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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302
2월11일 [연중 제5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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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사랑 없는 법의 위험성>
전례나 교회 행사를 주도해 나가다 보면 가끔씩 크게 착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례나 미사의 가장 중심, 핵심, 본질, 주체는 당연히 하느님이시지요.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강렬한 표현인 예수님이 주인공입니다. 이 사실을 망각하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언젠가 제법 큰 행사를 한번 주관한 적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할 일이 많더군요. 기획안을 제출했습니다. 승인을 받자마자 행사를 추진할 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각 분야의 실무자를 선정해 즉시 실무에 착수했습니다.
제 성격상 적당히 하는 것, 스스로가 용납이 안 됩니다. 그야말로 혼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이런 노력 덕분에 행사는 아주 경건하고 아름답게 진행됩니다. 1부 전야제, 2부 미사, 3부 친교의 마당... 행사는 조금도 빈틈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피드백’을 받아보니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 대부분이 대만족이었습니다. 다들 간결하지만 깊이 있는 그 행사를 통해 많은 분들이 깊은 하느님 체험을 했습니다. 행사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얼굴들이 흡족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저 자신은? 큰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행사 내내 제 머릿속에는 오로지 행사가 완벽하고 정확하게 끝나야만 된다는 강박관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저 일만 죽으라고 했던 힘겨운 시간이었습니다.
그 행사를 통해 많은 사람들 마음 안에 하느님 사랑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지만 정작 제 안에는 아무 변화도 감동도 없었습니다. 그 기간에 예수님은 제 안에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그저 과로에 찌든 한 영혼이 힘겨워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많은 경우 주객이 전도됩니다. 행사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기보다는 개인적, 사적, 이기적 욕구나 기대를 충족시키려 합니다.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보다는 사람들에게만 기쁨을 주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드러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만 잔뜩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으로부터 강한 질책을 받고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그랬습니다. 백성의 인도자들이었던 그들은 하느님 보다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율법에, 지극히 세밀한 생활규칙에 더 우선권을 두었습니다.
수도회나 교회 안에도 많은 규칙들, 법조항들이 존재하는데, 도대체 왜 그런 것들이 만들어졌을까요? 돈보스코 성인의 말씀을 들으면 더 쉽게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규칙들이 왜 존재하는지 아십니까? 우리의 규칙들은 ‘사랑 안에서’ 모든 문제들이 순조롭게 진행되기 위한 수단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심하게 질타 당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들이 강조하는 율법에는 사랑이 결핍되어 있었습니다. 이웃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당시 그들의 외양은 무서웠습니다. 어딜 가든 율법이란 잣대를 들고 다녔습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율법을 어기면 여지없이 율법서를 들이대었습니다. 싸늘한 눈초리, 냉랭한 얼굴, 엄격한 잣대, 호시탐탐 이웃의 실수를 노리는 표정...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랑과 인간미가 상실된 법이요 규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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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인정받으려는 마음이 있다면 인정받지 못한다>
어느 대학에 시험은 많이 보았으나 성적을 매기지 않던 한 영어 교수님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교수님은 첫 시험을 치룬 후에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시험을 볼 때 저에게 좋은 성적을 기대하며 보지 마십시오. 시험은 제가 여러분에게 평가를 받는 시간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여러분의 실력에 점수를 매기십시오.”
그러고는 시험지를 각자에게 나누어주고 각자가 점수를 매겼습니다. 학생들은 그 시험지를 다시 회수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교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점수가 여러분이 저를 평가한 점수입니다. 다음번엔 저를 좀 더 잘 평가해 주시고 시험지는 여러분이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시험은 좋은 점수를 받아 선생님께 인정받기 위함이 아니라 내가 선생님을 평가하고 내가 나를 평가하는 도구인 것입니다. 선생님은 학생들의 시험성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반 아이들의 성적이 더 뛰어나다는 것은 그만큼 아이들이 선생님을 믿고 인정하고 사랑했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치르라고 주신 시험지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우리가 율법을 얼마나 잘 지키는지 관심이 없으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잘 지킨다고 그분이 변하실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주님을 더 믿고 감사하여 좋은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증거가 됩니다. 따라서 율법을 얼마나 잘 지키고 못 지키는가는 내 스스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체크하는 도구이지 하느님이나 이웃에게 인정받으려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꾸중을 듣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의 관습법으로 하느님의 율법을 교묘하게 어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율법이 있지만 그들은 부모에게 드릴 것이라도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 더 잘하는 일이라고 말하며 행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당장 돈이 필요한 분은 하느님이 아니라 부모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부모를 봉양하지 않고 드리는 예물은 기쁘게 받으시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세상에서 창조자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참여한 작은 하느님들이시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창조자를 공경하지 못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공경한다고 말하기에 그것은 위선이 되는 것입니다.
왜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이 하느님께 사랑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을까요? 율법으로 자기가 자기 자신을 평가했어야 하는데 그것으로 하느님께 평가받으려 했고 이웃에게 평가받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 저 잘했죠? 이 정도면 인정받을만하죠?”라고 말하는 것이고, 이웃들에겐 “내가 너보다 하느님 마음에 더 드는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됩니다. 풀어서 말하면 “하느님은 제가 이 점수를 받아야만 저를 인정해주시는 군요.”라고 하느님을 판단하는 것이고, “하느님은 점수에 따라 우리를 차별하시는 분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듯 자신이 하는 행위로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으려하면 그 누군가가 그 평가로 자신을 인정해 주는 인정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이미 인정받으려고 하는 마음 안에 상대를 인정 없는 분으로 여긴다는 마음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인정받으려면 결국 인정받지 못하게 됩니다. 율법은 내가 나 자신을 판단하는 도구인데, 율법주의는 그것으로 내가 하느님과 이웃에게 평가받으려는 행위입니다.
