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조네(Giorgione, 1477∼1510, 베네치아 화파’의 창시자), ‘폭풍(The Tempest)’, 1508년경, 캔버스, 78x72cm,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통일, 탈북인 보듬기가 시작이다
작년 연말 가까이, 예정에 없던 뮤지컬 하나를 어렵사리 보게 되었습니다. 총 2백 석 남짓한 작은 공연장에서, 그것도 딱 이틀만 하는 공연이었습니다. 제목도 '외딴섬'이라 돼 있어 뮤지컬로서 별 재미는 없겠다 싶었습니다. 누구라 하면 알 만한 옛 직장 동료가 느닷없이 전화로 뮤지컬 표가 두 장 있는데 함께 가지 않겠냐고 하기에 공연이라면 마다하지 않는 저로서는 즉각 좋다고 했었지요. 이틀 중 둘째 날이었으니 마지막 공연이라고 할 수도 있겠군요. 공연장을 찾아가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동숭동 일원의 오래된 교회의 강당 같은 곳인데 골목길을 꼬불꼬불 돌아야 닿을 수 있었습니다. 내려가는 좁은 통로 끝 지하 공간에 조성된 초라한 공연장이었습니다.
들어가서 보니 객석은 거의 차 있었고 관객은 대부분 교회 인사들과 뮤지컬 관련자들, 그들의 가족 또는 우리처럼 특별히 초청을 받아 온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우리는 주최 측의 초청이 있었던 데다 탈북인들이 직접 하는 행사라니 일종의 호기심이 발동했던 것이지요. 거기 모인 사람들의 표정에서 제대로 된 뮤지컬이 나올까, 하는 의구심이 읽혀지기도 했습니다. 이 뮤지컬은 탈북인 배우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라파'라는 극단이 상당 기간 준비해서 제작한 것입니다. 라파는 언론인 독지가 한 분이 사재와 후원을 기반으로 운영하는 영세 극단으로서 생긴 지 일 년이 채 안 됩니다.
다소 숙연한 분위기가 감돌면서 예정된 시간에 공연이 바로 시작되었습니다. 무대 구석구석에 5, 6명의 배우가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장애인 딸, 아주머니 하나, 젊은 여자 하나, 장년 남자 하나, 그리고 중국인 청년 하나였는데 이들이 배역의 전부였습니다. 제목이 '외딴섬'인 이유는 이렇습니다. 이 여섯 명이 각기 죽음을 각오하고 탈북을 하거나, 중국 청년의 경우 감옥행을 각오하고 중국을 탈출했는데, 모두 한 곳에 도착하고 보니 가이드가 약속한 대로 남한 땅이 아니라, 다른 어떤 외딴 섬이었다는 것입니다. 이후 자유를 찾아 나선 여정에서도 계속 외딴 섬에 와 있는 느낌을 가졌으며 종착지인 남한에 들어와서도 외로움을 느꼈다는 데서 그런 제목을 붙이게 되었다는 거죠.
무대 위 지금 한데 모여 있는 곳은 여전히 북한 땅일 수도 있는 무인도입니다. 이들은 물도 구하기 어려운 이 외딴 섬에서 갈증과 허기와 두려움으로부터 생명의 안전과 자유를 찾아 다시 남한을 향해 함께 떠나야 하는 공동운명체가 됩니다. 공포감이 지배하는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지옥 같은 북한체제를 벗어나고 있다는 일말의 안도감에서 그들은 익살스런 농담을 주고받습니다. 일행 모두 연기 경험이 있어서인지 뮤지컬 배우로서 아무런 손색 없이 열연을 하였습니다.
김일성 부자를 희화화(戱畵化)하면서도 막상 비칭(卑稱)이나 막말을 쏟아낼 용기를 낼 사람은 당장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일상 생활에서 체화된 주체사상의 굴레에서 빠져나오가 어려웠던 것이죠. 그러다가 누군가가 나서서 김씨 일가에 대해 욕설을 퍼붓고 조롱을 시작하고는 모두 몇 마디씩 거들곤 합니다. 누가 엿들을까봐 습관적으로 몸을 사리기도 하지만 그간 살아왔던 북한에서의 일들을 회고하면서 맘껏 풍자하고 비판하고 실소를 합니다. 강제수용소에서 인간 이하로서 겪었던 처참한 이야기를 할 때는 배우도 울먹였으며 보는 이들도 눈물을 훔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몰래 두고 온 가족을 생각하며 오열할 때는 관객들도 흐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에는 어쨌든 자유를 찾아갈 수 있다는 불타는 희망과 이로 인한 희열의 빛이 어려 있었습니다. 단순한 배우가 아닌 이들의 이야기는 바로 얼마 전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이 직접 겪은 실화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유 . . .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입니다. 각기 다른 경로로 왔지만 하나같이 극단의 상황에서 온갖 간난과 험한 일을 당하면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중국 청년의 경우 아버지는 중국인, 어머니는 조선인인데 어머니는 중국에서 강제로 맺은 부부관계에서 탈출하여 이미 남한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찾아 나선 것입니다. 그 어머니는 애초 탈북 후 중국인에게 넘어가 국적도 여권도 못 가질 아들을 낳은 것이죠. 이 청년은 한국말도 서툴 수밖에 없었지만 부자유스러운 환경을 벗어나 어머니를 만난다는 기대감으로 환희에 차 있습니다. 모두가 자유와 사랑을 찾아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고 살아남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사는 남한에서 자유는 공기와 같아서 이처럼 갈구하지 않아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자유를 넘어 방종과 무책임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남한 사람 대부분은 진정 자유가 얼마나 큰 가치인 줄을 모르고 살아옵니다. 이렇듯 쉽게 자유를 누려오던 저도 뮤지컬 무대에서 실제처럼 연기하는 탈북인 배우들을 통해 자유에 대한 갈망이 어떤 것인지를 느껴볼 수 있었습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자유'임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3만여 탈북인이 들어와서 살고 있습니다. 얼마 전 한 탈북인 모녀가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냉방에서 동반으로 숨져간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야 비단 탈북인에게만 일어나는 건 아니지만 그들의 경우는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있습니다. 북한 땅에서의 경험이 남한 사회에 그대로 적용될 수 없는 데다 남한 사회가 이들의 처지를 이해하면서 특별히 보살펴 주지 않는 한 그들은 이 땅에서 제대로 살아나가기 어렵습니다. 여전히 미스테리에 쌓여 있기는 하나 얼마 전 동해 경계선을 넘어온 선박의 생존자들이 미처 자유를 맛보지도 못하고 북으로 귀환하게 된 아픈 사연도 있습니다. 지금도 생사의 경계를 오가며 중국, 몽골, 동남아 등 중간 기착지에서 기약 없이 헤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뮤지컬에서 이들 여섯 명은 파란만장한 여정 끝에 모두 남한 땅을 밟고 꿈에도 그리던 자유를 누리면서 각기 능력에 맞는 일자리를 맡아 일하면서 행복을 구가합니다. 실제 남한에 살고 있는 탈북인들의 현실은 뮤지컬과는 딴 판입니다. 어찌해서든 성공을 이룩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삶을 포기해야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린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남한 도착 후 일정한 조사와 하나원 보호 기간을 끝나면 제한된 소득에 의존하면서 스스로 남한 사회에서 적응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들을 보는 남한 사람들의 시선은 결코 곱지 않습니다. 뭔가 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에서 경계의 시선을 놓지 않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가뜩이나 적응력이 부족한 북한인들이 제대로 헤쳐나가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북으로 되돌아가는 사례도 있습니다.
