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다루고자 하는 이야기는 이미 ONSIDE를 통해 여러 번 언급한 내용이다. 하지만 다시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다. 한국 여자축구는 이제 미래를 바라봐야 한다. 세대 교체 과정이 결코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현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들부터 차분히 해내야 한다.
여자 국가대표팀의 월드컵 실패는 많은 교훈을 남겼다
위기의 여자축구
한국 여자축구는 2023년이 그리 유쾌하지 않다. 주요 국제대회에서 연달아 실패를 맛봤기 때문이다. 시작은 올해 여름 호주/뉴질랜드에서 동시 개최된 ‘2023 국제축구연맹(FIFA) 여자 월드컵’이다. 콜린 벨 감독이 이끄는 여자 국가대표팀은 월드컵 출격을 앞두고 8강 이상을 목표로 잡았다. ONSIDE가 7월 여자 월드컵 대표팀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 총 31명 중 절반인 16명이 월드컵에서의 목표를 ‘8강’, 12명이 ‘4강 이상’을 답했다.
그만큼 자신감이 컸다. 2019년 벨 감독이 한국에 온 이후로 여자 국가대표팀의 경기력은 상승했다. 고강도를 중시하는 벨 감독의 스타일에 선수들이 자연스럽게 녹아 들면서 긍정적인 흐름으로 나타났다. 월드컵을 앞두고 가진 여러 경기에서도 좋은 성과를 거뒀다. 인도에서 열린 2022 AFC 여자 아시안컵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준우승을 차지했고 본선 출격 직전에 열린 잠비아, 아이티와의 친선전에서도 승리했다.
하지만 막상 실전에 들어가니 기대와 다른 모습이었다. 한국은 콜롬비아와의 첫 경기에서 0-2로 완패했고 이어진 모로코전에서도 0-1로 지며 16강 진출마저 어렵게 됐다. 독일과의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는 1-1로 비겼지만 목표인 8강까지 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예상보다 빠르게 한국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월드컵에서의 부진을 씻기 위해 출격한 ‘제19회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도 결과는 좋지 못했다. 미얀마, 필리핀, 홍콩을 연달아 격파하며 토너먼트에 올랐지만 북한과의 8강전에서 1-4로 지며 탈락했다. 당시 북한전에서는 심판 관련 이슈가 있긴 했지만 흐름을 가져오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운도 따르지 않았다. 메달을 노렸던 한국으로서는 이래저래 아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벨 감독은 여러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시스템 개혁을 강조했다. 한국도 다른 축구 선진국처럼 유소년 시스템부터 전반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결과를 내지 못한 상황에서 시스템 개혁을 언급한 것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이제는 진짜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벨 감독이 이야기한 것처럼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꿔야 한다.
현재 여자 국가대표팀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이른바 ‘황금세대’들은 상당수가 선수 생활의 종반을 달리고 있다. 여전히 절정의 기량을 가지고 있는 선수들이 많지만 이를 그라운드 위에서 보여줄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중이다. 여자축구의 세대 교체는 과거부터 지속적으로 나온 이야기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지소연, 조소현, 이민아 등 황금세대를 대체할 만한 어린 선수들이 잘 나오지 않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 ‘골 때리는 그녀들’이 인기를 얻으면서 축구를 즐기는 여성들은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중 대부분은 취미로 즐기는 생활축구인들이다. 다시 말해 엘리트가 아니라는 뜻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엘리트 여자축구 유소년 선수들은 좀처럼 수가 늘어나지 않고 있다. 생활축구 인구가 많다면 이들 중 엘리트로 흡수되는 사례도 많아져야 한다. 생활축구를 하면서 축구에 대한 흥미를 가졌고 기량도 좋다면 제도권 안으로 들어와 꾸준히 이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저변은 그런 식으로 넓혀져야 하는데 사실 쉽지 않다.
한일교류전에 나선 여자 U-13 대표팀. 잘된 점도 있었지만 격차도 보였다
흔들리는 뿌리
무엇보다 제도권인 엘리트 여자 유소년 축구팀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 지소연의 모교로 알려진 한양여대 축구부를 비롯해 수많은 초중고팀, 대학팀들이 소리 소문 없이 해체됐다. 이제는 각 지역에 유소년 팀이 하나 정도 남아있는 것도 다행인 상황이다. 그것도 없는 지역이 정말 많다. 그러다 보니 여자 유소년 선수들은 뛰고 싶어도 뛸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 황인선 전 여자 U-20 대표팀 감독은 “생활체육 인구는 늘어나고 있지만 엘리트는 상황이 다르다. (팀이 없다 보니) 남자 축구팀에서 남자 선수들과 뛰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연령대에 맞는 체계적인 교육을 하기 힘든 여건이다 보니 유소년 레벨로 내려갈수록 기량 차이가 두드러지기도 한다. ONSIDE는 10월 18일부터 19일까지 파주 축구국가대표팀 트레이닝 센터(NFC)에서 열린 여자 U-13 대표팀의 한일교류전 현장을 찾았다. 한일교류전에 나서는 20명의 멤버들은 골든에이지 훈련에 참가한 30명의 선수를 대상으로 대한축구협회(KFA) 전임지도자가 선발한다.
