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심(3)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8:26-30 / 박상훈 목사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8:18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난 주간 우리에게 현재의 고난에 대해서 말씀해 주었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장래의 영광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현재 겪는 고난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쉽게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확신하면 그만큼 현재의 고난은 쉽게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에 살던 인디언들 가운데 아파치라는 유명한 부족이 있었습니다. 미국 남서부 지방에 주로 살던 인디언들로서 대단히 강한 부족이었습니다. 그들과 백인들 사이에 있었던 아파치 전쟁은 미국의 서부개척사에 있어서 가장 치열했던 전쟁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이 부족에게는 하나의 특징이 있었습니다. 절대로 추장직은 세습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든지 그 부족 가운데 가장 강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언제나 추장으로 추대를 받았습니다.
한 번은 어느 추장이 나이가 많아서 은퇴를 앞두게 되었습니다. 그를 뒤이어서 추장직에 오르고 싶어하는 여러 사람들이 후보자로 나섰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강한 사람을 추장으로 세우기 위해 여러 가지 시합이 벌어졌습니다. 말타기, 창던지기, 활쏘기 시합도 있었습니다. 이제 많은 후보자들 가운데 세 명으로 추려지게 되었습니다.
최종적으로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뽑기 위해서 마지막 시합이 벌어졌습니다. 추장은 세 사람에게 멀리 바라보이는 산꼭대기를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너희는 저 산꼭대기에 올라갔다 내려와라. 그리고 내려올 때는 너희가 정상까지 올라갔다는 증표를 하나씩 가져오도록 해라."
대단히 가파르고 험한 산이었습니다. 아무도 올라가 본적이 없는 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세 사람은 추장이 되겠다는 일념 하에 죽을 각오를 하고서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왔습니다. 이제 부족 앞에서 자기들이 가지고 온 증표를 보일 차례가 되었습니다. 첫째 사람은 산꼭대기에서만 자라는 특별한 풀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는 그것을 추장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산꼭대기에 올라갔더니 이런 특별한 풀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둘째 사람의 손에는 돌멩이 하나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산꼭대기에는 이렇게 매끈매끈한 돌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셋째 사람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추장은 의아스럽게 생각하면서 물었습니다.
"아니, 너는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증표를 하나 가져오라는 내 말을 듣지 못했느냐?"
셋째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도 분명히 그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우리 마을의 반대 방향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멀리 아주 크고도 아름다운 강물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주변의 땅은 너무나도 비옥했습니다. 그곳을 바라보면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우리 부족의 거주지는 즉시 그곳으로 옮겨야 되겠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산꼭대기에 올라간 증표로서 그 비옥한 땅을 제 마음에 품고 돌아왔습니다."
그 소리를 듣던 추장은 그 즉시 모든 사람들 앞에서 선언했습니다.
"나 다음의 추장은 바로 너다!"
왜 그랬겠습니까? 미래를 볼 줄 아는 사람, 마음에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 부족의 추장으로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스코틀랜드의 선교사였고 탐험가였던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1841년 흑암의 대륙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오지에서 복음을 전하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는 말년에 나일강의 근원지를 밝히기 위해서 잠비아의 깊은 밀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그에게서 연락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생사를 알지 못해서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1871년 헨리 스탠리라는 탐험가가 탐험대를 조직해서 리빙스턴을 찾아내기 위해 아프리카로 들어갔습니다. 1년 동안 강행군을 했습니다. 겨우 밀림 속에서 병들어 앓고 있는 리빙스턴을 만났습니다. 그때 그는 식료품과 의약품이 거의 다 떨어진 채 심한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탠리는 오랫동안 그와 함께 머물면서 극진히 그를 간호했습니다. 드디어 리빙스턴은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스탠리는 떠나기 전에 그에게 간절히 권면했습니다.
"선교사님, 아프리카의 복음사역을 위해서 30년 간 헌신해 오셨으니까 이제 그만 하시고 저와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말을 듣던 리빙스턴은 아주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아닙니다. 제게 있어서 아프리카의 선교사역은 헌신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큰 특권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이 영광스러운 일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벅차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스탠리는 홀로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로부터 약 1년이 지난 1873년 5월 1일,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리빙스턴은 침대 곁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깍지낀 채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으로 고요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장래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은 현재의 고난을 쉽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을 기다리는 사람은 얼마든지 현재의 고난을 감수할 수 있습니다. 마지못해서 고난 당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특권으로 생각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 얼마나 놀랍고 확실한지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장래의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과거형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분명하고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도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 얼마나 확실한 것인지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편의상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간단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우리에게는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 계십니다.
고난을 겪고 계십니까? 외롭지 않습니다. 나 홀로 고난을 겪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 계십니다. 26∼27절 말씀입니다. 26절을 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성령께서 우리의 보혜사가 되셔서 늘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육적으로도 약하지만 영적으로도 얼마나 약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지만 영적으로 한없이 연약합니다. 어느 정도까지 연약합니까? 바울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 한 가지 예를 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할 정도로 우리는 연약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돌이 떡인 줄 알고 돌을 달하고 기도할 때도 있습니다. 뱀이 생선인 줄 알고 뱀을 달라고 기도할 때도 있습니다.
한 번은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그들의 어머니 살로메를 모시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절하면서 무엇인가 구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뇨?"
살로메는 나서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그들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고린도후서 12장에 있는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세째 하늘인 낙원에 이끌려 갔습니다.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광경을 그곳에서 보았습니다. 지극히 신비로운 체험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이 그것 때문에 자고하면 안되니까 그의 육체에 찌르는 가시를 허락하셨습니다. 질병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기 육체에서 가시가 없어지기를 세 번씩이나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응답하셨습니까? 고후12:9의 말씀입니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사도 바울과 같이 영적인 사람도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라고 하면서 "우리"라는 대명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기도 그 가운데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할 정도로 연약합니다. 우리는 무조건 건강하면 좋은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건강하기 때문에 범죄하는 자리에 이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그저 돈벌고 출세하면 다 좋은 줄 압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영혼이 병드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연약합니다.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십니다. 26절 하반부입니다.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는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할 정도로 연약하지만 성령께서는 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친히 간구해 주십니다. 물론 우리는 그 간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해 주십니다. 우리가 영화롭게 되는 그 시간까지 끊임없이 계속해서 성령은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십니다. 어떻게 간구하십니까? 2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의 뜻과 하나님의 뜻은 100%일치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반되는 기도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서툴고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그것을 고쳐 간구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는 늘 아름다운 향기가 되어서 하나님의 보좌로 끊임없이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십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입술에서 나온 잘못된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서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해 주시는 내용에 귀를 기울이고 계시는 것입니다.
넘어가서 3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지금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십니다. 우리 속에서는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또 친히 간구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위에서 우리를 잡아당겨 주시고, 성령께서는 밑에서 우리를 밀어주십니다.