탈북인들이 남한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한 나머지 절망에 빠지고 삶에 환멸을 느낄 정도에 이른다면 이는 누구의 책임일까요? 물론 본인들의 책임이 크겠지만 북에서 온 동포들을 잘 보듬지 못한 우리에게는 책임이 없을까요? 우리는 스스로 냉정하게 물어봐야 합니다. 남한 사람인 우리는 인간 지옥을 탈출해온 북한인들을 홀대하고 있지는 않나요? 우리 정부는 도리어 이들을 백안시하면서 필요한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이러한 물음 앞에서 그렇지 않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너 나 할 것 없이, 사선(死線)을 넘어온 동포들을 저 먼 나라에서 밀입국한 이방인 대하듯 골칫거리, 애물단지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탈북인 문제는 심각하면서도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탈북인들을 어떻게 대하며 또 이들이 어떻게 남한 사회에 잘 적응하도록 하는가의 문제는 바로 통일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머리 위에 핵을 이고 역사상 가위 최악의 전제주의 체제와 마주하고 있는 한, 이 땅에 통일은 쉽게 오지 않습니다. 통일 이전에, 북한이 국제사회의 재제로 인해 궁지에 몰려 마지막 수단으로 남한에 무력도발을 한다면 그야말로 재앙입니다. 이에 대응해 우리 안보를 튼튼히 해나가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언젠가는 올 수도 있는 통일에 잘 대비하는 것 또한 현실적으로 간과해서는 안 될 중차대한 일입니다.
독일의 경우 역사적, 현실적 조건이 우리와는 다르지만 결국 탈출하는 동독인들이 많아지면서 통일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국가의 구성요소인 영토,국민, 주권 중 가장 핵심인 국민이 계속적으로 줄어든다면 이는 국가로서의 온전성이 무너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독으로 빠져나가는 동독인이 급증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동독 국민들은 서독과의 통합 여부를 결정할 투표권이 주어집니다. 역사에 만일이 없다지만, 만약에 이 과정에서 동독 국민이 서독과의 통일을 원하지 않는 것으로 투표 결과가 나왔다면 오늘날과 같은 독일 통일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상황을 한반도에도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장래 어느 시점에 어떤 커다란 변수가 생겨 남한과의 통일 여부에 대한 북한 주민의 의사를 물어야 하는 상황을 상정해봅니다. 그 시점에서 북한인들이 남한과의 통일을 바랄 것인지를 쉽게 예단할 수는 없습니다. 흔히 '흡수통일' 운운하면서 북한 정권이 무너지면 통일이 곧바로 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경우에 대비해 우리는 미리부터 북한인들의 마음을 얻어 놓아야 합니다. 대북 인도적 지원은 그 자체로서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미래의 통일에 대비하여 그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데도 그 중요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북한 주민의 마음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바로 남한 사회에 대한 그들의 믿음일 것입니다. 남한과 막상 한 몸이 되었을 때 북한인들로서는 통일 후 새로운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두려움이 클 것입니다. 그들이 가보지 않은 미래에 대한 기대감과 불안감 사이에서 판단할 수 있는 기준으로 탈북인들의 정착 사례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어디서나 눈과 귀가 있어서 그들도 탈북인들이 남한 사회에서 잘 정착하고 있는지에 대한 소문을 듣고 나름대로 판단을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가깝든 멀든 미래에 우리에게 닥칠 수 있는 이러한 상황에 대비하여 제대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3만여 탈북인들을 제대로, 잘 보듬어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탈북인들을 잘 보듬는 것인가는 당국자들과 국민들이 머리를 맞대고 짜 내어야 합니다. 지금의 수준으로는 많이 부족하다는 게 드러났습니다. 우선 당국이 보다 면밀하고 현실적인 계획을 짜서 실행하고 우리 국민들이 탈북인들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계도하고 협조를 구해나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수용력이 있는 한 되도록 많은 탈북인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북한이 처한 현 상황이 한계에 이르러 북한인들이 스스로의 운명을 선택할 기회가 왔을 때, 만일 그들이 남한과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면 통일은 영원히 물 건너가고 말 것입니다.
통일은 궁극적으로 사람과 사람 간의 통합입니다. 스스로 들어온 탈북인들과 잘 화합하지 못하면서 이념과 체제가 다른 북한 사회와 통째로 통합한다는 것은 자가당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들어온 탈북인들을 잘 보듬어가면서 미래에 대비해야 합니다. 몇 명이 되든 지금으로서는 들어왔거나 들어올 탈북인들을 잘 보살피고 이들과 잘 화합하는 것이 통일을 위한 현실적인 첫걸음이라 하겠습니다.
[퍼온 글] / 출처; 2020.01.30 06:56에 받은 자유칼럼그룹의 e메일 / 필자소개; 정달호(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줄곧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파나마, 이집트대사를 역임했다. 은퇴 후 제주에 일자리를 얻는 바람에 절로 귀촌을 하게 되었고, 현재 제주평화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한라산 자락에 텃밭과 꽃나무들을 가꾸며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즐거움을 찾는다)
'한우물'의 힘
협상의 승패를 결정짓는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담당자의 전문성이 특히 중요하다.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개인의 타고난 능력과 노력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절대적 시간’이 요구된다. 5년간 끌어온 쌀 관세화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끈 김경미 농림축산식품부 농업통상과장이 세간의 화제다.
그는 ‘쌀 관세율 513%, 의무 수입물량(TRQ) 40만8700t에서 동결’이라는 협상 결과를 이끌어내 세계무역기구(WTO)의 승인을 받았다. 2015년부터 미국 중국 등 5개 쌀 생산국과 벌여온 협상에서 한국의 요구 사항을 모두 관철시킨 ‘완승’과도 같은 결과다.
이런 성과는 김 과장이 6년 넘게 한자리를 지키며 탁월한 협상 전략을 짜고 실무협상을 주도했기에 가능했다. 정부 중앙부처 과장이 6년간 한자리를 지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농식품부 과장들은 한자리에 평균 2년 정도 머물 뿐이다. “상대국 협상 담당자들은 수년간 거의 안 바뀌는데 우리쪽만 바뀌면 전략적으로 문제가 있을 것 같았다. 장기간 협상에는 인적 네트워크 간 신뢰도 매우 중요하다”는 게 김 과장의 전언이다.
주요 보직을 거치며 ‘경력 관리’를 하는 대신 ‘한우물’만 파다 보니 이런 성과로 이어졌다는 얘기다. 한국 공직사회는 순환보직 전통이 강하다. 이른바 ‘요직’에는 여러 명을 돌아가며 앉혀야 조직 내 불만이 잦아든다. 여러 자리를 두루 거치는 것이 승진에도 유리하다. 공직사회만 그런 게 아니다. 자연히 각 조직의 전문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탄생의 주역인 웬디 커틀러 전 미국무역대표부(USTR) 부대표는 28년간 통상 문제만을 다룬 베테랑이다. 반면 FTA 협상 당시 한국 측 협상 담당자들은 수시로 바뀌어 미국 측이 오히려 당황했다는 후문이다. 주요 국가와의 외교 협상, 한・미 자동차협상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져왔다. 존 헤네시 미국 스탠퍼드대 총장은 20년 가까이 학교를 이끌며 아이비리그를 능가하는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서울대 총장의 재임 기간은 평균 2.7년에 불과하다.
