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의 정의 및 배경과 영향
1. 종교개혁이란?
(1) 일반 역사가들의 견해
일반역사에서 종교개혁(宗敎改革, Protestant Reformation)이란 개신교 신앙운동으로 16세기 초의 정치, 경제, 사회적 변화에 의해 태생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예로 사회주의 역사학자 스미스는 그의 저서 ‘종교개혁의 시대’에서 16세기의 종교개혁을 사회 구조의 변화로부터 기인된 것으로 보고 국가주의, 자본주의, 개인주의가 팽배하면서 그 결과로 종교개혁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2) 개신교 교회 역사가들의 견해
그러나 개신교 역사가 중 한 사람인 독일의 종교개혁자요 역사가인 Mathias Flacius Illycius는 그의 책 ‘Mahdeburg Centuries’에서 교회역사를 성경중심의 ‘참된 교회’와 의식과 위선을 중시하는 ‘거짓 교회’의 투쟁사로 해석하면서 16세기 종교개혁을 ‘거짓된 교회에 대항하여 일어난 참된 교회의 역사’로 설명했다. 16세기 영국의 역사가인 John Bale 역시 ‘두 교회의 모습’에서 종교개혁을 ‘거짓 교회에 대한 참된 교회의 역사’로 설명한다. 즉 그는 교회사를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참 교회와 의식과 전통을 강조하는 거짓 교회의 투쟁사로 설명했다. 영국의 종교개혁자 존 폭스도 교회사를 참 교회인 ‘그리스도의 교회’와 적그리스도의 교회인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투쟁사로 이해했다. 이처럼 개신교 역사가들은 공통적으로 종교개혁을 하나님에 의하여 계획되고 준비되어 온 교회에 대한 하나님 섭리의 역사로 본다.
(3) 로마 가톨릭교회 역사가들의 견해
반면에 로마 가톨릭교회의 역사가들은 중세 시대를 기독교의 이상이 실현되었던 사회로 보고 종교개혁 당시의 그들 교회에 어떤 오류도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러기 때문에 종교개혁을 하나의 이단적이고 분리주의적인 운동이라고 비판한다. 특히 로마 가톨릭교회 역사가인 추기경 Baronius는 ‘교회연대기’(Annales Ecclesiastici)에서 개신교의 종교개혁을 로마 가톨릭교회의 정통신학으로부터의 일탈로 평가했다.
(4) 개혁주의자들의 견해
이러한 종교개혁에 대한 다양한 견해 차이는 종교개혁을 해석하는 역사가의 견해나 신학적 입장과 전제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을 바로 이해하려면 바른 신학적인 전제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바른 신학운동은 신학 활동에서 인간의 이성(理性)보다는 성경의 권위를 중시하며,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믿음으로 가능하다. 이런 바른 신학은 성경의 권위를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개혁주의 신학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학적인 전제를 강조하는 개혁주의 입장에서 본 종교개혁의 정의(正意)는 무엇인가?
– 종교개혁은 환원운동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초대교회 신앙으로 돌아가려는 운동이다. 주후 30년 경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초대교회는 380년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Flavius Theodosius, 347-395) 때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되었는데 그 결과 당시 5개 교구 중 하나였던 로마교회로 교권(敎權)이 집중되어 주후 590년 그레고리 1세(Pope Gregory I, ?-604)가 로마 가톨릭교회 교황으로 취임하면서 중세교회로 전환되었다. 이후 약 1000여 년 동안 로마 가톨릭교회가 세계 교회를 지배하면서 교권 확장에서 파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로 타락하여 초대교회의 가르침으로 돌아가고자 1517년 종교개혁(Reformation)이 발생했다. 이처럼 종교개혁은 중세교회를 부정하고 초대교회의 참된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환원운동이었다.
