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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인생" "사랑"의 저 '충만함'
크리슈나무르티 : 꺼지지 않는 촛불, ‘자기로부터의 혁명’을 위하여
-- “聖人”의 시대를 살면서, “내가 바뀌지 않으면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The strange thing was that you felt such a great sense of affection, not for anything or for anyone, but the fullness of what may be called love. The only thing that matters is to probe into the very depth of it, not with the silly little mind with its endless mutterings of thought, but with silence. Silence is the only means, or instrument, that can penetrate into something that escapes the mind which is so contaminated.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것은 애정의 지고지순한 느낌이었습니다. 그 뭔가 또는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불릴 그 충만함 자체였지요. 오로지 문제되는 것은 아주 깊숙이 그것을 파고드는 일입니다. 어리석고도 초라하게 마냥 재잘거리는 생각으로써가 아니라, 단지 고요로써 말입니다. 고요만이 유일한 수단 또는 도구입니다. 이다지도 오염된 마음이 마냥 도망다니기만 하는 그 무엇을 뚫고 들어가는 데에는 말이지요.
-- J Krishnamurti, Meeting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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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머리 20221005] "삶"의 '충만함' 그런 분위기에서의 "교육"
본래는 인도 크리슈나무르티 학교 아이들과 함께 있는 사진이 배경이었는데, 이제는 그 배경은 사라지고 본문만 남았군요.
이러나저라나 간에, "사랑"과 "고요"에 대한 말씀이라서 더 주절거리기도 뭣합니다. "자비"라고도 불리는 그 "사랑" 말씀이지요. 그저 "우리들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을 먼저 할 수밖에 없고요.
이다지도 오염된 채로 타락해 있는 이 내 '마음'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만 있어도, 엄청 참을성 있는 거겠지요? 다들 그런 자신의 실제 모습에서 '도망'치기만 하는 게, 우리들 일상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그런 걸 "인생"이라고 부르지요? 우리네 그런 삶에서, 저렇게 '사랑이라고 불릴' 충만함과 '지고지순'의 느낌을 지녀볼 수 있겠습니까? 상상으로나 가능하겠지만, 니나내나 그런 상상마저 잘 안 해보고 살지요?
그런 삶의 자세도 문제 아닌 건 아니지만, 아니, 오히려 그 때문에 저런 '존재의 고양된' 느낌 또는 충만함은 평생 단 한번 맛도 못 보고, 싸게싸게 살다 가는 거라는.. 좀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살다 가야지 말씀입니다. 내 마음 속에 저 "사랑" 한 조각 지니고 있기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설령 있다한들.. 그걸 '파고드는 일'은 또 완전히 별개의 문제지요? 그런 자세가 '산다는 게 이게 뭔가?' '꼭 이런 꼴로 살다 가야 하나?' '과연 사랑이라는 게 뭘까?' 하는 그런 의문의 연장선에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지구가 다 망한다고 해도, 아예 다음 세대마저 저런 건 가르치지도 않으니..
결국, 인간으로서 거의 본능이라고 할, 이 '생각하는 능력'을 문제 삼지 않으면, 두 평생 세 평생 더 살아봤자, '인생은 그저 낡은 잡의 표지처럼' 너덜너덜 추접허접할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러면 그럴수록 '세상'은 더 망가지는 거지요? 딱 그런 꼴로 살아왔으니, 오늘날 "대멸종"을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고 말씀입니다. "대멸종"이나마나 처음부터 "고해"였으니까요.
글쎄요, 인간들이 다들 "고해"로 살아왔기에 결국 인류 "대멸종"을 맞이하게 된 걸까요? 얼토당토 않는 비약입니까? 또한 "대멸종" 뒤에는 몽주리, 너나없이 극락이나 천국에 가 있을까요? 우리 아들 딸 손주 다 함께 말이지요? "대멸종" 앞에서 '선정'이니 '삼매'니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더구나 그게 다 '말뿐인' 꼴이라면요. "고요" 또한..
우리들 저마다 '한 세상 다하여 돌아가는 길' 그 '저무는 하늘가에 노을'이나마 붉게 물들어 '충만'할 수 있으려는지요? 평생을 다하여 '나'에 쫓기기만 하는 꼴에, "사랑"의 그 '충만함'은, 그런 "교육"은 아주 먼 나라, '갈 수 없는 나라' 얘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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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끄적거려놓은 건 몇 년 사이의 ‘사족’인데요, 그저 내다버리지 못 하는 ‘집착’ 때문에 달아놓은 것뿐입니다. ‘이딴 걸 왜 못 버리냐?’ 하시겠지만, 혹시나 관심 있으신 분, 흘낏, 읽어라도 보시라고 그대로 달아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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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5] 아이들 가르치는 '보람'도 없다는데
성자와 거지로 가난한 나라 인도, 그래도 그 아이들에게 저런 말씀을 들려주고 계신 모습 · 본문의 저런 사진을 볼 때면, 도대체 앞만 보고 달리라고 채찍질을 당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아이들은 시나브로 어떤 인생을 살게 될 것이며, 나아가서 한반도 이 나라 꼴은 결국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런 생각도 들곤 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인도 애들은 가난하다고 해도 진짜 행복하게 산다는 거지요? “학생들이 아니라 선생들을 먼저 제대로 가르쳐야 된다”는 말씀도 자주 하십니다만, 과연 오늘날 이 나라 ‘선생님’들은 수업 시간 돌아서서 칠판에 가르칠 내용을 쓰면서도 속으로, ‘야, 이 쌔끼들아, 너거들이 잘 되면 이 나라가 거들나는 거다’는 생각이 일어나곤 한다면, 이제 진짜로 막장 파장 뒷장 장외까지 볼장 다 보는 거지요?