고난을 겪고 계십니까? 우리는 외롭지 않습니다. 나홀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간구해 주고 계십니다.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속에서 친히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반드시 현재의 고난을 이기고야 말 것입니다. 영화로운 그 자리에 이르고야 말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아는 것이 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현재의 고난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2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는 연약해서 고난을 당할 때 마땅히 빌바를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왜 내가 이 고난을 겪어야 하는가? 이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가?" 우리가 고난을 겪을 때, 이것을 몰라서 참으로 괴롭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바를 몰라서 그저 엎드려 "주여! 주여!"라고 소리만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내놓고 나면 "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그 가운데 있었구나! 하나님께서 그래서 그때 그 고난을 내게 주셨구나!"라면서 그 사실을 깨닫고 감사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가 알기 때문에, 현재의 고난이 장차 내게 유익이 되고 선이 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의 고난을 쉽게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요셉의 삶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형들에 의해서 애굽에 종으로 팔렸습니다. 보디발의 아내 때문에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요셉은 거기에서 바로의 술맡은 관원장을 만났습니다. 그의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맡은 관원장은 요셉의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감옥에서 2년 동안 더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요셉이 당한 모든 고난이 그를 영화롭게 하는 길로 인도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요셉의 삶만 그렇습니까? 욥의 삶을 통해서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의 삶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지나간 체험을 통해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의 섭리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그 자체만을 생각하면 그것은 저주스러운 것입니다. 본시 십자가는 죄수에게 주어진 형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우리의 모든 죄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깨끗하게 씻음을 받았습니다. 사탄의 노예가 되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멸망의 자식이었던 우리가 천국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죄인 되었던 우리가 의롭다하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누구에게나 다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만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입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세상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왜 하나님이 우리를 나쁜 길로 인도하시겠습니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우리에게 내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마치 우리 한 사람만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 각자 모두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나쁜 길로 가도록 내버려두지 아니하십니다. 그저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닷가에 가면 파도가 많이 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복을 따는 해녀는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바다 속으로 들어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다 속에는 파도가 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바다 표면에만 파도가 치는 것입니다. 바다 속 깊은 곳을 흘러가는 물줄기는 표면의 파도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을 피상적으로 바라다보면 고난의 물결이 쉬지 않고 밀어닥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 깊은 곳에서는 하나의 거대한 하나님의 섭리의 물줄기가 도도히 한쪽 방향을 향해서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선을 향해서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영광을 향해서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기 때문에 현재 겪는 고난을 겁먹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현재의 고난도 쉽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우리가 영화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작정하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인도하시는데 누가 그 뜻을 감히 거역하겠습니까? 이미 우리는 영화롭게 되기로 작정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이루고야 마십니다. 29∼30절 말씀입니다. 여기에 보면 구원의 과정이 다섯 가지 단계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첫째로, "미리 아신"입니다. 둘째로, "미리 정하셨으니"입니다. 셋째로, "부르시고"입니다. 넷째로, "의롭다 하시고"입니다. 다섯째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입니다. 이 다섯 가지는 독립되지 않았습니다. 하나의 고리로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번 살펴봅니다. 미리 아신 그들을 미리 정하셨습니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셨습니다.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셨습니다.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다섯 가지 단계의 주어가 누구입니까? 사람인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전혀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도 하에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밀고 나가십니다. 그러므로 다섯 가지 고리는 절대 끊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중단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정하셨으면 반드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부르시기는 하셨는데, 의롭다고 하시지 않는 경우는 결코 없습니다. 일단 의롭다 하셨으면 반드시 영화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섯 가지 단계를 일명 "The Golden Chain(황금의 연쇄고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구원이 우리가 하는 행동에 따라서 좌우된다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인간이 얼마나 연약합니까? 얼마나 변덕스럽습니까? 믿음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고, 열심도 붙었다 떨어졌다가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만일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삶에 따라서 결정되어진다면 우리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안에 떨 필요가 없습니다. 안심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원의 모든 과정은 하나님이 친히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밀고 나가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 하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홀로 주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얼마든지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과거형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편에서 보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이미 그렇게 확정하신 것입니다. 알파와 오메가되신 하나님은 시작하시면 반드시 끝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가 그 자식을 사랑할 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이를 키워서 그 아이가 부모의 말을 잘 듣고 또 효도를 하면 호적에 올려주고, 또 아이가 말을 잘 안듣고 효도도 잘 하지 않으면 호적에 올리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태어나기도 전에, 어머니의 배속에 있을 때부터 이미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나서 키우는 것입니다. 사랑받는 자녀가 될 수 있도록 양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전에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택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받는 자녀로 키워 양육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하나님이 언제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했습니까? 우리가 연약할 때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경건하지 못할 때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도 사랑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적인 사랑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변덕스러움에 좌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밀고 나가시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는 영화롭게 되기로 작정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우리를 영화롭게 하셨습니까? 29절에 보면 두 가지 목적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영화롭게 되는 그날,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 곧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영적으로도 육적으로도 닮게 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29절 하반부입니다.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로서 영화롭게 되는 그날, 우리는 하나님의 맏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모든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머리에 있는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다 벗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좌 앞에 던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세무궁토록 우리는 성삼위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우리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다 이겨냅니다.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반드시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이따금씩 꼭 보고 싶은 스포츠중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없어서 그것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합니까? 재방송을 봅니다. 재방송을 볼 때는 마음이 느긋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이미 이긴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졸일 필요가 없습니다. 느긋한 마음으로 즐기면서 볼 수 있습니다. 또 연속극 중에 사극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학교에 다니면서 역사시간을 통해 이미 결과를 어느 정도는 배웠습니다. 그래서 나쁜 사람이 아무리 못된 방법으로 주인공을 해하려고 해도 주인공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주인공이 영화롭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극을 볼 때면 마음이 편안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화롭게 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고난은 아무리 극심하다 할지라도 우리를 넘어뜨릴 수가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영화롭게 되기로 작정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면서 현재의 고난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날마다 느긋한 마음으로 승리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
로마서 8:26-30 / 손상률 목사
옛날 사람들은 「뒷동산 호랑이가 돌봐주더라도 도와 주는데가 있어야 산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인간이 자율적으로 살수 없는 자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결코 세상을 승리하며 살수 없는 존재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에게 힘이 되는 대상을 찾아서 거기에 의지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아닌 그 어떤 대상도 진정한 도움이 못된다는데 유의하여야 됩니다. 이사야 45:20에는 "나무 우상을 가지고 다니며 능히 구원치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는 자들은 무지한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45:5-7에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도와 주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이사야 41:10에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이 너를 붙들리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기자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고 하였습니다(시121:1-2).
환난이 극심하고 재난과 질고가 그침이 없는 세상 가운데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사는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옛날 출애굽의 영도자 모세는 이스라엘을 이끌고 40년동안 겪었던 광야 여행의 과정을 회고하면서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신33:29).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곧 성도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총애와 도우심을 받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세상을 사는 사람들 중에 가장 큰 배경을 가진 자들이요 가장 큰 행복의 조건을 갖춘자들입니다.
Ⅰ. 도우시는 이유
본문 말씀 중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누리게되는 특권을 논하면서 이를 말로 다 할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독생자도 우리를 위하여 아낌없이 내어 주셨습니다(롬8:32).
따라서 어떤 세력이 우리를 해하려하여도 해를 당하도록 내어주지 않으시고 끝까지 보호하신다고 하였습니다(롬8:33-34).
(1)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운동을 주도하였던 모세는 광야여행 40년동안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보호 하셨던 일을 회고하면서 그것은 모두 그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신명기 7:7-8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라고 하였습니다.
인간 세상에 일어나는 미움과 다툼, 갈등과 전쟁같은 것은 그 어떤 명약으로도 치유가 불가능하지만 오직 사랑만 있으면 조건없이 치유됩니다.
로마서 8:35에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8:37에는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하였습니다.
(2)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14-15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자녀를 향한 어버이의 사랑은 설명이 안되는 것이며 가히 동물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 표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였습니다(마7:9-11).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고 도와주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그중에도 자녀가 병약하거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경우일 때는 모든 것을 전폐하다시피 거기에 매달리곤 합니다.
부모는 자식이 고통당하는 것을 보면 밥맛을 잃고 잠을 못이루면서 할수만 있다면 그것을 대신 맡아주고 싶은 심정으로 애를 태웁니다.
그래서 옛말에 "열 자식은 한 부모를 못 섬겨도 한 부모는 열 자식을 돌본다"고 하였습니다. 한편 부모의 사랑이 아무리 위대하고 숭고하더라도 도울 힘이 없을 때는 어찌할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불가능이 없는 권능으로 그의 자녀들을 도우십니다(사49:15-16).
(3) 하나님의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17에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된 우리를 하나님의 기업을 이어받게 될 후사로 지정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기업을 계승할 후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도하시는 바를 이루어야될 책임이 있습니다.
