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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른쪽에만 석물들이 있고 왼쪽은 안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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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의 곡장 위에서 본 홍릉(오른쪽이 휭하다) |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양의 서쪽에 위치한 조선왕릉 중에 5기의 왕과 왕비의 능을 일러 서오릉이라 부른다.
그 능의 주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가 갖가지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어
조선 왕가의 역사를 엿볼수 있는 좋은 공부자료이기도 하다.
그런데 왕릉하면 큰 봉분에 멋지고 큰 석물이 있고,
일반묘와는 달리 능의 옆과 뒤로 담장을 치고
능의 앞에는 문인석 무인석 그리고 옆으로는 석양 석호가 호위하며,
가운데 앞으로는 장명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능의 아래에는 정자각(丁자모양의 집)이 있고,
정자각의 앞으로는 넙적하고 납작한 돌 있어
신과 임금이 걸어간다는 신도와 왕도가 있어,
언듯 보면 대부분 비슷 비슷해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대체적인 모습만 보았을 때 보이지 않는 다양한 모습들이 보이고,
어느 하나 똑 같이 생긴 능은 하나도 없다.
이곳 서오릉에 모셔진 조선의 왕과 왕비의 능들도 다양해서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오늘 보여주는 홍릉은 정성왕후 서씨의 능으로,
정성왕휴는 조선조 최고로 장수한 영조의 원비로
30세에 세자빈이 되었다가 66세까지 살았던 왕비다.
그런데 그녀가 돌아가자 영조는 이곳 서오릉에 정성왕후의 능을 정하고
능을 조성하면서 후일 자신이 들어갈 자리로
능의 아래에서 보았을 때 왼쪽자리를 자신의 자리라고 점지하고 능을 조성하였다.
그래서 곡장도 미리 넓게 둘렀으며 석물들도 왼쪽을 비워둔채 세웠던 것이다.
자신이 들어오면 반듯하게 균형이 되도록 미리 배치했던 것이다.
그런데, 영조의 뒤를 이은 왕은 영조의 손자인 정조로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인 영조가 승하하자 할아버지가 점찍었던 이곳
홍릉에 장지를 정하지 않고 동구릉의 원릉에 영조의 능을 정하여 능을 만들었다.
그리고 영조의 원비였던 정성왕후의 뒤를 이어 계비가 된
정순왕후와 나란히 묻힐 수 있도록 쌍릉을 조성하여,
영조는 정성왕후와는 영원히 만날 수 없게 하고 말았다.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써
자신의 할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아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그 이유는 여러가지로 해석하고 있지만,
자신이 왕좌에 있으면서 유언으로 손자에게 부탁했건만,
영조는 자신의 원비인 정성왕후의 옆에 묻히지 못하고
정성왕후가 묻혀있는 이곳 홍릉에서 보았을 때,
한양의 반대편인 구리 동구릉으로 가서 묻히게 되었다.
그런 연유로 자신의 자리라고 철썩같이 믿고 남겨둔
정성왕후가 묻힌 홍릉의 좌측은 텅 비어있는 채로 영원히 있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살아서는 그 무엇이든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나자, 자신의 손자마저도 쉽게 유언을 따르지 않고 말았다.
참으로 하루 아침에 권력이 변하고 마는 것이
권력의 무상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자신이 가장 믿었던 친손자이지만
손자가 왕위에 오르자 모든 것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손자의 뜻대로 되고 말았다.
하물며 아무리 철썩 같이 믿고 승계해준 들 권력의 주인이 변하면,
바뀐 권좌의 주인은 언제 자신을 배반할 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능의 위에 올라서 아래로 내려다 보니 정성왕후의 좌측 빈자리가 더욱 넓고 커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