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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신라,가야토론방 역사의 교훈!!!
바흐조아 추천 0 조회 268 08.10.07 17:33 댓글 2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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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8.10.07 20:21

    첫댓글 지나치게 일방주의적 주장이라는 생각이 개인적으로 드는군요. 그저 결과적으로 '승리'했다는 평가로 모든 사실을 재단한다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우선 신라 입장에서만 보아도 문무태왕 김법민을 그저 외교를 위해 뛰어다닌 인물 정도로만 평가한 것은 문중사학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김춘추가 '우선은 살고 보자' 식의 외교를 벌인데 비하여 문무태왕이 백제 무(강)왕의 '양단책'에 비할만한 '화전양면정책'을 적절히 구사하면서 대국체제로 전환된 대신라를 수립한 경과를 간과해서는 아니된다고 봅니다. 박순교 씨의 견해는 다분히 고답적이라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해봅니다.

  • 08.10.07 21:25

    쟁점이 '왜 멸망했고, 왜 승리했느냐' 라는 점이 중요하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백제의 부흥운동이 내분으로 전락하면서 힘을 모으지 못해 백제 부흥의 기회를 상실했다는 지적도 꽤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신라의 통일이 한민족 형성의 출발점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견해가 다릅니다. '민족 형성'(Nation Building) 이라는 것의 핵심은, 사람들이 '우리는 하나' 라는 공동체 의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다민족으로 구성된 한 나라일 뿐, 하나의 민족으로 융합되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신라의 말기를 보면, 삼국유민의식이 등장해 후백제, 후고구려가 신라로부터 분리되어 나갑니다. 이는 신라가 '민족 융합' 에

  • 작성자 08.10.08 11:07

    200년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러나 백성이 두마음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삼국사기 김유신조에 언급된 표현은 의미심장한 얘기입니다. 우린 언제 하나가 될까요. 불행하게도 남과북 아직도 우리국민은 두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 08.10.09 00:31

    천만에요. 고려적 이후에 (단군 중심의 역사관과 유교적 '충' 의식에 힘입은 것 같은데) 국가분열적인 복수의 민족의식이 나타난 예는 없었습니다. 현재의 남북한 분열만 해도, 민족의식이 분열되어 남북한으로 갈라진 것이던가요? 아니죠. / 200년은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한 개 왕조가 흥망성쇠를 다 할 정도의 시간입니다. 한 번 사회화된 인간은 변화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통합은 통합 당시 세대가 모두 죽은 뒤에 가능하다고 하지요. 그렇게 보면, 공동체로서의 통합은, 하려고만 하면 1개 세대만 지나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징기스칸이 몽골족을 통합하기 전에는 몽골족으로서의 공통된 정체성은 강하지 않았습니다

  • 08.10.09 00:34

    만, 징기스칸이 통합한 이후에는 매우 빠른 속도로 통합된 정체성이 나타났습니다. 200년만에 몽골인으로서의 통합 정체성이 나타날 수 없다면, 몽골은 징기스칸이 통합한 후 원나라가 망할 때까지 '민족 형성' 이라 할 정도의 통합 정체성이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 08.10.07 21:36

    실패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고려 중기까지만 해도 삼국유민의식은 극복되지 못한 것 같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무신정변 이후 사회 혼란 속에서 삼국유민의식과 삼국부흥운동이 간혹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군 등을 중심으로 한 의식이 강화되면서 삼국 이전에 고조선이라는 공통의 근원을 인정하게 되고, 이로써 '우리는 하나' 라는 민족통합이 이루어졌습니다. 이후에는 당쟁에서 영남 남인이 소외받고 차별받았더라도 신라부흥운동과 같은 삼국유민의식이 나타나진 않습니다. 평안도가 차별받아 일어났다던 홍경래란이나 전라-충청도가 주축이 된 갑오농민전쟁에서도 고구려부흥운동이나 백제부흥운동의 성격을 찾기 어렵습니다.

  • 08.10.08 01:07

    전체적인 맥락은 공감합니다. 그래도 신라 성덕왕 부터 진성여왕 이전의 정강왕까지의 약180년간 크던 작던 고구려나 백제의 부흥운동이 일어나질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신라왕실을 부정하고 자신의 나라를 수복하겠다는 의지 치고는 너무 미약해 신라백성으로 동화된 것 아닐까요???또한 이미 신라에 통합되어 상호 같은 백성으로 융합된 180년 이상의 세월이 있었기에 짧게 분리 되었다가 고려의 재통합시는 보다 완전할 수 있었다고 보여집니다..실제로 완벽한 단일 민족의식은 몽고침입 이후에나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됩니다만...

  • 08.10.07 21:38

    즉, 우리가 볼 교훈은 이것입니다. "신라가 어떻게 더 국력이 강해 보이던 백제나 고구려를 무너뜨릴 수 있었을까? " 그리고 '통일신라는 왜 민족형성(혹은 민족통합) 에 실패했는가?" / 전자가 국가의 하드웨어를 구성하여 국가를 '형성' 케 한다면, 후자는 국가의 소프트웨어를 구성하여 국가가 '유지' 되는 데 도움을 줍니다. 통일을 앞둔 우리는 통일신라의 하드웨어적 성공과 소프트웨어적 실패를 모두 받아들여야 합니다. 남북의 영토적 통합 이후 문제는 新 '민족형성' 이 될 테니까요.