옛날 왕조시대에 황제가 왕세자를 책봉하게 되면 황제의 대업을 이루어 갈수 있도록 훈련을 시키는가하면 그의 신변을 철저하게 보호하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수행할수 있도록 책임을 맡기시고 또 그것을 감당할수 있게 능력을 주셨습니다(출19:5-6). 그리고 어떤 경우에 처하든지 그의 천사를 보내서라도 지키게 하시며 보호하여 주십니다(행12:7-11).
Ⅱ. 도우시는 방법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도우실 때 전능하신 하나님의 성향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역사하십니다. 일반적인 경우는 자연의 은택을 입혀 주셔서 사람들을 위시하여 그가 지으신 모든 피조세계에 골고루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게 하여 주십니다(행17:25-27). 그 중에도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된 사람들에게는 보통 사람들이 입지 못하는 특수한 은혜의 도우심을 적용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1) 말씀으로 도우십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말씀을 주셨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입니다.
본서를 기록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특별계시의 산물인 성경말씀을 자기 백성에게 주시고 이것을 통하여 무궁무진한 축복을 행사하게 하셨다고 가르쳤습니다. 로마서 3:1에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향하여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하고 불만의 소리를 발하고 있는데 여기에 대하여 바울은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라"고 하였습니다(롬3:2).
하나님께서는 계시하신 말씀을 통하여 자기 백성에게 도움을 주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둔한 자에게 지혜를 준다고 하였습니다(시19:7). 또한 그 말씀이 밤중같이 캄캄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그 나아가는 길에 빛이 되고 발에 등이 되어 밝은 세상을 살수 있도록 도와 줍니다(시119:105). 디모데후서 3:15-16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도록 지혜를 공급해주며 또 하나님의 사람들을 온전케하여 준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지혜와 분별력을 행사하게 하시며 선과 악을 가려서 행동하게 하시고 또한 의를 추구하게 하시며 어떤 경우에도 담대함과 용기와 인내력을 발휘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밀레도에 모인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 설교를 하면서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행20:32).
(2) 성령으로 도우십니다.
본문 말씀 26절에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우리들을 도우시기 위하여 성령의 임재를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부활 승천하신 후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고 자기 백성들을 도와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26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1-4에는 성령을 강렬한 불꽃으로 또는 급하고 강한 바람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는 성령의 하시는 역할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성령의 강한 힘과 능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성령의 힘이 성도들에게 주어질 때 불가사의한 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스가랴 4:7에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비결은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하였습니다(슥4:6).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 자들입니다.
로마서 8:14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8:9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 있는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미리 아시고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면서 필요한 모든 은사를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26-27절).
(3) 교회의 관리와 지도를 통하여 도우십니다.
바울의 교회론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교회는 몸이며 성도들은 몸에 속한 지체(肢體)라고 하였습니다(엡1:22-23).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모두가 다 교회의 회원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2:19에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집의 권속들을 관리하도록 청지기(종)에게 임무를 맡기셨다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4:45에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줄 자가 누구뇨"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0:14-15에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자기의 양들을 위하여 목자를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성실하게 관리하도록 분부하였습니다(요21:15-17).
이와같은 분부를 받은 목회자들은 교회 안에서 주님의 양된 회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교양으로 양육하며 관리합니다(시23:2).
따라서 성도들은 목회자가 인도하는대로 따라 가며(계14:4) 그 말씀과 치리에 순종하므로 은혜로운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Ⅲ. 도우시는 결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세상을 살고 있는 성도의 경우 승리적인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에 부응하게 됩니다. 이사야 43:2-3에는 "네가 물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저들을 빈틈없이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시는 하나님께서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하라 그들은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사43:7).
(1)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추구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특징은 구속받은 은혜에 대한 감격으로 하나님께 헌신과 봉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교의 경우 모두가 하나같이 인간 본위의 신앙행위를 추구합니다. 그것은 종교의 목적이 사람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생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삶의 목적을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에 집착하고 있습니다(고전10:31).
이와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여 복을 받겠다는 이기적인 목적이거나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벌을 받을 것이 두려워서 억지로라도 하여야 되는 강박관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미 받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 크신 은총에 대한 감격이 마음 깊은 곳에서 발동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기쁨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 하였습니다(고후5:13-14)
(2) 선한 일에 열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기키는 자는 반드시 이웃을 사랑하고 도와주며 선을 행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마22:37-40).
요한 1서 4:20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디도서 2:14에는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한편 야고보는 "사람이 선을 행할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고 하였습니다(약4:17).
(3) 축복의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년 선지 예레미야를 부르시고 그를 악한 세상으로 내어 보내실 때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렘1:8). 그뿐 아니라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분부받은 바 자기의 사역을 다했을 때 그를 승리적 삶의 주인공으로 높이 세우겠다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 1:18-19에 "보라 내가 오늘날 너로 그 온땅과 유다 왕들과 그 족장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도여러분 !
하나님의 자녀된 여러분들이야말로 세상에서 크게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믿음의 승리를 보장받은 자요 또한 두고두고 축복의 증거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3:43에 "그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같이 빛나리라"고 하였습니다.
성장한 모습
로마서 8:26-30 / 김상복 목사
여러분은 누구를 닮으셨습니까? 아버지를 닮으셨습니까 어머니를 닮으셨습니까? 아니면 할머니나 할아버지, 누구를 닮으셨습니까? 아마도 닮은 분이 있다면 그 분이 여러분을 참 좋아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 가운데서도 여러분을 아주 닮은 자녀가 있지요? 아이들이 여럿이면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자신을 닮은 아이들에게 정이 더 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불행하게도 저희 집에는 저 닮은 아이들이 없습니다. 참 섭섭하더군요. 아이들이 셋인데 그 중에 하나라도 나를 좀 닮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해서 연구하고 찾아보고 또 찾아봐도 닮은 곳이 없더군요. 그런데 첫째 아이의 손이 제 손을 닮은 것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기쁘던지! 첫째 딸하고 악수를 하면 그 손이 마치 제 손처럼 딱 들어맞습니다. 둘째 아이는 자기 엄마를 빼 닮았습니다. 생긴 모습이나 말하는 것이나 행동까지 똑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딸아이를 볼 때마다 그 엄마가 얼마나 좋아할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의 장점을 닮았다는 말을 들으면 참 기쁩니다. 장점을 닮았는데 그것도 우리보다 2배, 3배나 더 좋게 닮았다고 하면 꼭 하늘에 붕붕 뜨는 기분입니다. 제가 성도들을 만나 그 자녀들을 보면 정말 부모를 많이 닮은 자녀들이 있습니다. 굳이 "제 아들입니다" 하지 않아도 그분의 아들인지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들이 아버지보다 훨씬 잘 났네요" 해도 기분 나빠하거나 질투하는 아버지를 본 적이 없습니다. 자식이 부모보다 낫다는 칭찬을 들을 때 부모는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를 닮은 자식에 대한 칭찬은 바로 나에 대한 칭찬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좋은 점들을 닮은 자식을 볼 때 나의 젊은 시절을 다시 보는 느낌을 받습니다. 반면에 부모가 자식을 아주 심하게 야단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자녀가 자기의 단점을 더 많이 닮았다고 느낄 때입니다. 자기의 단점들이 자식에게 그대로 나타나면 화가 더 나는 것입니다. 내가 옛날에 잘못했던 것들을 자식이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으면 막 화가 끓어오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받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맏형, 또는 큰오빠가 있습니다.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어떤 가정을 보면 자녀들이 셋이 있는데 줄줄이 공부도 잘하고 착실합니다. 그 이유를 물어 보면, 첫째가 잘 훈련되었기 때문에 첫째가 둘째, 셋째를 또 그렇게 잘 훈련시켜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첫아이 때문에 그 아래 모든 형제들이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맏형인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를 원하십니다. 구원받은 사람, 영원한 생명을 얻은 사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누구든지 일생을 살아가면서 점점 예수 그리스도를 닮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성장(Sanctification)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점점 성장할수록 자유를 누립니다. 