퇴계 선생은 젊은이들을 모아 가르치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큰 그릇이 되라고 건물구조 자체를 공(工)자로 설계해서 지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강의실 전관에 ‘박약제’란 현판을 걸어 두었습니다. ‘박약제’란 말의 뜻은 ‘박’자는 박사할 때의 박(博)자이고 ‘약’자는 절약할 때의 약(約)자입니다. 학문은 넓히고 예절은 줄이라는 뜻입니다. 이조 5백 년 동안 유교의 예절이 너무 번거로워 백성들의 삶을 위축시켰기에, 퇴계 선생은 지나친 예절의 폐해를 살피고 후학들에게 학문에 더 에너지를 쏟으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율법은 좀 줄이고 복음에 집중합시다. 행위로 인정받으려하지 말고 이미 인정받았다는 복음을 믿읍시다. 인정받았음을 믿을수록 스스로 메기는 율법점수는 저절로 더 높아질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 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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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7,1-13 : 조상들의 전통
바리사이는 ‘분리된 자’라는 뜻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완전하다고 여기는 생활 방식을 따랐고, 자기들이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된다고 즉 낫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켰는데,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루카 18,12 참조), 의례적으로 놋그릇과 접시와 잔을 닦고(참조: 마태 23,25; 마르 7,4), 십일조를 바치고 맏물을 봉헌했으며(참조: 마태 23,23; 루카 11,42), 많은 기도문을 바쳤다.(루카 5,33 참조) 그래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6절; 이사 29,13)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신다. 롯의 아내는 어땠는가? 그 여자가 한 것이라고는 세상 부패를 향하여 의지적으로 머리를 돌린 것이 전부인데, 감각 없는 소금기둥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창세 19,26 참조) 그 마음이 하느님과 거리가 먼 죄악의 생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질책하신다. 즉 하느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 관습에 얽매어 있기 때문에 하느님과는 멀다는 의미이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다는 것이 관습을 따르는 것이라고는 할 수 있으나 하느님을 섬기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고 인간의 전통이나 관습을 하느님의 계명인양 가르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시면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계명을 들어 그것을 이행하지 않는 행위를 질책하고 계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제4계명, 신명 5,16).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탈출 21,17; 레위 20,9)고 하면서 가난한 부모는 자녀에게서 부양받아야 하고, 자녀들은 연로한 부모에게 받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코르반”이라고 하면서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아무 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고 하신다.
코르반 서약문은 물건을 하느님께 바쳐 다른 사람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서약문이다. 그 의미는 “제가 제대에서 약속하고 성전에 봉헌하기로 서약한 선물이 당신 영혼에 힘을 불어넣어 줄 터이니 제가 당신을 공양할 필요는 없습니다.”(11절 참조)라는 뜻이다. 이렇게 인간의 전통을 핑계 삼아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래서 부모와의 사이가 좋지 않으면 코르반 서약문을 이용해서 부모의 봉양을 저버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부모가 굶주리는 데도 그 자녀는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 게걸스레 먹어 치울 제물을 봉헌하는 일이 생기기도 하였다. 하느님께 바쳤다는 핑계로 부모께 대한 의무를 쉽게 저버리는 썩은 서약이 되어 버렸다.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형식적인 것을 지적하시면서, 진정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은 이런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있다는 점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우리의 삶이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되겠다. 외적인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 외적인 형식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담긴 본래의 뜻을 알고 실천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서 율법주의적인 모습을 떨어내고 참된 하느님의 자녀인 신앙인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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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오늘 복음을 두고 흔히 ‘정결법 논쟁’이라고 부르지만 이는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어야 한다는 규정은 율법이 담긴 모세 오경 그 어느 곳에도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규정은 전통에 따라 이어진 관례일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쟁점은 왜 ‘율법’을 지키지 않는지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말마따나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만든 전통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는 이들의 태도를 지적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가요? 전통을 고수한다는 이유로 하느님의 뜻을 애써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이 점에 있어 프란치스코 교종(교황)께서 보여 주신 모습은 우리에게 일러 주는 바가 큽니다. 머무르셨던 숙소 비용을 직접 계산하시고, 바티칸의 관저가 너무 크다며 그 대신에 사제들이 묵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지내십니다. 또 고급 방탄차가 아닌 일반 차량을 타시고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시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면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예전 교종들께서 하신 방식 그대로 하신다고 하여도 그 누구도 비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늘 당연시하던 관례를 다시 복음의 빛에 비추어 과감하게 포기하시는 모습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시려고 교종께서 얼마나 노력하고 계신지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빌려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관습과 규정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위선자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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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마르 7,1-2)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5-8)
여기서 ‘조상들의 전통’이란, 옛날의 유명한 학자들이 정해 놓은, ‘할라카’ 라고 부르던 ‘신앙생활에 관한 지침들’을 가리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그 지침들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고, 그래서 그것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정결 예식’을 행하는 것은 그 지침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여기서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라는 말은,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행하라고 ‘할라카’에 규정되어 있는 정결 예식을 행하지 않고서 그냥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를 인용해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위선’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관습과 전통만 중요하게 여기고 따르면서, 하느님의 계명은 제대로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인 것처럼 사람들을 가르치는 자들인데, 그것은 하느님을 헛되이 섬기는 것이고, ‘입술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거짓 신앙생활, 위선’일 뿐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인간 세상의 전통이나 관습을, 또는 사람이 정한 규정을 ‘하느님의 계명’보다 위에 둘 수는 없다.”
사람이 정한 규정이나 인간 세상의 전통과 관습은 ‘하느님의 계명’을 잘 실천하기 위한 세부 실천 지침으로만 그쳐야 합니다. 만일에 ‘세부 실천 지침’이 ‘하느님의 계명 실천’과 반대되는 일이 생긴다면, 그 실천 지침을 없애야 합니다. (마실 물도 부족해서 늘 갈증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손 씻는 예식부터 거행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오늘날의 상황으로 바꿔서 생각한다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고 있는 사람에게 ‘공복재’를 지키라고 강요하는 것은 옳은 일일까? ‘사랑 없이’ 율법 준수만 강요하는 것, 그것이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그런 율법주의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2) “‘하느님 나라의 법’, 또는 ‘신앙생활을 위한 법’을 제정하는 ‘입법자’는 하느님뿐이다.”
인간은, 인간들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법을 충실하게 지켜야 하는 존재일 뿐입니다. 만일에 인간들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법을 마음대로 만든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월권행위가 되고, 하느님과 같아지려고 했던 아담과 하와의 죄를 다시 짓는 일이 됩니다. (선과 악을 결정하는 것은 하느님의 권한입니다.)
