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장 "그런데 나를 걱정해주고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생겼소. 아직은 가족이 무엇인지 잘 모르오. 다만 귀혼곡에서 형님이 그랬고 큰형수님이 그랬소. 우리는 가족이라고 그러니 미안해하지 말라고." 구화산의 혈전 전에 조천영이 냉추렴에게 한 말을 소살우도 들었고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철이 들고 난 후 처음으로 걱정해주는 사람이 생겼다. 걱정해줄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 자신보다 더 소중한 사람들이었기에 아까울 것이 없다. "저……. 살우 도련님!" "어? 작은형수님은 왜 나왔소? 큰형수님이나 돌보지 않고." 그들의 뒤쪽에 냉추렴이 와 있었다. 많이 울었는지 퉁퉁 부은 얼굴로 아직도 울먹였다. 도강이 덮쳤을 때 죽음을 생각했었다. 그때의 상황이 너무 급작스러웠지만 자신도 무공을 익힌 무림인이다. 하지만 갑작스런 기습에 아무런 방비도 못했다. 죽음을 예감하고 눈을 감으려 할 때 도강을 막는 것이 있었다. 소살우의 왼팔이었다. 너무 미안했다. 거의 대화 한 번 없었던 이들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팔을 희생한 것이다. 자신 같으면 저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그리 할 수 있을까 하고 바꿔 생각해보았지만 아니었다.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지금껏 울고 있다가 이제야 나온 것이다. "이거……." "형수님!" 냉추렴이 내밀고 있는 것, 나중에 애를 갖게 되면 보약으로 쓰라던 소림의 대환단이었다. "다음에는 다치지 마세요. 소운이도 같이 오려고 했는데 도련님들의 상처가 심해서……."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형수님." 받아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에, 자신이 받지 않으면 더욱 힘들어할 것이기에 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백산과 냉추렴은 자신만 쳐다보고 있었다. "받았잖소!" "먹어!" 줘봐야 먹지도 않고 따로 보관할 것을 알기에 두 사람이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형님!" "팔 하나 가지고는 소운이와 추렴이를 동시에 못 지킨다, 그러니 먹어. 그리고 우리는 건달이다." "알았소!" 두 사람을 계속 지키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하고 그러려면 대환단을 먹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백산과 광견조 일행이 철저하게 지켜오는 철칙이 하나 있다. 여인들에게는 절대 살인을 시키지 않는다는 것. 자신들이 모두 죽었을 때는 모르지만 눈을 뜨고 있을 때만큼은 그녀들은 보호받아야 할 대상일 뿐이었다. 무림인이 되지 않기 위한 마지막 발악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건달들의 사고방식 속에는 여인에게 검을 들게 하는 놈은 남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한 면이 이번의 사태를 불러왔고 결국 소살우는 왼팔을 잃었지만 그들의 생각엔 변함이 없는 것 같았다. "제길! 이 보물을……." 대환단을 노려보던 소살우가 결국 그것을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백산은 두고라도,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냉추렴의 시선 때문에 견딜 재간이 없었다. "고맙다!" 운공을 하고 있는 소살우를 쳐다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까짓 약 한 알로 잃어버린 팔과 바꿀 수는 없겠지만 그나마 해줄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다. 더구나 도(刀)보다는 주먹을 쓰는 무공에 더 집착했던 소살우가 아니었던가. 이제는 권을 버리고 도만 써야하기에 두 손을 가지고 있을 때보다 배는 강해져야 함이다. "추렴아, 됐어. 더 이상 신경 쓰면 살우가 힘들어." 소살우를 응시하고 있는 냉추렴을 잡아끌었다. 추렴에게 감사의 말을 듣고 있는 소살우의 마음도 편치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소살우가 혼자 나와 있던 이유, 자신의 팔을 잃었다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비록 냉추렴을 구하기 위해서 한 팔을 잃었지만 그 위기의 순간에 그의 선택은 소운이었다. 두 사람이 가까이 있었기에 구소운과 냉추렴을 구할 수 있었을 뿐이지, 만일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면 냉추렴은 포기했을 것이다. 소살우가 석두와 그것을 이야기하며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조용할 때 소살우를 찾아왔던 거였다. "오라버니!" 