지적으로, 영적으로, 인간관계와 성품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자유를 누리게 되면 그만큼 우리가 성숙하다는 표시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은 반드시 성장을 합니다. 성장하지 않는 생명은 죽은 생명이거나 없는 생명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알아서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면 그 때부터 우리는 성장합니다. 조금씩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성장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건강하고 아름답게 성장해야 합니다. 느리지 않고 제때에 빨리 성장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성장의 문제, 즉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성령의 도움으로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아직도 미성숙하고 어릴 때는 우리 속에 약함이 있습니다. 본문은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26절)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도움 없이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영원한 생명을 받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속에 죄성으로 인한 연약함과 부족함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채워주시고 도와주셔야만 우리가 성장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연약함이 있습니까? 믿음이 약합니다. 기도할 줄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합니다. 가끔 어떤 분들이 제게 와서 요즘에는 기도가 잘 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기도의 문을 열어달라고 성령께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운영되는 기도학교를 통해서도 기도의 방법들을 배워가면서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직 죄성이 있으므로, 믿음이 연약하고, 성품의 연약하고, 능력이 부족하고, 잘못된 습관들도 남아있으며, 또 아직까지는 성령의 은사들이 충분히 개발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아직까지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 것 같다면 성령께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은 그 순간 보혜사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 거하실 것이며, 우리와 함께 거하실 것이며,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왜 우리의 마음속에 오셨습니까?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우리의 성장, 즉 영적 변화를 돕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약함을 성령께 고하고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우리의 언어, 습관, 성격, 생활과 직장에서 나타나는 어려운 문제들을 성령께 말씀드리고 도와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연약한 부분들이 하나씩 채워져 가는 것이 성장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계속해서 예수를 닮아갑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28절)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반드시 그것이 선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가난할 때나 부할 때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모든 환경과 여건을 움직여 주셔서 마침내 선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선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들이 됩시다! 우리의 인생이 언제나 편안할 수는 없습니다. 어려움이 닥치면 우리는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이 생길까?" 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닥치는 의미는 그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이 심각해질 때 인간이므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하고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고통이 우리의 잘못 때문에 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이전의 잘못들을 회개하면, 깨끗함을 얻습니다. 점점 변화가 일어납니다. 점점 예수님을 닮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우리들은 어떤 경우에서도 예수님을 닮는 결과가 나오기를 원합니다.
셋째로, 구원의 궁극적 목적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29-30절). 영화롭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꼭 닮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완전하게 닮은 그 모습이 바로 영화롭게 된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이라 하였는데,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을 알지도, 느끼지도, 믿지도 않고 있었는데, 나를 영원 전부터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대상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나를 사랑하셔서 내게 다가오셨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와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대상입니다. 놀라운 은혜입니다. 나는 죄성이 있고, 부족하고, 연약하고,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인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영원 전부터 사랑하시고 예정하셨습니다. 그 예정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입니다. 즉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최고의 목표는 예수님을 닮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가끔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죽기 전에 제 고향에 교회를 꼭 하나 세우고 싶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좋은 목표입니다. 교회를 하나 짓고 싶으면 돈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업이 잘 되면 좋지만 IMF를 만나서 부도가 났습니다. 목적을 이룰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의 인생이 실패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만약 좋은 아파트를 사는 것, 또는 건강하게 무병 장수하는 것 등이 인생의 목표가 된다면, 이런 목표를 이루지 못했을 때는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저의 마지막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이 목표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부할 때나 가난할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 때나,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언제 많이 성장했었는지 한 번 돌아보십시오. 사실 우리의 신앙은 고통 속에서 더 성장하였습니다. 시련을 거칠 때 우리는 더 예수께 가까이 갔고, 깨달음이 있었고, 변화를 체험했고, 하나님의 은총을 삶에서 맛보았습니다. 그러므로 편안한 삶만이 축복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닮는 것이 진정한 축복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인생의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반드시 그 상황을 통해서 예수님을 닮는 성장의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주님 닮기 원하네. 그 아름다운 주 예수를. 이 세상에서 저 천국까지 닮기 원하네. 주 예수를" 이라는 찬양이 있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최고의 목적, 즉 우리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를 닮는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목적은 언제, 어디서, 어떤 형편에서든지 이루어집니다. 우리 삶의 연약하고 부족한 부분들, 아직도 개발되지 못한 부분들, 아직도 예수를 닮지 못한 부분들을 하나씩 찾아서 회개하는 가운데, 우리의 삶이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결혼을 해 보면 대개 서로의 단점이 보입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안 보였는데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나타나기 시작하지요. 그래서 속이 상하니까 남편을, 또는 아내를 바꿔 보려고 애를 씁니다. 서로의 약점을 지적하며 야단을 치기도 하고 빌어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적을 받는 사람은 지적을 받을 때마다 속이 상합니다. 아픕니다. 기분이 나쁩니다. 왜냐하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이나 아내에게 잘못된 부분을 지적 받을 때는 그를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파견하신 스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숨겨져 있던 나의 부족한 부분들을 스파이가 들어와서 다 찾아내는 것입니다. 지적을 받을 때마다 "하나님이 내 아내를 통해서, 또는 내 남편을 통해서, 내가 이 부분에서 변화되기를 원하시는구나" 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이 사실이라 너무 아파서 설사 아내나 남편 앞에서 화를 냈다 하더라도, 곧 돌이켜 하나님께 회개하시고 성령의 도움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날마다 우리 삶의 목표인 예수님 닮은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닮으면 세 가지가 변화합니다. 첫째, 믿음이 강해집니다. 하나님이 나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살다가 없어지는 존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히 사는 존재임을 믿습니다. 나는 비록 약하나 아버지 하나님이 강하심을 믿습니다. 성령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어떤 고난도 성령의 도움으로 넉넉히 이길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의심이나 두려움이나 불안이나 초조가 있으면 "성령님이여, 나를 도와주시고 강력한 믿음을 주옵소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있으면, 사탄이 아무리 공격해도 지지 않습니다. 주 예수를 믿는 믿음이 온 세상을 이깁니다. 둘째, 그 믿음에서 솟아나는 소망이 있습니다. 어두운 세계 속에 살아도 저 어두움이 언젠가는 걷힐 것이라고 믿습니다. 지금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녀도 저 터널의 끝에는 밝은 햇빛이 나타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희망적인 생각, 희망적인 태도, 희망적인 말, 희망적인 표현을 갖고 삽니다. 그뿐입니까? 셋째,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여러분 가슴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사람을 향한 사랑이 있다면 거듭난 증거입니다. 예수님을 닮아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사랑이 더욱 더 강해지는 은총이 있기를 원합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하였습니다. 예수 닮은 사람의 최고의 특징은 사랑입니다. 성령의 첫 열매도 사랑입니다. 뒤이어서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가 맺힙니다. 오 하나님, 내 영혼에 임해 주시고, 성령님, 나를 도와 주셔서 예수 닮게 하시고, 내 속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비롯한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자질들이 솟아나게 하여 주옵소서.
끝으로,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이깁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느니라!" 예수님이 내 속에서 강해지기 때문에, 성령님이 나를 도우시기 때문에 나는 변화하며 성장합니다. 그러므로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은총 주셔서 우리로 예수님 닮게 하옵소서. 시간이 갈수록 더 예수님의 아름다운 그 모습을 이 세상에서 저 천국까지 닮게 하옵소서.
마음의 평화를 원하십니까?