3)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을 해석하는 일과 실생활에 적용하는 일은, 그 계명들과 율법들에 들어 있는 본래의 정신과 의도대로 해야 한다.”
‘안식일 율법’이 좋은 예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 율법 때문에 바리사이들과 충돌한 일이 많은데,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는 무조건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했고, 그러면서 그들은 안식일에는 사랑 실천과 선행 실천도 안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은 사랑과 선행을 실천하는 날이다.”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르 2,27; 마르 3,4) (사랑과 선행 실천은 평소에도 늘 해야 하는 일이지만, 안식일에는 특히 더 잘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하느님께서 안식일을 정하신 것은, 무조건 일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일만 하는 사람들도 쉴 수 있도록 휴식을 보장해 주라는 뜻이었습니다.(신명 5,12-15) (이것은 사랑 실천이 안식일의 근본정신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위선을 꾸짖으시는 말씀 다음에 나오는, ‘코르반 관행을 꾸짖으시는 말씀’은, 율법을 잘못 해석하고, 잘못 적용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모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마르 7,9-13)
예수님 말씀을 단순하게, “너희는 하느님을 핑계 대면서 불효를 저지르는 큰 죄인들이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효도를 하기 싫어서 하느님을 핑계 대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큰 죄입니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도 큰 죄이고, 불효죄도 큰 죄입니다.) 십계명 제1계명인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라는 계명과 제4계명인 “부모에게 효도하여라.”라는 계명은 모순 관계도 아니고, 대립 관계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은 가정생활도(효도도) 잘하는 법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가정생활을(효도를)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혹시라도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라고 말씀하셨다.”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 말씀은, 가족에 대한 인간적인 애착과 집착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힘으로 작용할 때의 경우에 관한 말씀이지, 가족을 버리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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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이진원 십자가의 바오로 신부님]
<사람의 전통>
혼인을 준비하는 부모나 당사자를 만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사제가 되길 잘했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간혹 혼인의 의미나 필요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겪는 어려움을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대에는 필요하지 않은 많은 절차를 전통이라는 이름과 남들도 다 한다는 이유 때문에 힘겹게 계속하고 있다.
결국 양가와 혼인 당사자 간에 불협화음이 일어나고 심지어 혼인생활을 파괴하는데 한 몫 하기도 한다.
혼인의 의미를 더 풍부하게 하고 부부가 더 잘살게 하는 것이라면 모르지만, 이제는 의미 없는 관습이 되어버린 것을 계속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정작 혼인에서 중요한 마음의 준비, 양가가 새로운 가족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 부모가 되기 위한 준비 등은 소홀히 하는 모습에 더욱 마음이 아프다.
전통과 관습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잃어버린 채 맹목적으로 지킨다면 그것은 허례허식으로 전락한다.
기득권자나 지도층에는 자신을 과시하는 도구가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한테는 스스로를 옭아매는 사슬이 된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살기 때문에 세상에 맞추어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혹시 그것 때문에 하느님의 뜻까지 접어두고 사는 것은 아닌지 늘 조심하고 성찰해야 한다.
‘남들이 다 하니까’ 해도 되는 잘못이 하느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그들과 나의 죗값을 물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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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윤인규 라우렌시오 신부님]
<누습(陋習)의 끈>
옛 전통 중에 삶을 피곤하게 만드는 누습(陋習)이 있다. 그리고 마땅히 사라져야 할 악습도 있다.
그 중에서 유래도 뜻도 모르면서 체면 때문에 지키는 허례허식과 같은 가증스러운 관습이나 제도는 하느님의 심판 대상이 된다. 명분만 있고 실제가 없는 위선적 전통은 하느님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질기게 이어져 내려오는 폐습의 끈은 권력 유지와 대중 통제에 수단으로 악용되어 왔다. 유래도 뜻도 제대로 모르지만 ‘전통’이라는 명분의 끈은 비판이나 개혁정신을 맥못추게 만드는 올무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부끄러움을 통해서 자신에게 영혼이 있음을 발견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알몸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하느님께서 그들을 찾으셨고, 자신들의 부끄러운 처지를 말씀드림으로써 인류 최초의 기도를 시작했다. 부끄러움 때문에 영혼이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들을 찾으셨고 말씀을 건네오셨다. 그러나 누습의 끈은 부끄러움을 모르게 한다.
누습은 다수 대중 속에 끼어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정당성을 제공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코르반’이라는 한 마디가 불효를 정당화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설령 악이 아니라도, 그것이 정의나 진리라고 인정되는 것이라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언 행위는 사람을 교만으로 이끌기에 하느님께서 건네시는 끈을 놓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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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성 안토니오 수도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핑계>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
어떤 짓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가 있다.”
이것이 바로 제가 하는 짓이고, 그래서 가슴을 콕 찌르는 말씀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이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우리는 하느님을 공경하기 위해 부모를 공경할 수 없고,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고 합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뒤늦게 철이 드는 것 중의 하나는 제가 얼마나 하느님께도 부모님께도 불효자인지 아는 것입니다.
수도생활을 하는 한 동안 저는 육신의 부모와 형제들에게 잘 못하는 것이 수도생활을 잘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를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에 충실하기 위해 불효할 수밖에 없다고 합리화하며 저는 일찍 홀로 되신 어머니께 쌀쌀 맞았고 오랫동안 자주 찾아가지도 전화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저는 부모에게 불효하면서까지 정말 주님의 말씀에 충실하게 하느님을 공경하였는가?
주님께서는 가족을 포기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고, 또 다른 데서는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나를 버리는 것은 쏙 빼고 가족만 포기하였습니다.
이런 심사가 잘 드러나는 것이 명절 때입니다. 이번 명절에도 수도원에 있으면서 이런 생각을 할지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고생고생하면서 부모, 형제들을 만나러 갈 때, 차가 밀려서 귀성과 귀경에 고생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장가 안 들어서 속 편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이웃 사랑을 핑계로 하느님 사랑을 살짝 빗겨 갑니다. 헐벗은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라는 말씀, 사람이 안식일에 주일이라는 말씀, 이런 말씀들을 가지고 주님의 계명 어기는 것을 합리화하고 이웃 사랑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 게을리 하는 것의 핑계를 댑니다.