냉추렴이 울먹이며 백산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그래, 이제 괜찮아. 다 잘될 거야." 백산이 냉추렴의 등을 두드리며 그녀를 달랬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신의 일행 중에 부모님의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과 조천영밖에 없었다. 티 없이 자란 것 같은 냉추렴도 초상의 말을 들어보니 어두운 과거가 있었고 소운도 그렇고, 누구 하나 제대로 살아온 이가 없었다. "이제부터 어둠은 없을 거야. 우리의 행복은 내가 지킨다, 영원히……." "네?" "아냐, 누님에게 가보자. 근데 추렴이 너 가슴이 더 커진 것 같다?" "오라버니!" 냉추렴의 얼굴이 밝아졌다. 사랑하는 사람의 조그마한 농담이 우울했던 마음을 돌려놓고 있었다. 백산의 뒤를 따르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사랑이란 이런 것인가. 어떤 고난이라도 그 사람만 곁에 있으면 다 극복될 수 있는 것. 결코 고난이 아니다, 더욱 단단하게 엮어주는 매개체가 될 뿐……. 그들과 다른 곳에서는 또 다른 사랑을 키워가는 이들이 있었다. "미안합니다, 남궁 소저!" 석두와 남궁미령이었다. 남궁세가에서 이곳까지 오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두 사람이었다. 검법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지만 둘 다 젊은 사람이다보니 오가는 감정은 무공에 관한 느낌만이 아니었다. 서로의 가슴속에 무언가 조금씩 자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석두가 지금 미안하다고 하는 말, 위기의 순간에 자신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아니에요, 석공자님. 저는 무가의 자손입니다." 두 여인이 넋을 놓고 있을 때 가장 침착하게 대응한 이는 남궁미령이었다. 마음이야 조천영의 상태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었지만 소운이나 냉추렴보다는 덜했기에 비교적 냉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오히려 조천영 쪽보다는 아버지가 있는 전방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던 거였다. 그런 그녀의 눈에 소살우가 뛰어드는 장면이 들어왔고 무의식적으로 앞에 있던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검을 휘둘렀다. 그녀와 근처에 있던 몇몇 아이들이 상처가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우리들이 사는 모습이 바보 같지요?" "글쎄요……." 남궁미령의 눈에 비친 이들의 모습은 어떨 때 보면 그녀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언제나 자신들 이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들임에도, 또 어떨 때는 단순할 정도로 의리라는 것을 따지며 산다. 오늘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마을 사람들에게 광천뢰를 던질 정도로 냉정하게 처리했던 사람들이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었다. 아이들만 없었더라면 청풍검진이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과 같은 부상자는 없었을 것이다. 개인보다는 단체를, 조직을 우선시하는 무가나 문파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행동이질 않는가. 그러나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선택이란 말조차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의 대장이라는 백산이란 남자만 해도 그렇다. 소림사에서 보여주었던 그 사람의 행동은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사부의 원수이면 불구대천(不俱戴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복수를 한다며 비무를 했고 이겼다. 그럼 영원한 봉문은 아닐지라도 몇 년 또는 몇십 년의 봉문을 시켜서 복수를 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 복수라는 것이 대환단 세 알이었다. 그것도 사숙 자리와 바꾼 것이라 한다. 내면에 있는 사정까지야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그것을 당연한 것이라 받아들이는 나머지 일행의 행태도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또한 대환단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 무인이면 목숨을 걸고 구하는 그런 영약을 그냥 보약으로 치부하고 누구 하나 욕심을 내지도 않는다. 