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높이 푸르르고 서늘한 바람이 간간히 불어오는 가을은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다.
온겸대장님 따라 관악산야간산행만 다녔는데 이번 주말 마침 시간이 났다.
어디로 가볼까 생각하는 순간 데이비스대장님이 떠 올랐다.
데대장님은 올해에만 해외원정을 7번 하신 지구여행자이고
국내 서울,북한산둘레길. 금오도비렁길. 영남알프스종주.대덕산금대봉.무등산.축령산.운탄고도완주 등
버킷리스트에만 있는 명승 경관을 찿아 안내 해 주시는 전국구길잡이시다.
대장님과는 첫 만남이라 깨끗히 차려입고 한성대역에 조금 빨리 도착하였는데 곧바로 대장님이 오셨다.
원정.종주 이런 쎈 단어와 어울리지 않게 첫 인상이 남쪽에서 불어오는 부드러운 춘풍(春風)이다.
이래서 대장님 산행에는 오랜 길 벗들이 함게 하는구나.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1396년 천도를 하고선 이곳 남산 팔각정에 목멱(木覓)사당을 세웠는데
일제와 병탄되고 나서 사당은 인왕산 선바위옆으로 옮겨져 국사당(國師堂)이 되었다.
동북변방 출신 태조는 이(李)씨 성의 수호신 나무 목(木)의 신당에서 한양도성과 왕실 안녕을 빌었다.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만득이도 등산 따라 다니면서 옆 사람들의 소소한 행동들을 얼핏 보게 되는데
사진 뒷편 왼쪽 끝 '검은돌'(黑石)님이 콜라 2통을 냉장 시켜 와 이 곳에서 대원들의 갈증을 풀어줬다.
가만보니 한 두번 베푼 공덕이 아니었다.
태조가 사당에 제사를 통해 나라의 흥성을 빌 만큼의 정성이 검은돌님의 콜라두통에 가득차 있었다.
앞줄 왼쪽에는 사람들의 비타민이 되겠다는 마음씨를 가진 '난비타민'
가운데는 건축기술사여서 마츄피츄의 공중정원을 꼭 한번 가보는게 꿈이라는 '마츄피츄'
- 이날 나는 점심을 마츄피츄와 남대문 막내횟집에서 반주를 곁들였다.
그 오른쪽으로 사진포즈을 알아 안경테를 메만진 척 하시는 분이 데이비스대장님이다.
데대장님이 저렇게 여유롭게 대장노릇을 하고 있는 이유는 순전히 짝꿍 '대련' 언니 때문이었다.
몇 십년을 같이 살았는데 서방님이 다른 대원들에게 잘 해주는 것을 보면 열통이 터져
남편 꼴 뵈기도 싫을 텐데 행여 순둥이같은 서방님이 다른사람에게 흠이라도 잡힐 샤
잡다한 것 같아도 중요한 일을 쥐도새도 모르게 조용히 챙기는 모양이다.
이 날도 중간에 합류하는,후미에 뒤쳐진,앞서가는 대원 챙기기와 맛있는식당 알아보기. 밥값 계산에
더하여 화장실 알려주기 까지 손과 발과 휴대폰이 분주히 움직였다.
노오랗게 물들여 가는 가을빛이 완연한 남산길을 오르는데 국립극장에 서초패왕 항우와 우미인이 이별하는
뮤지컬 " 패왕별희(覇王別姬)" 공연중이었다.
" 대련누님, 가을은 쓸쓸한 것이 이별하기 좋은 계절에요.삼사십년을 같이 살았으면 살만큼 살아준거에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이란 책을 써서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신
혜곡 최순우 선생님은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 는 책에서
" 온 세상에 가득 차 있는 자연과 조형의 아름다움을 자기의 안목이 어느 만치 가늠 할 수 있고
또 그것을 어느 만치 간절하게 느낄 수 있는냐에 따라 인생의 즐거움이 크게 달라진다." 라 하였다.
최순우는 평생을 아름다움에 살다 아름다움에 간 사람이다.
평생 아름다움을 찿았고, 아름다움을 키웠고,아름다움을 퍼 뜨렸다.
혜곡이 찿고 키웠고 퍼 뜨렸던 아름다움은 우리 것이었다.
우리 것의 아름다움 이었다.
우리 것이라서 저절로 알고, 다 아는가? 아니다.
아름다움은 그냥 오지 않는다.
아름다움의 '아름'은 '알음' 이자 '앓음' 이다.
앓지 않고 아는 아름다움은 없다.
알음을 아름답게 하려고 그는 앓았다.
