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권공 묘갈명 병서
(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權公墓碣銘 幷序)
공의 휘는 덕윤(德潤), 자는 자반(子胖)이다. 권씨(權氏)는 고려 태사(太師)인 행(幸)으로부터 비롯되어, 벼슬이 대대로 이어졌으니 우리 동방의 대성(大姓)이다. 수홍(守洪)은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 인(靷)은 예의판서(禮儀判書), 원(原)은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다.
계경(啓經)은 현감(縣監)을 지내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니 이분이 공의 고조이다. 증조 곤(琨)은 부호군(副護軍)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는데 처음으로 금계(金溪)에 터를 잡았고, 맑은 덕행으로 중망을 받았다. 조부는 사영(士英)으로 습독(習讀)을 지냈고, 부친은 응희(應禧)로 의흥위부장(義興衛部將)을 지내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되었다. 모친 숙부인(淑夫人) 진안백씨(眞安白氏)는 좌부위(左副衛) 원형(元亨)의 딸이다.
공은 가정(嘉靖) 무자년(1528, 중종 23)에 태어나 병오년(1606, 선조 39)에 돌아가셨으니 향년 79세이다. 천등산(天燈山) 남쪽 성곡(城谷) 간좌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원주변씨(原州邊氏) 생원 광(廣)의 딸로, 정숙하고 자애로워 이웃의 환심(懽心)을 얻었다.
(1533, 중종 28)에 태어나 공보다 17년(1623, 인조 1) 뒤에 돌아가셨으며 묘소는 공과 합폄하였다. 3남을 두었는데, 훤(晅)은 경학과 행실이 있었으며 호가 성재(誠齋)이고, 양(暘)․ 창(昶)이다. 훤이 아들이 없어 계선(繼善)을 후사로 삼았다. 양은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종선(宗善)․ 승선(承善)은 출계하였고, 계선은 들어와 공의 제사를 받들었고, 호선(好善)․ 장악원 정(掌樂院正)으로 추증된 처선(處善)으로, 모두 학문과 행실로 가문을 빛냈다.
딸은 이형원(李馨遠)․ 이양원(李揚遠)에게 각각 시집갔다. 창은 승선을 후사로 삼았다. 계선의 아들은 자(滋)․ 영(泳)․ 찬(澯)․ 연(沇)이고, 딸은 생원 남구(南俅)․ 옥률(玉嵂)에게 각각 시집갔다. 종선의 후사(後嗣)는 제(濟)이고, 딸은 대간(大諫) 남천한(南天漢)에게 시집갔다.
처선의 아들 현(灦)은 형조참의에 추증되었고 호는 우헌(愚軒)이다. 딸은 이완(李琓)에게 시집갔다. 승선의 아들은 심(淰)․ 출계한 제(濟․ 회(淮)이고, 딸은 김진수(金軫壽)․ 김종준(金宗準)․ 문성표(文聖標)에게 각각 시집갔다.
자(滋)로부터 4대를 내려와 괴(烠)는 행실이 돈독하고 학문이 깊었으며 호는 행정(杏亭)이다. 병문(炳文)은 정자(正字)를 지냈으며 경술(經術)로 유림에서 신망이 두터웠고 호는 약재(約齋)이다. 휴(烌)는 생원으로 호는 묵암(默庵)이고, 준(焌)․ 습(熠)은 당대에 문헌(文獻)이 성대하였다.
공의 타고난 품성은 화락하고 강의하며 명철하였다. 일찍이 정훈(庭訓)을 받아 법도에 벗어나는 적이 없어, 약관의 나이에 이미 노성(老成)하다는 칭송이 있었다. 부모님을 모심에 삼가 혼정신성(昏定晨省)하여 충심으로 봉양함이 지극하였고, 거상에 있어서는 슬퍼하여 몸이 손상되는 것이 예제(禮制)를 넘었다.
형과 침상을 나란히 하여 함께 자며 우애가 독실하고 지극하였고, 선묘(先墓)에는 다 제전(祭田)을 마련하여 봉제사에 대비하게 하였다. 손수 집안의 법도를 써서 아들들을 성심으로 가르쳤다. 평소에도 간묵(簡黙)함으로 스스로를 지켰으며, 초대하거나 방문하며 빈번히 왕래하는 일은 좋아하지 않았으나 권송암(權松巖36) ․ 배임연(裵臨淵37) 등 현인들과는 도의의 교분을 맺어 서로 왕래하며 시를 주고받았다.
벼슬길에 나아가려는 뜻을 버리고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로 스스로 즐기며, 더욱이 후진을 장려하는 것으로 책무를 삼았다. 남공형(南公衡)․ 상사(上舍) 신내옥(辛乃沃)과 경광서당(鏡光書堂38)을 건립하여 제생들이 학업을 익힐 수 있게 하였고, 그 뒤에 재물을 거두고 적임자를 골라 선비를 기르는 자원을 넉넉하게 하였다. 단양(丹陽)의 훈도(訓導)로 천거되고, 뒤에 나이 80세가 되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장인 변공(邊公)이 일찍이 공에게 단금(短琴) 하나와 칠서(七書) 여러 질을 남겨 주며 금서헌(琴書軒)이라 이름 하였는데, 어쩌면 공이 이를 천명이라 여겼으므로 변공도 이로 인하여 그렇게 일컬은 것일 것이다. 후손 연호(淵浩)와 주현(周顯) 등이 묘석(墓石)을 이미 마련하고, 비석에 새길 글을 요구하였다.