‘가르친다는 보람은 단 하나도 없다’는 말도 들린 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물심양면 공히 뭐 하나 나아지는 꼴은 전혀 안 보입니다. 소위 초·중·고 ‘선생님’들이 빨리빨리 명예퇴직 해버리는 것도 어떤 세태로 된 것 아닙니까? 철밥통 대학교수들은 빼고요. 교수라는 인간들에게 ‘보람’은 문제가 아닌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에, 그리고 인간이 되어가는 모습에 뿌듯해야 말이지요. 교육부를 위시해서 저 수많은 교육 관련 시민단체들까지 없는 게 없을 정도인데도, 왜 정작 교육은 이다지 비틀거리기만 할 뿐이겠습니까?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대한민국 교육은 ‘망하기 5분 전’이라고 한다지요? ‘5 분 지난’ 나라도 있다니까요. 그 ‘5 분 무대’에 오른 나라들은 세상에서 경제적으로 수위에 드는 나라들 아닙니까! 반드시 “좀 살만하면 다 타락”할 수밖에 없는 일일까요? 여기서도 ‘낙타’와 ‘바늘구멍’일 수밖에 없는 걸까요?
“요새 젊은 것들 아주 못 쓰겠다”는 말은, 수 천 년 전 저 이집트 미이라 무덤 어디에도 씌여 있다던가, 그러지요? 그래도 모름지기 ‘인간’을 길러내야 하겠습니다. ‘선생님’이 되겠다는 인간들부터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 그 말씀이지요. 그 역시 오늘날의 ‘종교’로써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입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유치원 세워놓고 가르쳐온 것 역시 겨우 요모냥요꼴이지 않습니까! 궁극적으로는 교육으로 ‘사랑’이라고 불릴만한 그 무엇을 찾아내는 일에는 이 세상 그 어떤 수단이나 도구로도 안 된다는 말씀! ‘사랑’이란 오로지 ‘고요’함 속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것일 뿐이라는 말씀! 그래서 ‘명상’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겠지요? 거기에 ‘명상’에는 ‘법’이 있을 수도 없습니다. ‘법’이라는 게 바로 저 ‘마냥 재잘거리는 생각’에서 나오는 것 아닙니까! 모든 종교와 또 그 유사한 조직들은, 여기서도 또 각자 교활한 능력을 발휘해서는 ‘사람’들을 자기네 조직의 수단과 도구로 낚아 버립니다.
본문의 ‘사랑’이라는 것이 ‘득도’니 ‘견성’이니 ‘확연대오’니 ‘대오각성’이니 하는 용어가 가리키는 ‘그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그 ‘길 없는 길’이 ‘고요’이며 그 ‘문 없는 큰 길’이 바로 ‘고요’다 그런 말씀이겠지만, 그러한 지적인 진술들에 무슨 의미가 있을 것 같지가 않습니다. 지적으로 보자면 바로 위의 진술만 해도 상당한 차원의 언급에 해당하겠지요. 그러나 ‘종교’란 지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경지이며, 그러면서도 또한 반드시 발을 땅에 디디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지요. 지금 사는 게 아주 죽을 맛인데, 나중에 극락이고 천당이고 가면 뭐하겠습니까? 그리고 극락이니 천당이니, 그런 게 진짜로 있기나 하단 말이겠습니까? 더구나 ‘생각’의 속임수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말입니다.
배우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뭔지부터 가르쳐나 줘야 풀든지 말든지 알아서 할 거 아닙니까! 그래도 그 중에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아이들이 나오기도 하겠지요. 그저 문제가 뭔지도 모르는 채로, 지금 되어 있는 이대로 욕망과 쾌락을 추구하면서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가다가, 문득 나타난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으라고 가르친단 말입니까? 해방 이후만 본다고 해도, 해도해도 겨우 이거뿐이라면 더 망하기만 할 뿐이라면, 뭔가 근본적으로 검토하고 바꿔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왜 이 잘난 ‘촛불혁명’을 일으키고도, 아이들을 ‘인간’으로 ‘사람’으로 키울 씨도 하나 못 뿌린단 말이겠습니까? 아이들을 못 키우면 사회는 망하는 거 아닙니까? 저렇게 ‘고요’부터 가르쳐야지요. 그런데도 왜 그것부터 고치려고 안 하는 걸까요?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다고요? 설령 나서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오히려 그를 조져버리겠다고요?