로마서 8:26-39 / 박조준 목사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원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평안입니다. 머리를 싸매고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도 좋은 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해서 생존 경쟁이 심한 이 사 회에서 이김으로 좀 평안하게 살고자 합니다. 부지런히 장사를 하거나 사업하는 사람도 돈을 많이 벌어서 남보다 평안하게 살려고 하는 기대 속에서 연구하며 애쓰고 있습니다. 권력을 잡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며 때에 따라서는 권모술수(權謀術數)를 사양치 않는 사람들도 권력을 잡으면 평안히 살 것 같아서 그럽니다.
유엔 총회는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생겨난 기구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땅 위에 전쟁이 다시없 고 불안과 공포가 없이 평화롭게 살아갈 것인가를 위해서 세계 각국 대표들이 모여서 의논하고 결의하는 기관입니다. 이미 작고하신 세계적인 신학자 칼 발트 박사가 유엔 총회 석상에서 강연할 기회가 있었습니 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 애쓰고 있는 여러분에게 이런 말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마는 유엔 총회에 서 세계의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착각일 것입니다. 세계의 참된 평화는 만왕의 왕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 위에 다시 오실 때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의미깊은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개인이던 가정이던 나라이던 세계이던 모두가 평화를 원하고 있지만 그 평안이 그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을 얻었다고, 돈을 벌었다고, 권력을 누린다고, 평안이 따라서 오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그러면 참 평화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환경과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리오 왕은 보좌에 앉아 있으면서도 불안해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사자굴, 죽음의 굴 속에 들어갔어도 평안히 지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 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 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한 14 : 27). 여기 주님의 주시는 평안은 마음의 평화를 의미합니다. 이 마음의 평화를 어떻게 얻을 수 있습 니까? 첫째로, 영혼의 병을 고침 받아야 합니다. 새는 하늘을 나를 때 안식할 수가 있습니다. 물고기는 물 속에서 헤엄칠 때 쉼을 얻습니다.
어느 댁엘 갔더니 도롱 안에 새가 몇 마리 있는데 제가 아, 저 새들의 울음소리가 아주 아름답 습니다. 그랬더니 그 주인 대답이 목사님, 저 새들이야 얼마나 평안하겠습니까? 이렇게 추운 동절이지 만 먹이 걱정이 있습니까? 집 걱정이 있겠습니까? 정말 도롱 안에 있는 새가 평안해서 그럴까요? 말을 하지 못해서 그렇지 아마 우리는 죽지 못 해서 살고 있어요 하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 역시 그렇습니다. 인간은 영혼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신앙 안에서만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인간의 본거지입니다. 믿음은 열매를 맺습니다. 사랑과 기쁨과 평화, 소망과 용기의 열매를 맺습니다. 가령 믿음의 반대인 의심을 가진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의심은 우리 마음 속에 부정적인 감정을 만들 어 냅니다. 그래서 의심하는 사람은 불안하고, 근심하고, 두렵고, 실망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의 병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죄입니다. 마음에 죄를 품고 있는 한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 에 악인은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한다 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 책임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뉘우치 기 전에는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전에는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기를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서운 분, 벌하시는 분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복음이란 복된 소식이란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악한 우리 인간 속에 들어 있는 선의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인간의 속에 있 는 가장 좋은 것을 밖으로 나타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어떻게요? 우리의 죄를 용서하므로 죄에 서부터 해방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완전하십니다.우리의 죄를 동에서 서가 먼 것처럼 옮겨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기억도 하지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마음의 평화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었 은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하나님께로 나아오면 그 분이 우리를 용서해 주시리라 하는 것을 믿을 때 우리 마음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내가 죄를 지은 일이 없는 것처럼 내가 아무런 잘못도 저지른 일이 없는 것처럼 내 게는 죄의식이란 것은 없는 것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의 평화를 느끼며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화평을 갖기 전에는 우리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해 보세요. 하나님, 내게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내 모든 죄를 용 서해 주시고 내 마음을 깨끗케 해주세요. 주님, 저는 주님의 용서를 믿습니다. 저를 사랑하시는 것을 압니다. 주님은 저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화평하 게 된 것을 믿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화평하게 될 때, 둘째로, 주 안에서 긍지와 확신 그리고 담력을 가지게 됩니다. 죄의식이 있으면 수치심도 느껴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을 때 마음 속에 긍지를 가지게 됩니다.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떳떳해집니다. 그 리고 주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구원받은 사람, 변화받은 체험이 있는 그리스도인은 주 안에서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 다. 존경과 사랑으로 주님을 바라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그 분을 닮기 위해 애쓰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믿는 사람은 마음에 담력이 생깁니다. 이 세상은 한 마 디로 불안한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우리 마음 속에 불안이 들어옵니다. 전에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가게 될 때 불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길은 초행이요. 원수들은 많은데 이런 생각을 할 때 모세의 마음은 무거웠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모세야 가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알지 못하는 장래 때문에 우리가 미리 근심하고 염려할 것은 없 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두려워 근심 가운데 싸여 있는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 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약속해 주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 이 얼마나 우리에게 확신과 담력을 주시는 말씀입니까? 이 말씀을 믿는 요한 웨슬레가 세계를 자기의 교구로 생각하고 대담하게 전도했습니다. 이 말 씀에서 힘을 얻은 리빙스톤이 식인종이 사는 아프리카에 대담히 가서 확신있게 복음을 평생토록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과 같이 배를 타고 가던 제자들이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그때 너무 피 곤하셔서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제자들이라 웬만한 풍랑 은 걱정될 것이 없었습니다. 배를 저어 나가는데는 다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문제가 좀 달랐습니다. 바람이 어찌나 세찬지 그리고 물결이 얼마나 높은지 그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오는데 배를 젓는 실력이 대단한 제자들로서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우리가 지금 죽게 되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바다를 향하여 잔잔하라 말씀하시니 그 풍랑이 잔잔해 졌습니다. 그 리고 제자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의심하느냐?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근심과 시험과 유혹의 풍파, 실패와 슬픔의 물결이 일 어납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실 때 모든 풍파를 잔잔케 하실 수 있는 능력이 계신 것 을 믿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이 타신 배가 풍파 때문에 침몰할 수 있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 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우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이런 축복을 받습니다. 이사야 43장 1절 이하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 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 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하였습니다. 주님과 더불어 사는 사람은 세상의 풍파가 아무리 높아도 마음의 평화를 누리며 담대하게, 확 신있게, 여유있게 살 수 있습니다.
셋째로, 마음의 평화를 원하시면 삶의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그 삶의 목표에 어떤 정신이 들어 있습니까? 보통으로는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것이 고작입니다. 공부를 해도 자기를 위해서 돈을 벌어도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권력을 누려도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의 목표는 그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에 관한 것은 다 잊고 다른 사람과 그들이 갖고 있는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해주십니다. 그리고는 이 상처받은 이들을 도와줄 수 있도록 우리에게 자신감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삶의 바른 목적을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의 목표는 생기를 불어넣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을 때 거기 삶의 보람이 있고 마음의 평화가 있 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오늘 봉사주일에 나보다 어려운 이를 위해 조금이라도 돕는 일에 참여해 보세요. 아마 모른 척하고 상관없는 것처럼 지나가실 때 느끼지 못했던 다른 마음을 느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고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은 믿음 없는 사람도 다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어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생을 가지는 것이 보람있는 것입니다. 「보물섬」이라는 책을 쓴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항상 자기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잊지 않 았다고 합니다. 그는 자기 집 창밖에 가로등지기 할아버지가 어두움이 내릴 무렵이면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의 거리를 내려가면서 거리에 있는 기름 등잔에 하나씩 불을 붙이는 것을 보곤 하였습니 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스티븐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가로등지기에 대해서 가장 인상이 남 은 것은 그가 항상 자기 뒤로 불을 남기고 간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나가는 뒤에는 빛을 남기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소망을 주며 기쁨을 주 며 도움을 주며 영감을 주고 있습니까? 이 세상을 산 것이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았다면 그게 무슨 자랑스러울 게 있습니까? 너희는 세 상의 빛이라 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빛이란 자기 자신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일찍이 공자 선생님은 이 세상에서 가 장 아름다운 것은 자기가 가르쳐 준 길을 따라 조그만 아이가 자신있게 걸어가는 광경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삶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 하게 됩니다. 한 시간 한 시간, 하루하루 미지의 세계를 향해 살아가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 신 운명이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고 계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우리의 길을 이끌고 계시며 우리의 미래를 예정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강렬하게 느끼 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앞날이 결코 어려운 일이나 환난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여 러분은 신앙 생활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닥치는 환난과 고통을 없게 하시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할 수 있습니다. 그 까닭은 우리보다 앞서 가신 예수님께서 환난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도 이길 것을 믿고 마음의 평화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모든 일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사실을 믿는 사람의 마음에 평화가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위대한 손 이 나를 유익한 데로 이끄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을 때 우리 마음에는 평화가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 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고 하신 말씀을 꼭 그대로 믿습니다.
