淵蓋蘇文 : 경직된 對外정책·후계자 선정 실패로 唐의 침략 자초
金春秋 : 實利를 좇아 유연 외교·「노블레스 오블리주」로 統一의 동력 마련
勝敗를 가른 요인은 깨어 있는 지도자였고, 일가의 희생이었으며, 국민의 총화였다. 「왜 신라가 생존했고, 고구려와 백제는 망했는가」를 곰곰이 되새겨 보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몫이다.
朴順敎「외교의 승부사 김춘추」저자
1964년 경북 청도 출생. 경북大 사학과 졸업.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대학원 역사학과 석사. 경북대 대학원 사학과. 저서·논문 「외교의 승부사 김춘추」, 「김춘추의 집권과정 연구」, 「진덕왕대 정치개혁과 김춘추의 집권과정」 등.
三國의 전쟁이 아니라 국제전쟁이었다
「고구려 드라마」 열풍이 일고 있다. 고구려를 건국한 朱蒙(주몽)의 일대기를 비롯해, 唐(당)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淵蓋蘇文(연개소문), 제2의 고구려인 발해를 세운 大祚榮(대조영)을 다룬 史劇(사극)들이 그것이다. 고구려의 시작과 끝, 속편이 한꺼번에 나왔다. 이제 고구려는 오랜 시간의 침잠에서 벗어나 主流(주류)의 역사로 다가온다.
독자적 天下(천하)질서를 표방하며 700년간 중국의 여러 왕조들과 東北亞(동북아)의 覇權(패권)을 놓고 경쟁했던 大國 고구려와 현재를 비교할수록 과거의 영광은 더 크게 보인다. 그럴수록 그 영광에 종지부를 찍은 양, 신라에 비난의 화살이 집중된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신라가 외세와 결탁해 고구려를 멸망시킨 데서 비롯된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의 뿌리는 통일신라와 고려, 조선에 이어져 있다. 그런 만큼 신라의 三國통일에 대해 무조건 폄하하고 부정할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그 功過(공과)를 따지는 것이 필요하다.
7세기는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된 중국이 주변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던 시기였고, 800년 가까이 분열된 한반도의 三國이 하나의 接點(접점)으로 수렴하던 때였다. 두 지역의 세력은 서로 부딪치고 集散(집산)하면서 전쟁 양상은 삼국 간의 전쟁이 아니라 국제전의 양상으로 비화했다.
영류왕을 죽이고 권력을 찬탈
이 시기 고구려를 이끌었던 연개소문은 祖父(조부)와 아비가 막리지를 역임한 무장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642년 9월에는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을 거세하려 한 180명의 대신과 영류왕의 목숨을 빼앗고 권력을 찬탈했다. 그의 집권은 「강한 고구려」를 내세운 것이었으나, 그 때문에 고구려는 唐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됐다. 그는 죽을 때까지 「강한 고구려」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았고, 唐과의 결전을 승리로 이끌어 자긍심을 드높였다.
연개소문은 탁월한 군사 지휘 능력을 지녔다. 하지만 국가의 총체적 國力(국력)을 파악하고 한발 앞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돌리는 경륜가는 아니었다. 그에게는 전쟁을 생각하는 현재만 있었을 뿐, 새 미래를 설계할 경륜과 철학은 없었다. 「강한 고구려」에 대한 인식은 갖고 있었지만, 唐이 가진 힘의 원천, 전략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말하자면 그에게는 「知己(지기)」는 있었으나, 결정적인 「知彼(지피)」가 결여되어 있었다.
연개소문에게는 전쟁을 시작하고 방어하는 능력은 있었지만, 전쟁의 완급을 조절하거나 외국과의 세력 균형을 통해 전쟁을 억지하고, 나아가 그 양상을 守勢(수세)에서 攻勢(공세)로 또는 休戰(휴전)으로 바꾸는 유연함이 없었다. 武人(무인)의 피를 타고난 그의 한계였다.
군사대국 고구려는 국제 정세를 유리하게 바꾸는 것은 고사하고, 북방의 유목국가인 설연타의 멸망, 남방의 협력자 백제의 멸망 등 시시각각 변화하는 國外(국외) 정세에 따라가지 못했다.
격변하는 7세기 東아시아 정세 속에서 진화하지 못한 고구려는 회한과 굴욕만을 남긴 채 「안보는 자신의 힘만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정교한 계획과 설계를 바탕으로 이웃과 더불어 짜야 한다」는 명징한 교훈을 남기고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외교의 승부사 金春秋
「自主(자주)와 鎖國(쇄국)이 나라를 일시적으로 지킬 수 있을지언정, 영속적인 안전을 보장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고구려는 보여 주었다.
