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푸른문학상 ‘새로운 시인상’ 수상작] 안오일 <사랑하니까> 외 11편
사랑하니까
아파서 누워 있던 날
엄마가 곁에 누워 안아 줬어요
쿵덕 쿵덕 쿵덕 쿵덕
엄마의 심장 소리 들려왔어요
콩닥 콩닥 콩닥 콩닥
내 심장 소리 엄마도 들릴까요?
엄마도 나도
심장이 두 개가 됐어요
익어 가는 색깔
큰 감나무 한 그루
주렁주렁 감들이 달렸는데
푸른색도 아니고
노란색도 아니고
주황색도 아니다
그런데 참 묘하게 예쁘다
무슨 색깔이라고 해야 하나?
엄마는 익어 가는 색깔이라고 했다
이제부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깔은
익어 가는 색깔이다
대단한 나
공부도
그리기도
운동도 못하는
내가 아주 작게 느껴지는데
교실 벽에 붙은 세계지도가
눈에 들어온다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어디를 찾아봐도
나는 안 보인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
뭐 어때?
나는 세계를 한눈에 보고 있잖아?
꽃씨
꽃씨는 알까요?
아주 조그마한 자기 몸이
딱딱한 땅을
뚫게 되리란 걸
꽃씨는 알까요?
아주 조그마한 자기 몸이
세상을 물들이는 꽃이 되리란 걸
꽃씨는 알까요?
정말 정말 조그마한 자기 몸이
꽁꽁 닫힌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 주는
열쇠가 되리란 걸
햇볕 친구
교실 화분이 깨졌다
내가 안 그랬는데
벌로 화장실 청소를 한다
어제 다투고 토라졌던
단짝 친구
슬며시 다가와 빗자루를 든다
‘도와줄게’
‘고마워’
말도 없이 그냥 청소만 하는데
어느새 끼어들어 비질하는 햇살
몽당연필
작고 작아
연필깎이에도 안 들어가는
몽당연필
작고 작아
내 손에도 안 쥐어지는
몽당연필
아직 수학 문제 더 풀 수 있는데
일기도 몇 편 더 쓸 수 있는데
필통 속에서 꺼내 달라고
콩알콩알 투덜거리네
마음에 맞는 몸
구걸하는 할아버지 보면
마음은 벌써 갖다 드리는데
내 몸은 주머니 속 돈만
만지작만지작
여자 친구가 좋아질 때마다
마음은 벌써 고백했는데
내 몸은 언제나 저만치서
쭈빗쭈빗
발표 시간만 되면
마음은 벌써 저요! 저요! 하는데
내 몸은 부끄러워 입술만
달싹달싹
내 마음에 맞는 몸이 되었으면 좋겠네
돌멩이와 바위
조잘조잘조잘
시냇물이 재미있게 얘기할 수 있는 건
들쑥날쑥 돌멩이들이 있기 때문이죠
철썩철썩 쏴 쏴
파도가 신나게 수다 떨 수 있는 건
끝까지 들어주는 바위가 있기 때문이죠
웬수들
의자에 걸쳐 놓은 책가방이 떨어졌다
열려 있던 책가방 속 책들이
우당탕탕 쏟아졌다
문제집, 교과서, 필통, 공책, 연습장……
순간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
-이 웬수들아
한숨을 쉬며 어디 더러워진 데 없나
살펴 가며 책가방에 넣는데
이 웬수야, 하면서도
맛난 간식 만들어 주던 엄마 생각났다
하지
엄마에게 야단맞고 집 나와
동네 담벼락에 하루 종일 서 있던 날
어서어서 해 저물어
나 찾으러 우리 엄마 나와야 하는데
해는 떠날 줄 모르고
해는 떠날 줄 모르고
하루 중 낮이 가장 긴 날이었네
야구장에서
아빠랑 야구장엘 갔다
나보다 더 신났다
홈런 한 방 날려라!
옆에 앉은 내 귀 아프도록 소리친다
뻥-
이 소린
분명 홈런이다
일이 잘 안 풀린다던 아빠
벌떡 일어나 두 주먹 불끈 쥔다
그래, 그래 그거야!
야구공이 관중석으로 높이 날아간다
서쪽 하늘에 야구공만 한 해가 빛나고 있다
환호성 치는 아빠의 얼굴이 붉다
꾸벅이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는데
앞에 앉은 진희가 자꾸만 인사를 한다
꾸벅 꾸벅 꾸벅
그만 됐다구
난 선생님 아니라구 해도
자꾸만 인사를 한다
꾸벅 꾸벅 꾸벅
진희 앞에 앉은 아이들은
전부 이렇게 인사를 받는다
꾸벅 꾸벅 꾸벅
그래서 진희 별명은
인사 잘한다고 꾸벅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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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오 일
1967년 목포에서 태어났으며,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광주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7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다. 현재 한국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2009년「사랑하니까」외 11편의 동시로 제8회 푸른문학상 ‘새로운 시인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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童詩. 時調 감상
[제8회 푸른문학상 ‘새로운 시인상’ 수상작] 이정인 외
박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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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30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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