무서운 환난을 당했을 때도 마음 속의 평안을 잃지 않게 해주는 성숙된 신앙의 기반이 바로 우 리의 환난을 이용하셔서 그 어려움을 통하여 우리에게 수확을 얻는 기회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입니다. 위대한 구약의 신앙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고통 중에 하나님은 나를 더욱 큰 자로 만드셨 나이다.암담한 시기일수록 거기서 긍정적인 마음을 찾아보세요. 마음의 평화가 넘쳐날 것입니다. 환난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인가 좋은 것을 얻을 수 없다면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그런 어려 움을 허락하시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환난을 통해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환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십 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모든 일을 유익한 것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려움 을 통해서 우리가 가는 길과 마음에 빛을 비추시는 기회로 삼으신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죤 번연은 오랫동안 억울하게 감옥 생활을 하면서 성경 다음으로 유명하고 많이 읽히는「천로 역정」이라는 책을 쓰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고난의 골짜기에 들어가기까지는 하나님의 목소리에 별로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습니 다. 만일 이런 고난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편으로 주의를 돌리게 한다면 그것이 바로 축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환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남아메리카에서 발견된 꽃으로 이 꽃은 바 람이 세차게 불 때에만 눈에 보이는 꽃이라고 합니다. 그 꽃은 선인장의 일종인데 바람이 불어오 면 그 줄기로부터 조그만 혹 같은 것이 고개를 내밀어 거기에서 꽃이 터져 나온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모든 근심과 두려움을 버리고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십시다. 여러분의 앞날은 소망으로 가득찰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절망적인 상황이란 없습니다.
다만 소망을 잃은 사람들, 소망이 끊어졌다고 생각하 는 사람들이 있을 뿐입니다. 희망을 잃지 맙시다.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지키세요. 긍정적인 사고를 통해 서 마음의 평화를 소유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절대 긍정의 삶
로마서 8:28 / 조용기 목사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절대 긍정의 삶’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주님께서 말씀 하셨는데 이와 같은 절대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지 않고는 이와 같은 삶은 불가능합니다. 절대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려면 롬8:28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을 깨달아 알아야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사회학자인 커밍 워크는 성공의 요인을 네 가지로 말했습니다. 첫째는 머리가 좋아야 하고, 둘째는 지식이 있어야 하며, 셋째는 기술이 있어야 하고, 넷째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했는데 그런데 이 네 가지 요인 중에서 성공에 93% 이상의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바로 '긍정적인 태도'라고 말한 것입니다. 긍정적인 태도가 인간성공에 93%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긍정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경말씀 롬8:28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해서 가장 첫째 요건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고 말한 것입니다.
<본론>
1.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이 절대 긍정적이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이 절대 긍정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어떻게 긍정적인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이 많고 어려운 고난이 많은데 우리 인간의 힘으로 헤쳐 나갈 수 없는 벽에 부딪히면 우리는 암담하게 되고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긍정적인 마음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속담처럼 온천지가 꽉 막혀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계시므로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긍정적인 마음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이 절대 긍정적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니 내가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안하는지를 점검해 봐야 할 것입니다. 오늘 내가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마음중심에 하나님 생각이 항상 뿌리가 내려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사랑하는 대상을 생각합니다. 저는 어릴 때 우리 어머님이 부엌에서 밥을 지을 때 불을 때는 역할을 많이 했습니다. 부엌에서 불을 때고 있는데 안방이 상당히 먼데도 불구하고 동생이 깨어서 울면 영락없이 어머님은 "불 단단히 때어라. 동생이 깨어서 운다. 젖먹이고 올 테니까 부엌일을 단단히 돌보라"고 했습니다. "저는 어머니, 우는 아기 소리가 전혀 안 들리는데요?" “아니야. 깨어서 울고 있어.” 늘 그것을 신비하게 느꼈습니다. "어머니는 어떻게 동생이 우는 소리를 들으시는가 나는 전혀 들리지 않는데.." 그것은 어머니의 마음이 동생을 사랑하기 때문에 동생 생각으로 꽉 들어차 있어서 동생의 조그마한 울음소리도 들을 수 있지만 나는 동생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울음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마음 중심에 하나님 생각이 가득히 뿌리 내린 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인 것입니다.
마22:37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6:33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속에 항상 하나님 생각이 꽉 들어찼는지 아닌지 이것을 점검해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일주일 내내 하나님 생각 깜박 잊었다가 주일날 오면 '벌써 주일이야? 빨리 세월이 흘러간다.' 비로서 하나님을 떠올리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인 것입니다.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는 24시간 남편 생각을 늘 하고 있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도 무슨 일을 해도 마음에 잠재의식 속에 아내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늘 마음에 두고 생각하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 두고 늘 생각해야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하나님 생각 안하고 무슨 별난 생각하고 삽니까? 여러분 하루 종일 하나님 생각하고 사시지요? 그것 하나님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담대하게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랑하면 하나님과 대화를 늘 합니다. 사랑하는데 대화를 안 할리가 있겠습니까? 부부가 자식을 사랑하면 어찌하든지 시간 내어서 자식과 대화를 하려고 하고 부부간에 서로 사랑하면 어찌하든지 대화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고 세월이 흘러가서 결혼이 법적인 연결만 되고 형식화, 의식화 되면 대화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남편도 부인 만나서 할 이야기도 없고, 부인이 남편 만나서 할 이야기도 없고 이야기 해봤자 별 재미도 없고 그러므로 점점 대화의 창이 닫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창이 닫혔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사랑을 하면 쓸데없는 이야기라도 자꾸 하고 싶습니다. 온갖 대화의 조건을 만들어서 서로 대화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과 늘 기도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앉아도 기도하고, 서도 기도하고, 무슨 일을 당해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란 특별한 것이 있나요? 하루가 지나면 '하나님, 오늘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하나님 은혜로 밥 잘 먹었습니다. 직장에 나가서 일을 했는데 상사하고 좀 다퉜지만 화해했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했지만 잘 해결했습니다. 하나님 건강하게 오늘도 하루를 잘 지내고 집에 와서 가족들과 만나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그게 기도에요. 기도라는 것은 자꾸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이것만이 기도라고 생각하면 기도가 아닌 것입니다. 기도란 단순한 우리 하루하루 생활에 대한 보고도 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감사하는 이와 같은 대화가 있어야 됩니다.
시130:5에 "나 곧 내 영혼은 야훼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 도다."
하나님을 앙망하고 기다리는 것도 하나님과의 대화인 것입니다.
시19:14에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야훼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 되기를 원하나이다."
내 입술에 말하고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묵상을 하는 것도 하나님과의 대화인 것입니다.