신라는 철저히 자신이 弱小國(약소국)임을 인정하고 지속적 변화와 혁신을 도모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었다. 진흥왕이 백제와의 맹약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漢水(한수)지역을 차지했듯 신라의 생존 전략에는 正道(정도)가 정해져 있지 않았다.
고구려 연개소문과 백제 의자왕이 강성함을 믿고 현실에 안주했다면, 金春秋(김춘추)는 카멜레온처럼 변화와 實利(실리)를 좇아 끊임없이 탈바꿈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구와도 연계했다. 642년 그 첫 번째 대상이 고구려였다. 그 협상에 실패한 후, 金春秋의 발걸음은 倭(왜)와 唐으로 향했다.
金春秋는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 구금된 순간조차 정탐의 시간과 기회로 활용했고, 거듭된 실패에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는 고구려ㆍ倭와의 협상에는 실패했지만, 그 경험은 뒷날 唐 太宗(태종)을 만나 협상을 성사시키는 데 귀중한 원천이 되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외교 전문가였다. 그는 놀라울 정도의 열정으로 「周遊天下(주유천하)」했으며 외교와 정신의 힘으로 약소국의 핸디캡을 극복했다. 구석진 신라의 폐쇄성, 廢位(폐위)당한 진지왕의 손자, 이런 것들은 더 이상 약점이 될 수 없었다.
고구려는 두 차례 그를 잡아 죽일 기회를 가졌다. 642년 평양 방문과, 649년 장안에서 돌아오던 歸路(귀로)에서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손 안의 金春秋를 두 번이나 놓침으로써 역사의 물길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연개소문은 생전에 맏아들 男生(남생)을 후계자로 정했다. 男生은 661년 압록강 전투에서 唐將(당장) 설필하력에게 패배, 3만 명의 군사를 잃었다. 나라를 제대로 이끌거나 방어할 만한 그릇이 아니었다. 영류왕의 자질을 문제 삼아 弑逆(시역)까지 행하고 시체를 잘라 개천에 버렸던 연개소문이 적임자가 아닌 자식에 연연해 고구려의 앞날을 맡기려고 한 것이 욕심이었다.
왕조의 구심인 왕에 대해 亂行(난행)을 저지른 순간 도덕성을 상실했던 연개소문은 가장 신중해야 할 선택의 기로에서, 사사로운 父情(부정)에 가려 판단력을 상실하는 愚(우)를 범한 것이다.
연개소문은 죽으면서 男生을 후원하도록 아들 男建·男産에게 당부했다.
『너희 형제는 고기와 물같이 화합해 작위를 다투는 일은 하지 말라. 그런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이웃 나라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연개소문은 생전에 자식들의 불화를 눈치챘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그가 자식 이외의 다른 유능한 인물을 후계자로 세우거나, 男生의 집권 기반을 다져 주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이었다.
연개소문 死後, 동생들은 형(男生)이 지방 순시를 나간 사이에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들은 형을 살해하는 데 실패하자 형의 아들을 죽였다. 형제들 사이의 권력 다툼은 돌이킬 수 없는 骨肉相爭(골육상쟁)으로 발전했다.
안시성에서 당나라 군대와 맞서고 있는 고구려군.
唐에 투항, 선봉 역할한 男生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조카들의 싸움을 조정해야 할 삼촌으로서의 역할은 포기한 채 신라로 투항했다. 고구려의 國運(국운)이 다했음을 알리는 亡兆(망조)였다. 설사 수십만의 强兵(강병)이 遼河(요하)를 철통같이 지킨들, 내부의 분열까지 막아 낼 수는 없었다.
唐이 연인원 100만에 가까운 군사를 동원한 전쟁에서 고구려의 군인들은 戰線(전선)을 死守(사수)했지만, 爲政者(위정자)들은 나라를 그르쳤다. 형제들은 아비의 가르침을 잊고 아비 무덤의 흙이 채 마르기 전에 외적을 막아야 할 군사들을 동원해 권력과 사사로운 복수심을 위해 싸웠다. 고구려의 敵(적)은 고구려가 되었다.
아무리 권력을 빼앗기고 자신의 아들마저 죽었다고 해도 唐에 투항해 嚮導(향도·길잡이)를 자처한 男生에게 문제가 있다. 복수심에 눈먼 男生은 唐軍을 도성까지 안내한 것으로 모자라, 장안성(평양성)을 지키던 신성과 내통해 성문을 열게 했다. 고구려인이 敵을 인도했고, 고구려인의 손에 의해 성문이 열렸다.