내가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 두려웠으나, 그러나 스스로 돌아보건대 외람되이 혈맥에 이어져있고 또 공의 후손들과 10세에 걸쳐 같은 마을에서 지낸 오랜 정리가 있어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었다. 이에 행장에 의거하여 위와 같이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뿌리 깊으면 반드시 가지가 무성하고// 根深者末必茂。
근원이 멀면 반드시 흐름이 유장하나니 / 源遠者流必長。
자손이 이어짐이여 유자의 덕행 갖추었네 / 子孫繩繩兮有儒行。
우리 공의 숨은 덕망과 아름다운 행적이 / 吾知公潛德幽懿。
드러나지 못했으나 더욱 빛나실 것을 아네 / 闇然而彌章。
<끝>
[주해]
01) 권송암(權松巖)
송암은 권호문(權好文, 1532∼1587)의 호이다. 자는 장중(章仲), 본관은 안동이다. 이황의 문인이다.
1561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청성산(靑城山) 아래 무민재(無悶齋)를 짓고 은거했다. 류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 등과 교유하였
다. 저서로는 송암집이 있다.
02) 배임연(裵臨淵)
임연은 배삼익(裵三益, 1534∼158)의 호이다. 자는 여우(汝友), 본관은 흥해(興海)이다. 이황의 문인이다.
1564년 문과에 급제, 성균관 학유로부터 대사성까지 지냈고,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진사사(陳謝使)의 정사(正使)로 파견되었을 당시 명나라 조정에서는 공개를 꺼리는 대명회전 수정된 초본을 외교적 노력을 통해 입수
하였고 더불어 황제로부터 옥적(玉笛), 상홀(象笏), 앵무배(鸚鵡盃)를 받았다. 외직으로는 풍기 군수와 양양 부사를 거쳐 황해도 관찰
사를 지냈다. 저서로는 임연재집이 있다.
03) 경광서당(鏡光書堂) : 송암 권호문이 안동 금계리에 세운 서당으로 1570년 건립되었다. 권호문의 기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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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權公墓碣銘 幷序
公諱德潤字子胖。權氏出麗太師幸。冠冕赫世。爲東方大姓。諱守洪尙書左僕射。諱靷禮儀判書。諱原中郞將。諱啓經縣監。贈吏參。寔公高祖。曾祖諱琨副護軍。贈吏判。始居金溪。有淸德重望。祖諱士英習讀。考諱應禧義興衛部將。贈通政。妣淑夫人眞安白氏。左副衛元亨女。公生嘉靖戊子。卒丙午。享年七十九。葬天燈南城谷枕艮之原。配原州邊氏。生員廣女。婉淑慈惠。得鄰里懽心。生癸巳。歿後公十七年。墓合堋。有三男。晅有經行。號誠齋。暘,昶。晅,無子。以繼善嗣。暘五男。宗善,承善出。繼善入承公祀。好善,處善贈掌樂正。皆以文行世其家。二女適李馨遠,李揚遠。昶嗣男承善。繼善男滋,泳,澯,沇。女南俅生員,玉嵂。宗善嗣男濟。女南天漢大諫。處善男灦贈刑議號愚軒。女李琓。承善男淰,濟出。淮。女金軫壽,金宗準,文聖標。滋之後四傳。而曰烠有至行邃學。號杏亭。炳文正字。以經術重於儒林。號約齋。烌生員號默庵。焌,熠。一時文獻蔚如也。公天稟愷悌剛明。早襲庭敎。不離典則之內。弱冠。已有老成稱。事親謹定省。極其忠養。居喪哀毁逾制。與兄聯牀共枕 。愛友篤至。先墓皆置祭田。以備奠獻。手書家規。諄諄敎諸子。平居簡默自守。不喜徵逐。與權松巖,裴臨淵諸賢。道義交。相往來酬唱。絶意進取。書史自娛。尤以奬進後承爲務。與南公衡,辛上舍乃沃。刱鏡光書堂。令諸生肄業。旣又收貲擇任。以贍養士之資。以薦爲丹陽訓導。後以大耋授僉樞。外舅邊公嘗遺公短琴一張,七書諸袠。謂琴書軒。豈公以此自命。而邊公因而稱之歟。後孫淵浩,周顯等。治墓石旣具。責以顯刻之詞。興洛懼非其人。而顧忝爲自出。又與公諸孫。有十世同閈之舊。於義不敢辭。遂按其狀而敍之。系以銘曰。
根深者末必茂。源遠者流必長。子孫繩繩兮有儒行。吾知公潛德幽懿。闇然而彌章。<끝>
西山先生文集卷之十八 / 墓碣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