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거제 사진의 역사
사진의 역사는 짧다. 그러면서도 엄청난 발전을 가져 왔다. 사진의 시초는 18세기 초 였다. 프랑스의 니에프스 형제(niepce, J.N.)와 1829년 다게르(Daguerr, L.J.M.)에 의하여 발전되었고, 다게르는 니에프스의 헬리오그래피의 현상술을 개선하여 그의 스튜 디오에서 선명한 사진을 제작하는데 성공하였다. 다게르의 사진방법은 1839년 8월 19 일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에서 아라고(Arago, F.)에 의하여, 공식 발표되었다. 이때부터 사진의 원년을 기록하게 된 것이다. 1851년 아처(Archer, F.S.)가 콜로디온법을 발명 할 때까지 경쟁없이 독보적으로 걸어 왔다. 콜로디온법의 발명은 초기의 사진발명에 여러가지 부분이 개선되는 단계에 왔다. 한 장의 음화에서 원하는 대로 사진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또 감광도가 빨라 짧은 시간에 촬영이 가능해 졌다. 1840∼1850년은 초상 사진의 시대로 접어 들었다. 1867 년 영국에서 개발된 건판과 1880년대 코닥이 등장함으로서 크게 발전되어, 사진은 대 중화하였다. 1886년 영국의 에머슨(Emerson, P.H.)이 예술에 대한 인정을 최초로 받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사진이 들어온 시기는 1871년 신미양요 당시 미해병대의 전투기록과 역 관이나 해외시찰에 나선 사신들에 의하여 사진에 대한 개념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 러한 접촉이나 소개가 사진문화의 직접적인 수용은 아니었다. 1884년 2월 14일자 [한 성순보]에 의하면, 저동에서 살고 있는 우후를 지낸 김용원(金鏞元)이 촬영국을 설치하 였으며, 외무아문 주사를 지낸 지운영(池運永)이 일본에 가서 사진기술을 배워 왔다.
이 때, 황철(黃鐵)이 상해와 일본에서 사진기를 구입하여 사진관을 설립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 때는 사진을 일본 문물로 오인한 민중들에 의하여, 사진관이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1895년 단발령이 선포되자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한 사진이 유행되기 시작하였다. 거제에 사진이 들어온 시기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서 어느 시기에 누구에 의하여 보급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일합방 후 일본사람들에 의해 사진기술이 본격적으로 파급 되었다. 1904년경에 장목 송진포에 일본 해군기지를 만들면서 일본인에 의하여 사진에 대한 제10편 문화예술·체육 - 2112 - 첫 선을 보였다고 한다. 그후 한일합방과 더불어 일본사람들로부터 사진기술을 배워, 장승포와 거제 구읍(거제면 소재지)에 사진관이 설치되었다. 그 당시 사진은 가족사진을 비롯하여, 증명사진 등 기록사진에 중점을 두었다. 1930 년부터 1948년까지 김종민이 거제면 동상리 443번지에서 기성사진관을 경영하였고, 1956년부터 1963년까지 서상리에서 김찬영이 사진관을 경영했다. 1948년~1968년까지 황상두가 거제면 동상리 543번지에서 사진관을 경영했고, 이어서 정정부, 정태종, 김동 주, 유치곤, 김성식이 사진관을 경영했다. 장승포에서는 이장섭이 일제시대부터 장승포사진관을 경영했다.
거제 김종민과 더불 어 거제사진의 원조라 할 수 있다. 6·25동란 후, 피난민에 의해 사진관이 많이 생겼다. 고현에 이원석, 장승포에는 최종환이 화랑사진관을, 이석조가 평화사진관 또, 장미사진 관을 한 사람도 있다. 그리고 성포에서 이정명이 사진관을 경영했다. 지역민으로는 아 양에서 이주옥이 청춘사진관을, 일운에서 이명춘이 문화사진관을, 고현에서 백문기가 백씨사진관, 옥갑종이 월광사진관을 경영하다가, 거제군청 사진기사로 들어갔다. 마산 심 씨가 조광사진관, 이범수가 은파사진관, 추영복이 청춘사진관, 김병선이 금탑사진관, 김 소정이 백조사진관을 경영했으며, 일운 지세포 반문석이 백조사진관, 둔덕 옥수복, 장목 김기주·한재훈·고이남, 외포 김영덕, 연초 옥주영 등 읍면소재지에 사진관이 생겼다. 1970년 초반 대우·삼성조선이 들어 오면서 사진 인구가 늘어나, 사진관과 현상소가 생기게 되었다. 사진을 전문으로 하는 영업소는 여러 곳 생겼으나, 작품사진을 하기 시 작한 것은 윤의도가 고향에 정착하면서 부터이다. 사진을 영업으로 하는 사람은 있어도, 예술에 대한 눈을 뜨지 못했다.
그럴 때 고향 이 거제인 윤의도는 전국적으로 명성이 있는 사진작가로 활약을 하였다. 윤씨는 해군사 관학교 정훈부에서 보도사진을 하다가, 부산시청에서 홍보사진을 담당했다. 그때 부산 상공(釜山商工)에 대한 칼라판 책자 상·하권을 만들어 전국은 물론, 일본에까지 홍보 하기도 했으며, 그후 1970년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거제관광 소개를 위한 관광문화유적 지 사진전을 전국을 순회하면서, 20여 회에 걸쳐 소개하였다. 천주교 순교자 후손인 윤씨는 종교관계 사진을 비롯하여, 풍물사진 등을 전국에 순회 전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1972년에는 관광거제란 칼라판 책자를 제작하여, 보급하기도 했다. 당시 거제군 공보실 사진기사로 있던 이승철을 비롯하여, 많은 사진인이 그의 지 도를 받았다. 이씨는 윤씨가 제작한 관광거제 홍보책자를 만드는데, 일조를 하였다. 윤씨의 창작기법은 생동감이 넘치는 새로운 소재를 발굴하였고, 사진의 구도를 생명 으로 여겼다. 교통사정이 어려울 때,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거제의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풍물을 촬영하였다. 특히, 배를 이용하여 바다의 절경을 촬영하는데는 어려움이 많았다.
윤의도는 작가협회에 가입은 하지 않고, 독자적인 작품활동을 왕성하게 펼쳤으며, 평 제9장 사 진 - 2113 - 생을 사진과 함께 살아왔다. 뿐만 아니라, 향토문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거제 문화원 활성화와 예총 거제지부 창립에 대한 관심과 노력은 대단했다. 향토에 대한 애 착과 예술에 대한 긍지를 가지고 일해 왔다. 윤씨는 마지막 정열을 쏟아 옥포에 민속박물관을 건립하였으며, 평생 모아놓은 자 료와 사진을 전시할 계획이었다. 박물관이 완성단계에 있을 때, 병으로 인하여 그 건물을 대우조선에 팔았다. 매매조건은 윤씨의 뜻이 이어질 수 있는 박물관으로 한 다는 조건으로 집과 자료를 넘겨 주었는데, 그것이 모체가 되어 거제박물관이 서게 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