고구려 역사의 영광은 찬란했을지 모르나 마지막은 비참했다. 그것도 당대 집권자의 아들이자 한때 고구려를 영도할 위치의 인물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주역이 됐다. 男生의 사람 됨됨이가 이러했으니 쿠데타가 일어났겠지만, 그런 그를 후계자로 지목한 연개소문은 아비로서, 위정자로서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
唐, 고구려 내분 틈타 再侵
당시 唐과 10여 년에 걸친 전쟁을 치른 후라 고구려의 내부 상황은 피폐했다. 파종과 수확이 여의치 않았고, 재해가 겹쳐 기근이 만연했다. 게다가 설연타·돌궐·거란을 비롯한 북방의 여러 종족들이 唐에게 망했다. 倭는 철저히 중립을 지켰다.
고구려로서는 唐을 견제해 줄 우호세력이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남쪽 변경을 치고 올라오면서 唐軍에게 군량을 조달한 신라軍의 움직임도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고구려 멸망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唐 高宗(고종)은 아비 太宗과 마찬가지로 전쟁을 일으키긴 했으나 그 전쟁이 패배로 끝나면서 고구려 정벌에 대한 미련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종지부를 찍는 듯했던 唐의 고구려 침략은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벌인 고구려의 內紛(내분)으로 재개됐다.
男生의 투항을 접한 唐은 男生이 다시 아들을 보내 고구려 공격을 재차 요청한 순간까지 출정을 망설였다. 신라 문무왕이 20만의 군사를 동원하겠다는 적극적 외교 공세를 펼치고서야 唐 高宗은 마음을 정했다.
이 마지막 전쟁에서 唐은 100만의 군사를 동원했다. 唐이 백제를 정벌할 때 동원했던 군사가 13만이었으니, 대략 그 열 배에 달하는 수이다. 그만큼 고구려는 唐에게는 어려운 상대였다. 아마 형제의 갈등과 內訌(내홍)이 없었다면 고구려는 10세기 거란이 흥기하기까지 200여 년간, 아니 더 이상 존속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백제의 경우 이 점은 마찬가지였다. 의자왕은 집권 초반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일거에 40여 城(성)을 빼앗고 대야성을 무너뜨려 신라의 숨통을 죄었을 만큼 위협적인 군주였다. 기록상 백제는 고구려보다 8만여 호나 많게 나타날 만큼 대국이었다. 계백이 거느린 5000명의 군사가 5만 명의 신라 군사와 네 번 싸워 모두 이긴 군사강국이었다.
의자왕 자신이 향락으로 일관해 41명의 아들을 두고, 그들 모두에게 좌평의 벼슬과 食邑(식읍)을 준 부분까지는 그렇다 치자. 일개 장군도 꿰뚫을 나라의 요새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었고, 옳은 軍略(군략)을 건의받고도 분별할 판단력이 없었던 점은, 그간의 세월을 의자왕이 어떻게 보냈는지 가늠하게 한다. 군사력으로 가야 할 풍부한 물산과 정신이 향락과 퇴폐로 흘러간 罪過(죄과) 역시 그의 몫이다.
최소한 성충의 말대로 지친 唐軍을 제 때에 요격하고 險路(험로)를 지키며 시간을 벌었다면, 지방 세력과 고구려·倭의 지원을 등에 업고 국면을 바꿀 여지가 있었다. 충성심으로 무장된 우수한 군인, 풍부한 물산, 천혜의 방어 조건을 갖추고서도 의자왕이 병법의 기본인 시간과 자기 관리에 잇달아 실패한 탓에 백제는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백제의 全域(전역)이나 다름없는 200여 성이 백제의 마지막 전투가 아닌, 唐軍의 노략질 이후에야 저항을 시작한 점은 의자왕과 아들들에 대한 離反(이반)의 도를 가늠하게 한다.
금강 하구를 막는 위기의 순간과, 도성을 지키는 최후의 결전에서 1만의 군사와 백성은 죽고, 계백과 휘하의 5000 군사들이 산화하는 순간까지 41명에 이르는 의자왕 아들들이 함께 했다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왕자 孝(효)·泰(태)·隆(융)은 국가 존망의 순간에 왕위에 욕심을 부렸고, 隆과 孝의 아들은 그 와중에 敵에게 투항했다.
서기 642년 金春秋의 맏사위 품석이 엽색과 방종을 일삼다 낙동강 以西(이서) 전선을 총괄하는 대야성을 백제에 함락당하고, 妻子(처자)와 함께 목숨을 잃었다. 품석의 失行(실행)은 뒷날 벌어질 의자왕이나 연개소문 아들들의 경우와 다르지 않았다.