여자 U-13 대표팀은 일본과의 두 차례 경기에서 모두 패배했다. 1차전은 1-3으로 패했다. 후반 26분에 강지윤(경남진주여중)이 골을 넣었다. 2차전은 1-5로 크게 졌다. 대표팀은 전반 3분 권효리(경남진주여중)의 선제골로 앞서갔지만 이후 연달아 일본에 실점을 허용하며 패했다. 동일한 연령대 일본 선수들과 비교해 몇 가지 차이점이 보였다. 한국 선수들은 공격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어 잘 되지 않아도 끊임없이 두드리려는 집념이 돋보였다. 하지만 일본 선수들과 1대1로 붙게 되면 밀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김은정 KFA 전임지도자(여자 U-16 대표팀 감독)는 한일교류전이 끝난 후 “짧은 기간이었지만 공격, 수비적인 요소들을 훈련했고 선수들이 훈련한 것을 경기장에서 만들어내려고 노력했다. 모여서 훈련한 기간이 길지 않음에도 선수들이 집중력을 가지고 잘 임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 더 많았다. 김은정 감독은 경기 후 일본 선수들과 웃고 어울리는 한국 선수들을 바라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애들이 웃고 있기는 하지만 (일본과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여자축구 지도자 입장에서는 마음이 아픈 경기”라고 말했다.
일본은 남자, 여자 모두 한국보다 인프라가 두텁다. 2022년 기준 한국 여자축구 전체(U-12~성인) 등록 수는 약 1,400여 명이다. 반면 일본은 80만 명이 넘어간다. 선수가 많은 만큼 팀 수도 압도적이다. 김은정 감독은 “일본은 선수 수가 많고 중학교 레벨에서도 많은 팀이 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팀을 만들려고 노력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입장에서는 부러울 수밖에 없다. 골든에이지를 할 때도 우리는 100명이라는 한정된 자원 안에서 30명을 선발해야 한다. 한국과 일본의 환경이 솔직히 너무 많이 차이 난다”고 했다.
한일교류전을 현장에서 지켜본 황인선 전 감독은 1대1 기량에서 차이가 나는 것 같다는 ONSIDE의 질문에 “나도 과거에 한일교류전을 지도했다. (1대1 기량 차이는) 옛날부터 나온 이야기다. 그 때보다 우리 여자 유소년 선수들이 피지컬이나 힘, 스피드는 좋지만 축구는 그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개인 기술이 떨어지면 감독이 아무리 좋은 전략을 짠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 우리 아이들도 점점 좋아지고는 있지만 아직 공간 인지 능력은 부족하다. 볼을 잡기 전 혹은 볼을 잡고 난 후에도 나를 상대하는 한 사람밖에 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일본은 공간 인지 능력이 좋아서 알아서 착착 움직이고 미리 볼을 받을 수 있는 위치로 찾아간다. 그러니까 우리 입장에서는 볼을 뺏는 것이 쉽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한일교류전에 나서는 여자 유소년 선수들은 여자 연령별 대표팀을 거쳐 미래에는 여자 국가대표팀을 이끌 자원들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현 황금세대의 뒤를 단단히 받쳐줄 수 있을 정도로 기량이 성장해야 한다. 여자 연령별 대표팀은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과를 거둬야 한다. 한국은 2010년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열린 FIFA U-17 여자 월드컵 우승, 같은 해 독일에서 열린 FIFA U-20 여자 월드컵에서 3위라는 성과를 올렸지만 그 이후에는 여자 연령별 대회에서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다.
황인선 전 감독은 “13년 전에 연령별 대회에서 성적을 내면서 여자축구 붐이 일었다. 그 때만 해도 여자 중고등학교 팀이 약 20개까지 늘어났었다. 초등학교 팀도 많이 늘어났었는데 당시의 좋은 흐름을 지금까지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고 밝혔다.