(같은 책 초판 서문 발췌)
조선왕조 500년 도읍지인 한양을 에워 싼 한양도성은 그 역사성 뿐아니라
오늘날 까지 문화적으로도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수도를 정하기 위한 태조와 정도전.무학.하륜의 다툼부터
관악산의 화기를 억누르기 위해 명필였던 양녕대군이 세로로 崇禮門의 편액을 써서 남대문에 현판했다는 이야기,
단종을 멀리 여의고 남편을 그리워하며 정순왕후가 올랐던 동망봉,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경복궁에 들어 온 인왕산 호랑이,중종반정에서 남편였던 진성대군을 구했으나 반정군의 명분에 의해
왕후자리에서 쫓겨나 경복궁을 산책하는 중종을 향해 아내를 잊지 말라며 단경왕후 신씨가 붉은 치마를 걸었던 치마바위,
인조반정에서 김류 이귀 김자점 등이 인조로 등극한 능양군의 쿠테타군 700명과 함께 넘어와서 이름 지엇던 彰義門,
지대가 낮아 땅의 기운을 돋기 위하여 다른 세 글자의 사대문과 달리 갈 지(之)를 더 한 興仁之門,
인구 10만명이 살아 무덤을 만들수 없어 도성안의 시체를 밖으로 내 보내는 시구문였던 光熙門,
도성 밖의 10리를 그린벨트로 묶어던 성저십리(城底十里).
한양도성은 서울일대 역사문화탐방 일번지 되겠다.
예로부터 한양의 백성들은 경치가 좋은 곳에 올라 봄이면 꽃놀이를 하거나
맑은하늘 가을에는 성곽길을 따라 돌며 순성(巡城) 놀이를 즐겼다.
한수 이북에 조성된 한양은 지리적으로 북악산.낙산.남산.인왕산의 내사산(內四山) 과
용마산.관악산.덕양산.북한산의 외사산(外四山)이 외호하며 지형을 갖추었다.
태조.무학.삼봉 3인이 정궁의 위치를 정하기 위하여 인왕산에 올랐다.
무학은 인왕을 주산으로 하여 동래 방향의 왜적을 방어하자 하였고,
삼봉은 모름지기 임금은 남면을 하여야 한다며 북악을 진산 삼고 남산을 안산으로 하자 아뢰었다.
태조가 말씀 하시길 "과인이 일직히 남원 황산에서 왜구를 토벌하였으니 주례대로 북악을 주산으로 하라" 했다.
비록 무학이 태조의 불문 스승이엇으나 조선은 사대부가 세운 유학의 나라였다.
우연스럽게도, 무학의 말대로 정확히 200년후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 동쪽으로부터 시작됐다.
종묘사직의건립과 정궁의건축, 도성의축성을 책임진 정도전은 지역별로 부역자를 징발했다.
제일 먼저 왕실 조상들의 위패을 모시는 종묘를 건립하고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을 만들었다.
커다란 복이 가득하라는 경복궁에 왕이 근면하게 정사를 볼 수 있도록 집무실 근정전을 지었다.
1396년에 경상 전라 동북의 백성을 징발하여 도성을 97구간의 나눠 지역별로 책임 시공을 하게 하여
100일 만에 도성을 완공하였다.이 때 구간별 설계 감리 시공 책임소재를 돌에 새겨 남긴 것이 각자성석(刻字城石)이다.
전체길이 40리가 넘는 18.6키로의 성곽에 크게 사대문과 사소문을 두었다.
유교의 인간이 해야할 도리인 오상의 인.의.예.지.신의 글자를 넣어 사대문을 정하니
흥인지문.숭례문.돈의문.숙정문과 가운데에 보신각을 설치 하였다.
백성이 글을 알아서는 통치가 어렵다며 처음에 북대문을 숙정문이라 하였고
훗날 청나라가 어수선한 틈을 타 숙종이 성곽을 유지 보수하고 북한산성을 쌓아 북방의 침입을 경계하였다.
이 때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을 축성하였은데 세검정 근처의 문을 홍'지'문이라하여
인의예'지'신 오상을 완성 하였다.
사소문으로는 동남대문 사이의 광희문, 남서대문 사이 소의문, 서북대문 사이 창의문,북동대문 사이에 혜화문이 있다.
소싯적에 서울 올라와 봤던 기억나는 문 이라곤 남대문과 광화문만 있었는데 이번에 도성길을 답사하며
사대문.사소문과 내사산의 위치와 개념이 서게 되었다.
사람은 알고 싶어 하는 앓음과 알음을 통해 아름다움을 느낀다.
첫댓글 다시 읽어보아도 명품 내용입니다.
전문해설가 보다 박식하고, 일반인인 우리가 알아듣기 쉽게 이해시키는 능력은 대단하십니다.~
다음에도 역사탐방을 해보고 싶은 욕망이 생깁니다.~
칭찬과 격려는
용기와 발분심을 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