金春秋 일가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金春秋와 일가의 분발은 이때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신라의 重臣(중신)인 金春秋는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아들들까지 멀고 어렵고 힘든 외교 첨병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열 살을 갓 넘긴 문왕은 아비 대신 인질이 되기 위해서, 법민과 인문은 請兵(청병)과 동맹을 위해서 각기 長安을 오갔다.
둘째 사위 흠운은 왕의 사위임에도 백제와의 전투에 나아갔다. 말을 타지 않았고 군졸들과 함께 한뎃잠을 잤으며, 손수 군량을 짊어지고 행군했다. 그리고 나라를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바쳤다.
셋째 딸 지소는 아비와 金庾信(김유신)의 틈을 메워 통일 전쟁을 마무리 지으려 예순을 넘긴 金庾信에게 出嫁(출가)했다. 元述(원술)이 唐과의 싸움에서 패한 후 살아 돌아오자, 아들을 끝내 용납하지 않았다.
다섯째 딸은 唐에 맞서기 위해 고구려 부흥운동을 이끈 고구려 왕족 안승의 아내가 됐다.
羅·唐전쟁이 치열해지자 唐은 문무왕(金春秋의 아들)의 동생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임명하여 문무왕과의 이간을 시도했다. 唐의 향도가 된 고구려 男生의 역할을 인문에게 부여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인문은 唐의 향도가 되기를 거절했다. 문무왕이 「東海의 護國龍(호국룡)이 되겠다」고 자신의 뼈를 동해에 뿌리게 했던 稀代(희대)의 애국심 또한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다.
金春秋의 사위·아들·손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딸들마저 나라의 일을 개인의 행복보다 우선했다. 그들은 권력을 누리기보다 희생과 헌신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위정자의 솔선수범은 當代(당대)는 물론 이후의 우리 역사에서 유례가 없다. 통일의 동력은 지배계층의 살아 있는 정신에서 나왔고 이 점에서 고구려·백제와 본질적으로 달랐다.
唐은 연인원 200만의 군사를 동원, 20여 년에 걸쳐 나라의 힘을 쏟았으나 실리 없는 자존심을 세우는 데 그쳤다. 고구려 지역은 불과 30년 뒤 발해로 떨어져 나갔다.
唐 太宗이 생각한 대동강 이북의 영토는 연기처럼 사라졌고, 후대의 제왕들은 더 이상 이 지역을 지배하거나 정복하려는 헛된 만용과 오기를 부리지 않았다. 唐은 이후 토번과의 싸움에서 줄곧 밀리는 등 심각한 후유증을 겪었다.
위정자가 제 할 일을 다하지 못한 고구려와 백제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절치부심해서 나라의 에너지를 모아야 할 부흥운동마저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내분으로 전락했다.
신라만이 主敵(주적)이었던 백제와 그 동맹국인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대동강 이남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이전보다 세 배나 확대된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한민족 형성의 출발점이었다.
三國統一을 어떻게 볼 것인가
통일전쟁은 三國 모두에게 「사느냐 죽느냐」의 岐路(기로)였다. 그 생존 경쟁에서 낙오한 고구려와 백제는 멸망했다. 그 원인은 내부에 있다. 그 점을 간과하거나 「고구려 영광론」을 버리지 못하는 한, 우리는 과거사에서 귀중한 교훈을 얻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勝敗(승패)를 가른 요인은 깨어 있는 지도자였고, 일가의 희생이었으며, 국민의 총화였다.
이제 쟁점은 「누가 통일했느냐」, 「누구의 통일이 정당하냐」에 머물러선 안 된다. 「그들이 왜 멸망했으며, 왜 승리할 수 있었나」라는 문제 인식으로 나아가야 한다. 「왜 신라가 생존했고, 고구려와 백제는 망했는가」를 곰곰이 되새겨 보는 것이야말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자, 미래를 도약시킬 해답이 된다.●
첫댓글지나치게 일방주의적 주장이라는 생각이 개인적으로 드는군요. 그저 결과적으로 '승리'했다는 평가로 모든 사실을 재단한다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우선 신라 입장에서만 보아도 문무태왕 김법민을 그저 외교를 위해 뛰어다닌 인물 정도로만 평가한 것은 문중사학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김춘추가 '우선은 살고 보자' 식의 외교를 벌인데 비하여 문무태왕이 백제 무(강)왕의 '양단책'에 비할만한 '화전양면정책'을 적절히 구사하면서 대국체제로 전환된 대신라를 수립한 경과를 간과해서는 아니된다고 봅니다. 박순교 씨의 견해는 다분히 고답적이라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해봅니다.
