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휼식품 (감자)
평양 칠성문 밖 빈민굴의 여인들은 칠성문 밖에 있는 중국인의 채마 밭에 감자며 배추를 도둑질하러, 밤에 바구니를 가지고 간다.
복녀도 감잣개나 잘 도둑질하여 왔다.
어떤 날 밤, 그는 감자를 한 바구니 잘 도둑질하여가지고, 이젠 돌아오려고 일어설 때에, 그의 뒤에 시꺼먼 그림자가 서서 그를 꽉 붙들었다. 보니, 그것은 그 밭의 주인인 중국인 왕 서방이었었다.
복녀는 말도 못하고 멀찐멀찐 발 아래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집에 가.”
왕 서방은 이렇게 말하였다.
“가재믄 가디. 훤, 것두 못 갈까.”
복녀는 엉덩이를 한번 홱 두른 뒤에, 머리를 젖기고 바구니를 저으면서 왕 서방을 따라갔다.
한 시간쯤 뒤에 그는 왕 서방의 집에서 나왔다. 그가 밭고랑에서 길로 들어서려 할 때에, 문득 뒤에서 누가 그를 찾았다.
“복네 아니야?”
복녀는 홱 돌아서보았다. 거기는 자기 곁집 여편네가 바구니를 끼고, 어두운 밭고랑을 더듬더듬 나오고 있었다.
“형님이댔쉐까? 형님두 들어갔댔쉐까?”
“님자두 들어갔댔나?”
“형님은 뉘 집에?”
“나? 눅(陸) 서방네 집에. 님자는?”
“난 왕 서방네…. 형님 얼마 받았소?”
“눅 서방네 그 깍쟁이 놈, 배추 세 페기….”
“난 삼원 받았디.”
복녀는 자랑스러운 듯이 대답하였다.
십 분쯤 뒤에 그는 자기 남편과, 그 앞에 돈 삼원을 내어놓은 뒤에, 아까 그 왕 서방의 이야기를 하면서 웃고 있었다.
그 뒤부터 왕 서방은 무시로 복녀를 찾아왔다.
'감자'는 1925년 김동인(金東仁)이 지은 단편소설로 환경적 요인이 인간 내면의 도덕적 본질을 타락시킨다는 자연주의적인 색채가 잘 드러난 작품이다.
주인공 복녀는 가난하지만 정직한 농사꾼 집안의 딸로 나름대로의 도덕심을 가진 여인이다.
그녀는 15살이 되던 해에 80원이라는 돈에 팔려 20년이나 연상인 무능력한 홀아비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타락해가는 복녀의 일생을 시종 냉엄하게 조명하고 있다. 특히 말미에서 왕서방에게 살해당한 복녀의 시체를 놓고 왕서방과 복녀의 남편 사이의 금전거래 장면을 부각함으로써 비정한 인심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소설에서 '감자'는 가난하고 어려운 삶과 생존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감자는 생존의 먹거리로 그 가치를 인정 받고 있다.
감자의 원산지는 페루 남부, 볼리비아 북서부 지역의 안데스 고산지대로, 기원전 8,000~5,000년 경 재배가 시작되었다고 추정한다.
16세기 유럽에 전파되자 처음에는 성경에도 나오지 않는 식량으로 시체를 땅에 묻듯이 파종하여 울퉁불퉁 괴상한 모양으로 새까만 흙을 뒤집어쓴 채 땅속에서 나온다 하여, 한때 감자를 ‘악마의 식량’으로 지칭하며 감자 먹는 행위를 죄악으로 간주하였고, 또 감자를 먹으면 나병에 걸린다는 소문이 만연하여 감자를 기피했다고 한다.
17세기 말 러시아에서는 기근을 막기 위해 황제가 각 지방에 감자를 재배하라고 칙령을 내렸으나 사람들은 굶어 죽을지언정 무섭게 생긴 뿌리식물을 먹으려 들지 않았다.
일부 지역에서는 감자를 먹으라는 정부의 방침에 반발해 '감자의 반란'이라 불리는 폭동까지 일어났다고 한다.
그러다가 처음에 말사료로 제공하다 점차식량으로 보급되어 먹기 시작한 1750년 이후부터 기아가 사라졌다.
