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어도 걷는 사람 (외 1편)
손현숙
당신의 왼손은 나의 오른손이다 우리는 손을 잡고 반대쪽으로 걷는다 가끔은 당신을 잃어버리기도 하는데, 들판을 가로지르는 나무들 하얗게 손사래 친다 생각난 듯, 이름을 부르면 모르는 얼굴이 뒤돌아다 본다
당신은 어깨를 찢어서 부글거리는 흰피, 휘파람을 불면 꽃들은 만발한다 가을 개 짖는 소리는 달의 뒷면에서 들려오고 눈을 뜨지 못한 강아지는 꿈 밖으로 나가서야 젖꼭지를 물 수 있는데
담장 밖에 둘러쳐진 오죽의 둘레는 그림자가 없다 대나무 숲으로 돌아가야 이름이 돌아오는데, 당신은 멀어도 걷는 사람 도무지 말을 모르겠는 여기, 눈빛으로 기록된 말들 속에서 없는 당신은 다정하다
여성 전용 남자 팔아요
당신이 애인을 바꿀 때
나는 굽 높은 구두를 산다
당신이 애인을 만질 때
나는 구두의 장식을 붙였다 뗐다 한다
그러다 살짝 흠집 파이면 매장으로 내달려
조금은 거만하게 그러나 재수 없게는 말고
맨발을 내보이며 나를 기억하는지?
맨숭거리던 그 아이 내 발을 보자 놀랍게도
볼에 발간 피가 돌잖아
사방을 돌아봐도 여자 점원 하나 없네
애인보다 선명하고 등빨이 단단한
한련화 입술처럼 나긋나긋한 꽃
맨종아리 살살 쓸어주면서
상큼 발랄하게 자기야로 퉁치는 수작
너무 클래식하잖아 쫑알거리는 상술에
힘차게 카드를 긁네, 긁히네, 긁힌
고객님 앞에 중세의 기사처럼 무릎을 반으로 꺾고
발만 만지작, 만지작거리네
여기는 자본을 딛고 가는 구두, 꽃 파는 가게
당신은 실컷 애인을 바꾸시라 나는
꽃아, 오늘의 구두는 얼마?
―시집 『멀어도 걷는 사람』 20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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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현숙 / 서울 출생.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멀어도 걷는 사람』. 사진 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마음 치유의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