쟁점이 '왜 멸망했고, 왜 승리했느냐' 라는 점이 중요하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백제의 부흥운동이 내분으로 전락하면서 힘을 모으지 못해 백제 부흥의 기회를 상실했다는 지적도 꽤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신라의 통일이 한민족 형성의 출발점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견해가 다릅니다. '민족 형성'(Nation Building) 이라는 것의 핵심은, 사람들이 '우리는 하나' 라는 공동체 의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다민족으로 구성된 한 나라일 뿐, 하나의 민족으로 융합되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신라의 말기를 보면, 삼국유민의식이 등장해 후백제, 후고구려가 신라로부터 분리되어 나갑니다. 이는 신라가 '민족 융합' 에
천만에요. 고려적 이후에 (단군 중심의 역사관과 유교적 '충' 의식에 힘입은 것 같은데) 국가분열적인 복수의 민족의식이 나타난 예는 없었습니다. 현재의 남북한 분열만 해도, 민족의식이 분열되어 남북한으로 갈라진 것이던가요? 아니죠. / 200년은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한 개 왕조가 흥망성쇠를 다 할 정도의 시간입니다. 한 번 사회화된 인간은 변화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통합은 통합 당시 세대가 모두 죽은 뒤에 가능하다고 하지요. 그렇게 보면, 공동체로서의 통합은, 하려고만 하면 1개 세대만 지나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징기스칸이 몽골족을 통합하기 전에는 몽골족으로서의 공통된 정체성은 강하지 않았습니다
실패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고려 중기까지만 해도 삼국유민의식은 극복되지 못한 것 같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무신정변 이후 사회 혼란 속에서 삼국유민의식과 삼국부흥운동이 간혹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군 등을 중심으로 한 의식이 강화되면서 삼국 이전에 고조선이라는 공통의 근원을 인정하게 되고, 이로써 '우리는 하나' 라는 민족통합이 이루어졌습니다. 이후에는 당쟁에서 영남 남인이 소외받고 차별받았더라도 신라부흥운동과 같은 삼국유민의식이 나타나진 않습니다. 평안도가 차별받아 일어났다던 홍경래란이나 전라-충청도가 주축이 된 갑오농민전쟁에서도 고구려부흥운동이나 백제부흥운동의 성격을 찾기 어렵습니다.
전체적인 맥락은 공감합니다. 그래도 신라 성덕왕 부터 진성여왕 이전의 정강왕까지의 약180년간 크던 작던 고구려나 백제의 부흥운동이 일어나질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신라왕실을 부정하고 자신의 나라를 수복하겠다는 의지 치고는 너무 미약해 신라백성으로 동화된 것 아닐까요???또한 이미 신라에 통합되어 상호 같은 백성으로 융합된 180년 이상의 세월이 있었기에 짧게 분리 되었다가 고려의 재통합시는 보다 완전할 수 있었다고 보여집니다..실제로 완벽한 단일 민족의식은 몽고침입 이후에나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됩니다만...
즉, 우리가 볼 교훈은 이것입니다. "신라가 어떻게 더 국력이 강해 보이던 백제나 고구려를 무너뜨릴 수 있었을까? " 그리고 '통일신라는 왜 민족형성(혹은 민족통합) 에 실패했는가?" / 전자가 국가의 하드웨어를 구성하여 국가를 '형성' 케 한다면, 후자는 국가의 소프트웨어를 구성하여 국가가 '유지' 되는 데 도움을 줍니다. 통일을 앞둔 우리는 통일신라의 하드웨어적 성공과 소프트웨어적 실패를 모두 받아들여야 합니다. 남북의 영토적 통합 이후 문제는 新 '민족형성' 이 될 테니까요.
추모왕님 그러면 고려나 조선시대는 귀족(양반)들이 정치를 햇지 일반 백성들이 정치를 했나요???그리고 아무나 과거를 볼 자격이 잇었나요??..신라도 마찬가지로 6두품 5두품 4두품등 신라 조직편제에서 각자 장군으로 또는 지도층으로서 역활을 했습니다..마치 신라 왕족들만 지도층이 되고 나머지는 모두 상민이나 노예쯤으로 생각하시는데 삼국사기 잡지를 좀 검토하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그리고 고구려의 번성기때 과정을 추적하고 그 역사를 본받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 일이지요!