– 종교개혁의 기준은 성경이었다.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교회를 지배해 왔던 성경과 다른 전통이나 교황의 결정 및 교회의 권위에 반대해서 성경과 초대 정통교부들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운동이다. 즉 종교개혁은 오직 성경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가려는 운동이었다.(Returning to the Bible)
– 종교개혁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었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 :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는 대중으로부터 성경을 빼앗았으나 종교개혁은 대중에게 성경을 돌려주었다. 개혁의 선두 주자였던 루터는 1522년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누구나 읽게 했다.
오직 믿음(Sola Fide) : 개혁자들은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공덕(功德) 사상에서 비롯된 면죄부 판매, 고행, 고해성사들에 반대해서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득의(以信得義) 교리를 새롭게 했다.(롬 1:17)
오직 은혜(Sola Gratia) : 개혁자들은 자연은총과 일반은총을 강조하는 아퀴나스를 중심으로 하는 스콜라신학을 반박하고 특별은총 즉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어거스틴신학으로의 복귀를 주장했다.
오직 예수(Solus Christus) : 개혁자들은 구원은 교회의 전통과 교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뿐임을 강조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 개혁자들의 종교개혁의 궁극적인 목적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었다.
2. 종교개혁의 배경
주후 590년부터 1517년까지 거의 일천 년 동안 유럽사회를 지배한 로마 가톨릭교회가 왜 무너져 내렸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아주 의의가 깊다. 카노사의 굴욕(Road to Canossa, 1077.1.28.)사건을 통해 교황권이 왕권 위에 군림하게 되었다. 즉 1077년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Emperor Henry IV, 1050-1106)가 자신을 파문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Pope Gregory VII, 1020-1085)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의 카노사 성(城)으로 가서 용서를 구함으로 교황권이 한층 강화 된 사건을 말한다.
특히 교황 이노센트 3세(Innocent III, 1198-1216)는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다.”라고 교황의 권위를 신성시했다. 그리고 한없이 높아진 사제(司祭) 주의는 중세 사람들의 삶을 종교적, 사회적으로 지배했다. 특히 7성례(영세, 견진, 성찬, 고해, 결혼, 서품, 종유)를 통해 요람에서 무덤까지 사제(司祭)의 집행이 없이는 살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즉 사제의 개입이 없이는 일반 성도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었다. 이처럼 철저하게 제도화되고 교권화된 어두운 중세의 교회 상황 가운데서 교회를 개혁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때가 차매’(갈 4:4)라고 말씀한 것처럼 하나님의 때가 차서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중세의 종교개혁이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종교개혁의 배경을 살펴보기 위해 먼저 당시의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상황들을 중심으로 종교개혁의 간접적인 원인들을 살펴보고 다음에 종교적인 원인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종교개혁의 간접적인 원인
– 지리적 변화
1492년 Columbus의 신대륙 발견은 중세 사람들의 세계관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강(江) 중심의 문명에서 대양(大洋) 중심의 문명으로 전환된 것이다. 중세 때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당시의 종교는 물론 정치, 사회, 경제, 과학까지도 지배하여 태양도 지구 중심으로 돈다고 믿었고 지구는 평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대륙의 발견으로 인해 중세 사람들의 시야가 넓어졌고 과학기술과 항해기술의 발전으로 식민지를 개척하게 되어 중세 사회 사람들의 인식(認識)에 대변동이 일어났다.
– 경제와 사회구조의 변화
십자군전쟁이 끝난 후 장원제도(莊園制度)와 함께 봉건주의가 무너졌다. 따라서 장원제도 중심으로 신분 상승이 제한되어 있었으나 봉건제도가 붕괴가 되면서 새로운 중산층(中産層)이 생겨남으로 사회구조의 변화가 생겨났다. 즉 이전의 소수의 지배층과 다수의 피지배층으로 구성된 피라미드식 사회구조가 파괴되고 상업과 무역으로 인해 자본을 형성한 다수의 중산층으로 인해 사회구조의 변화를 가져왔다.