  • 08.10.08 01:12

    고구려가 말갈족을 완전하게 복속이나 통합시키지 못하고 발해 역시 고구려인과 말갈인이 같은 국가내에서도 단일민족으로 통합되지 못한 것에 비하면 그래도 신라의 삼한족 통합은 비교적 한단계 위라고 봅니다...

  • 삭제된 댓글 입니다.

  • 08.10.08 01:51

    추모왕님 그러면 고려나 조선시대는 귀족(양반)들이 정치를 햇지 일반 백성들이 정치를 했나요???그리고 아무나 과거를 볼 자격이 잇었나요??..신라도 마찬가지로 6두품 5두품 4두품등 신라 조직편제에서 각자 장군으로 또는 지도층으로서 역활을 했습니다..마치 신라 왕족들만 지도층이 되고 나머지는 모두 상민이나 노예쯤으로 생각하시는데 삼국사기 잡지를 좀 검토하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그리고 고구려의 번성기때 과정을 추적하고 그 역사를 본받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 일이지요!

  • 삭제된 댓글 입니다.

  • 08.10.08 14:47

    추모왕님의 말씀대로 조선시대는 그나마 고대정치권보다는 열린사회였습니다.역시 오늘날 대한민국 또한 조선시대보다는 훨씬 더 열린 사회입니다...조선시대 일반백성이라 함은 어떤 부류를 이야기 하는지요 천민이나 서자들에게도 과거길이 열려 양반이 될 수 있었는지요..물론 특출한 몇명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조선시대 과거를 볼 수 잇었던 일반백성은 이전에 양반의 후손이었거나 적자들입니다..특히 무과 같은 과거에 올랐어도 집안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삭탈되는 사례도 있었는게 조선시대입니다..

  • 08.10.08 14:46

    차라리 조선시대의 홍길동전이 당시 사회를 잘 풍자한 소설입니다...그리고 장보고의 예는 잘못된 것입니다..장보고가 6두품에 해당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자신의 신분에 비해 자신의 딸까지 왕비로 세우려고 했던 높은 위치까지 올랐던 인물입니다..그리고 6두품의 불만은 황당한 내용으로 심지어 왕족들 끼리도 불만이 많아서 서로 반란을 일으킵니다..비단 신라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나라에 해당됩니다..차라리 장보고의 예를 들게 아니라 설계두의 예를 들었다면 이미 삼국사기 열전에서 불만내용이 자세히 언급되어 보다 이해가 쉬울뻔 했습니다.

  • 삭제된 댓글 입니다.

  • 08.10.09 13:46

    추모왕님 님의 댓글중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반론한 것입니다..님의 말씀대로 대신라의 시스템 한계라고 하셨는데..그러한 광범위적인 시스템이 단 몇줄로 어떻게 설명되고 어떻게 잘못되었다고 단칼에 설명될 수가 있는지요..그러면 신라의 시스템적 한계에 대해서 납득이 될 수 있도록 설명이나 그런 시스템이 단칼에 자잘못이 판단된 논문이나 사료가 있는지요???..님의 글 요지가 무슨 근거로 신라의 시스템적 한계니 잘잘못이니 그런 단정을 지을 수가 있는지요?

  • 08.10.10 03:29

    추모왕님과 소호금천님의 의사소통의 원활화를 위해 제가 잠깐 참견 좀 해 볼까 합니다. 우선 맨 위에서 추모왕님의 '일반백성도 과거를 볼 수 있었습니다. 최소한 일반백성도 과거를 봐서 양반이 될 수 있었죠' 라는 말은, '법적으로는 <양인> 의 경우 과거를 볼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라는 뜻으로 생각됩니다. (일반백성이라 하면 그 뉘앙스는 '피치자' 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천민도 포함되는 듯이 보입니다.) 이 말은 틀린 말은 아닙니다. 조선 초기에 위정자들이 계획한 조선의 신분제는 양천제로서 천민만 아니면 과거 볼 수 있는 자격은 있었으니까요. 다만 여기서 '양반이 될 수 있다' 는 표현은 적절치 못하다고 봅니다.

  • 08.10.10 03:34

    (천민이 아닌) 일반백성이 과거를 통해 양반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양천제가 아닌 다른 신분제를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즉, 일반 백성 위에 양반이 또 위치한 신분제, 즉 양인 내에 양반과 비양반 양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따라서 양반이 될 수 있다가 아니라 그저 관리가 될 수 있다... 정도로 표현하셨다면 오해가 없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조선 중후기가 되면 '현실' 면에서 볼 때, 소호금천님 지적대로 과거를 볼 수 있는 자격은 극히 제한됩니다. 조선 초기의 법적 '양천제' 에서 양인계층이 크게 분화하면서 양인 -> 양반, 중인, 상민, 신량역천 등으로 나뉘고, 양반인 양인은 다른 양인과 자신을 구분하고자 했기

  • 08.10.10 03:41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게 되면, 양반 내에서도 다시 계층이 분화하여 최상층의 경화사족부터 평민과 다름없어지는 잔반이 출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조선 중후반에는 4조(아비, 할아비, 증조, 외조) 안에 벼슬한 자가 없으면 실질적으로 과거에 합격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소호금천님이 얘기하신 것은 법제도와 관계없이 조선 중후반의 '현실' 이 이러했다는 지적입니다. (장보고 이야기는 조금 특수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두 분이 의견을 좀 더 나누심이...)

  • 08.10.10 15:55

    미주가효님께서 저의 댓글을 정확하게 파악하셨고 설명 또한 매우 자세하고 쉽게 표현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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