한 신부가 승용차를 타고 어디를 가게 되어 뒷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왼쪽에는 할머니가 앉고 오른쪽엔 아가씨가 앉았답니다.
길이 굽어 왼쪽으로 몸이 기울어질 때는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하고 기도하고 오른쪽으로 몸이 기울어질 때는 “당신 뜻대로 하소서”하고 기도하였다는 우스개 소리를 들었는데 제가 하는 짓이 그러한 것 같습니다.
내 좋을 대로 하기 위해 어떤 때는 하느님 사랑을 팔고 어떤 때는 이웃 사랑을 파는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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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 찬미 예수님
완벽에 가까운 사랑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행복한 시기를 함께 보내는 동안 상대를 사랑하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 시기에는 상대에게 좋은 에너지를 받게 되고 스스로 기쁨을 찾아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상대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을 때 혹은, 오히려 상대가 나에게 짐이 되는 상황에서도 사랑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기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우리 인간에게 그것은 실로 불편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을 일구어내고 있는 자들을 우리는 종종 주변에서 찾아보게 됩니다.
이를 테면 병상에 누워있는 남편을 인내로 간호하는 배우자, 아무리 마음을 상하게 해도 자녀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는 부모의 모습, 지체 장애인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의 마음에서 우리는 이러한 사랑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다름 아닌, 어려운 시기에도 상대를 보살피고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두고 “진정한 사랑” 이라고 표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는 예수님을 지적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느님을 기억하며 항상 청결을 유지하는 행위를 지키려 한다는 측면에서 이들의 모습은 누구보다 거룩해 보이고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들을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비난하시니 다소 그들의 진심을 너무 몰라주신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지켜온 규정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실 이들의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실로 부족한 점이 많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행위는 종교적인 의식 행위였습니다.
이 규정에 의하면, 유다인들은 식사 전에 손을 씻어야 하고, 요리가 바뀔 때마다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손을 씻는 물은 특별히 큰 항아리에 따로 보관 되어야 하며 특별히 정결예식을 위하여 쓰여지는 것이기에 다른 목적으로 사용될 수도 없었습니다.
손을 닦는 방법 또한 세세하게 규정되어 있었는데, 손을 처음 씻을 때에 손가락은 반드시 위로 향하게 하고, 그 위에 계란 껍질 하나 반 정도의 물을 부어 손목까지 흘러내리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그 규정이었습니다.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양손이 젖어 있는 동안 양손 각각을 주먹으로 문지른 다음에, 손과 손가락 끝을 아래로 하고 물을 손목에서 손끝까지 흘러내리도록 부어야 이 의식은 끝났습니다.
유다인들은 반드시 이 방법을 통해야 부정한 것이 씻겨 내려가고, 비로소 손이 깨끗하게 된다고 여겼습니다. 만약 이 방법을 어기면 쉽게 악령이 들어올 수 있으므로 하느님 앞에 부정한 사람으로 간주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유다인은 로마인에 의하여 투옥되었을 때 물을 먹는 대신 그것을 손을 씻는 데 사용해 수분부족으로 목숨을 잃는 일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러한 이들의 시선에서 손을 씻는 전통을 지키지 않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좋아 보일 리 없습니다.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으니 당장 악령에 들렸다고 해도 예수님과 제자들은 할 말이 없을 상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를 인용해 다음과 같이 대답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이 말씀은, 그들이 계명을 잘 지키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릇된 사랑의 방식임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병이 걸린 이들, 보잘 것 없는 이들, 죄 지은 이들, 이 모두를 사랑하시는 분이신데 이들은 손 씻는 행위를 통해 모든 이를 사랑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나아가 보잘 것 없는 이들과 자신을 철저히 구분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들이 만약 병에 걸리거나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벌처럼 느껴지고 결국 힘들 때에 더욱 의지해야 할 하느님을 원천적으로 배척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처럼 종종 나 자신만을 세상의 중심에 두고 생활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하느님께 달콤한 것만을 청한다면 우리의 마음 안에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가졌던 그릇된 사랑, 즉 즐거움과 기쁨만을 기대하는 완전하지 않은 사랑만 남을 뿐입니다. 이 지점에서 사람의 전통과 하느님의 계명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사람의 전통은 다분히 인간 중심적이며 좋은 것을 일방적으로 청하는 태도를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명은 힘들 때도 기쁠 때에도 주님께 의지하고 그분을 사랑하는 삶을 필요로 합니다. 이것이 실제로 실현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정결하게 되며 그 누구보다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섬기게 됩니다. 오늘 복음말씀을 기억하며 나의 마음 속 하느님의 자리는 과연 어떠한지 돌이켜 보아야 하겠습니다. 나의 자리가 지나치게 많다면 조금은 하느님께 그 자리를 양보하고 그분께 마음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한 좋은 기도가 오늘의 복음 환호송입니다. “주 하느님, 당신 법에 제 마음 기울게 하소서. 자비로이 당신 가르침을 베푸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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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압구정((狎鷗亭)과 반구정(伴鷗亭)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압구정은 조선시대 최고 권력을 지녔던 한명회((韓明澮)가 지은 정자입니다. 지금 그 정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작은 표시석만 있다고 합니다. 압구정의 의미는 갈매기와 친하게 지낸다는 뜻입니다. 한명회의 삶은 친하게 지내기는 하지만 자신의 권력과 부를 과시하였습니다. 자신의 뜻에 어긋나는 사람은 제거하였습니다. 그의 화려함의 뒤에는 살생부(殺生簿)가 있었습니다. 권력의 정점에 있었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진 압구정처럼 그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냉정합니다. 생육신의 한명인 김시습은 한명회에 대해서 ‘젊어서는 나라를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힌다.’라고 혹평했습니다.