한국 사회도 바뀌고는 있다. 인사혁신처는 전문직위제도 등을 도입해 고위 공무원들의 장기근무를 통한 전문성 제고에 나섰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제2, 제3의 김 과장이 나와 ‘한우물의 힘’을 계속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퍼온 글] / 출처; 한경닷컴 / 김선태(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 2020.01.30 00:20
유령도시 우한
중국 후베이성 성도인 우한(武漢・무한)은 3500년 역사를 지닌 고도다. 하・은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우한의 판룽(盤龍・반룡)성은 은나라 때 세워졌다고 한다. 전국시대에는 초나라 심장부를 이뤘고, 명・청 시대에는 핵심 군사요충지였다. 무너지는 청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양무운동도 그곳에서 시작됐다. 1911년 신해혁명의 불을 댕긴 무창봉기도 그곳에서 일어났다.
역사의 도시 우한. 낭만적인 문학 전통은 수천 년을 이어온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어라(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굴원을 깨우치는 ‘어부사’다. 그는 초나라 재상이었다. 명경지수와 같은 성품. 너무 꼿꼿해 충절의 뜻을 굽힐 줄 몰랐다. 음모에 밀려나 유랑하던 굴원이 안타까워 이름 모를 어부는 “왜 현실과 좀더 타협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어부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굴원의 ‘초사(楚辭)’. 그의 글은 우한을 가로지르는 장강처럼 역사를 가로질러 흐른다.
우한이라는 지명은 1949년 생겼다. 우창(武晶)・한커우(漢口)・한양(漢陽) 세 곳의 이름을 따 우한이라고 했다. 그곳은 지금 유령 도시처럼 변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불러일으키는 ‘우한 폐렴’ 공포가 범람하는 거리. 인적이 사라졌다. 생필품을 구하거나 병원・약국을 찾는 사람 외에는 눈에 띄질 않는다. 마치 좀비 영화의 한 장면 같다. 그들은 숨을 죽인 채 공포에 맞서고 있다. 혹시 가족이 폐렴에 걸리지나 않을까, 두려움에 떨며.
하지만 인심은 야박하다. ‘우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기피 낙인을 찍는다. 주변 중국인은 우한으로 가는 길을 막고, 그들을 내쫓기까지 한다. 중국 정부는 우한 봉쇄령을 내렸다. 우한으로 통하는 모든 교통망을 차단했다. 함부로 도시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외지인을 포함한 우한 인구는 1400만명. 봉쇄령을 내린다고 봉쇄할 수 있을까. 우한 사람이면 아예 입국을 거절하는 나라도 수두룩하다. ‘우한 포비아’는 번지고 있다.
금단의 땅으로 변한 우한. 창랑의 물이 오염된 걸까. 공포를 걷어내고 맑은 물이 다시 흐를 날은 언제일까.
[퍼온 글] / 출처; 세계일보 / 강호원(세계일보 논설위원) / 2020-01-29 23:52:17
일본단풍나무(미국,오리건/포틀랜드) Beautiful Japanese Maple In Portland, Oregon
기상천외 식도락이 '박쥐의 역습' 불렀다…중국 우한의 비극
[차이나 인 사이트]
우한 폐렴 숙주로 박쥐가 유력 / ‘야생의 맛’ 즐기다 야생 역습 불러
신의 반열 오르려는 공산당 치하 / 언론 감독 사라지며 초기 대응 실패
박쥐는 중국에서 ‘볜푸(蝙蝠)’라 부른다. ‘푸(蝠)’가 복(福)의 중국어 발음 ‘푸’와 같아 박쥐 모양의 상징물은 행복을 의미한다. 특히 ‘볜푸(蝙蝠)’는 ‘복을 널리 퍼뜨린다’는 ‘볜푸(遍福)’의 뜻으로도 쓰인다. 그러나 웬걸, ‘볜푸’가 2020년 새해 중국을 상갓집 분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우한(武漢)에서 발생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숙주로 박쥐가 유력시되기 때문이다. 지난 23일 중국과학원 우한바이러스연구소의 스정리(石正麗)팀이 최신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골자는 신형 바이러스의 염기서열이 박쥐의 코로나 바이러스와 96%의 상동성을 보인다는 거다. 박쥐를 행복의 상징으로만 여기지 않고 이를 잡아먹는 오랜 식습관이 재앙을 불렀다는 이야기다. ‘야생의 맛(野味)’을 즐기다 ‘야생의 역습’을 당한 셈이다.
송(宋)대 시인 소식(蘇軾)의 시에도 “박쥐를 끓인다(燒蝙蝠)”는 대목이 나온다. 중국 인터넷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우한 폐렴) 발발을 불과 열흘 앞두고 올라온 ‘박쥐는 먹을 수 있나? 어떤 영양가치가 있나?’란 글이 있다. 글에 따르면 광둥(廣東)성에선 전문적으로 박쥐를 잡아 파는 사람이 있다. 한 마리에 20위안씩 받는데 끓이거나 쪄먹는다. 날개 뼈는 연골이라 바삭바삭하고 고기는 참새와 비슷한 맛이 난다고 소개한다. 영양가치도 상세하게 선전한다. 가래를 삭이고 기침을 멎게 하며 이뇨작용을 해 부기를 빼고 간을 보호해 눈을 밝게 한다는 등이다. 주의사항으론 독이 있는 박쥐는 먹지 말라는 게 전부다.
2003년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때의 교훈은 깡그리 잊혔다. 전 세계에서 8098명이 감염돼 774명의 사망자를 낸 사스는 박쥐에 있던 바이러스가 사향고양이로 옮겨진 뒤 이게 다시 사람에게 전파된 경우다. 하긴 사스 사태 3년 뒤인 2006년 중국야생동물보호협회가 중국 16개 도시 2만400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30%가 야생동물을 먹는 습관을 계속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로부터 다시 10년 이상 흘렀으니 더욱 잊혔을 법하다.
지금은 폐쇄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발원지로 지목된 우한 화난 수산시장의 야생동물 점포. [웨이보 캡처]
중국에서 야생동물을 먹는다는 ‘츠예웨이(吃野味)’란 말엔 신분 과시용의 우쭐함이 배어 있다. 옛날엔 먹을 게 없어 야생동물을 잡았지만 시대가 흐르며 돈 있는 자가 보신을 위해 또는 새로운 걸 탐하는 식도락 차원에서 ‘예웨이(野味)’를 찾게 됐다. 명・청 시대에 유행한 원숭이 골, 낙타 육봉, 표범의 태 등과 같은 진귀한 여덟 가지 요리가 그렇고, 20세기 초 동북왕(東北王)으로 불린 군벌 장작림(張作霖)이 호랑이고기를 특별히 좋아했다는 이야기 등이 다 그런 경우다.