또 농업중심의 사회에서 상업과 무역의 자본주의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십자군전쟁과 백년전쟁 후 평화 시대를 맞아 인구의 증가로 인해 노동력이 풍부하여지자 영주들은 농지에 대한 임대료를 인상하여 농민들을 억압하였고 그로 인해 많은 실업자가 생겨났다. 일자리를 잃은 농민들은 도시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 결과 넓은 토지를 소유한 영주들은 점차로 부족한 노동력을 해소하기 위해 기계화를 촉진 시켰고 그 결과 산업이 발전하고 협동조합과 은행들이 생겨났으며, 은행의 출현과 함께 신용제도, 지폐, 할인제도 등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경제구조가 등장하였다. 이런 경제구조의 급속한 변화는 사회를 혼란 가운데로 몰아넣었고 사람들로 하여금 개혁 등의 변화를 열망하게 만들었다.
– 민족주의와 국가 의식의 발달
왕권이 점점 커가면서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에서 절대 왕조들이 일어났다. 세속 군주들은 절대 권력을 추구하였고 전쟁을 일으켜 국토를 확대하거나 왕권신수설을 주장함으로 상대적으로 신성로마제국의 교황권을 약화시켰다. 이전까지는 교황청이 보유한 재산이 많았는데 민족국가들의 왕권이 강화됨으로 자국의 돈이 교황청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에 저항했다. 세속군주들은 로마 교황청으로의 재정 유출을 막음으로 국가 재정을 든든히 하고자 종교개혁을 지지하여야만 했다.
– 문예부흥과 인문주의
종교개혁을 아우그스티누스(Augustine of Hippo, 345-430) 신학의 부흥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로마 가톨릭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 신학에 대한 반발을 의미한다. 토머스 아퀴나스는 자연과 은총이라는 이중 구조를 강조하면서 자연을 통하여 우주와 보편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자연신학은 일반계시에 기초한 것으로 성례 신학을 중시하게 만들었고 특별계시를 경시함으로 은혜를 소홀히 여기게 하였다. 반면 아우그스티누스가 특별계시를 강조하는 은총의 신학을 주장하였고 이는 존 위클리프와 롤라드 및 루터에게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이처럼 신학자들을 통해 아우그스티누스 신학의 부흥이 일어남과 동시에 일반인들을 통해서는 문예부흥운동 곧 인문주의운동이 전개되었다. 1096-1291년 약 200년 동안 8차에 걸친 십자군전쟁을 통해 동방의 문헌과 예술작품이 서방에 소개됨으로 동서방 간의 문화교류가 진행되었고 이에 영향을 받아 건축, 음악, 그림에서 문예부흥(文藝復興, Renaissance)이 일어났다. 이 문예부흥운동은 종교적으로 초대 교부들의 믿음으로 돌아가자는 ‘원전(原典)으로의 복귀운동’의 결과이기도 하다.
또 학문적 측면에서는 인문주의(人文主義, Humanism)가 발달되어 인간의 본질을 찾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인간이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동방문헌 즉 헬라문화와 철학에서 찾으려고 했다. 따라서 성경을 헬라어, 히브리어 원전으로 읽으려는 운동이 일어났고 이러한 인문주의운동은 일반 인문주의와 기독교 인문주의로 나눌 수 있는데 일반 인문주의는 철학의 발달과 함께 현대 계몽주의 발생에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기독교 인문주의자로 대표되는 에라스무스는 성경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찾고자 노력했다. 따라서 그는 성경연구에 관심을 극대화시켰고 이러한 성경연구의 관심 증대는 종교개혁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인문주의운동은 인간에 대한 연구길을 열었고 성경연구를 고양시킴으로 종교개혁에 공헌하였다.
– 인쇄기 발명
1455년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468)에 의해 인쇄기가 발명됨으로 정보 파급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또 종교개혁 사상의 파급을 신속하게 해 주었다. 특히 성경 지식의 확산을 도왔고 그 결과 1457년에서 1500년 사이에 유럽 전역에서 인쇄된 성경이 100여 종이나 되었다. 이러한 인쇄술의 발달은 종교개혁 사상이 유럽 곳곳으로 짧은 시간에 전파되게 함으로 종교개혁의 확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국의 종교개혁가 존 폭스는 그의 ‘순교사기’에서 인쇄술이 종교개혁에 미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올바른 지식과 분별하는 빛이 훌륭한 양식 속에 자리를 잡게 되며, 어두움은 물러가고, 무지는 소멸되며, 오류로부터 진리가, 미신으로부터 참된 종교가 구별되기 시작하였다.”