반구정 역시 조선시대 최고 권력을 지녔던 황희(黃喜)정승이 지은 정자입니다. 지금도 반구정은 임진강 강가에서 찾아오는 사람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습니다. 반구정의 의미도 갈매기와 친하게 지낸다는 뜻입니다. 권력과 부를 과시하는 친함이 아니고, 동등하게 함께하는 친함입니다. 황희 정승이 반구정에서 지는 해를 바라볼 때 사람들은 그가 황희 정승인줄도 몰랐다고 합니다. 한명회의 삶은 적과 아군을 나누는 삶이었습니다. 적은 제거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황희 정승의 삶은 시비(是非)를 가리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바른 것은 이야기하지만 그른 것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아름다운 자연과 하나가 되고 있는 반구정처럼 황희 정승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따뜻합니다.
예루살렘에는 올리브 산이 있습니다. 산의 정상에는 주님의 승천을 기념하는 성당이 있고, 그 아래에는 주님의 기도를 기념하는 성당이 있습니다. 조금 아래로 내려오면 주님께서 예루살렘의 앞날을 생각하며 비탄에 잠겨 눈물을 흘리셨다는 기념 성당이 있습니다. 주님의 눈물 성당에서 정면을 바라보면 화려한 황금색의 사원이 보입니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승천한 걸 기념하는 사원입니다. 그 곳에는 바위가 있는데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했던 바위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그곳에 솔로몬의 성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2000년 전 무너져 내린 성전의 벽이 남아 있는데 유대인들은 그 벽을 ‘통곡의 벽’이라고 부릅니다. 가톨릭은 그곳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묻히신 곳이라고 합니다. 같은 장소에 유일신을 믿는 3대 종교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같은 공간에 서로 다른 역사의 시간이 있었고, 지금은 한 지붕 세 가족이 ‘평화의 도시’에 함께 머물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도, 예수님의 무덤도, 무함마드의 승천도 시간이 흐르면서 또 다른 변화를 맞이할 겁니다. 그렇다면 변하지 않는 건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입니다. 그것만이 유한한 시간과 유한한 공간에 머물 수밖에 없는 우리가 영원한 삶을 향해 나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하느님, 당신 종의 기도와 간청을 돌아보시어, 오늘 당신 종이 당신 앞에서 드리는 이 부르짖음과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사옵니다. 하느님의 집 문간에 서 있기가, 악인의 천막 안에 살기보다 더 좋사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자애를, 사람들에게 베푸신 그 기적을. 그분은 목마른 이에게 물을 주시고, 굶주린 이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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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서 내 뒤에 오신다네>
마르코 7,1-13 (조상들의 전통에 관한 논쟁)
그때에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모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
<하느님께서 내 뒤에 오신다네>
나마저
아픈 이를
돌볼 수 없을 때
하느님께서 내 뒤에 오신다네
나마저
슬퍼하는 이를
위로할 수 없을 때
하느님께서 내 뒤에 오신다네
나마저
굶주린 이에게
나눌 것이 없을 때
하느님께서 내 뒤에 오신다네
나마저
버려진 이를
품을 수 없을 때
하느님께서 내 뒤에 오신다네
나마저
쓰러진 이를
일으킬 수 없을 때
하느님께서 내 뒤에 오신다네
나마저
외로운 이의
벗이 될 수 없을 때
하느님께서 내 뒤에 오신다네
나마저
어둠속에 내쳐진 이를
비출 수 없을 때
하느님께서 내 뒤에 오신다네
나마저
절망하는 이에게
희망이 될 수 없을 때
하느님께서 내 뒤에 오신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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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하느님만으로 만족….>
어느 신부님께서 하신 말씀을 묵상합니다. “사제로 살면서 준비를 너무나 소홀히 했다.”라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이 시커멓게 변하더니 천둥 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약 1시간 동안 쏟아졌답니다. 그래서 신부님 자신도 모르게 사제로서 잘 준비하며 살지 못한 것 같아서 너무나 무서워 무릎을 꿇고 소리쳤답니다.
“하느님, 잘못했습니다.”
그때 번개가 성당 꼭대기 피뢰침을 때렸고, 성당과 사제관에 전기가 끊겼답니다. 그래서 전기를 고치는 신자가 와서 전기를 고치고 성당에서 내려와서 신부님께 이런 말씀을 하셨답니다.
“신부님, 우리 성당이 잘 될 것 같습니다. 성령의 불꽃을 맞았으니까요?”
그 순간에 신부님은 자신이 벼락 맞은 듯했답니다. “주님께서 사제의 마음을 아시고 회개하여 항상 성령의 불을 받으며 살라.”고 하신 것 같았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물었습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즉, “제자들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았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겉으로 보이는 사람의 전통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안에 영원히 지켜야 할 하느님의 계명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다.” 즉, 겉으로는 전통을 지키는 척하면서도, 안 보이는 곳에서 온갖 나쁜 짓과 사악한 짓을 저지르고 있는 그들에게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이 위선자들아, 이 독사의 족속들아….”
물론 사람의 전통을 무조건 없애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느님의 말씀(계명)이 먼저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야 “죽음의 길에서 벗어나 생명의 길로 들어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2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아멘.
사랑하는 고운님들!
저는 항상 부족함을 많이 느끼는 사제로 살고 있고, 또한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제이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십자가의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먼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고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요즘 저는 안식년을 보내면서 두레박 신부의 영적 일기와 시편 밤공부를 하면서 많아 깨닫습니다. 그동안 하느님만으로 만족한 삶이었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살다가 되돌아보니 온통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저는 하느님으로 만족합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언제나 좋은 날입니다.”
고운님들이 이 세상을 살다가 하느님 곁으로 가는 마지막 환송의 날에 “하느님으로 만족했습니다.”라는 고백으로 영원한 생명에 길에 들어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오늘은 프랑스 루르드의 성모 발현에서 비롯된 세계 병자의 날입니다. 저 두레박은 특별히 성모님의 도움으로 매일 기도와 미사 지향대로 몸과 마음이 아픈 분들과 간호하는 분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에게 성모님과 함께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 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저는 하느님으로 만족합니다.”
오늘 고운님들이 하느님 한 분으로 만족함으로 성령의 불이 일어나 은총 가득한 치유와 회복의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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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404)
♧♧ 시편 73편 17절…
"그러나 마침내 하느님의 성전에 들어가 그들의 종말을 깨달았습니다."