진화론의 창시자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은 1835년 칠레에서 가장 큰 섬인 칠로에 섬(Chiloé)에서 감자를 채집하여 영국으로 보낸 바 있으며, 감자를 “6개월 이상 비가 내리지 않는 메마른 산이나 습기가 많은 섬의 숲에서 똑같이 자란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얼마나 흥미로운 대상인가?” 라 하고, 독일의 문호 괴테는 '신이 내린 위대한 축복'이라고 찬양했다.
또한, 프랑스혁명이 발생할 무렵, 사치의 대명사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 부부는 궁 안에 감자를 직접 경작하고, 감자꽃으로 몸을 장식하면서까지 감자를 보급하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미국 스미소니언 연구소의 헨리 홉하우스(Henry Hobhouse)는 감자를 인류를 기아에서 구하고 인류 역사를 바꿔놓은 5대작물 중의 하나로 정의했다.
우리나라에서도 감자는 헐벗고 굶주린 민초들의 고난과 애환이 서린 구휼식량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감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경로는
조선 순조 24년에(1824년) 명천의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북쪽에서 종자를 가지고 왔다는 설과 청나라 사람이 인삼을 캐러 왔다가 인삼밭에 심어 놓았던 것이 전파되었다는 설이『오주연문장전산고』에 기록되어있다.
또한, 김창한이 쓴『원저보』라는 책을 보면 북방으로부터 감자가 들어온 지 7~8년이 지난 1832년에 영국의 상선이 전라북도 해안에서 약 1개월간 씨감자를 나누어주고 재배법을 가르쳐주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그 당시 감자가 좋은 식량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백성들이 씨감자를 다른 사람에게나누어 주기 꺼릴 정도로 인기가 많았고, 어려운 시절 굶주린 사람들의 배를 채워준 고마운 작물이 되었다.
본격적인 재배는 1890년경부터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 일원에서부터 시작되었고, 1961년 대관령에 ‘고냉지농업연구소’가 설립되면서 우리나라 감자산업이 종자 개량 등 여러모로 추진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감자는 인류의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며 함께 해왔다.
올해도 별밭골 텃밭에 감자를 심었다.
여러 작물 중에 감자를 선택한 것은 심을 때 한 번만 수고를 하면, 나머지 일은 자연이 알아서 해주고 수확만 하면 되기때문이다.
거기다가 산돼지, 고라니 등 산짐승의 침해가 비교적 적다는 것도 이유 중의 하나가 된다.
감자는 장마가 오기 전, 하지 무렵에 수확을 해야 하나, 이런 저런 핑계로 게으럼을 피우며 차일피일하다 장마를 맞고 말았다.
그렇다고 장마가 끝날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라, 잠시 볕이 들었을 때 서둘러 감자를 파기 시작했다.
호미로 한 번씩 두둑을 긁을 때마다 갓난아기 머리통만한 감자들이 후두둑 불거져 나오는 것이 '자연은 말이 없으나 정은 있다(造物無言却有情)'는 옛시인의 싯귀가 실감이 난다.
혼자서 나름 열심히 호미질을 하지만 파야할 감자밭은 그다지 줄어들지가 않고, 파낸 감자만 고랑에 수북히 쌓여간다.
해는 점점 기울고 어스럼이 짙어져, 부득이 감자 파는 작업을 멈추고 파낸 감자를 카트에 실어, 몇 백미터 아래에 있는 창고로 옮긴다.
감자가 가득한 카터를 끌고 가파른 비탈길을 몇 번 오르내리니 주위가 깜깜해지면서 천둥을 동반한 장맛비가 다시 쏟아진다.
'方夏潦之淫也, 雲烝雨泄, 雷電發越, 江湖爲一....
바야흐로 여름이 되어 장마가 지면, 김 오르듯 검은 구름이 끼고, 하늘이 새는 것처럼 비가 내리며, 천둥과 번개가 몰아치고, 물이 불어 강과 호수를 분간 할 수 없으며.... '
소동파(蘇東坡)가 떠난지 천 여 년이 흘렀것만, 여름 장마철 농민들의 애환을 절절하게 표현한 그의 글귀는 여전히 가슴에 와 닿는다.
지리산 별밭골에서 池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