여학생 축구교실은 꾸준히 엘리트로 가는 선수들을 배출하고 있다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
현재의 부진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좀더 넓은 시선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다. 결국에는 환경 개선이다. 옛날부터 반복해 나온 이야기이지만 다시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다. 축구에 흥미를 가지고 엘리트로 들어온 여자 어린이들이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이를 직업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할 직장이 매력적이어야 한다.
일반인들도 직장을 선택할 때 연봉이나 근무 환경 등을 따져본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여자 선수들도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축구를 직업으로 삼는 이들이 늘어나야 꿈을 키우는 유소년 선수들도 많아진다. 부모님 입장에서 내 딸이 성장해 갈 팀이 매력적인 직장이 아니라면 계속 축구 선수로 키우는 것이 망설여질 수밖에 없다. 윗물의 질이 좋아야 아랫물도 좋아진다.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할 수 있는 것부터 해야 한다. KFA도 조금 더 나은 여자축구 환경을 구축하기 위한 여러가지 노력들을 하고 있다. 한국여자축구연맹과 함께 올해 본격적으로 도입한 WK리그 클럽 라이선스 제도가 대표적이다. 리그 참가팀들이 주최 측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기준 및 규정을 충족해야 대회 참가가 가능하도록 만든 일종의 인증제다. 물론 클럽 수가 8개뿐인 상황에서 조건 미충족 팀의 리그 참가 제한을 요구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KFA나 연맹도 이 부분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최대한 클럽들과 호흡을 맞춰 제도 정착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무엇보다 라이선스 자체가 없던 WK리그에 라이선스를 도입한 것은 소기의 성과다. 클럽들이 라이선스 충족을 위한 노력을 지속할 수 있도록 꾸준히 독려하고 지원하는 것도 KFA와 연맹이 해야 할 일이다.
무엇보다 아시아축구연맹(AFC)이 2024년부터 AFC 여자 챔피언스리그의 본격 출범을 공식화했고, 이에 앞서 파일럿 대회로 올해 11월 AFC 여자 챔피언십 예선을 개최한다. 이 대회는 아시아 주요 8개국 여자축구리그의 1위 팀들이 참가하는데 한국은 인천현대제철이 나선다. 2024/25시즌이 AFC 여자 챔피언스리그의 원년이고 2028/29시즌에는 클럽 라이선스 취득이 필수여야 한다. 적어도 2027년까지는 클럽 라이선스를 모든 클럽이 취득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자격 요건은 스포츠, 기반시설, 인사와 행정, 법률, 재무 등 총 다섯 가지 카테고리다. 잘 정착한다면 팀과 리그의 질도 올라가고 선수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내용은 ONSIDE 7월호 ISSUE 코너 참고)
또 하나는 여학생 축구교실이다. WK리그 클럽 라이선스가 선수들이 가고 싶은 직장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라면 여학생 축구교실은 뿌리를 튼튼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2009년부터 시작된 여학생 축구교실은 여학생들이 부담 없이 축구를 접하면서 흥미를 갖게 하고, 이 흥미가 엘리트 진입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지난 해의 경우 서울에서 6개소, 경기에서 15개소, 광주에서 2개소, 대구에서 4개소 등 총 50개소에서 여학생 축구교실이 열렸다. 올해는 총 49개소에서 진행 중이다. 기초와 재미 위주의 교육으로 여학생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더 주목해야 할 점은 여학생 축구교실에 참가했던 인원 중 엘리트 축구부로 진학하는 인원이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2020년의 경우 25명이, 2021년과 2022년은 각각 20명이 엘리트 축구부로 진학해 본격적인 선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크게 두드러지는 숫자는 아니라고 해도 이런 식으로 엘리트로 가려는 인원이 꾸준히 나오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교육청과 함께 하는 Let’s Play 축구교실과 공차소서(공을 차자 소녀들아 서울에서) 프로그램도 좋은 반응이 나타나고 있다.
물밑에서 하는 노력들이 당장 큰 성과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저변이 넓어지면 여자 연령별 대표팀, 국가대표팀의 경쟁력도 향상된다. 황보관 KFA 기술본부장은 “선수 숫자를 늘리는 것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골든에이지 프로그램 안에서 여자축구 기술 발전을 위해 성인 레벨에서 요구하는 전술적인 이해도, 위닝 멘탈리티 등이 반영돼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국내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이뤄져야 하지만 국제화 시대에 발 맞춰 케이시 유진 페어와 같은 선수들을 발굴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 이 글은 KFA 기술리포트&매거진 ONSIDE 11월호 ‘INTERVIEW’ 코너에 실린 기사입니다.
글=안기희
사진=대한축구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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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풋볼뉴스(Football News) 원문보기 글쓴이: 블루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