* 하느님의 성전에 들어가...
‘하느님의 성전에 들어가...’라는 말은 두 가지로 그 의미를 풀이할 수 있는데 기도와 말씀입니다.
첫째, 아삽은 악인의 평안함에 대해 이해할 수 없게 되자 하느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문제 해결을 간구하였을 것입니다.
둘째, 성전은 율법 책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니 이는 아삽이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자 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구절은... 인간의 어떠한 고민도 하느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 해결하고자 할 때 선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음을 교훈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들의 종말을 깨달았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악인들을’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악인들의 종말...’은 이 세상에 겪게 되는 비극적인 죽음이나 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최후 심판 날에 인간의 행위대로 갚으시는 하느님의 정의의 보응에 따른 영원한 멸망을 가리킵니다.
아삽은 악인들이 비옥 이 땅에서는 일시적으로 평안을 누릴 수 있으나, 의인이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과 달리 악인들의 종말은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되는 성경적 인과응보 사상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 시편 73편 18절…
"정녕 당시께서는 그들을 미끄러운 길에 세우시고 그들을 멸망으로 떨어지게 하셨습니다."
악인들의 번성의 기초는 굳건한 반석이 아니라 마치 눈 내린 비탈길이나 얼음판과 같이 미끄럽고 위험하기 그지없는 것이어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정한 것임을 뜻하는 비유적 표현입니다.(잠언 23장 34절. 에제키엘서 13장 10절. 참조)
♧♧ 시편 73편 19절…
그들이 얼마나 순식간에 멸망해 버리는지! 그들은 없어지고 공포로 사라져 갑니다."
* 순식간에 멸망해 버리는지!
악인의 평안함은 영원한 것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평안함이 하느님의 은총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하느님의 최후 심판 날에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 같이(시편 1편 4-5절. 참조) 날려서 멸망에 이르고 말게 될 뿐입니다. 아삽은 이를 선취적 신앙에 근거해 이미 일어난 일인 양 노래하고 있습니다.(욥기 21장 13절. 참조)
* 그들은 없어지고 공포로 사라져 갑니다.
문자적으로는 ‘그들은 두려움과 공포로 인해 완전히 쓸려가 버렸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악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의 엄정함과 완전함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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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가 이상하게도 층마다 서는 것입니다. 제 옆에 있던 사람들도 답답한지 한소리를 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엘리베이터가 섰는데, 이 안에 조그마한 아이 혼자 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아이는 엘리베이터의 층수 버튼을 모두 눌렀다가 해제하기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한 형제님께서 아이를 향해 화를 내십니다. “뭐 하는 거야? 네 엄마 어딨어?” 아이는 울먹이다가 울음을 터뜨립니다. 바로 그때 이 형제님의 아내로 보이는 분이 형제님을 나무라며 말합니다. “왜 애를 혼내요? 아이는 버튼 누르는 것을 좋아하는 것 몰라요?” 그리고 아이에게 “버튼 누르는 것은 괜찮은데 이렇게 모두 눌러 놓으면 바쁜 사람들이 화난단다. 다음에는 이렇게 하면 안 돼요. 알았지?”라며 아이를 다독이고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이유까지 말씀해주십니다. 아이는 보통의 아이들처럼 좋아하는 것을 했을 뿐입니다.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이유조차 모릅니다. 그래서 억울해서 울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요?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하는 말과 행동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는 착각까지 겹쳐서 더욱더 인간관계를 힘들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은 자신들이 완전하다고 여기는 생활 방식을 따랐고, 자기네 방식이 다른 어떤 것보다 낫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손을 닦지 않는 예수님 제자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를 따끔하게 혼내십니다. 남의 잘못만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잘못은 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만 그럴듯한 모습이 아닌 우리의 내적 지향을 보시는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하느님의 법에 어긋나는 가짜 규정을 덧붙이면서도 자신들이 생각이 옳다면서 그 생각이 율법에 근거한다는 논리를 세웁니다.
대표적인 예가 부모 공양에 대해 ‘코르반’이라고 말하면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부모가 굶주리는데도 자녀는 제물 봉헌만으로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보시는 우리의 내적 지향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에 기초하지 않는 어떤 판단도 주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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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안고 살아가는 삶>
살아가는 것이 곧 죽어가는 것이고, 죽어가는 것이 곧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살았다는 것은 오늘 하루 죽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렇게 삶과 죽음은 서로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죽음을 기억하면서 지금을 살아야 합니다. 이제 더는 되돌릴 수 없는 오늘이라는 삶을 죽음 앞에 후회하지 않도록 보내야 합니다. 예전에 읽은 책에서, 말기 암 환자로 살아가는 저자는 이 세상 안에서 많이 너그러워질 수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고 화를 내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이게 죽음 앞에서 해야 할 일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저절로 용서와 사랑을 품게 된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기억하며 사는 삶은 더 이상 후회를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지금 삶의 의미를 계속 되뇌며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더 높은 가치의 중요성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안고 사는 삶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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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람이 성전聖殿이다>
-사람의 전통(인습)이 아닌 하느님의 계명을-
참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이 사람입니다.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 사람이지만 현실에서는 참 소홀히 함부로 다뤄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잘 들여다 보면 사람 하나하나가 인재人材입니다. 얼마전 몇 년 만에 수도원을 찾은 분이 한 말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수도원에 뭐 볼것이 있습니까? 앞에는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고---, 주변도 옛만 못합니다. 아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수사님들이 있었습니다. 수사님들이 늘 여기 이 자리에 있기에 꼭 고향집에, 아버지의 집에 온 것 같습니다. 기도하는 수사님들이 없다면 불암산도 수도원 건물도 참 공허하고 무의미해 보일 것입니다.”
결국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명산대찰(名山大刹)이라도 고승高僧이 없으면 참 허전할 것입니다. 아무리 전통이 좋고 자연환경이 좋고 건물이 좋은 수도원도 그 안에 수도자가 없다면 참 공허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수도원에 전통이, 자연이, 건물이 살아 빛나는 것도 거기 사람이, 수도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사람이야말로 살아있는 보물입니다.
