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잎이 된 나무
박정미
하늘을 보게 하는 나무
만인산 자락의 투박한 길을 걷다 보면 하트모양의 잎사귀들이 어깨를 툭툭치며 말을 건네듯 서 있다. 동글 동글한데 하트 모양의 잎을 가진 친구라서 금방 알아 볼 수 있다. “참 신비하네, 이 친구를 여기서 만나다니!” 이 친구의 이름은 바로 계수나무이다. 어릴 적 부른 동요에 토끼 한 마리와 등장하는 바로 그 친근한 나무이다. 어른들의 바둑판으로도 만들어지는 사랑스런 잎모양의 계수나무를 바라보면 할머니가 생각난다. 할머니와 함께 부르던 그 반달의 동요 가사와 함께 정겨운 옛날의 추억을 앨범처럼 펼쳐주는 나무이다. 더욱 신비한 것은 마음을 부드럽개 만져주는 동그란 하트형의 그 잎의 손짖이다. 산 속 수많은 잎사귀들 사이에서 나를 알기라도 하는 듯 하트를 날린다. 나를 마중 나온 계수나무가 보고 싶어 그 모퉁이를 돌때면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 나뭇잎들도 나의 발걸음 소리를 따라 바라보고만 있는 것 같았다.
물푸레나무는 키가 너무 커서 우툴두툴한 몸이 먼저 보인다. 하늘을 한참 올려 다 볼 때 작은 얼굴들이 보인다. 작은 잎사귀들을 사이좋게 매달고 하늘 높이 흩날리고 있다. 사진을 찍어 보면 키가 큰 나무에 작은 잎들을 달고 하늘을 받쳐 들고 있다. 작은 잎들 사이 사이로 비추이는 햇살이 잎사귀처럼 매달린 채 나뭇잎 사이에 걸려있다. 햇살도 이 작은 잎들 사이에서 나뭇잎이 된 이 조화로운 모습은 사진을 통해서만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잎 하나 햇살 한 장 겹쳐 나뭇잎처럼 달려 있는 이 물푸레 나무의 선택을 믿을만하다. 키가 큰 나무의 배려와 겸손을 통해 햇살을 자신의 잎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처음엔 알 수 없는 키 큰 나무와 작은 잎의 어울림은 어설퍼 보이지만 눈을 지그시 감고 올려 다 볼 때 놀라운 또 다른 나뭇잎을 발견하게 된다. 그건 햇살이 나뭇잎처럼 출렁이며 매달려 있는 묘한 매력의 물푸레나무이다. 그래서 작은 잎을 달고 있는 물푸레나무를 존중하며 햇살이 잎이 된 불편한 나무를 챠다 보면 빛의 잎을 만나는 희열을 안겨준다.
그 옆에 굵은 잿빛의 나무를 올려다보면 층층 나무과에 속하는 산딸나무가 반가울 수밖에 없다. 이 산딸나무에는 십자가형의 흰 꽃이 피어 우리 예수님을 생각하게 하는 나무라서 신성함을 안겨준다. 네 장의 희고 흰 길쭉한 꽃잎이 꼭 십자가를 닮아있다. 가을에는 작은 구찌뽕나무같은 열매가 빨갛게 매달린다. 땅에 떨어진 작고 예쁜 열매들이 주님의 피처럼 흩날려 있다. 가만히 주워 들여다보면 생각에 잠기게 하는 산딸나무 아래 서 본다. 하얀 꽃잎은 붉은 열매로 익어가면서 하늘을 이고 바람을 타고 산새들의 노래를 듣는다. 그들이 자라가는 모습을 보려고 산을 향해 걷는 나는 이미 산지기가 되어있다. 아름다운 변신은 하늘의 가는 바람결에도 익어가는 나무들을 보며 배운다. 내 곁에 스치는 작은 고마움에 나의 마음도 산딸나무처럼 익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먹는다.
작은 아그배나무에서도 벚꽃만큼 화려한 꽃을 피워 설탕 꽃처럼 눈부시게 피어 있다. 사과도 배도 아니면서 사과꽃처럼 예쁘고 배꽃처럼 치즈 빛을 내면서도 정작 탐스러운 열매보다는 꽃으로도 열매로도 나무로도 남고 싶은 욕심쟁이 나무같다. 나의 모습을 이 아그배나무에 비춰본다. 많은 욕십으로 인해 정작 마음의 열매들을 잃을 것 같아 조바심이 난다. 이 친구를 보면서 욕심의 잎사귀들을 하나씩 내려놓을 결단을 하게된다. 이 길을 빠져 나오면 녹음으로 건너가는 갈참나무잎들이 제법 시원한 바람으로 얼굴을 어루만지니 에덴의 동산을 보았노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동안에도 첩첩 산들이 따라오고 있다. 시내를 들어서면 길마다 하이얀 이팝꽃들이 피고 지면서 눈부신 녹음으로 달려가고 있다. 이곳에 사는 나는 동산 한 가운데 갇힌 듯 아름다운 풍경에 내 마음에도 짙은 푸른 물결이 흐르고 행복의 녹음이 물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장마비는 사흘간이나 밤마다 쉬지 않고 내렸다. 잠결에 들리는 빗소리는 세차고도 무겁게 느껴졌다. 어디론가 빗줄기는 새어 들어와 집집마다 물바다를 만들기도 한다. 영락없이 장마철이면 비가 새던 작은 하우스에 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새벽에 깨어 일어나 그릇을 대놓고 비를 받으며 그치기를 바랄 뿐이었다. 사람의 힘으로는 감당키 어려운 빗물은 무서운 속도로 도시와 사람들을 덮친 비보가 되길 그치질 않았다.
산에 올라가보니 빗물은 산줄기를 타고 나무 사이 바위틈을 비집고 돌아 미끄럼을 타듯 세차게 쏟아져 내렸다. 즐거운 함성처럼 들리는 물소리의 부딪침은 내 마음까지 흘러들어와 마음을 씻어주고 급물살을 타고 흘러간다. 바다를 향해 물방울들은 서로를 기대어 부서지며 산에서 골짜기를 돌아 망망대해 길을 찾아간다. 한참 자라난 풀을 쓰러트리고 바위도 비켜나가며 질주를 하는 동안 많은 상처들이 난다. 갑자기 봄에 처음 만났던 청 벚꽃나무들이 궁금해졌다. 고목들의 나뭇가지들이 무사할까?
청 벚꽃이 피는 어느 산사 마을에 오고 가는 발걸음이 잦아졌다고했다. 분홍벚꽃이나 흰 벚꽃이 지고 나면 이 청빛의 벚꽃이 피어난다. 네 그루의 청 벚꽃 중 하나는 고사하고 세 그루만 남았다, 이 특이하고 소중한 벚꽃을 산사에서 한 도시로 옮겨심어 생명을 보존하여 서식지를 옮겨 심기도했다. 이 벚꽃은 이렇게 하여 생존에 성공하여 더 많은 사람들에게 푸른 눈빛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고 한다. 이 친구의 생존률을 높인 사람들의 손길이 신이 부여한 솜씨만 같다. 이 벚꽃을 아끼고 사랑하지 않았다면 전설 속의 꽃으로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이 벚꽃은 사람들이 많은 거리로 옮겨져서 청 벚꽃의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이 벚꽃 아래 거니는 사람들은 마음에 푸른빛이 물들어 갈건만 같았다. 이런 꿈이 깨어질까 봐 장마비에 나의 마음도 함께 흔들리며 안부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