지금 이들 중 누구라도 대환단을 복용하게 되면 천하에 적수가 없을 정도로 강해질 것이다. 지금도 강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수준인데 이 갑자의 내공이 더해지면 상상이 불가능해질 정도로 강해질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언젠가 알 수 있는 날이 오겠지요. 그런데 안 아파요? 좀 봐요." "괜찮아요." "이리 내봐요. 이 피 좀 봐, 천을 갈아야 될 것 같아요." 자신의 말처럼 언젠가는 이해할 날이 있을 것이다. 미리부터 알려고 하면 더욱 모르는 게 사람의 일이지 않던가. 이들 속에 자연스럽게 어울려 있다보면 알 수 있을 것이고, 이 사람에 대해서도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소저! 옷을 찢으면 어떡합니까." 남궁미령이 자신의 옷을 찢어서 석두의 상처를 싸맸는지 석두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다른 분들 상처 때문에 천도 없어요. 그러니 가만있어요." 멀리서 들려오는 두 사람의 티격태격하는 소리를 들으며 백산과 냉추렴이 집으로 들어왔다. "이것 보우! 아비가 돼서는 아기는 안 보고 어딜 그리 돌아다니누?" 일행 중 가장 힘들어해야 할 사람임에도 산파의 얼굴은 의외로 밝았다. 아이가 살아난 이유 때문이기도 했지만 현실에 적응하는 것이 그만큼 빠르기 때문이다. "할머니……." "젊은이, 자네가 우리들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네. 아쉬움도 있었지만 우리 마을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았네. 더 이상 바랄 것 없이 살았다고나 할까……." 너무 힘들어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벌써 육십 년 이상의 세월을 살아온 사람인데 백산의 행동을 모를 리가 없었다. 자식이 태어났으면 하루 종일 싱글벙글하고 다녀도 시원찮을 판인데, 마을 사람들과 일행이 입은 피해 때문에 좋아하는 표정 한 번 짓지 못하고 밖으로만 나돌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남 보기에는 하찮아 보일지 몰라도 욕심이 없다는 것, 그것은 다 가진 사람들이란 말이네." 갈태독이 깨달았던 삶의 철학을 할머니도 알고 있었다. 마음이 풍족한 사람들. 진수성찬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산나물 몇 가지가 전부인 반찬에 쌀로 지은 밥은 구경도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지만, 더 이상은 바라지 않고 사는 사람들. 남들이 사는 것을 부러워하지도 않고 내 사는 것을 자랑할 것도 없기에 욕심을 내지도 않는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들이었기에 이 세상 누구보다 부자였던 거였다. "자, 안아봐야지. 아비 닮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엄마만 닮았어." "감사합니다, 할머니." 백산의 얼굴에도 미소가 돌아왔다. 자신이 위로를 해드려야 하는데 오히려 위로를 받고 말았다. 노파가 건네주는 소령이를 받아 안았다. 백야평에서 보고 처음 안아보는 소령이다. 너무 부드럽고 귀여웠다. 도저히 자신의 아이라고 믿어지지가 않았다. 어떻게 자신같이 못난 놈에게 이리도 귀여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천영에게 고맙고 가족들에게 감사하는 마음뿐이었다. 다시 눈물이 흘렀다. 한 번 터져버린 눈물샘은 조그마한 감동에도 곧잘 물기를 내보내고 있었다. "예뻐요?" 깨어났는지 조천영이 미소를 지으며 백산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사랑하는 자식을 낳은 여자의 지친 얼굴이었지만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아름답고 숭고한 얼굴이었다. "수고했어요, 누님! 미안해, 너무 늦어서……." "아니에요. 제가 바보였어요. 백랑이 있어야 했는데……." 자신의 모든 것인 사람이다. 그가 있어야 삶의 의미가 있다. 그가 없다면 자신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시간이었고 그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자신의 반쪽을 만난 비익조(比翼鳥)였다. 누구 하나가 없어지면 날지도 보지도 못하는,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비익조……. "나가보세요. 동생들도 돌봐야지요." "쩝!" 조천영에게 다녀온 백산이 서 있는 곳, 아버지의 유골을 모시고 왔던 마차였다. 불화살의 공격에 검게 타버리고 안에 있던 모든 내용물은 재가 되어버렸다. 아버지의 유골이 들어 있던 상자도 마찬가지였다. 거의 재가 되어서 제대로 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단지 몇 조각의 뼈만 있었다. "아버지, 이제는 이곳에서 쉬셔야 하겠습니다. 칠성리까지 모시고 가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할 일이 생겨버렸어요. 