(2)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원인
- 무지와 미신적 신앙
1200년경에는 유일한 표준으로 라틴어 성경만을 사용함으로 평신도를 우민화(愚民化)하였다. 일반 성도는 성경을 소유하거나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진리를 바로 알수 있는 기회가 없었고 이는 자연히 고위 성직자의 권위를 강화시켰다. 성경을 자유롭게 해석함에서 오는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 성경해석 권한은 교황에게만 있었다. 따라서 성경적 기독교는 사라지고 인간적 고안(考案)과 편의(便宜)에 의하여 마련된 교훈들이 교회와 신자의 삶을 지배하였다. 이러한 일반 성도들의 성경에 대한 무지는 영적무지로 이어졌고 일반성도는 미신적 행위를 통해 대리만족을 얻고자 했다. 면죄사상, 성자 숭배사상, 마리아 숭배사상, 성물숭배사상 등이 이러한 영적무지의 산물로 나타났다. 이처럼 중세 시대는 말씀의 빛이 가려지면서 영적인 암흑시대가 되었다.
- 교회 재정부패 및 성직자들의 타락
교회의 재정부패는 종교개혁이 일어난 또 다른 하나의 동기를 제공했다. 교회의 재정부패는 13세기에 성직을 가진 자가 사망할 경우 교황 마음대로 성직록(聖職祿)을 재할당할 수 있다는 교회법이 제정되면서 가속화되었다. 교황의 교회 재정에 대한 입지가 강화되자 교황들은 치부(致富)를 위해 다양한 세금제도를 고안해 냈다. 성직자 유고(有故)시를 고려하여 후임을 약속하는 예약세, 성직에 임직한 후 1년간의 수입을 교황청에 내는 임직세, 서약을 지킬 수 없을 때 내는 약속 변경세 등을 고안해 냈고 성직매매 등의 방법을 통해 엄청난 축재(蓄財)를 했다.
이러한 재정의 부패는 교황뿐만이 아니라 일반 사제(司祭)들도 돈의 노예가 되었다. 고리채 놀이 및 공석 목회제도를 통해 축재함으로 성직자들이 돈으로 인해 말할 수 없이 부패했다. 이 같은 교회의 부패는 결국 성직자의 타락으로 이어졌고 성직자의 도덕적 성적 부패와 타락은 보편적 현상이었기 때문에 평신도들은 성직자의 축첩(蓄妾)을 묵인할 정도였다. 이처럼 성직자들의 도덕적 성적 타락은 사회적 종교적 문제로 대두되었고 이는 종교개혁의 간접적 원인 중 하나를 제공했다.
- 면죄부 판매
면죄부(免罪符, Indulgence) 판매의 근거로 로마 가톨릭은 마태복음 16:19 을 인용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제자로 사죄권(赦罪權)과 축복권(祝福權)이 있다고 해석했다. 그러기 때문에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도 이러한 사죄권이 있다고 주장하며 면죄부를 판매를 정당화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십자군전쟁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전쟁에 직접 참여하거나 혹은 물질을 지원하면 죄 사함을 받는다고 로마 가톨릭교회는 선전했다.