시116:2에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하나님께 이야기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향해서 귀를 기울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것을 보여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적고 큰 모든 일에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것을 그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 섬기기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마음에 즐겁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도와주는 것이 얼마나 즐겁습니까? 부모가 자식을 도와주는 것은 억지가 아닙니다.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 자녀를 도와주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돌보아 주는 것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 하는 것이고, 남편이 아내를 보살피는 것도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봉사하고 섬기는 것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면 봉사하는 것이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남편을 돌보아 주는 것이 짜증이 나거든 사랑이 식은 줄 아십시오. 아내 돌보아 주는 것이 귀찮아지면 사랑이 식어진 경고가 빨간불이 켜진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를 섬기는 것이 즐겁고 기뻐서 무엇보다도 그것을 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시2:11에 "야훼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것이 즐거운 것입니다.
시100:2에 "기쁨으로 야훼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기쁨으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잠8:17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 이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고 찾으면 하나님이 즐겁게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섬기기를 기뻐하는 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자랑하기를 기뻐하고 실행하는 자인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상대를 밉게 보는 사람 보았습니까? 제가 오랜 세월동안 목회하면서 많은 집안에 심방을 갔는데 손주나 손녀를 안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주나 손녀 자랑 안하는 사람 못 봤어요. "내 손주, 손녀 잘 못났지요? 아이고 밉상꾸러기지요." 이런 말 못 들었어요. 내가 보기에는 잘 못나고 밉상꾸러기같이 보이는데도 "아이고 우리 손주 잘났다. 우리 손녀 잘났지요? 한번 쓰다듬어 주세요. 안수해 주세요. 아이고 이놈 참 잘났어." 왜, 사랑의 눈으로 보니까 잘나게 보이는 것입니다. 사랑이 사라지면 못나게 보여요. 여러분 남편이 못나게 보입니까? 사랑이 식어졌어요. 부인의 얼굴에 흠집만 보입니까? 사랑이 식어졌어요. 여러분의 형제나 친구들이 미워 보입니까? 사랑이 식어졌어요.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고 못난 것을 다 덮어 버리고 잘난 것만 보기 때문에 잘나게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나게 보면 하나님을 자랑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자랑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시91:14~16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하나님을 사랑해 주면 하나님이 건지겠다.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내 이름을 알아주면 나도 저를 높여 주겠다."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 하나님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자를 위해서 건지시고 높이시고 같이 계시고 돌보시고 장수하게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정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제일 첫째 요건이 하나님을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무관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이 도와주겠다고 약속하지는 아니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우리는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고 하나님을 자랑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시도록 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만이 절대 긍정적이 된다.
둘째로는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절대 긍정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이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나는 나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우리 위해서 역사할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돼요. 우리가 가정에서 자녀를 기를 때라도 자녀가 부모의 뜻대로 살아야 자녀를 책임지는 것입니다. 자녀 자기대로 가고, 부모 자기대로 가면 자녀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 부모가 책임을 질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되는데 가장 중심적인 뜻은 예수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지 않고는 하나님 자녀가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온 천하 만민이 예수 믿고 구원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 믿지 않고 하나님께 가겠습니다. 내가 수양과 도덕을 닦고 많이 기도하고 고행을 해서 스스로 자격을 갖춰서 하나님께 나가겠습니다." 그것 하나님께서 "No. 나는 너를 모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시한 길은 그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오라는 것입니다. 그 아들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처참하게 몸 찢고 피 흘려서 죄과를 지불해 놓으시고 난 다음 하나님 '이 길을 통해서 오너라. 내 아들의 보혈을 통해서 오라.'고 말했는데 그 보혈의 길을 버리고 다른 종교를 통해서 스스로의 노력과 수양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가겠다면 하나님에 대한 반역인 것입니다. 길을 잘못들인 것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부르심을 받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여러분을 불러서 예수 믿고 구원받기를 원하는데 오늘 예수를 구주로 믿고 교회 나와서 예배드리는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주님께 나온 것을 보여 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요14:6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시므로 구원의 유일한 길을 예수를 믿는 길밖에 없고 하나님께 나오는 길고 그 길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엡1: 5에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한 것입니다.
예수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마귀의 자식이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섬기는 것이 생활의 목적이 되어야 하나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사는 사람은 내 삶 전체가 하나님 섬기는 것입니다. 내가 있는 곳이 곧 하나님 섬기는 곳입니다. 내가 하나님 섬기기 위해서 목사가 되어야 되고, 전도사가 되어야 되고, 장로가 되어야 되고, 안수집사, 권사, 서리집사, 지역장, 구역장이 되어야 하나님 섬긴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특별히 성직을 얻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지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전업 주부입니까? 주부로써 하나님을 섬기십시오. 내가 소재부입니까? 소재 부로써 하나님을 섬기십시오. 내가 직원입니까? 직원으로써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기십시오. 내가 공장 노동자입니까? 노동자로써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기십시오. 있는 그 자리가 예배당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있는 그 자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재단으로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요12:26에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어느 곳에 있든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에 성자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티칸에서 교황이 성자로 서명을 해주었는데 굉장한 사람인줄 알고 찾아가 보니까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그는 햇빛 비취는 구석에 앉아서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것 없이 늘 더운 아프리카에서 구두를 수선합니다. 그는 구두를 수선할 때 모든 사람이 예수님이라고 생각하고 그 사람이 신고 있는 구두는 예수님의 구두를 수선해 준다고 생각하고 있는 정성을 다해서 구두 수선공으로써 일해서 나중에는 성자의 명칭까지 받게 된 것입니다. 그는 바로 구두 수선하는 그곳이 예배당이요, 구두 수선하는 그곳에 재단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할 때 사람들이 그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은 다르다. 특별한 사람이구나. 저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다." 인정받아 주님께 영광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고전10:31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내가 처처에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아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고 말한 것입니다. 안 기쁜데 기뻐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안 기쁠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래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안 기뻐도 웃으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웃으면 복이 같이 와요. 나는 언제나 우리 성가대가 노래할 때 TV를 통해서 성가대원들의 얼굴을 봅니다. 대다수가 부루퉁 해가지고.. 집에서 부부간에 싸우고, 부모 형제간에 싸우고 온 것처럼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면 안돼요. 부루퉁하고 싶어도 노래 부를 때 방실방실 웃으면서 웃는 얼굴 이쁜 얼굴.. 웃는 얼굴을 보면 성도들이 다 음악만 듣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보고 마음에 즐거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을 만날 때도 찡그리고 만나면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방실방실 웃으면 이쁘지요. 장미꽃만 이쁜 것 아닙니다. 호박꽃도 이쁘다구요. 왜냐면 웃기 때문에 이쁘다 구요. 그러므로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기쁜 일이 있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안 기뻐도 사람을 만날 때는 웃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만날 때도 웃고, 사람들 만날 때도 웃는 것이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도 늘 하나님께 있는 말, 없는 말 다 가지고 대화를 하라는 것이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고통스러울 때도 감사하라. 돌을 탁 차고 발이 아플 때 "아이고 아파라. 어느 놈이 돌을 갖다 놓았나." 하지 말고 "아이고 아파라. 돌로 인하여 감사합니다." 감사를 밥 먹듯이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평신도일 때 부산순복음교회에 성도를 했습니다. 그때 리처드 목사님 선교사가 목사였는데 언제나 예배드리기 전에 교인수가 적으니까 일주일 동안 좋은 일이나 슬픈 일이나 있는 사람 간증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나와서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우리 아버님이 죽었습니다." 나 그것 잊어버리지 않아요. 잘못 들으면 굉장히 오해 할 만합니다. 그러니 범사에 감사하라니까 우리 아버지 죽었다고 감사하다구.. 그러나 사실은 아버지가 돌아 가셔서 천당 가셨으니까 감사 안할 일도 없지요. 그러나 그 사람은 철저히 성경말씀대로 산다고 속으로만 감사할 것을 겉으로까지 감사를 해가지고서 모든 사람이 웃었고 세월이 오래 흘러도 항상 그 사람 얼굴이 기억나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철저히 우리의 생활 속에 좋은 일이나 굳은 일이나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느8:10에 "야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고 말했었으며