이번 우한 폐렴의 진앙지인 화난(華南) 수산시장 동쪽에 자리한 상점 ‘대중(大衆)목축야생동물’의 차림표에 등장하는 동물만 42종에 달한다. 사스를 옮긴 사향고양이는 물론 오소리, 공작, 기러기 등을 바로 현장에서 도살・냉동해 집까지 배달한다고 광고한다. 중국 사스 퇴치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중난산(鍾南山)이 계속 경고해 왔지만, 기상천외의 식도락이 바뀌지 않고선 언젠가 터질 일이었던 셈이다. 중국 저장(浙江)대 법학교수 첸예팡(錢葉芳)은 야생동물 소비 저변에 깔린 중국인의 얄팍한 속내를 질타한다. 그는 “동물 방역에 대한 법률의식이나 동물 보호의식이 천박하고 우매하기 이를 데 없다”며 “야생동물을 먹는 게 몸보신을 위해서라 말하지만 실제론 허영으로, 일종의 특권을 드러내는 신분 상징처럼 쓰인다”고 비난했다.
야생 담비. [웨이보 캡처]
문제는 사태가 터진 뒤 중국 당국의 대처다. “문제를 삼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어떤 문제든 덮으려는 본능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우한에서 처음 신종 폐렴 환자가 발생한 건 지난해 12월 8일이다. 이후 환자가 속출하기 시작했으나 우한시 위생당국은 3주를 미적거렸다. 그러다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고 인식하고 지난달 30일 “원인 불명의 폐렴이 돌고 있다”는 긴급 통지문을 냈다. 그럼에도 새해 분위기를 망치지 않으려는 듯 지난 3일 “사람 간 전염은 분명하지 않다”고 말해 사회의 경각심을 무디게 했다. 또 잇따른 환자 발생을 보고 놀라 “사스가 재발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생기자 이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린다며 붙잡으러 다녔다.
중국은 ‘보희불보우(報喜不報憂)’의 전통이 있다. 황제에게 좋은 일은 알리지만 걱정을 끼칠 나쁜 일은 보고하지 않는다. 우한은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의 기치를 올려 2000년여 넘게 지속한 황제 제도를 깨뜨렸지만 이 악습만큼은 부수지 못했다. 여기에 신중국 건국 이래 공산당 일당제의 장기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안정이 모든 걸 압도한다(穩定壓倒一切)’는 구호도 한몫했다. ‘안정’이란 대의를 위해 관방(官房)과 다른 말은 용서가 되지 않는다.
이에 따라 우한에선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졌다. 신종 폐렴으로 병원을 찾는 사람이 급속도로 늘고 확진 환자만 100여 명이 넘어서는데도 대규모 잔치를 연 것이다. 이름하여 ‘만가연(萬家宴)’이다. 세 번째 사망자가 발생한 지난 18일 우한시는 바이부팅(百步亭) 사구(社區・지역사회)에서 중국의 최대 명절 춘절(春節・설)을 일주일 앞두고 4만여 가정이 참여하는 초대형 잔치를 열었다. 현장에서 만들어진 요리만 1만3986가지라고 중국 언론은 전했다. 이후 춘절을 쇠기 위한 수많은 귀성객의 발길이 한커우(漢口) 기차역으로 이어졌다. 신종 폐렴의 진원지인 화난 수산시장과는 불과 500m 거리다. 우한이 봉쇄되기 전 500만 명이 빠져나갔다. 초기 대응의 완전한 실패다. 중국 전역은 물론 세계 곳곳에서 확진 환자가 나올 수밖에 없게 된 이유다.
3년 전 여행지에서 박쥐탕을 즐기던 유명 블로거. [웨이보 캡처]
중요한 건 이럴 때 역할을 해줘야 할 언론이 본연의 감독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왜? 강력한 리더십의 시진핑(習近平) 등장 이후 중국 언론은 스스로의 성(姓)이 ‘당(黨)’이라며 공산당의 선전에 충실할 것을 맹세한 터다. 당의 허가 없는 보도는 불가능하다. 최근 언론을 죄는 당의 손아귀는 더욱 세졌다. 한 베이징 언론사의 경우 기자가 취재를 나가려면 세 군데의 도장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한 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당의 의지가 강력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다당제의 서방이 대중 영합주의로 흐르고 있다며 비난한다. 반면에 공산당 일당제의 효율성을 자랑한다. 그러나 당이 잘못하면 어떡하나. 당의 착오는 누가 감독하나. 여기서 왕치산(王岐山) 국가부주석이 말한 ‘셀프 감독론’이 등장한다. 왕치산은 2015년 ‘역사의 종언’ 논문으로 유명한 프랜시스 후쿠아먀와 만나 그에게 “종교 내부의 치리(治理)는 무엇에 의지하는가”라고 묻고 스스로 답했다. 종교가 자아 감독에 의존하듯이 중국 공산당 또한 자기 스스로를 감독한다는 주장이었던 것이다. 중국 공산당이 신의 반열에 오르고자 하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시진핑 집권 2기 중국이 모든 공무원의 비위를 조사할 수 있는 감찰위원회를 출범시킨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그러나 세상에 완벽이 존재하나. 특히 스스로의 완전한 감독이 가능한가.
2020년은 중국에 역사적인 해다. 먹고사는 데 걱정이 없고, 문화생활도 즐기는 전면적 소강(小康)사회를 달성하는 해다. 그러나 중국의 새해는 모두 마스크를 쓰고 서로를 경계하며 멀리하는 공포로 시작하고 있다.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극도의 두려움과 함께이다.
[퍼온 글] / 출처: 중앙일보 / 유상철(중앙일보 베이징 총국장) / 2020.01.29. 06:54
인공지능은 N차원 세계
2차원 도로 차선・교통량 제한 / 미래 이동수단 3차원화 발전 /
4차 산업혁명 핵심 빅데이터 / ‘다차원 벡터’로 급속하게 변환
정의선 현대차그룹 총괄 수석 부회장은 최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2020에서 항공과 지상에서의 이동수단을 결합한 미래 모빌리티 사업의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했다. 이때 그는 “하늘길에서 새롭게 펼쳐질 현대자동차의 신개념 스마트 모빌리티 솔루션은 끊김 없는 이동의 자유를 제공하고 인류를 위한 진보를 이어나가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보면 미래 이동수단이 공간적으로 3차원화해 발전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기존의 2차원 평면 위의 도로는 차선과 교통량에서 제한을 받기 때문이다. 이렇게 4차 산업혁명을 맞아 기술의 발전이 1차원 세계에서 다중(N)차원 세계로 급격히 이동하고 있다.
보통 먼 거리를 연결하고, 공간이 좁을 때 1차원 선으로 두 점을 연결한다. 고속도로가 그렇고, 철도가 그렇다. 여기에 더해서 전기 에너지를 공급하는 송전선과 데이터를 주고받는 신호선도 1차원적인 선 구조이다.
하지만 공간적인 안정성을 추구할 때, 매일 생활 속에서 경험하는 구조는 2차원인 경우가 많다. 식사 테이블, 책상, 노트북 컴퓨터에서 스마트폰까지 대부분 2차원적으로 평평한 2차원 평면 구조를 갖고 있다. 특히 손바닥, 발바닥도 평평한 2차원 평면을 이룬다. 이렇게 일상 생활 속 구조가 2차원인 것은 지구 중력과 관계가 있다. 중력과 직각인 평면이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반도체의 구조와 생산공정이 2차원적이다. 그 이유는 반도체 공정인 리소그라피 공정에서 극자외선(EUV) 평행광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레이저나 태양과 같이 멀리서 오는 빛은 평향광이다. 반도체 공정에서 빛을 이용해서 판화 작업을 하는데 이때 반도체 표면과 수직인 방향으로 빛을 받는다. 이러한 감광작업에는 포토레지스트라고 불리는 화학물질이 있고, 그 빛을 가리는 마스크가 있다. 이때 극자외선 평행광이 수직으로 입사되기 때문에 정밀한 패턴을 만들 수 있다. 이때 빛과 수직인 2차원 평면이 반도체 웨이퍼가 된다. 이런 이유로 반도체 표면은 2차원적이다.
