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딕투스 수도원
폴 존슨, <기독교의 역사>, pp.276-280.
점진적으로 계승되고 발전되던 서방의 수도원 운동이 그레고리우스 1세에 의해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레고리우스 1세가 교황으로 선출될 당시에 갈리아 동부 지역에서는 콜룸바누스를 비롯한 켈트 수도사들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수도원은 로마 교회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임의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로마 교회는 어찌하여 수도원을 교회조직으로 흡수하지 않았을까? 비잔틴 제국의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가 과거 로마 제국을 회복시키겠다는 명분으로 이탈리아를 침공해 오고 롬바르드족으로부터도 공격을 받은 로마 교회로서는 수도원 운동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비잔틴 제국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고 롬바르드족의 침입 또한 소강상태에 들어간 상황에서 교황이 된 그레고리우스에게 수도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레고리우스는 롬바르드족의 침입으로 로마에 온 몬테카시노의 베네딕투스 수도사들로부터 수도원 규칙집을 얻었고, 이를 계기로 베네딕투스 수도원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 그는 베네딕투스의 전기를 쓰거나 베네딕투스의 수도 규칙을 서방 수도원의 규범으로 삼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모든 힘을 다 동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쓴 전기에 의하면 480년경 부유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베네딕투스는 로마에서 교육을 받은 후에 수비아코와 몬테카시노 등지에 수도원을 세웠다고 한다.
베네딕투스 수도원의 위대한 장범은 수도생활의 규율을 상식적인 수준에서 설정했다는 점이다. 베네딕투스 수도원은 엄격함을 지키면서도 유연함을 잃지 않았던, 한마디로 중도 노선을 능숙하게 견지했다. 상급자들의 시중을 드는 젊은 수도사들을 제외한 모든 수도사들에게 자기만의 침대가 제공되었다. 이와 함께 두 벌의 속옷과 겉옷, 매트리스, 양털로 된 이불과 요, 베개, 구두, 양말, 허리띠, 칼, 펜, 글을 쓸 때 사용하는 서판, 바늘과 손수건 등이 제공되었다. 물론 그 이외에는 어떠한 개인 소유도 허락되지 않았다. "책이나 펜, 서판....그 어느 것도 사적인 소유물로 인정되지 않았다." 수도사들의 식사는 적당하면서도 간단했다. 하루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두 사람당 빵 500그램, 포도주 600밀리미터, 계절에 맞는 과일과 야채가 전부였다. 베네딕투스 수도사들은 네 발 달린 짐승의 고기는 일절 먹지 않았다. 하지만 병든 수도사들에게는 예외적으로 특별의식이 주어졌는데, 이는 베네딕투스 수도원 규칙집에는 “모든 일에 앞서, 모든 일보다 먼저 환자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도원을 찾는 “손님들은 그리스도처럼 영접을 받아야”했기에 손님 접대를 위한 부엌도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수도사들은 예배를 드리는 일 외에 성경 읽기와 노동을 했다. 그들은 “거의 모든 시간을 침묵으로 보내야 했는데, 특히 밤 시간에는 더욱 그러했다.” 불평은 ‘가장 큰 죄’로 간주되었고 수도원 규칙을 위반한 수도사들은 성찬식에 참여할 수 없었다. 필요하다면 체벌도 사용되었다. ‘외과 의사의 칼’(추방)은 마지막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베네딕투스 수도원의 규칙은 지엽적인 몇몇 조항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규칙이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베네딕투스가 직접 필사하여 테오데마르에게 전달한 규칙집 또한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이 규칙집은 원본에서 오직 한 사람의 손을 거쳐 필사된 것으로 고대 필사본들 중에서 거의 유일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규칙집은 일반인들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이탈리아 중부의 지방어(불가타어)로 씌어 있는데, 이를 보더라도 당시 수도원이 학문의 중심지였다기보다는 경건함을 강조하는 실천적인 기관이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규칙집은 실용주의자인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마음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이 규칙집은 영웅적인 행위나 덕행, 즉 특별한 수행을 강요한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상식적인 눈높이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 규칙집은 예외나 수정의 가능성 등 유연성도 갖추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일단 제정된 규율들을 반드시 준수되어야 한다는 엄격함 또한 잊지 않고 있었다. 수도사들은 성무 일과표에 조금도 어긋남 없이 생활해야 했다. 단 한 순간도 그저 흘려보내서는 안 되었다. 수도사들은 심지어 음식을 먹거나 잠자는 시간마저도 노동을 위한 재충전의 시간으로 생각해야 했다. “게으름은 영혼의 원수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던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바울 사도가 했던 충고와 유사하다. 이제 베네딕투스 수도원 규칙은 보편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 세상 전부를 기독교 복음으로 채우려 했던 선교 지향적인 교황 그레고리우스가 베네딕투스 규칙을 하나의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베네딕투스 수도원의 규칙은 계급이나 시대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특정한 문화나 지리적 장소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즉, 이 규칙은 어떤 사회에서도 적절하게 통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베네딕투스 수도원 규칙이 널리 사용될 수 있기를 바랐으며, 그의 후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계기로 유럽 사회를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이교 의식이나 제도를 기독교화하려는 열풍이 서유럽 사회를 강타했다. 수도원에 막 입회한 신입 수도사들은 세속 사회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세속 사회와 완전히 통합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기성 교회에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수도원 체제를 발전시켰다. 그들은 세상에 살면서도 수도원적인 금욕적 삶을 살고 싶은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수도사들은 교황의 지도를 받았고 감독의 명령에 순응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그레고리우스의 토지 경영에 참여하게 되면서 경제적으로 기여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베네딕투스 수도원 규칙이 순식간에 일반화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규칙은 7세기에 전파된 이후, 하나의 규범적인 수도원 규칙으로 일반화되기까지 200-30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수도원들은 대부분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수도원 규칙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다. 잉글랜드의 복음화를 위해 교황 그레고리우스가 597년에 선교사 아우구스티누스를 켄트로 파송했을 때에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켄터베리 수도원에서 사용할 규칙을 따로 만들었다. 수도원 규칙들은 주로 주변의 다양한 전통들을 차용했는데, 윌프리두스 주교가 세운 휘트비 수도원에서는 로마와 아일랜드 전통이 혼합되어 있는 규칙이 사용되었다. 674-681년에 노섬브리아 왕의 지원을 받아 웨이머스와 재로에 수도원을 설립한 베네딕투스 주교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여러분은 내가 무지해서 여러분에게 이런 규칙들을 부과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 규칙들은 내가 17개의 수도원을 탐방하면서 직접 경험해본 것들이고 대부분의 수도원에서 인정받은 것들입니다.” 7세기 중엽부터 베테딕투스 수도원 규칙은 새로 건설된 수도원들, 특히 왕이나 대부호들의 지원을 받아 건설된 수도원의 기본적인 틀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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