이곳에서 돌아가신 마을 사람들을 아버지가 위로해주셔야죠. 아들의 잘못인데 아버지가 책임을 지셔야지 별수 있습니까." 흩어져 있는 뼛조각을 하나씩 주워 담으며 중얼거렸다. 결국 뼛조각 몇 개를 제외하곤 아버지도 남긴 게 없었다. "아버지, 그동안 보셨죠? 아버지와 저의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는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힘이 없어서 당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소령이 보셨죠? 너무 예쁘지 않소? 아버지의 손녀이고 제 딸입니다." 남아 있던 모든 뼈를 수거한 후에 작은 절구를 하나 만들어 조심스럽게 빻았다. "이곳에서 장사 지내실 거요?" 운공을 마친 소살우가 다가왔다. 대환단이 주는 효과는 엄청났다. 이 갑자 전부가 내공으로 화하지는 않았겠지만 한 번의 운공으로 기세가 완전하게 달라져 있었다. 몸에서 발산되는 살기가 사라진 것이다. 백산이 원했던 경지에 근접해 있었다. "보약이 몸에 맞나보네?" "그런 것 같소." 소살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대환단이 주는 약효 때문이 아니었다. 가족이란 개념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기에 정이 가득한 미소가 지어지고 있었다. "그건……." "아! 그냥 이곳에서 모시련다. 이편을 더 좋아하실 것 같기도 하고." "아버님을 고향에 모시는 것이 형님의 마지막 꿈 아니었소?" 복수의 꿈을 접었던 백산의 마지막 소원이었다. 아버지의 유골을 찾지는 못할지라도 자신이 가지고 왔던 유골 전부를 칠성리로 모시고 가고 싶었었다. "꿈은 변하는 거야, 이제 내 꿈은 소령이와 가족이야. 참! 요몽 스님은 어떠냐?" "아직 혼수상태인 것 같습니다." "그래? 빨리 좋아져야 할 텐데." 가장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사람이다. 자신이 그동안 구박했던 것이 못내 미안했다. 무슨 생각으로 그리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덕분에 소령이와 산파 할머니가 살아났다. 이야기를 나누며 환자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떻소, 영감!" 사뭇 걱정스런 얼굴의 백산이 갈태독을 향해서 물었다. 무의식 속에서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는지 연신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요몽 스님은 보기에도 무척 힘들어 보였다. 다른 광견조원들은 한 명씩 깨어나서 움직이고 있었으나 요몽 스님만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환단을 먹였으니 곧 깨어나겠지." 결국 소림에서 가져왔던 대환단과 소환단은 이곳에서 전부 써버리고 말았다. "으음!" "깨어나려나 봐요." 요몽 스님의 입에서 미약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오자 소운이 옆으로 다가앉으며 갈태독을 쳐다보았다.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느라 정신없이 움직인 그녀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다. 무의식 속에서 지르는 소리다." 갈태독의 말대로 요몽 스님은 혼수상태에서 과거의 기억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진정 아버지였단 말입니까, 당신이 진정……." "그렇다, 내가 너의 친아버지다." "그렇다면 왜, 왜……." "가문 때문이었다. 가문의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해선 인정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설령 가족이라 할지라도 예외는 없다." "그깟 가문 때문에 어머님을, 자신의 부인을 죽인단 말입니까. 천륜을 어기면서까지 가문을 세우고 싶었습니까. 그런 저주받은 가문이 제대로 된 가문이 될 것 같습니까?" "닥쳐라! 천륜이란 것은 인간에게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닥치시오! 내가 당신의 아들이라 하셨소! 당신은 나의 어머님을 죽인 원수일 뿐이오, 원수……." "아니다, 너는 우리 가문의 장자다. 배다른 그놈과 다르단 말이다. 내 말을 따라야 한다. 너는 장자다. 우리 가문의 장자, 장자……." "허억!" "정신이 드느냐." 온몸에 땀을 흘리던 요몽 스님이 깊은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갈태독이 재빨리 진맥을 하며 상태를 살펴보았으나 이내 고개를 흔들며 뒤로 물러났다. 아마 과거의 기억을 되찾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무의식중에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어느 정도 기억을 되찾을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잠깐 빛나는 것 같던 요몽의 눈동자가 다시 예전의 흐리멍덩한 눈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으으!" 