으면 인사해야겠다는 생각도 안했을 거다.
초기의 목표를 되짚어 보자면, 좋은 관리자가 되려는 마음이 있었고, 그래서 하숙생들과 친해지자는 목표였다. 착각했던 거지, 친해지면 관리자의 위엄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나재민에게 관리자의 멋짐을 보여주기는커녕 오히려 휘둘리는 내 모습이었다. 관리자야, 나도 안 하면 편하거든! 게다가 오랫동안 살았던 애들이고, 김도영이 안 내쫓았으면 이상한 놈들은 아니라는 가정하에 관리자의 목표는 점점 흐릿해졌다. 대신 친해지자는 목표가 전도되어 일순위로 올라간 거다. 이동혁은 차치하고 나재민과는 사제 관계를 통해 친해졌지만... 황인준은 아니었다. 하숙집에서 지내온 2주가 길지는 않지만 짧은 것도 아니다. 아침 저녁으로 얼굴 보는데 못친해질 일이 있겠냐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거라고.
괜히 심란해졌다. ...내가 쟤한테 뭐 잘못 보인 거 있나?
모임 장소는 학교 정문. 누가 봐도 20살인 친구들이 꽃단장을 하고 모여있었다. 우리 단과대 하에 과만 6개라고 했나?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그중에서도 과 깃발이 높이 치솟아있는 곳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오...."
한껏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무리 안으로 들어섰지만, 아무도 안받아준다. ...무안해라. 이미 오티 때 제 무리들을 형성한 모양이었다. 새로운 얼굴이 오면 그래도 반가운 거 아닌가요. 대학교는 무리 생활이 심하지 않다던데 다들 새로운 환경에 대한 불안감이 심한건지 봤던 얼굴들한테만 반갑게 어깨동무를 해주고 있었다. 친구 없는 것보다, 말 먹혔다는 게 더 창피했다. 나 겉으로 보기에 두 살 차이나 보이나. 슬금슬금 무리의 바깥쪽으로 향하는데 누군가 어깨를 톡톡 쳐왔다.
"안녕하세요!"
중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친구였다. 광대를 뽈록이면서 웃고 있길래 따라서 살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쾌활하고 귀여운 사람이었다. 나한테 먼저 말 걸어줘서 호감도 100에서 시작했음도 한 건 했다. 내가 인사를 받자마자 자신을 소개했다. 마치 외워온 것처럼 엄청 유창했다. 이름은 최지연, 오티 때 못 본 얼굴이라서 인사했고 재수해서 21살이라고 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나는 말을 놓자고 제안하며 삼수생이란 걸 밝혔다. 동갑이면 상관 없는데 한 살이라도 많으면 많은 쪽에서 말 놓자고 하는 게 편하니까. 지연이 엄청 놀라더니 그럼 소개해줄 사람이 한 명 더 있다고 한 명을 끌고 왔다.
"인사해. 여기는 김여주 언니. 22살. 여기는 이제노, 나이는 똑같아!"
"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
살짝 족보를 부수는 느낌이 들어 이제노한테도 말을 놓자고 제안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전체적으로 순둥해보이는 인상이었지만 눈매나 턱선처럼 부위 끝이 날카로운 느낌이었다. 어색하게 실실 웃고 있는데 지연이 작게 박수를 치면서 말했다. 저기 학생회장님 온다. 깃발을 들고 있는 사람이 학생회장인 줄 알았는데 물으니 그 사람은 부회장이라고 했다. 들어보니 오티를 전부 학생회장이 맡아서 진행했다고 한다. 다들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기대치를 낮추고 왔는데 배우처럼 생긴 사람이 있어서 화들짝 놀랐다나. 사람에 가려서 잘 안보였는데, 블루투스 마이크를 들고 테스트하는 정황은 짐작이 갔다. 몇 번의 에코가 울리더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여러분. 학생회장 정재현입니다."
소란스럽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조용해지고 이목이 집중됐다. 잘 안 보이실 것 같으니까, 하면서 정문 옆에 있는 판판한 돌 하나에 올라간다.
"이제 잘 보이시죠?"