추모왕님의 말씀대로 조선시대는 그나마 고대정치권보다는 열린사회였습니다.역시 오늘날 대한민국 또한 조선시대보다는 훨씬 더 열린 사회입니다...조선시대 일반백성이라 함은 어떤 부류를 이야기 하는지요 천민이나 서자들에게도 과거길이 열려 양반이 될 수 있었는지요..물론 특출한 몇명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조선시대 과거를 볼 수 잇었던 일반백성은 이전에 양반의 후손이었거나 적자들입니다..특히 무과 같은 과거에 올랐어도 집안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삭탈되는 사례도 있었는게 조선시대입니다..
차라리 조선시대의 홍길동전이 당시 사회를 잘 풍자한 소설입니다...그리고 장보고의 예는 잘못된 것입니다..장보고가 6두품에 해당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자신의 신분에 비해 자신의 딸까지 왕비로 세우려고 했던 높은 위치까지 올랐던 인물입니다..그리고 6두품의 불만은 황당한 내용으로 심지어 왕족들 끼리도 불만이 많아서 서로 반란을 일으킵니다..비단 신라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나라에 해당됩니다..차라리 장보고의 예를 들게 아니라 설계두의 예를 들었다면 이미 삼국사기 열전에서 불만내용이 자세히 언급되어 보다 이해가 쉬울뻔 했습니다.
추모왕님 님의 댓글중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반론한 것입니다..님의 말씀대로 대신라의 시스템 한계라고 하셨는데..그러한 광범위적인 시스템이 단 몇줄로 어떻게 설명되고 어떻게 잘못되었다고 단칼에 설명될 수가 있는지요..그러면 신라의 시스템적 한계에 대해서 납득이 될 수 있도록 설명이나 그런 시스템이 단칼에 자잘못이 판단된 논문이나 사료가 있는지요???..님의 글 요지가 무슨 근거로 신라의 시스템적 한계니 잘잘못이니 그런 단정을 지을 수가 있는지요?
추모왕님과 소호금천님의 의사소통의 원활화를 위해 제가 잠깐 참견 좀 해 볼까 합니다. 우선 맨 위에서 추모왕님의 '일반백성도 과거를 볼 수 있었습니다. 최소한 일반백성도 과거를 봐서 양반이 될 수 있었죠' 라는 말은, '법적으로는 <양인> 의 경우 과거를 볼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라는 뜻으로 생각됩니다. (일반백성이라 하면 그 뉘앙스는 '피치자' 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천민도 포함되는 듯이 보입니다.) 이 말은 틀린 말은 아닙니다. 조선 초기에 위정자들이 계획한 조선의 신분제는 양천제로서 천민만 아니면 과거 볼 수 있는 자격은 있었으니까요. 다만 여기서 '양반이 될 수 있다' 는 표현은 적절치 못하다고 봅니다.
(천민이 아닌) 일반백성이 과거를 통해 양반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양천제가 아닌 다른 신분제를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즉, 일반 백성 위에 양반이 또 위치한 신분제, 즉 양인 내에 양반과 비양반 양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따라서 양반이 될 수 있다가 아니라 그저 관리가 될 수 있다... 정도로 표현하셨다면 오해가 없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조선 중후기가 되면 '현실' 면에서 볼 때, 소호금천님 지적대로 과거를 볼 수 있는 자격은 극히 제한됩니다. 조선 초기의 법적 '양천제' 에서 양인계층이 크게 분화하면서 양인 -> 양반, 중인, 상민, 신량역천 등으로 나뉘고, 양반인 양인은 다른 양인과 자신을 구분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게 되면, 양반 내에서도 다시 계층이 분화하여 최상층의 경화사족부터 평민과 다름없어지는 잔반이 출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조선 중후반에는 4조(아비, 할아비, 증조, 외조) 안에 벼슬한 자가 없으면 실질적으로 과거에 합격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소호금천님이 얘기하신 것은 법제도와 관계없이 조선 중후반의 '현실' 이 이러했다는 지적입니다. (장보고 이야기는 조금 특수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두 분이 의견을 좀 더 나누심이...)
첫댓글 지나치게 일방주의적 주장이라는 생각이 개인적으로 드는군요. 그저 결과적으로 '승리'했다는 평가로 모든 사실을 재단한다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우선 신라 입장에서만 보아도 문무태왕 김법민을 그저 외교를 위해 뛰어다닌 인물 정도로만 평가한 것은 문중사학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김춘추가 '우선은 살고 보자' 식의 외교를 벌인데 비하여 문무태왕이 백제 무(강)왕의 '양단책'에 비할만한 '화전양면정책'을 적절히 구사하면서 대국체제로 전환된 대신라를 수립한 경과를 간과해서는 아니된다고 봅니다. 박순교 씨의 견해는 다분히 고답적이라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해봅니다.