다시 고통을 호소하는 요몽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던 갈태독이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는 대환단의 약효만으로도 충분히 치유가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나가자. 이젠 시간이 해결해줄 게야." 갈태독의 말처럼 백산 일행은 이곳에서 상당 기간 머물기로 했다. 상처를 입은 광견조원들 때문에 더 이상 이동하기 힘들었으므로 나머지 광풍대원들을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개방의 이목이면 자신들을 찾는 데에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백산 일행의 소식은 개방에만 알려진 것이 아니었다. 수양산 이곳저곳에서 전서구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소식을 접한 이들 중에는 백산 일행이 설검후의 세력을 물리쳤다는 데에 대해서 놀라는 게 아니라, 백산의 무위에 놀라고 있는 자가 있었다. * * * 무려 천오백 년 동안 가문의 유업을 이어온 자, 혈가(血家)를 알고 철가(鐵家)를 알고 광혈지옥비를 알고 있는 천신가의 후예, 천무맹에 있는 장생원의 주인인 검제 담운천이었다. 두 사람. 장생원 내에 있는 그 정자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자들. 노야라 불리던 검제 담운천과 모든 것을 정리해야 서방정토를 만들 수 있다던 스님이었다. "노야, 어찌하실 겁니까." 강호무림의 모든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산서성으로부터 들어온 소식은 너무 엄청났다. 붉은 혈광을 번득이며 지옥의 춤을 추는 비도가 출현했다는 소식이었다. 신의 가문을 몰락시켰던 저주받은 무기, 그 무기가 출현했다는 보고이질 않는가. "자네, 그때 화전민 마을에 있던 것들은 전부 없앴나?" "그렇습니다, 노야. 더구나 어른도 아니고 네 살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천살성의 기운을 받고 태어난 아이가 살아났을 가능성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님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이 혈랑 떼를 이끌고 그 마을을 유린할 때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가까운 곳에 마을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산속에 고립되어 있던 유일한 마을이었다. 그 폭우 속에 이제 네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가 마을 밖으로 나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이다. 물론 그때야 천살성이니 뭐니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한 일이었지만, 혹여 사냥 나간 어른이 있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혈랑 떼를 찾는 자에 대해서는 추살령까지 내려두었다. 단 한 치의 허점도 없이 완벽하게 처리했다고 생각했다. "그럼 그 비도는 어찌 설명한단 말인가……." 비도에 의해서 만들어진 죽음의 춤은 광혈지옥비가 확실한 것 같았으나, 파멸안을 확인하는 가장 중요한 단서인 눈에 대해서는 아무런 보고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동료들에게는 살수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를 혼란스럽게 하였다. 그의 가문에서 알아낸 혈가의 비밀 중에 한 가지는 비도가 춤을 추면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죽어야만 끝이 난다고 했다. 즉, 그 살아 있는 것에 포함되는 것은 적과 아군, 피아의 구별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도의 소유자는 동료를 보호하기 위해서 춤을 추었다는 것이다. 가문에서 알아낸 그들의 비밀은 틀림없을 것이다. 거의 삼백 년에 걸쳐서 알아낸 그들의 비밀이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한 가지밖에 없다. 혈가의 무기는 가지고 있을지언정 천살성은 아니라는 결론이다. 어떤 운 좋은 자가 광혈지옥비를 얻어서 나름대로 무공을 익혔다는 말인 것이다. "천살성이 동시대에 둘이 나타날 수도 있다면 몰라도, 그게 아니라면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또한 그들이 어디에 숨더라도 우리의 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않습니까." 모든 것을 다 쥐고 있는 자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자신감이었다. 