엡5:20에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믿는 자만이 절대 긍정적이 된다
셋째로,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져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범사에 그 뜻대로 사는 삶을 사는 사람은 모든 일이 합동하여 선이 된다고 믿고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라. 어떤 일이 생겨도 끝에 가서는 합동하여 선하게 된다. 눈에는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두고 봐라. 하나님의 손에 얹어 놓으면 하나님이 그것을 만들어서 유익되게 만들어 주신다. 좋은 일도 하나님 손에 얹어 놓고 나쁜 일도 하나님 손에 얹어 놓으면 하나님의 손이 만지면 모든 것이 변화되어 아름답고 선하게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와 같아서 어떤 진흙을 갖다 얹어 놓아도 멋진 토기로 만들어내는 능력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악 간에 모든 배후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음을 우리는 항상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한 일에도 배후에 서 역사하시고 악한 일도 배후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은 역사상 우리가 볼 때 가장 악한 일이 아닙니까? 유대인들과 빌라도가 합쳐서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였는데 우리가 볼 때는 최악의 상황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손에 얹혀 지니까 이것이 최선의 사건이 되어서 그를 통하여 온 인류가 믿음으로 구원받고 영생복락의 생명의 원천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마귀가 최악을 가지고 왔지만 하나님은 최악 속에서 최선을 만들어 내버리고 만 것입니다. 선악 간에 모든 배후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음을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45:7에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야훼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빛도 하나님 손에서 어둠도 하나님 손에서 다 창조되고 운영되는 것이므로 밝을 때도 어두울 때도 하나님께 의지하고 맡기면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루벤 토레이 목사님은 중국선교사로 오랫동안 헌신한 분입니다. 그가 중국에서 통역을 했던 일이 있었는데, 통역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여 깨어보니까 한쪽 팔이 없습니다. 엄청난 사고였기 때문에 혼수상태에 있을 때도 그대로 내버려두면 몸이 성하지 못하므로 허락 없이 의사들이 팔을 잘라 버렸습니다. 그가 혼수에서 깨어나 보니 한쪽 팔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제일먼저 기도한 것이 "하나님, 한쪽 팔을 가져가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두 팔을 주어서 잘 살았는데 또 하나님께서 필요하시기 때문에 내 한쪽 팔을 가지고 가셨음을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고개를 기우뚱 거리면서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이것 교통사고 당해서 머리가 좀 돈 거 아닌가? 팔을 하나님이 가져가시니 감사하다니.." 그래서 중국 선교사를 은퇴하고 미국에 들어갔다가 다시 자원해서 한국 선교사로 나왔는데 그때가 6.25사변 때였습니다. 6.25사변 때 전쟁으로 말미암아 많은 군인들과 많은 평민들이 팔을 잃고 다리를 잃고 의수 족 이나 이러한 일들을 하는 한국에 병원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팔을 잃고, 다리를 잃어도 의수족을 만들 곳이 없었는데 이분이 한국 선교사로 와보니까 너무나 한국에 많은 군인들과 평민들이 전쟁의 상처로써 팔이 없고 다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팔을 잃고 난 다음 미국에 건너가서 자기 팔을 의수족으로 만들어서 사용했었습니다. 그래서 팔, 다리 없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대구에서 처음으로 재활병원을 시작해서 팔, 다리를 만들어서 한국 상이군인들과 한국 국민들에게 보급하고 예수를 전도하게 된 것입니다.그때야 비로소 하나님의 섭리를 알았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무도 한국의 전쟁에서 팔, 다리 잃은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 날보고 팔을 하나 가져가시므로 네가 인조팔과 인조다리를 만들어서 이 사람들을 도우라고 하는 명령을 내리신줄 압니다." 그래서 이분을 통해서 비로소 의족과 의수를 만드는 한국 최초의 재활의학을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 많은 선교사들이 있었지만 팔을 잃은 아픔과 고통을 체험한 토레이 목사만이 팔과 다리를 잃은 자들을 위한 사명을 발견하고 그들을 위한 사역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분은 한번도 왜? 라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나님, 왜인지 제가 이해하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 믿습니다." 이것이 토레이 목사의 평생의 고백이었다고 한 것입니다. 그는 중국에서 팔을 잃었으나 그 팔 잃은 그 은혜를 한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의족과 의수를 만들어 주므로 갚을 수 있고 전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당시에는 큰 불행 같으나 나중에는 그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위대한 사역을 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만사를 통치하심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나 하나님이 배후에서 통치한다는 것을 알고 의지하면 마음속에 긍정적인 태도를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103:19에 "야훼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
하나님은 지배하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사45:9에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토기장이입니다. 진흙으로 원하는 것을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만사를 통치하심을 믿어야 되고 하나님은 악을 변하여 선이 되게 하시는 섭리를 나타낸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요셉도 보십시오. 형들에게 팔리고, 종이 되고, 보디발의 집에서 10년 동안 종살이 하다가 또 무고를 당하여 감옥에 들어가서 3년 감옥살이를 하고 엉망인 삶을 살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중에 악을 변하여 선으로 만들었습니다. 요셉이 직접 창50:20에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여러분께서 그러므로 고통과 괴로움과 좌절과 절망이 다가올지라도 하나님은 이것조차 선으로 만드신다. 악을 변하여 선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고 인정하고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국에 한 영특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어찌나 총명했던지 학교에서 '작은 천재'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소년은 눈에 피를 흘리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친구들이 놀이를 하다가 새총으로 눈을 쏴서 두 눈이 실명되고 장님이 되었습니다. 부모들은 땅을 치고 울고 좌절하고 절망했습니다. "하나님,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이 소년은 말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보고 "아버지, 어머니 슬퍼하지 마십시오. 눈은 잃었지만 머리를 달려 있습니다. 눈은 없지만 머리는 달려 있습니다. 팔, 다리가 있어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눈은 가져 가셨지만 머리와 팔, 다리는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야, 이놈아! 정신없는 소리하고 눈을 잃었으면서 무슨 그런 소리를 하느냐?" 이 소년은 절대 긍정적이었습니다. "나는 눈을 잃었지 머리는 잃지 안 았 습니다. 머리를 사용해서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점자를 열심히 공부하고 고등학교, 대학을 나오고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 훌륭한 정치인이 되어서 나중에 영국에 유명한 교통부장관이 되었습니다. 그 이름이 바로 헨리 포세트인 것입니다. 그가 비록 눈은 잃었지만 그 때문에 더 분발해서 영국을 움직이는 국회의원이 되고, 정치인이 되고, 교통부장관까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일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결론>
절대 긍정의 삶이 마음에 평안과 기쁨과 생활에 안정을 가져오고 삶의 승리와 성공을 가져옵니다. 이 세상에 5만 가지 걱정 근심에 휘말린 인생 삶 중 절대 긍정적인 삶, 눈에는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고, 내 앞길 칠흑같이 어두워도 절대적인 긍정적인 삶을 갖기 위해서는 롬8:28을 마음에 아로 새겨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어떤 일이 생겨도 끝장에는 좋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 인생을 손위에 얹어놓고 하나님께서 친히 이를 조작하셔서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아무리 파괴된 그릇이라도 다시 주의 손에 얹어 놓으면 새로운 그릇으로 만드는 기적을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사랑하십시다. 그리고 예수 믿고 우리의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사십시다. 그리고는 모든 일이 합동하여 선을 이룬다는 믿음을 가지고 항상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마음을 가지고 만사에 하나님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끝에 가서 언제나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영광스러운 결과를 얻게 되실 것입니다.
<기도>
우리 고개 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살아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허무맹랑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할 때가 많습니다. 인간의 힘이란 벽에 부딪히고 한계가 있어서 못할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전지전능, 무소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우리 일생을 살면 모든 일에 하나님이 간섭하여 주시고 역사하여 주셔서 합동하여 유익이 되게 만들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결과가 좋아지니 모든 것이 좋아집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 긍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