그런데 최근 2차원적인 평면 구조의 반도체 속에 트랜지스터를 만들면, 트랜지스터를 서로 연결하는 금속 배선의 길이가 길어지고, 그 수도 제한된다. 그러면 데이터 송수신 용량과 속도가 현저히 제한받는다. 그 결과 컴퓨터와 메모리가 느려지고 전력소모량이 증가한다. 최근에는 트랜지스터나 반도체 웨이퍼를 3차원적으로 아래위로 쌓는 적층형 구조로 가고 있다. 이때 아래위로 연결하는 3차원 연결 구조를 관통실리콘 전극이라고 부른다. 특히 빅데이터나 인공지능 처리용 반도체는 이러한 3차원 구조로 변해 가고 있다. 이동 수단으로 3차원 스마트 모빌리티가 등장하는 이유와 같다.
그런데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이 되는 빅데이터의 표현이 바로 N차원 벡터가 된다. 영상 이미지를 데이터라고 하면, 이 데이터 자체가 이미 2차원적이고, 여기에 밝기, 채도, 색깔을 넣으면 N차원 벡터가 된다. 여기에 1초에 60장 변화하는 데이터를 모두 포함하면 M차원 벡터가 된다. 이러한 다차원 벡터를 텐서라고 부른다. 구글에서 제공하는 인공지능 계산 플랫폼을 텐서플로라고 부른다. 다르게 보면 인공지능 학습과 판단 과정은 N차원 벡터가 흐르는 과정이다. 그 차원 N이 수백만 혹은 수천만 차원이 될 수도 있다. 4차 산업혁명은 N차원 벡터 세상이 된다.
우리는 물리적으로 경험하는 1, 2, 3차원 세계에서 살고 있지만, 실제 시간이라는 변수가 더해져서 4차원 세계가 된다. 그러나 인공지능에서 다루는 빅데이터는 N차원 벡터가 되고 그 벡터를 변환하고 전파하는 기능은 N×M차원 행렬이 담당한다. 이렇게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세상은 N차원이다. 그리고 숫자 N은 급속히 커지고 있다.
[퍼온 글] / 출처; 세계일보 / 김정호(카이스트 석좌교수 전기전자공학) / 2020-01-29 23:51:16
흥부 제비와 놀부 제비
삶과 문화
저 자신을 봐도 그렇고 이웃들을 봐도 그런 것 같은데 우리는 우리의 것을 덜 사랑하고, 덜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우리의 것에서 지혜와 교훈을 끄집어내지 못하는 편인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서양 신화에 대해서는 많이 연구도 하고, 그들의 신화에서 영감을 얻거나 작품의 동기를 끄집어내곤 하지만 우리의 신화를 가지고 그러는 것은 많이 보지 못합니다. 그것은 문학작품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다행히도 몇 작품은 판소리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지면서 그나마 많이 알고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흥부전입니다. 그리고 저 개인적으로는 이것을 초등학생 때 연극으로 접한 바가 있어 심정적으로 친밀한데 이번 설 명절을 기해 이 얘기를 오랜만에 다시 의미 새김을 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이 얘기가 행복에 대한 교훈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새해를 맞이하면 ‘새해 복을 많이 받으라’고 인사하든, ‘새해 복 많이 지으라’고 인사하든 복을 빌어 주는 인사를 하는데 지난해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새해에는 복을 받든, 복을 짓든 행복하라고 축복하는 것이지요. 이 인사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의 행복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복을 받는 측면과 복을 짓는 측면입니다. 복이 지지리도 없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은 복이 없는 것이 아니라 덕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굴러 온 복을 걷어차는 것이 부덕이라면 남으로 하여금 복을 빌어 주고 싶게 하고, 주는 보람이 있게끔 복을 고맙게 잘 받아들이는 것이 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복을 주고 싶게끔 하고, 복을 잘 받아들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복을 받은 다음에 복을 잘 농사짓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는 마치 하늘에서 비와 햇빛을 적당히 내려줘도 농사 잘 지어야 그러니까 제때에 씨 뿌리고, 물 관리를 잘하고, 풀도 잘 매 줘야 열매를 맺듯이 복 농사도 잘 지어야 우리가 행복하게 되는 거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복 농사를 잘 짓는 것일까요?
저의 행복론은 ‘나는 무조건 행복하다. 행복하지 않으면 나만 손해니까!’입니다. 조건에 좌우되지 않고 어떤 조건에서도 나는 행복하겠다는 의지로 저의 행복 농사를 짓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악조건에서도 씨앗인 복이 열매인 행복이 되게 하겠다는 겁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우선 뿌려진 씨, 곧 복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흥부는 제비가 물어다 준 박 씨 하나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옛날에 박은 먹거리뿐 아니라 바가지 용도로도 쓰였기에 많이 심었고, 그래서 박의 씨는 우리에게 흔한 거였는데 그 흔한 박 씨를 물어다 준 것을 흥부가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면 복이 다 날아갔을 테지요. 그런데 더 눈여겨볼 것은 흥부가 박 씨를 소중히 여겼을 뿐 아니라 그 이전에 제비 한 마리를 소중히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새가 다리 부러진 것을 보고, 그까짓 새 죽든지 말든지 한 것이 아니라 미물일지라도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살려 준 것이며 제비가 물어다 준 씨도 소중히 여기고 잘 돌봐 주었기에 박이 달리고 박에서 복이 쏟아져 나오게 된 거지요.
그러므로 또한 중요한 것이 행복 의지입니다. 농부로 치면 열매를 수확해야겠다는 의지인데 씨로 주어진 복이 행복이라는 열매가 되기 위해서는 수확의 의지가 있어야 잘 돌보기 때문입니다. 저의 행복론은 ‘나는 무조건 행복하다. 행복하지 않으면 나만 손해니까!’입니다. 조건에 좌우되지 않고 어떤 조건에서도 나는 행복하겠다는 의지로 저의 행복 농사를 짓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악조건에서도 씨앗인 복이 열매인 행복이 되게 하겠다는 겁니다.
흥부는 놀부보다 가난했으니 행복의 조건은 나빴지만 그는 없는 가운데서도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놀부는 욕심 때문에 많이 가졌어도 그것으로 행복하지 못하고 늘 부족하였고 그래서 더 가지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비 다리를 일부러 부러뜨리고 고쳐 준 다음 박 씨를 얻어 심었지만 행복의 대박이 아니라 쪽박을 차게 되었습니다. 작은 복을 큰 행복이 되도록 행복 농사 잘 짓는 한 해가 되시라고 모든 독자께 새해 축복 드립니다.
[퍼온 글] / 출처; 한국일보 / 김찬선(신부) / 2020.01.30. 04:40
영화 '두 교황'과 '지구 나이' 大논쟁
[김병민의 사이언스 빌리지]
절대온도 '캘빈' 체계 정립한 英톰슨, 19세기에 지구나이 1억년 주장
자신의 가설과 배치되는 주장은 묵살・수십 년간 왜곡된 지식 퍼뜨려
1900년대 중반 방사능 활용한 계산법으로 지구 나이 46억 년 밝혀져
우리는 사과가 아니라 치유를 받아야 한다.