오. 왜 그렇게 다들 놀랐는지 알겠다. 나재민이랑 같이 연영과라고 해도 믿을 만한 얼굴이었다. 학생회장은 싱긋 웃더니 말을 이었다.
"새내기배움터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아시겠지만 2박 3일간 진행되는 행사이고, 미리 조퇴 신청은 받아두었지만 혹시 일찍 돌아가셔야 하는 분은 말씀해주세요. 그럼 행사 동안 함께 지낼 조 불러드릴게요."
1조 김현지, 박수현, 이제노, 이하윤, 전상혁, 최지연, 한승민. 철자순대로 불렀기에 내 이름이 나올 희망은 없다는 걸 알았지만, 2조로 넘어가는 학생회장의 말에 실망감이 커졌다. 그나마 친해진 애들인데 나만 빼고 떨어진 상황이었다. 황급히 지연, 제노와 번호를 교환하고 떠나보냈다. 이름이 불린 사람은 미리 버스에 탑승하라는 설명 때문이었다.
성비도 딱 반반으로 나누어 배정한 모양이었다. 우두커니 서서 내 이름이 나오길 기다리니 6조에 이름이 불렸다. 이름이 불리자마자 바로 버스 쪽으로 향했다. 제노 지연은 첫 번째 버스에 탔는데, 나는 두 번째 버스로 향해야 했다. 버스 좌석 위에 이름표가 놓여져 있었다. 내 자리는 앞 쪽이었다. 그 옆은..., 이름표를 짚어서 보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저 여기, 제 자리인 것 같아서...."
"아, 아아. 죄송합니다."
황급히 상황파악을 끝내고 내 자리인 안쪽으로 들어갔다. 내 옆자리는 이 친구였다. 박지성. 옆자리면 곧 통성명 할 텐데 이름표를 훔쳐본 기분이었다. 의례 하는 소개를 마치고 빠르게 말까지 놓았다. 22살이라고 말하니 헙, 오, 우와, 세 가지 반응이 나왔다. 어려워하는 것 같아 편하게 누나라고 부르라고 했다. 지성이는 천천히 놓겠다며 어색하게 웃었는데, 왠지 그 모습에 내가 흑심 품은 개저처럼 굴었던 건지 후회스러운 거다. 내가 새내기였고 내 옆자리 사람이 오빠라고 부르라고 말했으면... 으. 그냥 편하게 부르라고만 말할 걸.
둘 다 더 할 말이 없어서 머쓱하게 정면만 보는데 학생회장이라 했던 정재현이 버스에 올라탔다.
"여러분, 조별 편성표 단체 공지방에 올려드렸으니 확인해주세요!"
단톡방에 올라온 사진을 보니 한 조의 몸집이 거대했다. 선배들까지 새내기 수와 똑같이 조에 배정한 듯 했다. 선배 7명에 새내기 7명 총 14명이 한 조인 셈이었다. 그 밑에는 자잘한 주의 사항이 적혀 있었다. 사전에 차 멀미나 기타 사항을 고지해준 사람 빼고는 자리를 이름 순으로 배치했으니, 자리 변경은 절대 금물. 소외되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취지라고 적혀 있었다. 휴대폰을 켠 김에 쌓여 있는 알람을 확인하는데, 전부 하숙집 단톡에서 온 알람들이었다. 잘 갔냐고 묻는 질문들에 그렇다고 대답을 해주고 폰을 껐다. 빨리 동기들이랑 친해지는 게 더 중요했으니. 유유히 손가락 장난을 치고 있는 박지성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의 꿀팁, 스몰톡에는 통학 얘기가 좋은 소재가 된다.
"지성아. 너는 어디서 학교 다녀?"
"어... 저는 집에서 통학해."
아직 반말하라고 한 게 익숙지 않았는지 음절마다 군데군데 끊겼다. 뭔가 잘못된 반존대라는 건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얼마나 걸려?"
"한 시간 이십 분?"
"한 시간 이십 분? 너무 멀다. 기숙사는 신청해봤어?"
"으음 아뇨. 서울 사는 사람은 기숙사 신청 안 된대서 못했어요."