쟁점이 '왜 멸망했고, 왜 승리했느냐' 라는 점이 중요하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백제의 부흥운동이 내분으로 전락하면서 힘을 모으지 못해 백제 부흥의 기회를 상실했다는 지적도 꽤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신라의 통일이 한민족 형성의 출발점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견해가 다릅니다. '민족 형성'(Nation Building) 이라는 것의 핵심은, 사람들이 '우리는 하나' 라는 공동체 의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다민족으로 구성된 한 나라일 뿐, 하나의 민족으로 융합되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신라의 말기를 보면, 삼국유민의식이 등장해 후백제, 후고구려가 신라로부터 분리되어 나갑니다. 이는 신라가 '민족 융합' 에
200년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러나 백성이 두마음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삼국사기 김유신조에 언급된 표현은 의미심장한 얘기입니다. 우린 언제 하나가 될까요. 불행하게도 남과북 아직도 우리국민은 두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천만에요. 고려적 이후에 (단군 중심의 역사관과 유교적 '충' 의식에 힘입은 것 같은데) 국가분열적인 복수의 민족의식이 나타난 예는 없었습니다. 현재의 남북한 분열만 해도, 민족의식이 분열되어 남북한으로 갈라진 것이던가요? 아니죠. / 200년은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한 개 왕조가 흥망성쇠를 다 할 정도의 시간입니다. 한 번 사회화된 인간은 변화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통합은 통합 당시 세대가 모두 죽은 뒤에 가능하다고 하지요. 그렇게 보면, 공동체로서의 통합은, 하려고만 하면 1개 세대만 지나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징기스칸이 몽골족을 통합하기 전에는 몽골족으로서의 공통된 정체성은 강하지 않았습니다
만, 징기스칸이 통합한 이후에는 매우 빠른 속도로 통합된 정체성이 나타났습니다. 200년만에 몽골인으로서의 통합 정체성이 나타날 수 없다면, 몽골은 징기스칸이 통합한 후 원나라가 망할 때까지 '민족 형성' 이라 할 정도의 통합 정체성이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실패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고려 중기까지만 해도 삼국유민의식은 극복되지 못한 것 같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무신정변 이후 사회 혼란 속에서 삼국유민의식과 삼국부흥운동이 간혹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군 등을 중심으로 한 의식이 강화되면서 삼국 이전에 고조선이라는 공통의 근원을 인정하게 되고, 이로써 '우리는 하나' 라는 민족통합이 이루어졌습니다. 이후에는 당쟁에서 영남 남인이 소외받고 차별받았더라도 신라부흥운동과 같은 삼국유민의식이 나타나진 않습니다. 평안도가 차별받아 일어났다던 홍경래란이나 전라-충청도가 주축이 된 갑오농민전쟁에서도 고구려부흥운동이나 백제부흥운동의 성격을 찾기 어렵습니다.
전체적인 맥락은 공감합니다. 그래도 신라 성덕왕 부터 진성여왕 이전의 정강왕까지의 약180년간 크던 작던 고구려나 백제의 부흥운동이 일어나질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신라왕실을 부정하고 자신의 나라를 수복하겠다는 의지 치고는 너무 미약해 신라백성으로 동화된 것 아닐까요???또한 이미 신라에 통합되어 상호 같은 백성으로 융합된 180년 이상의 세월이 있었기에 짧게 분리 되었다가 고려의 재통합시는 보다 완전할 수 있었다고 보여집니다..실제로 완벽한 단일 민족의식은 몽고침입 이후에나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됩니다만...
즉, 우리가 볼 교훈은 이것입니다. "신라가 어떻게 더 국력이 강해 보이던 백제나 고구려를 무너뜨릴 수 있었을까? " 그리고 '통일신라는 왜 민족형성(혹은 민족통합) 에 실패했는가?" / 전자가 국가의 하드웨어를 구성하여 국가를 '형성' 케 한다면, 후자는 국가의 소프트웨어를 구성하여 국가가 '유지' 되는 데 도움을 줍니다. 통일을 앞둔 우리는 통일신라의 하드웨어적 성공과 소프트웨어적 실패를 모두 받아들여야 합니다. 남북의 영토적 통합 이후 문제는 新 '민족형성' 이 될 테니까요.