'정말 2020년이 왔구나!'
수십 년 전 2020년을 그린 영화 대부분은 암울한 시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도의 과학기술과 산업문명을 배경으로 윤리와 인간 존엄이 상실되고 자본주의의 한계로 인류 대다수가 고통받는 시대입니다.
영화와 달리 지금 인류는 태양계 행성을 자유롭게 오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폭발적으로 진보한 과학기술과 산업문명의 혜택을 받는 동시에 기후 위기와 생태계 위협이라는 중대한 현실 문제도 맞닥뜨리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물론 세계 각국은 팽팽한 이념 대립과 견제로 힘의 균형을 맞추고 있습니다. 때로는 전쟁 혹은 자본주의의 양극화에 따른 가난으로 많은 인류가 고통받는 현실은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대립과 조화가 투영된 듯한 숫자인 '2020'으로 시작하는 새해 첫 주말에 본 영화는 다른 여운을 남기더군요.
필자가 본 영화 '두 교황'(2019)은 실존 인물인 베네딕토 16세 전 교황과 프란치스코 현 교황의 논쟁을 그린 작품입니다. 영화에서는 처음부터 낡은 것과 새 것의 대립이 드러납니다. 가톨릭 교회에서 여러 문제가 있는 정통 교조주의를 계승하려는 자와 신자유주의 가치관을 지닌 것 같은 도전자의 대결 구도로 시작하죠.
영화 내내 엄밀하고 긴장된 논쟁이 벌어집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상대의 마음에 귀를 열고 가슴으로 이해하며, 가톨릭 교회의 부정을 인정하고 베네딕토 16세의 반성도 이끌어냅니다.
왜 사람들이 '두 교황'에서 위안을 얻었는지 알겠더군요. 서로의 허물에 대해 인정하고 올바른 선택과 변화의 차원에서 주장을 수렴해 가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입니다.
사실 이런 대결 구도는 현대 종교와 과학의 논쟁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히 '두 교황'의 주인공이 빅뱅과 진화론 같은 과학적 사실을 인정하며 정통 가톨릭의 두텁고 낡은 옷마저 벗어버린 탓인지 영화 내내 과학사의 유명한 대논쟁이 필자의 머릿속에서 겹쳤습니다.
지금도 지구의 나이가 심심치 않게 논쟁의 중심에 서곤 합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더 그랬습니다. 15세기 르네상스의 여파로 종교에 의해 소멸했던 과학과 철학이 부활합니다. 하지만 새롭고 뛰어난 지식과 사상이라도 어느날 갑자기 인류 앞에 등장해 시대를 지배하거나 변화하진 않습니다.
과학은 기존 설명을 의심해 다시 증명하는 학문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지식도 낡은 믿음과 함께 얽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그래서 낡은 것과 새 것의 마찰이 생깁니다. 특히 과학자들 사이에도 대립과 논쟁이 있었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논쟁의 중심에 교황 같은 권위자가 있는 경우 논쟁은 막대한 영향을 받게 됩니다. '교황 무오류설'을 지켜온 가톨릭이 십자군 전쟁과 유대인 핍박 방조에 대해 시인한 반성은 무려 2000년이 돼서야 가능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근대 과학계에서도 큰 산과 같은 인물의 그릇된 가치관이 지구 나이에 관한 논쟁에서 그릇된 영향을 끼쳤습니다.
과학에서 사용하는 온도의 단위는 절대온도인 캘빈(K)입니다. 섭씨 마이너스 273.15도를 0K로 정의합니다. 이는 영국의 과학자 윌리엄 캘빈 경(1824~1907)이 절대온도 체계를 정립한 공로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당시 그는 온도뿐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세계적인 물리학자이자 전기공학자였습니다. 열 살 때 대학에 입학해 전 과목 수석을 차지한 천재였습니다. 많은 특허를 따고 논문도 발표했죠. 그는 이론 연구에 그치지 않고 많은 측정 도구와 도량형 정립에도 기여합니다. 현재 길이 단위인 미터법에도 그의 손길이 닿아 있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의 상대성 이론은 전자기 방정식을 완성한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1831~1879)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맥스웰에게 마이클 패러데이(1791~1867)의 이론을 소개한 사람이 바로 캘빈입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첨단 정보통신 기술에도 그의 몫이 있는 셈이죠. 실제로 그는 대서양을 잇는 통신망인 해저케이블 설치에도 관여합니다.
캘빈 경은 영국이 그의 공로를 인정해 내린 귀족 호칭이고 원래 이름은 윌리엄 톰슨입니다. 그는 영국왕립학회장까지 오르며 당시 과학계에서 최고 권위의 인물이 됩니다.
그런데 지구 나이에 관한 논쟁에서 그는 전혀 다른 인물이 됩니다. 당시는 성경에 쓰인 사실을 토대로 지구 나이가 약 6000년이라고 봤습니다. 이를 반론하기가 쉽지 않은 시절이었습니다. 과학계조차 지형을 만든 주요 원인이 노아의 홍수라고 인정했던 때죠.
그러다 새로운 관찰과 이론으로 성경을 기반으로 한 주장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 등장한 이론은 지구가 처음에 태양처럼 뜨거웠으나 녹은 상태에서 점차 식으며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는 겁니다. 지구의 냉각 속도와 해수면의 하강을 관찰하고 계산하니 지구의 나이가 늘었죠.
지구 나이는 프랑스의 조르주 루이 르클레르 뷔퐁 백작(1707~1788)에 의해 7만5000년이 됐고 프랑스의 자연사학자 브누아 드 마이예(1656~1738)는 20억 년이라는 파격적인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과학계에 현재 일어나는 현상으로 과거를 설명한다는 동일과정설이 등장했습니다. 이후 홍수에 의한 지구 격변설은 기반을 잃었죠. 하지만 신은 여전히 과학적 사실에 개입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수학자 피에르 시몽 드 라플라스 후작(1749~1827)은 태양계를 수학적 배열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신의 손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믿음이 있었죠. 이런 믿음은 영국왕립협회장인 톰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까 낡은 믿음이 새로운 의견과 뒤섞여 얽혀 있었죠.
톰슨은 학생 때부터 열역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에너지'라는 용어는 톰슨에 의해 처음 사용됐습니다. 그는 열역학이란 학문을 개척했죠. 그의 계산법은 지구가 원래 태양의 일부였고 생성 이후 일정한 속도로 냉각한다는 것이었죠. 그 단서는 광산에서 깊이 내려갈수록 온도가 높아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원래의 열원이 내부에 남아 있다고 생각한 거죠. 그의 방식으로 계산한 지구 나이는 1억 년이었습니다.
영국의 과학자 윌리엄 톰슨(1824~1907)
그런데 이 주장은 지질학자들의 추정과 찰스 다윈(1809~1882)이 진화론에서 추정하는 것에 배치됐습니다. 지금의 험난한 지형을 가진 지구 표면이 생성되고 자연선택으로 종들이 변하고 진화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죠.
톰슨은 진화론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지금의 창조론자들처럼 성서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자는 입장도 아니었습니다. 자기만의 견해를 주장하고 이에 맞지 않은 의견은 짓밟았던 거죠. 그의 생명기원 주장에도 신은 등장합니다. 세균 붙은 운석이 신에 의해 던져져 우연히 시작됐다는 겁니다.