세상이라는 것은 꼭 교육 받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소위 ‘아재’들까지 갈등을 극에 달하도록 몰아가고들 있습니다. ‘선생님’들 역시 갈등 속에서 살아요. 그러니 끝내는 꼭 나라 사이의 전쟁이 아니라도, 서로 죽이고 죽고 하는 거지요. 그러기에 아이들을 ‘세상 닮아라’ 하고 가르칠 일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거 아니라면 거창하게 왜 "교육"이라는 간판 달고 채찍질을 일삼는단 말입니까? 역사적으로 꼭 그렇게 굴러왔다고요? 본래 ‘역사’라는 것이 ‘발전’하는 게 아니겠습니다만, 혹시 그게 ‘종교’와 마찬가지로 본디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뿐인 걸까요? 그리고 ‘역사의 제자리’라면 그게 무엇일까요? 질문이 그렇게 나와버렸습니다만, 과연 올바른 질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설마 무리를 뛰어넘자는 게 ‘역사’라는 것의 의미일까요? 앞으로 살아갈 인간들의 행적도 지금까지 살아온 기록 그대로라면, 역사를 들먹이는 이유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이겠습니까? ‘되풀이’ 안 하기 위해서라고요? ‘되풀이’ 안 해서 ‘5 분 전’에 도달했다고요?
물론 세상은 진리에 의해서 굴러가는 게 아닙니다만, 그래도 과도한 ‘힘’의 발광이 보일라치면 그런 걸 견제라도 하게 되는 것이 그나마 막장사회란 소리를 피할 수 있는 조건 아니겠습니까? ‘촛불시민’이라고 해도, 그 가운데서도 좀 ‘생각’ 있는 사람들이 움직여야겠지요. 그런데 거기서 역시 ‘나’ 위주라면 그건 움직이나마나 아니겠습니까? 꼭 ‘자기 위주’라면 뭐하려 ‘움직이라’고 장려한단 말이겠습니까? 가만히 놔둬도 저들끼리 물고 뜯고 할 텐데요. 그런 것들부터 차근차근 해결되고 사라져서 내실이 다져지지 않는다면, ‘평화’를 내세우면서 북한에 접근하다고 해도, 그게 과연 그 얼마만한 실속이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여기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 아름다운 모습을 북한 사람들이 더 많이 지니고 있을 것이고, 경찰 노릇하겠다는 국제 무력에 진짜로 ‘자존심’ 꿋꿋하게 지켜온 그 사람들에게, 우리는 과연 무엇을 내세우려고 하는 걸까요?
‘또 말이 나른다’고 뭐라실까봐 무섭습니다만, 요점은 이런 뜻이지요? “‘사랑’을 탐구하는 데에는 ‘고요’가 그 도구다.” 그렇게 혹시 소위 저 ‘견성’을 이루었다고 해도, 수천 년 수만 년 축적된 ‘자기 자신의 폐단’은, 곧 ‘인간으로서 적폐’는 ‘고요’ 속에서 하나하다 또렷하게 드러날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슬금슬금 다 보이는데 스스로 또 속이고는 그냥 지나칠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하루하루 인간이라는 게 점점 더 맑아져 가겠지요? 오로지 딱 그거 하나만이 진짜 저 ‘종교적’인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게 자기 자신이 정말로 ‘종교적으로 살아가느냐 아니냐?’는 자기 스스로 말고 또 누가 더 잘 알겠습니까? ‘견성’에는 ‘성불’이라는 말이 따라 다니곤 하지만, 과연 다른 어느 누가 알아주고 말고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오로지 개인 스스로에게 달려 있는 문제일 뿐입니다. 그런 걸 ‘조직화’ 할 수 있단 말이겠습니까? 억지로 ‘조직화’해서는 그것마저 타락시키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종교적인 심성’이란 오로지 ‘개인적인 일’일 뿐이겠습니다. 세상 어느 누구의 인정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런 걸 조직화해서 힘을 발휘해보겠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며, 다만 그 사랑으로 묵묵히 걸어갈 수 있을 뿐이겠습니다. 혹시 어쩔 수 없이 ‘조직’에 몸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안 벗어날 수가 없게 되겠지요. 여기서 대표적으로 평생 입어오던 옷 벗어서 채곡채곡 개서 반납하고 떠나면서, ‘어느 겨울날 따뜻한 바위 곁에서 졸다 죽고 싶다’시던 그 분 생각도 나는 것이고 말씀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 조직 종교들은, 소위 ‘재가자’들이 나서지 않으면 안 될 만큼 극도로 타락해 있습니다. 뭔가를 일부러 들춰내지 않더라도, ‘뉴스’로 떠들썩한 것들이 어디 한두 가지입니까? 속세나 산중이나 매양 그게 그거라면, 왜 거기에 그냥 몸담고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이시랴’ 한다고 제 구태여 눌러앉아 있겠습니까? 게다가 구태여 떠나고서 그리워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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