고구려가 말갈족을 완전하게 복속이나 통합시키지 못하고 발해 역시 고구려인과 말갈인이 같은 국가내에서도 단일민족으로 통합되지 못한 것에 비하면 그래도 신라의 삼한족 통합은 비교적 한단계 위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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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왕님 그러면 고려나 조선시대는 귀족(양반)들이 정치를 햇지 일반 백성들이 정치를 했나요???그리고 아무나 과거를 볼 자격이 잇었나요??..신라도 마찬가지로 6두품 5두품 4두품등 신라 조직편제에서 각자 장군으로 또는 지도층으로서 역활을 했습니다..마치 신라 왕족들만 지도층이 되고 나머지는 모두 상민이나 노예쯤으로 생각하시는데 삼국사기 잡지를 좀 검토하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그리고 고구려의 번성기때 과정을 추적하고 그 역사를 본받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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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왕님의 말씀대로 조선시대는 그나마 고대정치권보다는 열린사회였습니다.역시 오늘날 대한민국 또한 조선시대보다는 훨씬 더 열린 사회입니다...조선시대 일반백성이라 함은 어떤 부류를 이야기 하는지요 천민이나 서자들에게도 과거길이 열려 양반이 될 수 있었는지요..물론 특출한 몇명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조선시대 과거를 볼 수 잇었던 일반백성은 이전에 양반의 후손이었거나 적자들입니다..특히 무과 같은 과거에 올랐어도 집안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삭탈되는 사례도 있었는게 조선시대입니다..
차라리 조선시대의 홍길동전이 당시 사회를 잘 풍자한 소설입니다...그리고 장보고의 예는 잘못된 것입니다..장보고가 6두품에 해당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자신의 신분에 비해 자신의 딸까지 왕비로 세우려고 했던 높은 위치까지 올랐던 인물입니다..그리고 6두품의 불만은 황당한 내용으로 심지어 왕족들 끼리도 불만이 많아서 서로 반란을 일으킵니다..비단 신라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나라에 해당됩니다..차라리 장보고의 예를 들게 아니라 설계두의 예를 들었다면 이미 삼국사기 열전에서 불만내용이 자세히 언급되어 보다 이해가 쉬울뻔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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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왕님 님의 댓글중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반론한 것입니다..님의 말씀대로 대신라의 시스템 한계라고 하셨는데..그러한 광범위적인 시스템이 단 몇줄로 어떻게 설명되고 어떻게 잘못되었다고 단칼에 설명될 수가 있는지요..그러면 신라의 시스템적 한계에 대해서 납득이 될 수 있도록 설명이나 그런 시스템이 단칼에 자잘못이 판단된 논문이나 사료가 있는지요???..님의 글 요지가 무슨 근거로 신라의 시스템적 한계니 잘잘못이니 그런 단정을 지을 수가 있는지요?
추모왕님과 소호금천님의 의사소통의 원활화를 위해 제가 잠깐 참견 좀 해 볼까 합니다. 우선 맨 위에서 추모왕님의 '일반백성도 과거를 볼 수 있었습니다. 최소한 일반백성도 과거를 봐서 양반이 될 수 있었죠' 라는 말은, '법적으로는 <양인> 의 경우 과거를 볼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라는 뜻으로 생각됩니다. (일반백성이라 하면 그 뉘앙스는 '피치자' 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천민도 포함되는 듯이 보입니다.) 이 말은 틀린 말은 아닙니다. 조선 초기에 위정자들이 계획한 조선의 신분제는 양천제로서 천민만 아니면 과거 볼 수 있는 자격은 있었으니까요. 다만 여기서 '양반이 될 수 있다' 는 표현은 적절치 못하다고 봅니다.
(천민이 아닌) 일반백성이 과거를 통해 양반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양천제가 아닌 다른 신분제를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즉, 일반 백성 위에 양반이 또 위치한 신분제, 즉 양인 내에 양반과 비양반 양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따라서 양반이 될 수 있다가 아니라 그저 관리가 될 수 있다... 정도로 표현하셨다면 오해가 없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조선 중후기가 되면 '현실' 면에서 볼 때, 소호금천님 지적대로 과거를 볼 수 있는 자격은 극히 제한됩니다. 조선 초기의 법적 '양천제' 에서 양인계층이 크게 분화하면서 양인 -> 양반, 중인, 상민, 신량역천 등으로 나뉘고, 양반인 양인은 다른 양인과 자신을 구분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게 되면, 양반 내에서도 다시 계층이 분화하여 최상층의 경화사족부터 평민과 다름없어지는 잔반이 출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조선 중후반에는 4조(아비, 할아비, 증조, 외조) 안에 벼슬한 자가 없으면 실질적으로 과거에 합격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소호금천님이 얘기하신 것은 법제도와 관계없이 조선 중후반의 '현실' 이 이러했다는 지적입니다. (장보고 이야기는 조금 특수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두 분이 의견을 좀 더 나누심이...)
미주가효님께서 저의 댓글을 정확하게 파악하셨고 설명 또한 매우 자세하고 쉽게 표현하셨습니다.....^^*