막강한 권위로 무장한 톰슨의 의견은 논쟁과 과학발전에 막대한 부정적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1846년 1억 년으로부터 시작한 지구 나이는 한 사람의 아집에 발이 묶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영국왕립학회장이라는 톰슨의 지위는 이 논쟁을 세기 말까지 무려 70여 년이나 끌어갑니다. 이후 프랑스의 물리학자 앙리 베크렐(1852~1908)이 방사능을 발견합니다. 지구 내부에 열을 계속 공급해주는 열원의 존재가 밝혀진 것이죠. 톰슨의 주장은 종말을 고하기 시작합니다.
19세기 중반~20세기 초는 인류의 과학적 성과 대부분이 쏟아진 시기입니다. 당시 많은 과학자가 톰슨의 논쟁 대상이 돼 멸시와 고통을 받았습니다. 수십 년간 많은 학생이 톰슨의 교과서로 왜곡된 지식을 쌓기도 했습니다.
귀와 마음까지 닫고 자기의 경험과 지식만 옳다고 주장하는 권력자의 영향력은 인류 진보에 부정적으로 작용합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종교와 과학사가 아니더라도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2020이라는 새해 숫자는 무엇인가 큰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위의 권력자들은 여전히 자기들의 주장만 내세우고 내로남불로 상대를 흠잡으며 귀조차 열지 않습니다. 사회구조는 뚜렷한 간극이 있는 상하와 경계가 흐릿한 좌우로 나뉘어 사람들의 희망으로부터 멀어져 있습니다. 게다가 세계는 힘의 균형으로 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죠.
지금의 세계는 한 쪽에서 던진 돌이 반대편에 파동을 일으킬 만큼 서로 얽혀 있어 먼 곳의 고통마저 공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파동이 그저 가난하고 힘없는 내 이웃으로부터 비롯됐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권력과 권위를 가진 지도자, 이른바 큰 산이라 일컬어지는 어른들로부터 시작돼 파동으로 전달되죠. 그런 어른들의 생각과 태도, 그리고 행동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현재를 유사한 과거 사실로 설명가능한 동일과정설처럼 역사는 반복되며 어른들의 과오가 되풀이되는지도 모릅니다. 현재의 불안은 물론 미래의 불확실성으로 그저 평범한 행복을 꿈꾸는 나와 수많은 이웃, 그리고 후대가 불안해 하고 고통과 상처도 받습니다. 잘못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잘못이 되풀이되는 것은 인류에 대한 죄악입니다.
상처받은 우리는 누구에게 사과를 받아야 할까요. 영화 '두 교황'에서 들은 말이 생각납니다. "죄악은 상처이지 얼룩이 아니다. 치료받고 아물어야 하지 용서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사과와 용서로 충분한 게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그 어른들로부터 치유받아야 합니다.
[퍼온 글] / 출처; 아시아경제신문 / 김병민(과학저술가) / 2020.01.29 15:21
겨울바람꽃 (Winter Aconite ; Eranthis hyemalis)은 눈이 채 녹기 전에 노랗게 피는데, 미나리아재비과 식물로 독이 있다.
법칙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대한민국은 법치국가다. 법은 국가의 정체성을 밝혀 나아갈 방향을 큰 틀에서 제시하기도 하고,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기도 한다.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할 당위의 가치가 담긴, 사람이 만든 법칙이 바로 우리가 얘기하는 ‘법’이다. 약하고 강한 징벌을 받을 수 있지만, 어쨌든 어기는 것이 가능은 하다. 어기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면 우리는 법을 만들지 않는다. 자동차의 공중 비행을 규제하는 법을 만들 이유가 없다. 법이 필요한 이유는 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이 따르는 법칙은 다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어길 수는 없다. 손에서 가만히 놓은 물체가 땅을 향해 아래로 떨어진다는 자연법칙은 당위가 아닌 사실의 법칙이다. 내가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생각만으로 돌을 위로 띄울 수는 없다. 사람이 만든 당위의 법칙과 달리 ‘스스로 그러함’을 뜻하는 자연(自然)은 금지하지 않는다. 어기는 것이 가능하지 않으니 금지할 필요가 없다. 인간이 만든 당위의 법칙이 “이렇게 하는 것도, 저렇게 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둘 중 요렇게 하기로 약속해요”라고 할 때, 자연은 “네 맘대로 해봐. 그게 되나”라고 말한다.
확인된 자연현상이 그렇게 관찰되는 이유는 자연의 법칙이 그 현상을 가능케 했기 때문이다. 어긋나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자연은 자연의 법칙이라는 커다란 테두리 안에서 금지하지 않고 허용한다. 동성애는 자연스럽지 않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틀린 생각이다. 자연이 허락했으니 동성애가 존재하는 거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연스럽다. “자연스럽지 않다”는 이유로 동성애를 금지한다는 발상은 돌멩이의 자유낙하를 금지한다는 발상과 다를 것 하나 없는 어불성설이다. 오해하지 마시라. 자연에서 발견되는 모든 것을 허락하라는 것이 절대 아니다. 제3자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는데도, 자신과 달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른 이의 감정을 막겠다는 발상은 야만임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인간이 알아낸 당대의 자연법칙은 시간이 지나면 변할 수 있다. 자연법칙은 우리 머릿속이 아니라, 머리 밖 자연에 존재하는 실재의 반영이라고 생각하는 과학자가 많다. 사람이 존재하지 않아 자연법칙을 발견할 주체가 없던 시절에도 돌멩이는 아래로 떨어졌다. 물론, 시간이 지나 인식의 틀이 바뀔 수 있다. 흙, 물, 공기, 불, 네 종류의 원소가 있고, 흙의 자연스러운 위치는 공기의 아래이므로 돌멩이가 아래로 떨어진다고 설명한 것이 그리스의 철학이다. 뉴턴이 완성한 고전역학은 지구가 중력으로 돌멩이를 잡아 끌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설명의 대상인 자연은 그대로지만, 우리가 자연을 설명하는 방식이 변한 거다. 이후, 뉴턴의 고전역학은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으로 외연을 넓혔다.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자연법칙은 변화와 발전에 열려 있다.
현대에 들어서는 물리학자들이 찾아낸 자연의 법칙을 ‘법칙’이라고 부르지 않는 경향이 눈에 띈다. 뉴턴의 중력법칙이라고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라고 하듯이 ‘이론’이라는 표현이 더 널리 쓰인다. ‘법칙’이라고 하면 인간의 합의에 의해 정해진 당위의 법칙을 먼저 떠올리는 오해를 막자면, ‘이론’이 ‘법칙’보다는 더 나은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론’이라 하면 사람들은 이론의 가변성에 과도하게 주목하는 경향도 눈에 띈다. 누가 어떤 주장을 할 때 “그건 그냥 네 이론일 뿐이야”라고 할 때의 ‘이론’의 의미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의 ‘이론’과 단어는 같아도 그 경중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물리학의 이론은 자연현상을 정합적으로 설명하는 사고의 틀이라는 면에서, “단지 네 이론”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여러 생각의 틀이 모여 구성된 전체인 물리학은 확실성의 정도가 제각각인 다양한 이론들의 모임이다. 빛보다 빠를 수 없다는 이론, 에너지가 보존된다는 이론, 닫힌계의 엔트로피는 증가한다는 이론 등은 물리학의 토대 중 가장 튼튼해, 어느 누구도 타당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한편, 최근 실험으로 관찰된 특정 물리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은 대체 가능한 여럿이 경합하는 약한 확실성의 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가 많다.