오늘 복음은 조상들의 전통에 대한 논쟁입니다. 사람들의 전통과 하느님의 계명간의 충돌입니다. 사람들의 전통에 가려 하느님의 계명을 망각한, 본말전도의 현실을 예리하게 집어 내는 예수님이십니다. 사람의 현실을, 본질을 직시하는 예수님이십니다. 사람들의 전통, 즉 인습의 노예들이 된 소위 ‘꼰대’가 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인습을 어긴 예수님 제자들의 행태에 대해 예수님께 묻습니다.
“어째서 당신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판별의 잣대는 사람들의 전통이 아니 하느님의 계명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살아 있는 사람을 항상 우위에 둡니다. 예수님의 답변이 정곡을 찌릅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역시 예수님께서는 좋아하시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사람들의 전통을 지키다 보면 남는 것은 전통이고 사라진 것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있고 전통이 있지, 전통이 있고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전통은 부단히 하느님의 계명에 의해 검증받아야 합니다. 지켜야 할 본질적인 것은 사람의 전통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명입니다.
식사전에 손을 씻는 일은 인습을 따르는 일이지 하느님을 섬기는 일과는 무관합니다. 인간의 전통은 코르반 서원문이지만 하느님의 계명은 부모를 섬기라는 계명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계명은 구체적 사람 사랑의 실천임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조상들의 전통인 인습에 치우치다 보니 꼰대가 되고 하느님의 계명이, 살아있는 사람의 현실은 완전히 증발된 것입니다. 사람이 빠진 성대한 성전 건물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바로 이점을 제1독서의 솔로몬은 잊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의 전통이나 외적 건물들은 본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본질적인 것은 하느님의 계명이요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사람을 제대로 가르치는 교육이 얼마나 본질적으로 중요한지, 참으로 땅이나 건물에 투자하는 것보다 사람에 투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솔로몬의 긴 기도입니다. 참으로 성대한 성전을 완성해 놓고 자기도취하여 감격에 벅차 드리는 기도입니다. 마침 오늘 말씀에 대한 주석이 이를 날카롭게 지적하여 그대로 인용합니다.
-솔로몬의 “어찌 하느님께서 땅 위에 계시겠습니까?” 물음에 창세기는 “그렇다(YES)!” 대답한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사람들이기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with us), ’우리 안에(within us)’ 계신다. 솔론몬의 성전처럼 거룩한 장소도, 바리사이들이 손을 씻는 것과 같은 거룩한 수행들 모두도 인격의 거룩한 존엄성과 비교할 때는 빛을 잃어 창백해 진다. 바로 하느님의 계명이 선포하고 보호하는 것이 인격의 거룩한 존엄성이 아닌가!”
얼마나 고무적인 본질 직시의 주석인지요! 진짜 거룩한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이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하여 이레네오 성인은 ‘살아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광이다.’ 갈파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존엄한 품위의 인간이기에 화답송 시편의 부르짖음은 너무 자연스럽습니다.
“만군의 주님, 당신 계신 곳 사랑하나이다! 주님의 뜨락을 그리워하며, 이 영혼 여위어 가나이다. 살아계신 하느님을 향하여, 이 몸과 마음 환성을 올리나이다.”
바로 이런 살아계신 하느님이 목말라, 배고파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거룩한 살아있는 성전’임을 새롭게 깨닫게 하시고 당신을 닮은 ‘존엄한 품위의 인간’으로 살게 하십니다.
“주 하느님, 당신 법에 제 마음 기울게 하소서. 자비로이 당신 가르침을 베푸소서.”(시편119,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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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헛되이 섬겨서는 안된다>
오늘 복음은 유다인의 전통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관습이 있었는데, 왜 손을 씻게 되었는가는 관심이 없고 손을 씻지 않았다는 것에만 마음을 둔 것을 지적해 줍니다. 사실 모든 음식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육적인 생명양식으로써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합당한 마음으로 먹기 위해서는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였습니다.
위생적인 의미도 있지만 정화의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미사전례 때에 참회예절이 있듯이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과 예의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 내용은 잊은 채 전통을 고집하면서 알맹이를 소홀히 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기 지켜야 할 전통과 관습이 있지만 그것을 시대와 상황에 따라 재해석하고 쇄신할 수 있어야 미래에 희망이 있습니다. 더욱이 사람의 전통은 사람의 전통일 뿐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계명을 대신 하거나 거기에 맞설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무리 좋은 전통이라 해도 그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법이 훼손된다면 그 전통은 마땅히 쇄신되거나 부정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2,2)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인용하여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마르7,6-7). 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알맹이보다도 껍데기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여전히 같은 꾸중을 들을 것입니다. 내용보다도 형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강조하며 거기에 얽매이다 보면 우리의 예배는 헛되고 헛된 행위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전통을 중요시 하되 그 의미와 내용을 제대로 알고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좋은 전통과 관습이라 하더라도 하느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좋은 것이 아니니 마땅히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간혹 “부득이 주일미사 참례를 못하여 주님의 기도 33번을 하였는데 고해성사를 봐야 되느냐?” “몸이 불편한데 미사전례 때 앉고, 일어서고, 꿇는 것을 따라 해야 하느냐?” “얼마 전에 고해 성사를 봤는데 판공성사를 또 봐야 하느냐?” 라고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런 질문에 대답을 일일이 해 드려야 합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행하는 것의 의미와 내용을 알고 거기에 얼마나 충실하였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명하신 바에 얼마나 사랑으로 응답하느냐의 문제 입니다. 법은 함부로 무시하여서도 안 되고 내 입맛에 맞게 합리화시켜서도 안 되느니 만큼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전통과 관습을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말로나 혀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헛되이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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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들 안에서는 하느님의 것과 인간의 것이 조화를 이루기도 하고, 대립하기도 합니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마르 7,9)
예수님의 몇몇 제자가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다고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이의를 제기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것(계명)과 사람의 것(전통) 사이의 질서를 바로 세워 주시지요.
"성경"(마르 7,6)
"하느님의 계명"(마르 7,8)
"하느님의 말씀"(마르 7,13)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하며, 삶과 예배의 근간이 되는 본질을 일러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친히 내리신 "계명"을 받은 민족으로서, 예언자를 통해 들려주시는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는 이들이며, 그 기록인 "성경"을 소유한 특별한 백성입니다.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마르 7,13).