하찮은 인간들이 저 잘났다고 해봐야 자신들의 손바닥 안에 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설사 노야의 생각대로 그자가 파멸안이라 해도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질 않습니까. 그들은 통치를 받아야 될 운명을 타고난 미물들일 뿐입니다. 역사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다는 말이지요." 담운천과 신가의 등장을 역사의 흐름으로 보고 있었다. 자신들은 통치를 하기 위해서 태어났고 나머지는 지배를 받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말이다. 더욱 이상한 것은 스님의 태도였다. 습관적으로 내뱉던 불호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자네……! 무공을 대성했구먼." 담운천이 대견스럽다는 듯이 스님을 쳐다보았다. 반신오가 중 사신가의 무공 대성, 마음속에 있던 모든 사악함을 증폭시켜 순수의 존재로 다시 태어나버린 것이었다. "무공을 대성하면서 깨달음이 많았습니다." 사신가의 무공을 대성하자 세상이 달리 보였다. 자신들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서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는 인간들의 행위가 우습게 보였고, 부처가 되겠다고 참선을 하고 있는 자들이 허황되게 보였다. 무릇 인간이란 태어날 때부터 그 그릇의 크기가 정해져 있는 것이다. 과거에 노예로 살았던 자들은 세월이 지나도 노예일 수밖에 없고, 과거에 신이었던 자신들은 어떤 환경에 있어도 신일 수밖에 없는, 세상 이치는 정해져 있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바꾸려 한다 해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자네도 무공을 완성하면서 깨달았을 것이네. 하늘이 우리에게 절대적인 힘을 준 이유를 말이네." 지금껏 시골 노인처럼 하고 있던 담운천의 기세가 급격하게 변했다. 투명한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온 연못을 뒤덮어버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늘의 기운이었다. "지금 세상에서 아옹다옹하고 있는 미물들과 어울려 살라고 준 것이 아니네, 그들을 잘 통치하고 가르치라는 의무를 준 것이란 말일세. 우리의 힘을 사용하는 것은 가진 자의 권리가 아니라 의무네. 세상을 지배해야 하는 의무." 담운천의 눈동자에서 처음으로 빛이 들어왔다. 천오백 년 동안 묻어두어야 했던 신인(神人)의 눈빛, 신안(神眼)이었다. 자신들이 우매한 중생을 지배하는 것은 하늘을 대신하여 수행해야 할 의무라는 것이다. 권리 행사는 스스로 포기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의무는 그렇지 않다.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의무는 반드시 수행해야 되는 천명을 말함이다. "이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가 있던가. 우리가 힘을 가지게 된 것이 인(因)이라면 세상을 지배하는 의무는 과(果)이네. 그것이 곧 자연의 법칙이고." 세상의 이치인 인과(因果)의 법칙을 자신들의 힘에다 결부시키고 있었다. 아무런 쓰임새도 없는데 자신들에게 힘을 주었을 리가 없다는 것이고 어쨌든 그 힘을 받은 자는 선택된 자들이란 말이었다. 아울러 하늘로부터 선택되었는데도 그곳으로부터 부여받은 힘을 쓰지 않음은 자연의 질서에 위해되는 것이기에 더 큰 죄악이 된다는 것이다. "이제 금신가의 무공을 익힌 아이만 나오면 시작될 것이네." "무슨 소리입니까, 노야. 금신가의 후예가 살아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노승의 얼굴이 경악스럽게 변했다. 그가 알고 있기로는 분명 금신가의 후예가 제거되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사람의 말은 그것마저도 자신이 꾸민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질 않는가. "금신가의 후예? 아니네. 그 아이는 금신가의 후예가 아니고 금신가의 무공을 익힐 수 있는 우수한 자질의 인간일 뿐이네, 나의 창조물이고……." "그럼 금황파천신공도……." 비로소 의문이 풀렸다는 표정이었다. 천무맹 제자들의 무공을 익히는 장소인 천무비고에 금황파천신공이 있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앞에 있는 이 사람이 주었다는 것이다. "그 아이는 야망이 있는 녀석이었네, 자질도 있었고." 담운천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우연히 자신의 가문에 흘러 들어와 있던 금황파천신공과 금황비도 천고의 보물이기는 했지만, 천신가의 무공과 동시에 익힐 수는 없었다. 금황파천신공은 외부의 힘을 흡수해야만 대성할 수 있는 무공이었기에 천신가의 내공과 합치시킬 수가 없었던 거였다. 