자신이 속한 사회가 합의한 당위의 법칙이 외부의 다른 사회에서는 성립하지 않음을 볼 때 우리는 세상을 보는 더 큰 시선을 얻는다. 외계의 지적 생명을 만나게 되면, 나는 그들이 자연을 기술하는 이론의 틀이 궁금하다. 빛의 속도가 일정하다는 것은 우주 어느 문명도 동의하겠지만, 우리가 가진 고전역학의 운동법칙을 그들은 어떻게 기술할지, 우리의 양자역학과 그들의 양자역학은 어떻게 다를지, 난 무척 궁금하다. 자연현상은 같아도, 기술 방식은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다. 같은 것을 보고 다르게 설명하는 외계 지적 생명체와의 만남은 과학의 역사상 가장 큰 도약을 만들 것이 확실하다.
지구에서 본 태양계 행성의 위치 정보를 학습시켰더니 인공지능이 행성 운동의 중심에 태양이 있다는 태양중심설을 스스로 알아냈다는 연구 결과가 최근 발표되었다. 인류에게 수천년이 걸린 태양중심설을 인공지능은 짧은 시간에 발견했다는 점에서 무척 놀라운 결과다. 아직 걸음마 수준이지만, 인공지능이 거둘 미래의 성취가 나는 벌써 궁금하다. 미래의 인공지능이 찾아낼 우리와 다른 자연법칙은 어떤 모습일까. 물리학자가 필요 없는 물리학의 발전이 가능한 세상이 도래하지는 않을까. 이해 없이 예측할 수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물리학의 아름다움을 얘기할 수 있을까.
[퍼온 글] / 출처; 경향신문 / 김범준(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 2020.01.29 20:49
망설임과 신중함
[정도언의 마음의 지도]
인생은 선택입니다. 선택은 대개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일입니다. 고약하게도 그 둘은 서로 정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을 극단적인 두 집단으로 나누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일에 신중한 사람들입니다. 늘 많이, 깊게 생각합니다. 한참 뒤에도 생각에 다시 빠져서 생각 자체가 숙성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겨우 결론을 내립니다. 결론 뒤에도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다시 신중해집니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고, 아는 길도 물어 가고, 얕은 내도 깊게 건너야 한다는 사람들입니다. 이와 달리 모든 일에 지나치게 적극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의 행동을 먼저 하고 생각은 뒤에 합니다.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보통 사람들은 신중함과 적극성 사이에서 갈등하며, 망설이고, 주저하며 살아갑니다.
자신의 소신을 지킬 것인가, 남들이 살아가고 행동하는 식을 따를 것인가. 이 역시 망설임의 대상이 됩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안 보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런저런 일을, 이런저런 이유로 망설이며 살아갑니다. 그 와중에 어떤 사람들은 영리하게도 ‘소신 따로, 행동 따로’를 삶의 전략으로 선택합니다. 사회적 공정의 차원을 논하지 않는다면 개인의 갈등 관리 차원에서는 그것도 한 가지 방법일 수 있겠습니다만.
‘망설임’은 ‘이리저리 생각만 하고 결정하지 못함’입니다. 정신분석적 용어로는 ‘양가감정(兩價感情)’이라고 합니다. 같은 일, 사람, 대상에게 두 가지 상반되는 감정을 느끼는 상태를 말합니다. 망설임이든 양가감정이든 뒤집어보면 상반되는 두 힘이 충돌하면서 마음에 흙먼지를 일으켜서 제대로 못 보도록 막고 있는 겁니다.
망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려면 누구나 망설입니다. 누구나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 전에 망설입니다. 둘째, 실패에 대한 걱정도 작용합니다. 성공을 포기하고 실패를 택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러니 실패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망설일 수밖에 없겠지요. 셋째, 망설임은 자율성이 부족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느 경우에도 문제는 시간입니다. 망설이는 사람은 늘 시간에 쫓깁니다. 누구도 시간의 흐름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통제 불능인 시간에 맞서 그나마 통제 가능한 결정을 서둘러야 할 시점이 점점 다가옵니다. 차라리 서둘러서 행동을 해버리고 실수는 나중에 자책하겠습니까? 신중하게 생각하다가 행동할 수 있는 시간을 허비하고 후회하겠습니까? 수술 환자를 앞에 두고 망설임과 결단 중에서 선택해야 하는 외과 의사의 결정적 순간과 같은 도전이 우리에게 닥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고 봅니다.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망설임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진단이 중요합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을 빌려 설명해 보겠습니다. 근본적으로는 망설임이 쓰고 등장하는 ‘신중함의 가면’을 과감하게 벗겨야 합니다. 사려 깊고 신중해 보이지만 뒤집어보면 신중함이 때로는 망설임의 보호막임을 우리 모두 경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좀 더 깊게 분석하면 이렇습니다. 이루고 싶은 소망이나 해야만 하는 일을 망설이고 있다면 일단 ‘마음속 웃어른’인 초자아(超自我)가 개입한 겁니다. 자아(自我)가 소망, 초자아, 현실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해야 하지만 허약하거나 정지돼 있는 상황입니다. 망설임은 부족하거나 방전된 자아 활력의 문제입니다. 재충전이 필요합니다. 그 뒤에도 계속 망설이고만 있다면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비어 있는, 골다공증 같은 자신의 부족한 능력이 세상에 알려질 것이 겁나서 주저하고 있는 겁니다. 마치 허물어진 집을 고치겠다고 어설프게 나선 목수와 같습니다. 필요한 연장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목수의 정체성은 공사 현장을 혼돈으로 빠뜨립니다.
망설이는 사람의 마음은 이미 스스로 정해 놓은 틀이 지배합니다. 틀을 벗어나면 위험할 것이라는 근심으로 차 있습니다. 결정을 계속 미루면, 결국 난처해집니다. 난처해지면 마음이 혼란스러워서 판단력이 떨어집니다. 일이 풀리는 선순환이 아닌, 일이 더욱 꼬이는 악순환으로 끌려들어 갑니다.
망설임을 둘러싼 갑옷은 불확실성입니다. 불확실성 중에서도 제일 크게 영향을 주는 것은 현실 여건이 아니고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불확실성입니다. 불확실성을 극복하고 생각에서 벗어나 행동으로 옮기는 방법을 하나만 든다면? 망설임을 이기는 적극성은 놀랍게도 틀에 박힌, 일상의 작은 힘에서 나옵니다. 그러니 망설임의 대상을 틀에 박힌 일상의 일로 조금씩 모습을 바꾸어 시작하고 차차 쌓아나가면 망설일 필요가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마치 양치질이나 세수하기가 일관성 있는 일상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자아의 행동력, 실천력을 서서히 배양할 수 있다면 효과적입니다. 말은 쉽고 이루기는 어렵습니다만. 소소하더라도 반복 실천이 필요합니다. 올해 어떤 일을 계획하셨나요? 신중함을 내세워 망설이고만 계시나요? 일단 시동을 걸고 움직인 후에 더 생각하실 건가요? 벌써 첫 달이 훅 지나고 있습니다.
[퍼온 글] / 출처; 동아일보 / 정도언(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 2020-01-29 03:00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1853-1890)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