대학교와 집이 끝과 끝에 위치한다고 덧붙였다. 지하철은 40분 걸리는데 도어 투 도어로 하면 두 배의 시간이 걸린다고 하며 시무룩해졌다.
"통학하는 거 힘들겠다."
"자취하고 싶은데 엄마가 걱정해서.... 집에서 밥이나 잘 해먹을지 모르겠대요. 솔직히 저도 자신은 없어서 말도 못하구."
그리고 나는 내가 흑심 품은 개저라는 걸 반쯤은 인정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흑심 품은 건 맞고 개저는 아니니 반쪽짜리 인정이다. 순간 머릿속에서 이모가 했던 말이 지나쳐갔기 때문이다.
ㅡ 지금 집에 빈방 하나 있으니까 학교 가서 한 명 데려오면 월세 반은 너 줄게.
ㅡ 정말요?
ㅡ 속고만 살았나, 그럼 진짜지.
이모가 말하는 빈방은 2층에 남은 한 방이었다. 이동혁과 나재민, 황인준 모두 1층에서 살고 있고, 내 방 옆에 한 방이 비어 있었다. 자취야 울 엄마도 너 생존이나 잘 하라며 반대했으니 지성이 어머니가 반대하시는 게 이해 가지만, 하숙집이라면 밥도 (나재민이 해주니) 꼬박꼬박 나오고 안전도 (관리자인 내가 있으니) 좋았다. 심지어 같은 과 동기면 같이 전공 과제도 할 수 있고 얼마나 좋아.
"나 지금 쉐어하우스 살고 있는데 너도 들어올래?"
"에?"
"마침 방 하나 비거든."
"갑자기요?"
어엉... 나쁠 건 없어. 밥도 맛있고 청소도 따로 해주고 애들도 재밌고... 최대한 하숙집의 장점을 꺼내 말했다. 싫을 만한 것들은 철저히 입단속해가면서. 예를 들어 나재민의 주사라든가, 황인준의 까칠함이라든가, 이동혁의 놀림이라든가. 박지성은 생각해보겠다며 윗니로 입을 꾹꾹 눌렀다.
구태여 더 건드릴 필요 없을 것 같아 조용히 창밖 풍경을 바라보는데, 박지성이 팔꿈치를 조심스레 툭툭 쳤다.
"응?"
"...근데요, 별 다른 뜻은 없구"
"응."
"누나 사는 곳이면, 다 여자... 밖에 없는 거 아니에요?"
그러면 좀... 들어가기 그렇지 않나....
볼을 부풀리면서 말하니까 입이 붕어 모양이 된 게 보였다. 남을 놀리는 데에는 취미 없다고 생각했는데 괜히 여자 밖에 안 사는 쉐어하우스라고 장난 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왔다. 단번에 거절도 못 하고 고민해보겠다고 대답할 것 같았다. 대학에 가면 선배들이 새내기 몇 명을 꼭 놀려먹으려 한다던데, 그게 이런 마음에서 비롯되는구나 싶었다.
존나... 귀여웠다. 아까 반쯤 부정했던 말을 정정하기로 한다. 나는 흑심 품은 개저가 맞을 지도 몰랐다.
빨리 주말이 왔으면 좋겠어요
댓글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S2
첫댓글 지성이 와아아아압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1.05.06 18:23
아 새내기 찌송이 너무 귀여워ㅠㅠㅜ 우리학교 학생회장은 왜 정재현이 아닐까....연희동에 없어서 그런가??
흑심 저도 품으면 안될까요..... 아니 일단 쉐어하우스 빈방에 제가 먼저 입주를..
저 거실에서 자도 되니까 입주하겠습니다
너무너무너무 재밌어요 작가님 최고...
아ㅠㅠ 저도ㅠ 입주ㅠ할래요ㅠ제발요ㅠ
지성이 너무 귀여워ㅠㅠㅠㅠㅠㅠ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1.05.15 23:04
박지성 너무 귀여워요 ㅜㅜㅜㅜㅜㅜㅜ( ・ᴗ・̥̥̥ ) ㅜㅜ
지성이만 보면 나도 모르게 개저씨가 되는,,, 이건 지성이가귀여운 탓이라고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