즉, 천신가의 내공을 익히고 있는 자는 익혀봐야 독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금신가의 후예를 창조하는 일이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천무맹의 인물 중에 모든 것을 버릴 만큼 큰 야망을 가지고 우수한 자질마저 있는 사람을 골랐다. 그리하여 선택된 인물이 바로 백무천이었다. "천선비도라 알려진 금황비도는 그 아이에 대한 시험이었네." 담운천이 천선비도라는 금황비도를 가지고 노렸던 것은 두 가지였다. 비도를 차지하기 위해서 다투는 와중에 두 맹의 전쟁을 유도하는 것과, 백무천이 그것을 얻어 금신가의 무공을 수습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금신가의 무공을 익히게 된다면 계속해서 부려먹으면 되는 것이고 실패한다 하더라도 자신이 조금 힘들 뿐 변하는 것은 없기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 아이가 말을 듣지 않으면 어찌하시려고……." 자신도 신가의 무공을 익혔기에 그 가공함을 알고 있다. 오죽했으면 자신의 성정마저 변해버렸을 것인가. 파천의 힘이었다. 만일 담운천이란 인간을 몰랐다면 자신을 고금제일인으로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무공이었다. 자신마저 그렇게 생각했는데 하물며 백무천은 말할 나위도 없을 터였다. 금신가의 무공을 익힌 상태에서 타인의 말을 듣는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노릇인 게다. "야망이 있는 자는 나의 제의를 거절하지 못하네, 아니면……." 담운천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기세가 변했다. 지금껏 폭풍 같은 힘만 내재하고 있었을 뿐 사물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는데 그 내재된 힘이 살기로 표출되고 있었다. '크윽!' 노승이 내심으로 비명을 지르며 앉은 자세 그대로 뒤로 밀려났다. 사신가의 무공을 대성한 자신도 견딜 수 없는 엄청난 힘이었다. '이것이 천역 두 곳이 합쳐진 힘인가…….' 불연성지와 사극혈지, 두 곳의 힘을 흡수한 담운천의 능력은 이미 노승이 넘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하늘 밖의 또 다른 하늘이었다. "또한 광혈지옥비를 겁낼 이유도 없고." '내가 사신가의 무공을 대성할 때 두 곳의 힘을 합쳐버렸어. 그래서 혈가도 두려워하지 않는 게야.' 혈가 때문에 천 년간을 숨죽이며 살아왔던 가문의 후예가, 광혈지옥비가 나타났다는 보고를 듣고도 확인조차 하려 하지 않았던 이유였다. 자신감이었다. 과거에는 천역의 힘을 얻지 못해서 숨죽이고 살았지만 이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천역 두 곳의 힘을 합쳐서 과거의 선조들보다 훨씬 강해진 그였기에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다. "인간의 일은 인간끼리 해결하도록 해야지, 우리가 나설 필요는 없는 게야." "그럼 광혈지옥비의 주인도 그대로 두실 겁니까?" "그냥 두어도 저절로 전쟁에 참여하게 될 거고, 그러다보면 그 여아와 금신가의 무공을 익힌 일꾼이 알아서 정리를 할 걸세. 그것만 조금 도와주면 될 것 아닌가." 결국 백산 일행의 산서성행도 순탄한 행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자신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타인에 의해서 그들의 운명이 또다시 결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참, 요즘 대초원에서는 연락이 오고 있는가." "원나라 잔당을 쫓고 있는, 자칭 신(神)이 되어 있는 그자를 말입니까." "그자도 가만히 둘 수는 없지 않은가. 인간임에도 그 그릇이 너무 커. 계속 방치하면 우리를 넘보게 될 걸세." 고개를 끄덕이는 담운천의 얼굴에 가벼운 살기가 어렸다. 그동안에는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다른 자들이 신으로 군림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렇게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정도 시간은 걸리겠지만 모든 것을 되찾을 것이다. "언제든지 명령만 내리시면 그자는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자칭 신이라 하는 자는 누구를 말함인가. 중원대륙에서 하늘인 자는 한 명밖에 없다. 그리고 원나라 후예를 정벌하기 위해서 대초원으로 나가 있는 자는……. 역천(逆天)을 생각하고 있는 자들임에도 그들의 얼굴에서는 어떠한 욕망의 표정도 나타나지 않았다. 잠시 남에게 맡겨두었던 물건을 찾아오는 듯한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자칭 신이라 생각하는 두 사람과는 달리, 인간 세상의 권력을 잡기 위해서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
첫댓글 즐감요 ....
즐감요~~~~~
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