그런데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이 잣대 삼아 사람을 판단하는 근거는 "조상들의 전통"(마르 7,3)과 "관습"(마르 7,4)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만들어낸 전통과 관습이 하느님의 말씀과 계명을 밀어내고, 심지어 우위를 차지하는 듯 보이는 현실을 지적하십니다.
인간은 무지몽매한 시야와 편협한 자기중심성으로 하느님의 것과 인간의 것을 전복시켜 질서를 교란해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에게서 본래 받은 선물이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리고 열심히 포장지만 덧씌우거나 장식하며 무게와 부피만 키워가고 있는 중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성전을 봉헌하는 솔로몬의 아름다운 기도가 울려퍼집니다.
"기도"(1열왕 8,23.28.29.)
"간청"(1열왕 8,28.30)
"부르짖음"(1열왕 8,28)
솔로몬의 기도에 반복해 등장하는 이 말씀들은 인간의 위치와 처지, 실존을 드러냅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기도하고 간청하고 부르짖는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앞의 인간은 그가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기도하는 존재'입니다.
"들어 주십시오."(1열왕 8,28.29.30)
"살피시어"(1열왕 8,29)
"용서해 주십시오."(1열왕 8,30)
솔로몬은 하느님께서 듣고 살피고 용서하는 분이심을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지혜를 받은 그는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식하는 현자입니다. 그는 인간의 얕은 꾀로 하느님의 자리를 넘보거나 사람의 것과 뒤바꾸지 않습니다. 아무리 호화롭게 임금의 영화를 누리고 있어도 자신이 들으시고 살피시고 용서하시는 하느님 앞의 작은 자임을 잊지 않습니다.
오늘 솔로몬이 하느님께 지어 바친 성전은 그런 하느님과 그런 인간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그런 하느님과 그런 인간이 하나 되는 순간이지요.
복음 안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진정 진리와 영 안에서 기도하고 예배하는 사람들이었다면, 하느님의 자리와 인간의 자리를, 하느님의 것과 인간의 것을 뒤바꾸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과 하나가 된 이는 오히려 그분과 자신 사이의 관계성과 질서를 더 명확히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당신 앞에서 걷는 종들에게 당신은 계약을 지키시고 자애를 베푸시는 분"(1열왕 8,23)
그분과 우리의 접점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관습이나 전통 너머에 자리하는 그분의 마음과 생각, 뜻을 헤아리며 마음을 다해 그분 앞을 걸어갑니다. 그분은 부족한 채로 더 사랑해 보려고 까치발로 종종걸음을 치는 우리의 진심을 보시고 당신 약속을 기억해 자애를 베푸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나의 삶 안에는 하느님의 것과 사람의 것이 제자리에 놓여 있는지, 나의 기도 안에서 하느님은 하느님이시고 나는 나인지 돌아보는 하루 되셨으면 합니다. 하느님과 하나 됨은 두서없는 뒤섞임이나 뒤엉킴이 아니라 각자의 자기다움이 근간을 이룰 때 일어나는 신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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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마르 7,6)
<말뿐인 종교>
위선적으로 평화를 추구하는 이들이 아니라, 헌신적으로 평화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하나가 됩시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이사 29,13; 마르 7,6).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입으로는 축복하지만 속으로는 저주하는구나”(시편 62,5). 이런 말씀도 하십니다. “그들은 입으로 그분을 속이고 혀로 그분께 거짓말하였다. 그들은 그분께 마음을 확고히 하지 않고 그분 계약에 신실하지 않았다.”(시편 78,36-37)
-로마의 클레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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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봉인된 명령
봉인된 명령(자신의 소명, 독특한 가치, 고유의 의미와 목적)은 탈진하지 않게 함
봉인된 명령은 탈진하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한다. 봉인된 명령은 우리를 삶의 생명력과 연결해 준다. 그래서 우리는 그 명령에 따름으로써 두려움과 장애물들을 극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탈진하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우리는 일을 너무 많이 해서 탈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의미 없는 일을 하기 때문에 탈진한다.
♣우리가 정말 의미 있다고 여기는 ‘활동들’은 우리 안에서 끝없는 생명력을 불러일으킨다. 다시 말해, 봉인된 명령은 하느님에게서 오고, 따라서 그 명령을 따를 때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의 힘을 경험하게 된다. 바로 이 순간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신 성령과 동일한 성령, 그리고 동일한 생명력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순간이다. (로마 8,11 참조)
-「무엇을 위해 사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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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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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본분>
"너희는 전통으로 하느님 말씀을
폐기하는 짓들을 많이 한다."
학생은 공부를 하는게 본분
엄마는 살림을 하는게 본분
아빠는 돈벌어 오는게 본분
사제는 미사를 하는게 본분
수녀는 기도를 하는게 본분
주어진 본분만을 위해서
살면 바람 빠진 타이어
나의 아버지가
나의 어머니가
우리 집안이, 우리 사회가
그것을 고수하려다 부러뜨리고
부러지는 아픔이 이어진다면
놔야만 합니다.
살리는 것이 무엇인지
어디에 마음을 써야하는지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차근차근 배워갑시다.
'"문지방 밟았다 복 나간다고
혼내다가 기를 꺽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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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 8)
계명과 전통은
공동체를
아름답게 하는
가장 중요한
질서의 본질입니다.
모든 삶의
참된 바탕과
질서는 언제나
사랑의 하느님께
있습니다.
하느님이
중심이 되십니다.
계명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앙인들의 참된
질서입니다.
이 원칙이
허물어지면
공동체 또한
망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계명 안에서
인간의 참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의 계명과
결합해야 할
우리의 여정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전통이 가장 중요한
마음을 잃어버리면
기계적인 소음과
독소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식과 허위의
전통을 벗어나게
하십니다.
우리 삶에
빠져있는 것이
다름 아닌
하느님을 향한
사랑임을 절실히
깨닫는 시간입니다.
버려야 할 것이
아닌 다시 살려야 할
생명의 질서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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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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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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