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와 문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과 생사관生死觀
김난희
며칠 전 산촌으로 귀촌한 큰아주버니 댁에 갔었다. 저녁을 먹고 마당의 모닥불 앞에 모여 담소를 나누던 중 1958년 개띠인 둘째 아주버니가 대학 동창회에 나갔다가 있었던 이야기를 꺼내셨다. 동창 하나가 어떤 팸플릿을 돌리길래 사회단체에서 활동하는 친구니까 으레 정치적 사안이나 사회적 사안이겠거니 하고 받았는데, 뜻밖에 <사전연명의료의향서>였단다.
적당히 술자리가 무르익어가는 시간이었는데, 순간 ‘갑분싸’ 해졌고, 술이 깬 동창들은 노안으로 잘 보이지 않는 글자들을 서로 물어가면서 <사전연명의료지향서>를 설명하는 동창의 이야기를 너무 진지하게 듣고 있더란다. 팸플릿을 내민 친구의 이런저런 설명에 대한 거부나 저항도 없었고 오히려 아주 구체적인 질문을 하는 질의응답 시간까지 가지게 되었는데, 예를 들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한 후 실행해야 할 상황에서 (본인과 가족 포함해) 갑자기 생각이 바뀌면 어떡하느냐, 지금 연명치료 거부 항목이 몇 가지 안 되는데, 정작 필요한 수액이나 수분 공급 문제는 왜 포함되지 않느냐, 본인의 치료를 맡고 있는 의사와 입장이 다르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등의 아주 세세한 질문도 나왔다 한다.
그 정도 질문을 할 수 있다면 어느 정도 <사전연명의료의향서>나 의료진의 <연명의료계획서>에 대한 학습을 한 것 같아서 질문한 친구에게 작성했냐고 물어보니, 아직은 아니란다. 좀 더 기다려보면 연명치료에 관한 법도 바뀔 것 같고, 의료 기술도 많이 발전될 것 같은데, 미리 서두를 건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란다. 다른 친구들은 죽음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을 아직은 미처 못해봐서, 이야기는 들어봤는데 막상 실행에 옮기려니 발걸음이 내키지 않아서, 뭔가 계기가 있어야 움직이게 될 것 같다 등의 답변이 이어졌고 열댓 명이 모인 가운데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한 사람은 결국 팸플릿을 돌린 그 친구 한 명뿐이었다고 한다. 아주버니를 통해 들은 그 상황은 2016년에 ‘연명의료결정법’이 제정되었고 2018년 2월 4일부터 시행되었지만, 2023년 현재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한 사람은 전국적으로 160여만 명에 불과한 우리나라 연명치료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연명의료와 관련한 대표적 기관인 <국립 연명의료 기관>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연명의료 결정 제도’ 코너가 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안내하기 전에 도입부로 마련한 코너인 것 같은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맨 앞에 자리하고 있다.
“나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에 대한 결정은 죽음의 문제라기보다는 삶의 문제이고, 삶을 어떻게 마무리할지에 대한 결정입니다. 그러나 막상 이 결정에서 환자는 그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불편해하고 그 결과 아무런 준비 없이 죽음의 순간을 맞닥뜨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한때 ‘웰다잉’이라는 용어가 널리 유행한 적이 있다. 2016년 ‘연명의료결정법’이 국회 본회를 통과한 이후 살아온 날을 정리하고 죽음을 자연스럽게 맞이한다는 용어로 쓰였는데, 웰다잉의 유행 바람을 타고 유언장 쓰기, 관 속에 누워보기, 묘지 견학, 비문 짓기 등의 프로그램들이 학교에서부터 노인정에 이르기까지 유행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웰다잉은 원래 존엄사 개념에서 유래한 것으로 인간의 죽음과 생명에 대한 깊은 경의敬義와 존경 없이는 쉽게 거론할 수 없는 용어이다. 일회적인 행사나 상업적 차원에서 유치하는 프로그램을 포장하는 용어로 쓰일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의 임상사생학 교수 사토 신이치는 그러한 유행 현상을 태양의 주변을 맴도는 행성처럼 죽음의 주변을 맴도는 일에 불과하다며 오히려 진정한 웰다잉이란 자신 나름의 생사관을 갖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신만의 생사관을 갖지 못하면 죽음 앞에서 허둥지둥 당황하기 쉬운데, 흡사 축제처럼 소란스러운 웰다잉 행사들이 그 단적인 모습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아주버니의 동창회에서 거론되었던 연명치료에 대해 의료 기술이 어디까지 발전할 것인지, 의료진과의 타협은 어느 선에서 할 것인지, 법이 어떻게 바뀌게 될 것인지에 관한 논의도 물론 중요하지만, 연명치료에 관한 입장은 무엇보다 자신만의 생사관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토 신이치 교수의 말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연명의료에 관한 것이 죽음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라는 것,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생사관을 갖추지 않는다면 연명치료를 어떻게 할 것인지는 쉽게 결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다시 읽어보자.
“나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에 대한 결정은 죽음의 문제라기보다는 삶의 문제이고, 삶을 어떻게 마무리할지에 대한 결정입니다.”
나는 나만의 생사관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