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목 : 문화재자료 제329호 (경남) 분류 :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인물기념/ 생활유적 수량 : 1동(棟) 지정일 : 2003.04.17 소재지 : 경남 진주시 상봉동 887-1 시대 : 일제강점기 소유자 : 정인화 관리자 : 정인화 연락처 : 경상남도 진주시 문화관광담당관실 055-749-2053
비봉루는 진주의 진산인 비봉산 아래에 있는 누각으로 팔작지붕과 겹처마 오량가로 구성되었으며 정면 3칸, 측면2칸의 평면으
로 누하주는 장초석으로 8각으로 위에 비스듬히 가공하였고, 3익공계 공포형식을 하고 있는데 출목이 있다.
충량은 대들보 위에 얹혀 있으며 머리에는 용두장식을 하였다.비봉루는 고려 말∼조선 초의 대유학자요 고려조의 충신인 포은 정몽주의 장구지소로, 후손인 정상진이 1939년에 지은 누각이며 비봉루와 관리사 정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진주의 대표적인 건물로 지금까지 알려지고 있고 비봉루에서 바라보는 시가지 전경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동측에 관리사는 서실 겸 차실로 사용하고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 사방에 계자난간을 두르고 외부에 유리창을 부착하였고, 누각이나 누하주는 짧다.
대청 방 2칸으로 구성되었으며, 한옥과 일본식의 절충형으로 겹집평면과 부속공간이 다양한 형태로 섞여있다.
추사체의 맥을 이은 이 지역의 서예가 정명수 서실로 운영하던 곳으로 현재는 그의 후손이 관리하고 있다.
지정면적은 1,190㎡이며, 건물 1동(42.97㎡)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출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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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정신의 堡壘 비봉루((飛鳳樓)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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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사월이면 비봉산에는 복숭아꽃이 지천으로 피어난다. 그 볼 붉은 꽃은 우리 일신인의 혼에 생기를 불어넣어 정신을 꾸밈없고 넉넉하게 하여 산 것을 살아있게 한다. 비봉산의 푸른 숲과 복숭아꽃의 탐스러움을 늘 보아온 우리 일신인들은 당당함과 후덕함을 두루 갖춘 여성 지도자로서 탐스럽게 영글어져 곳곳에서 제 몫을 다하고 있다. ‘새로워지다, ꡐ새로운 세상, ‘새누리, 란 의미의 일신정신은 진주의 주산인 비봉산에서 흘러내린 푸른 힘과 교육현장의 의식 있고 힘찬 교육의 결과가 어우러지고 다듬어져 80여 년을 이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와 더불어 일신정신과 맥이 맞닿은, 천년의 멋과 여유가 살아 숨쉬는 역사와 전통의 고장 진주는 자연 경관 또한 그에 걸 맞는 품격과 모양새를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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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비봉루를 건립하면서 단청에 많은 투자를 하였는데 단청은 “꽃집”이라 불릴 만큼 그 색이 화려하여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었다. 또한 난간을 두르고 유리창을 통하여 시내의 전경을 조망할 수 있게 하고 바람이 불어도 실내에서 여유롭게 활용 할 수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늘 끊이지 않게 하였다. 건물이 완성되자 의제 허백련, 동양화가 변정관, 동기 이경순, 파성 설창수 등 영호남의 예술인들이 빈번히 드나들고, 그곳에서 많은 문화 예술에 대한 토론이 전개되고 수시로 새롭게 창출된 아이디어가 시에 건의, 제공되어 자연스럽게 진주의 문화를 주도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영남예술제 초기에는 백일장 장소로도 활용되었으며, 원거리의 예술인들이 예술제에 참여할 경우 짜투리 시간을 보내는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또한 70년대 이전 까지는 마을 사람들이 오수를 즐기는 휴식공간으로 이용되었고, 근래에는 청춘 남녀의 데이트 장소로도 애용되고 있다. 건립자의 사후에는 그의 아들인 추사체의 맥을 이은 서예가 은초 정명수 선생이 기거하였는데 이때부터 더 본격적으로 예술인들이 발걸음을 하였다. 은초 선생은 비봉루 건립 당시 청남 오제봉 스님(1908-1991)이 30년 동안 주지로 계신 의곡사에서 기거하던, 성파 하동주 선생 문하에서 서예를 배웠다. 그것은 비봉루를 짓고 난 후 현판을 쓰기 위해서였다. 타고난 예술성으로 인해 곧 남다른 성취가 있었고, 그 때 쓴 경필이 아름다운 현판은 지금도 걸려있다. 은초 선생 문하에는 많은 후학들이 서예를 배우기 위해 몰려들었다. 정초에는 선생께서 직접 휘호를 쓰기도 하고, 시창 등을 하면서 신년의 흥취를 지인들과 나누었다. 70년대 후반에는 효당 최범술 선생과 더불어 진주 차인회를 결성하고 빈번한 차회를 가졌으며, 우리 차를 보급하고 알리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또한 많은 수행자들도 출입했는데, 그렇게 많은 묵객과 예술인들이 드나들었던 것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 후덕한 은초 선생의 인품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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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몸으로 진주를 사랑하고 느끼고 쓰다듬으며 살았던 지성의 의지 위에 우뚝 선 비봉루, 그 난간을 바라보며 남강은 유유히 흐른다. 진주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느끼며 살았던 선자의 삶을 있게 한 포은 선생의 ‘장구지소, 는 아래와 같다.
비봉산전 비봉루(飛鳳山前 飛鳳樓) 누중숙객 몽유유(樓中宿客 夢悠悠) 지령인걸 강하정(地靈人傑 姜河鄭) 명여장강 만고류(名勵長江 萬古流)
비봉산 앞 비봉루에 올랐더니 누각에 잠자는 나그네 꿈마저 함께 흐르네 영지에서 인걸이 난다더니 강씨 하씨 정씨로 그 명성 장강과 함께 만고로 흘러가네
비봉산 아래 진주시 상봉동 887-1번지에 있는 팔작지붕과 겹처마로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어져 후손인 화정 정인화 선생이 관리하고 있는 지방문화재329호 누각 飛鳳樓! 은초 선생 사후에 약간의 역할변화가 있어, 한때는 후손이 차실로 사용했으나, 현재는 시 예산의 지원을 받아 원래의 역할을 하기위해 보수, 복원하고 있다.
미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오래도록 가슴에 품고 갈 진주 정신의 보루 비봉루! 진주 정신의 얼개로서 비봉루가 차지하는 위치와 크기가 얼마나 큰지는 진주사람 이라면 모두 알고 있다. 눈빛 푸른 비봉루는 비봉산의 숲과 그 숲에 깃들인 바람과 햇살과 더불어 우리 일신인들을 올곧은 정신의 주인공으로 키워내었다. 오래도록 비봉루를 비봉루 답게 가꾸어 온 선자의 숨결이 오롯이 배여 청정한 자태로 꼿꼿한 그곳에는 지금도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지나가고 또 통과하고 만들어지고 사라지며, 흐르고 스쳐지나가고 다가오는 문화와 예술과 정신으로서의 비봉루는 마르지 않는 남강 물처럼, 혹은 쉼 없이 건너오는 바람처럼, 살아 있는 진주의 얼과 혼을 곧추세우기 위해 우리가 딛고 건널 넉넉한 품으로 안아들일 징검다리로 남으리라고 본다.
-일신세상 2007년 봄호에 발표 -
출처: 화요문학회 http://cafe.daum.net/thepoetry/4CJT/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