특히 교황 칼릭투스 3세(Pope Callixtus III, 1378-1458)는 1457년 연옥(煉獄, Limbo)에 있는 영혼들도 면죄부에 의해 구원이 가능하다 고 주장했다. 그리고 종교개혁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사건은 마인즈의 대주교인 브란 덴버그(Albrecht von Brandenburg, 1490-1545)가 공석(公席) 목회제도에 의해 3곳의 대주교를 맡고 있으면서 테젤(Johann Tetzel, 1465-1519)이라는 신부(神父)를 고용하여 면죄부를 적극적으로 판매한 사건이다. 그는 교황 레오 10세(Pope Leo X, 1475-1521)와 결탁하여 자신의 교구에서 면죄부를 독점 판매하도록 한 것이 루터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3. 종교개혁의 영향
종교적 암흑시대로 불리는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 시대는 하나님의 섭리로 시작된 종교개혁을 통해 막을 내리게 되었다. 종교개혁은 중세교회 안에 만연했던 비성경적인 모든 것을 제거하고 성경적인 교리, 예배, 교회정치를 회복하게 했다. 종교개혁을 통해 중세교회의 모든 인간적인 전통과 권위는 사라지고 성경 중심의 신앙과 생활이 교회 안에 회복되었다. 또 계급 구조적인 사회에서 성경이 제시하는 평등과 자유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이처럼 종교개혁으로 복음을 재발견하고 적극적이며 긍정적으로 교회 생활을 할 수 있는 신앙의 자유를 향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반종교 개혁을 통해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는 로마 가톨릭 국가로 남게 되었으며 그 이외의 나라와 지역에는 개신교가 다수를 점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의 결과 교황을 정점으로 하나를 이루어 왔던 서방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 루터교회, 개혁교회, 앵글리칸교회(성공회), 신령주의 그룹의 교회(재세례파 등)의 다섯 부류로 나뉘었다.
– 루터교회는 루터의 개혁운동과 신학을 따르는 교회로서 독일 동쪽과 북쪽 그리고 스칸디나비아 나라들로 확산되었다.
– 개혁교회는 스위스와 접경 지역인 남부 독일에서 여러 종교 개혁자들 을 통하여 세워진 교회이다. 개혁교회는 제네바의 칼빈으로 말미암 아 유럽의 여러 나라로 확산되었다.
– 성공회는 정치적인 동기에서 개혁이 시작되어 초기에는 신학 적으로 루터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엘리자베스 시대 이후는 개혁교회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그러나 교회 조직으로는 감독교 회 정치를 유지하며 왕을 교회의 수장으로 하는 앵글리칸 특유의 교 회로 발전하였다.
– 신령주의 교회들은 여러 다른 그룹들로 형성되어 있어서 통일된 조 직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종교 개혁 당시 신령주의를 대표하는 그룹이 재세례파였다. 재세레파는 유럽에서 이단시되어 정착하지 못하고 있다가 그 후예들이 미국으로 가서 대등한 개신교 교파의 하나로 발전하게 되었다.(*)
글쓴 이 / abraham koo(프랑스에 파송 된 한인 선교사)
첫댓글 요즘은 후원자체가 없다보니 먹을것도 못삽니다
공과금도 못내고 치료받으러 가지도 못해요 몇분이라도
후원참여를 해주시길 바랍니다..............
후원 참여가 없습니다 후원으로 도와주셔서 용기를 주십시요...
카페지기는 너무 힘든 시간을 보냅니다 늘 어렵게 살아가는데
코로나 사태로 후원이 거의 없어지니 하루하루 사는게 말이 아니네요,,
통신료 공과금 30만원과 치료비를 마련해야합니다
카페지기는 생활고를 겪고 있습니다 작은 나눔의 손길이 되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도와주신 분을 위해서 집사람 박경옥 전도사가 매일
기도해 드리고 있습니다.....
지병으로 투병하며 카페일로 소일하며 지냅니다 수입이 전혀 없이 살고 있습니다
예수 코리아 카페를 도와주실분을 기다리고 작정기도합니다 매월
자동이체 정기후원 회원님이 계셔야 카페를 운영 할 수 있습니다 공과금으로
30만원 병원약과 주사비가 30만원 40만원으로 먹을거라도 사야 삽니다
카페지기 전화입니다 010.2261~9301
카페후원계좌-국민은행 229101-04-170848 예금주.황종구
카페후원계좌-농협 233012-51-024388 예금주.황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